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일화중에서 

미국에서 《배달민족회》를 뭇고 활동하다가 조국에 와서 생의 말년을 보람있게 장식한 최덕신선생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화성의숙시절의 스승인 애국지사 최동오선생의 아들이였다.

허나 그들부자간이 걸은 길은 너무도 판이하였다.

아버지가 화성의숙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할 때 아들은 멀리 베이징에 가있었고 아버지가 보천보의 홰불을 바라보며 애국의 마음을 다질 때 아들은 남의 나라 군복을 입고 이역땅을 헤매였다. 아버지가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길을 떠날 때 아들은 아버지를 막아나섰고 아버지가 반미반외세를 주장할 때 아들은 미국으로 류학을 갔다. 아버지가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평양으로 왔을 때 아들은 남조선군 장성별을 달고 미국의 허수아비노릇을 하였다. 아버지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통일에 마음쓰고있을 때 아들은 동남아《반공련맹》의 주창자로 나섰고 남조선《외무부 장관》이요, 《국토통일원》 고문이요 하면서 미국과 남조선당국의 영구분렬장단에 춤을 추었다.

그후 최덕신선생이 그들과 결별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너무도 때늦은것이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한없이 넓은 품에 안아주시고 불미스러운 과거가 많은 그의 한생을 용서해주시였다.

그가 죽기 전에 선친의 묘에 술이라도 한잔 붓겠다고 조국으로 힘든 걸음을 했던 때인 주체70(1981)년 7월 1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를 친히 만나주시였다.

뜻깊은 석상에서 최덕신선생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속죄의 말씀을 드리였다.

《주석님, 민족앞에 얼굴을 들수 없고 선친을 위해주신 주석님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그가 떠듬거리며 하는 말을 듣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말을 제지하시며 말씀하시였다.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이고 지금 나라가 분렬이냐, 통일이냐 하는 기로에 선 이때에 우리와 손을 잡고 통일을 위하여 한몫 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최선생이 지난날의 일들을 씻어버리고 조국통일을 위해 일해보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가진데 대하여 감사히 여기고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하해같은 도량에 감복한 선생은 그후부터 조국방문의 길에 자주 올랐다.

그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국을 더 잘 알게 된 그는 동포들이 사는 이국땅에서 통일애국사업에 적극 떨쳐나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를 굳게 믿으시고 평양에 올 때마다 자주 만나주시고 뜨거운 사랑을 부어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조국에 영주하였을 때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중임도 맡겨주시였다.

은혜로운 사랑과 믿음속에 인생말년을 보람있게 살게 된 그에게는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었다.

단 하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로서 《동무》라는 호칭으로 불리웠으면 하는것이였다.

《주석님, 한가지 소청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석님과 뜻을 같이하는 전사가 되고싶습니다.

이 사람을 선생이라 부르지 마시고 동무라고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소청을 기꺼이 받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환히 미소를 지으시며 아, 그렇습니까, 뜻을 같이하는 동무, 그렇게 부릅시다, 최덕신동무, 우리 함께 통일위업을 성취하는 길에서 생사를 같이합시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최덕신동무!》

자기를 동무라고 불러주시는 자애로운 그 음성을 들으며 최덕신은 마음속으로 뜨겁게 생각하였다.

(아, 이런 품이여서 나의 선친도 사선을 헤치고 달려와 안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