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2)중에서
 

 

  

 1946년에 접어들면서 장개석도당의 군사적공세는 더 한층 강화되였다.

장개석도당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함선과 비행기로 그리고 륙로로 수십만의 군대를 들이미는통에 갓 조직된 동북지구의 민주련군은 실로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행복할 때에도 벗의 우정이 필요하지만 불행할 때는 더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것처럼 사람은 어려울 때 자기를 도와주고 구원해줄 벗을 더욱 그리게 되는 법이다.

동북해방전쟁이 생사기로에 놓여있던 준엄한 시기 중국혁명가들과 인민들은 그러한 심정으로 참다운 귀인의 손길을 바랐으니 그것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의 따뜻한 손길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중국인민과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오랜 기간 공동투쟁을 벌렸으며 해방후에도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고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여 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새 조국건설에서 난관이 많았지만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도와주기 위하여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였습니다.》

동북지방을 국민당반동군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가 못 지켜내는가 하는것은 전반적중국혁명의 승패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였다.

미제와 장개석도당의 대대적인 군사적공세로 동북의 정세가 엄중해졌을 때인 1946년초 모택동주석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한때 조직부장을 하다가 동북국 부서기로 임명된 진운을 자기의 특사로 평양에 파견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도록 하였다.

그때 특사는 위대한 수령님께 동북민주련군이 급속히 확대되였으나 무기가 없어 칼과 창, 몽둥이로 무장하고있다고 하면서 무기를 지원해줄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중국인민해방군 부대들의 전략적이동통로를 열어주며 부상병, 로약자, 환자들에 대한 치료대책과 화약, 피복, 신발 등 전략적후방물자들을 지원해줄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주석과 중국공산당 중앙의 요청을 즉석에서 수락하시고 일제침략군에게서 로획한 10여만정의 무기와 탄약, 화약, 의약품 등 수많은 군수물자들을 보내주도록 하시였으며 항일전에서 단련된 지휘관들과 전사들을 핵심으로 포병련대와 공병부대들도 조직하여 파견하시였다. 또한 산동지방에 있던 중국인민해방군 무력과 압록강까지 밀려왔던 부대들을 남포항과 우리 나라 북부국경지대를 거쳐 북만지역으로 이동시킬수 있게 하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3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에서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 겸 길료군구 사령원 주보중을 만나시여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한 문제를 토의하시고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 풀어주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주보중일행으로부터 동북의 군사정치정세를 료해하시고 할바령을 중심으로 로야령산줄기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이미 혁명의 보루로 꾸려놓은 동만의 해방지역을 적의 침공으로부터 보위할데 대한 방책을 제시하시면서 험한 산세를 리용하여 방어시설들을 설치할 지대와 지점들을 일일이 지적해주시였다. 그리고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을 보내여 조직하도록 하신 조선인부대들과 조선과의 전화, 통신련락을 보장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고 그 임무를 항일혁명투사 박영순이 책임지도록 하시였다.

그때를 회고하시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나는 주보중에게 중국의 전우들이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죄다 해결해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줄데 대해 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우리 나라의 형편은 남을 도와줄만 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조건 같은것은 아예 념두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북의 군사정치정세를 깊이 헤아리시고 그처럼 귀중한 전략전술적조언을 주시면서 당시 나라의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동북해방작전수행에서 위력한 거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동만지역에 조선인민혁명군출신의 군사정치간부들을 파견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한전호에서 싸우는 심정으로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국제주의적의리는 이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북민주련군측에서 신발문제를 해결하여줄것을 요청하였을 때에는 북조선의 모든 신발공장들에서 다른 신발생산은 다 중지하더라도 신발이 없어 맨발로 진흙땅과 자갈밭을 행군해가면서 고생하는 중국전우들에게 보낼 신발부터 생산할데 대한 긴급조치를 취해주시였으며 해당 공장 로동계급을 발동하시여 작전과 전투에 절실히 필요한 성능높은 《황색폭약》을 다량생산하여 보내주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힘겨운 전투를 하고있는 민주련군부대들이 군복의 부족으로 곤난을 겪고있다는것을 아시고는 먼저 1차분으로 3 000필의 군복천과 천여벌의 군복, 많은 량의 의약품들을 남양을 거쳐 보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취하신 조치에 의하여 상해지역만이 아니라 산동지구로부터 바다를 건너온 중국인민해방군 부대들이 남포항을 비롯한 조선의 항구들을 거쳐 동북전장에로 진출하였고 료동 등 남만지역으로부터 철수하던 민주련군부대들도 조선의 북부지구를 거쳐 후퇴하였다.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따라 주체36(1947)년 첫 7개월동안에 조선에서 동북민주련군측을 위해 21만t의 물자를, 그 이듬해에는 30만 900여t의 군수물자를 수송해주었다.

그리고 조선을 통과한 인원은 주체35(1946)년 하반기에 18개 부대에 이르렀고 주체36(1947)년 9개월동안에 조선에 들어왔다가 동북근거지로 간 인원은 1만명이상이나 된다. 주체37(1948)년에 남양교두를 통과하여 근 9 000명이 두만강을 건너갔고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의 적지 않은 민주당파, 무당파와 해외교포대표들이 조선을 경유하여 할빈으로 갔다. 사업상용무로 조선을 통과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의 수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고 한다.

실로 조선은 동북해방작전을 지원해준 중국의 공고한 후방이였다.

국제주의전사로서의 영예로운 사명과 임무를 다할데 대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의도를 높이 받들고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부대 장병들은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 전투들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장춘, 길림, 사평, 금주, 심양 등 도시들과 군사적요충지들을 탈환하고 동북전역을 해방하는데서 강건, 박락권, 최광 등 항일혁명투사들이 지휘하는 조선인부대들이 주도적역할을 수행하였다.

박락권이 인솔하는 조선인부대는 적의 대부대를 견제하고있던 최광이 인솔한 부대의 후원밑에 장춘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여 5일만에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고 만수천명의 적을 살상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에서 박락권련대장은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순간까지 대오의 앞장에서 부대의 공격을 지휘하였다.

장춘을 해방함으로써 사평계선에서 포위된 중국인민해방군 부대들이 포위에서 벗어나 장춘을 거쳐 할빈, 목단강 일대로 진출하게 되였다. 조중 두 나라 부대들이 대부대기동작전과 유격전에 의한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대부분의 적들은 도시지역에 몰리우게 되였다.

그무렵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선에서 싸우는 조선인부대의 일부 지휘관들을 평양으로 부르시였다.

조선인부대들의 활동정형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앞으로도 주력으로 잘 싸워야 한다고, 조선인부대들이 전투의 앞장에 서서 조선사람의 기개와 용맹을 다시 떨쳐 중국혁명의 승리에 크게 이바지하고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을 받아안은 조선인부대들은 생사를 판가리하는 치렬한 전투의 앞장에서 언제나 용맹하였으며 중국 동북지방에서부터 해남도에 이르는 3만여리의 광활한 대지우에 고귀한 붉은 피를 뿌리였다.

휘남현성진공전투에서 적포대들을 날려보내고 22살의 청춘을 바친 조성두, 사평전투에서 폭약을 안고 몸을 던져 적포대를 폭파한 김형두, 장춘해방전투에서 불을 뿜는 적화구를 가슴으로 막은 리기춘 …

동북해방전쟁과 더불어 빛나는 위훈을 세우고도 이름 석자조차 남기지 못한 렬사들은 더욱 많았다.

하기에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쳐싸운 조선인부대의 전투성과에 대해 전 동북민주련군의 한 지휘원은 자기의 회상록에 이렇게 썼다.

《동북에 침입한 국민당군대의 허리를 끊어놓은 사평전투에서도 조선공병들은 10만 대군이 의거하여 발악하고있던 견고한 방어시설들을 수십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까부시는 피어린 폭파전투를 벌려 마침내 승전의 돌파구를 힘있게 열어제꼈다.

치렬성에서 쓰딸린그라드격전을 방불케 한 이 가렬한 전투의 나날에 수만명의 피끓는 조선의 남아들이 사평의 한치한치 땅을 피로 물들이며 목숨바쳐 승리를 가져왔으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시가의 한그루의 나무와 한포기의 풀도 무심히 대할수 없을것이다.》

이렇듯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선인부대의 결정적역할에 의하여 국민당군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적군의 목덜미를 조인 금주해방전투와 장개석의 동북군 총사령부가 틀고앉아있던 적아성을 들어낸 심양해방전투, 포위전으로 국민당군을 독안의 쥐처럼 몰아넣고 족쳐댄 장춘해방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약 3년간의 동북해방전쟁기간 조중 두 나라 부대는 정예를 자랑하던 미국제신식무기로 무장한 100만의 국민당군대와 토비부대를 격파하고 그중 70만명을 살상포로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동북해방에 이어 중국관내에 진출한 조선인부대들은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을 해방하는 전투들에서 그리고 장강도하작전과 해남도상륙작전들에서 앞장서 혈로를 개척하였다.

하기에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는 여러 기회에 《우리 나라 5성홍기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피가 스며있다.》고 말하군 하였다. 또한 그들은 조선사람들이 아니였다면 동북해방은 고사하고 전국혁명도 승리하지 못했을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