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 (1)중에서

 

주체26(1937)년 3월말 무송현 동강으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있는 서강 양목정자의 수림속에서는 항일혁명투쟁사에 또 하나의 력사적분기점으로 기록되게 될 서강회의가 진행되였다.

이 회의에서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국내진공작전을 진행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날 회의에서 하신 연설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공작전으로 인민들에게 조국광복의 서광을 안겨주자》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공작전으로 일제침략자들을 족치고 원쑤들의 아성에 불을 지름으로써 인민들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은 건재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서 계속 승리하고있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어야 하며 우리 인민혁명군이 존재하는 한 조선은 반드시 독립된다는것을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국내진공작전과 관련하여 매 부대들이 수행하여야 할 임무와 활동방향, 활동구역을 확정해주시였다. 이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은 3개방면으로 진출하되 그이께서 친솔하시는 주력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일제의 국경경비의 요충지대인 혜산방면으로 진출하고 한 부대는 백두산을 에돌아 안도, 화룡을 거쳐 두만강연안의 북부국경일대로 진격하며 다른 한 부대는 림강, 장백일대의 압록강연안으로 진출하게 되였다.

서강회의를 결속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곧 국내진공작전을 위한 정치군사적준비를 철저히 갖추는데 박차를 가하시였다.

동강밀영에서의 군정훈련도 그러한 준비사업의 하나였다. 그해 4월초부터 한달가까이 진행된 훈련을 통하여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정치사상리론수준은 한층 높아졌으며 어떠한 정황속에서도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수 있게 군사적으로도 튼튼히 준비되였다. 후날 우리 인민들속에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백두산의 어느 한 깊은 곳에서 수많은 군사를 길러내셨다는 소문이 나돌고 어떤 고장에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백두산의 깊은 동굴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장수 수만명을 길러냈다는 전설이 널리 퍼졌는데 그런 전설을 낳은 고장이 다름아닌 우리 선조들의 옛 보루가 있었던 고려보자, 동강의 군정훈련터였다.

이렇듯 국내진공작전을 위한 만단의 준비를 갖추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드디여 주력부대를 거느리시고 력사적인 조국진군길에 오르시였다.

주체26(1937)년 5월 중순 장백현 19도구 지양개등판에 이르신 그이께서는 이곳에서 국내진공을 위한 대오정비와 여러가지 선동사업을 벌리시는 한편 국내정세를 보다 상세히 료해하시였다. 그이께서 의도하신대로 적들의 이목은 무산지구와 림강지구로 진출한 부대들의 활동지역으로 쏠리고 국경경비진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산지구에 진출한 부대가 적《토벌대》의 전면포위에 들 위기에 처하였다는 보고를 받게 되시였다. 뜻밖의 정황앞에서 지휘관들은 긴장해졌다.

국내진공을 미루고 포위에 든 부대부터 구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내진공을 먼저 한 다음 련이어 구출작전을 펼쳐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주력부대력량을 둘로 갈라서 두개의 작전을 동시에 수행하는것이 옳겠는가, 포위된 부대를 구출하자면 국내의 어느 지점을 치는것이 리상적이겠는가.

지휘관들은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그들의 의견을 듣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계획하신 작전안을 내놓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국내진공작전도 수행하고 포위된 아군부대도 구원할수 있는 출로는 국내의 어느 한 지점을 때려 두가지 목적을 단꺼번에 다 달성하는데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그 지점을 선택하는데서 다음과 같은 측면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것은 적의 력량이 집결되여있는 베개봉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고장이여서는 안된다는것이다. 반대로 턱밑에 바싹 붙어있는 고장이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국내진공이 두가지 효과를 다 낼수 있다. 베개봉쪽에서 제일 가까운 요충지는 혜산과의 중간지점에 있는 보천보이다. 보천보를 때려야 베개봉쪽에 집중되여있는 적들이 우리 주력부대와 최현부대에 역포위될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포위추격전을 포기하고 이미 진출했던 계선에서 철수할수 있다. 보천보를 치면 혜산을 치는것 못지 않게 국내에 강한 충격을 줄수 있다. 그러므로 국내진공의 목적 역시 원만하게 달성할수 있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보천보를 치는데 있다.…》

이렇게 되여 초기에 혜산으로 정해졌던 국내진공작전의 목표가 보천보로 바뀌게 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예정날자를 앞당겨 주체26(1937)년 6월 2일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 보천보에로 진격할데 대한 전투명령을 내리시였다. 그이의 친솔밑에 지양개를 떠난 주력부대는 6월 3일 밤 구시물동에서 떼목으로 압록강을 건는 다음 보천보의 뒤산인 곤장덕에 올랐다. 조국땅에서의 첫밤을 뜬눈으로 새운 대원들은 아침안개속에 그림같이 안겨오는 조국산천을 바라보며 저마다 환성을 올리면서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끓어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나무를 그러안고 돌아가는 대원들도 있었고 풀밭에서 딩구는 대원들도 있었다. 흙을 한줌 움켜쥐고 볼에 비벼보는 대원들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보천보시내에 정찰을 파견하시여 이미 여러선을 통하여 장악한 정찰자료들을 다시 확인하시고 각 구분대들에 구체적인 전투임무를 주시였다.

6월 4일 날이 어두워지자 부대는 곤장덕을 내려 은밀히 보천보시가에 접근하여 각기 지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림천기슭에 서있는 황철나무아래에 지휘처를 정하시였다. 지휘처에서 주공격목표인 경찰관주재소까지의 거리는 불과 100m안팎이였다. 시가전에서 지휘처와 주공격목표와의 거리가 이처럼 가까운 례는 일찌기 전쟁사에 없는 일이였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불빛이 가물가물 새여나올뿐 폭풍전야의 보천보거리는 잠잠했다.  일제는  백두의  령장 김일성장군님의 친솔밑에 조선의 아들딸들이 복수의 불벼락을 안길 작전을 펼치고있다는것을 꿈에도 감촉하지 못하고있었다. 하기에 이 시각 보천보거리의 이른바 《유지》들과 권세있는자들은 어리석게도 료리점에 모여 산림보호구 주임놈의 영전을 축하하는 송별연을 한창 벌리고있었다.

밤 10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권총을 높이 드시고 방아쇠를 당기시였다. 10여년세월 조국의 동포들에게 말씀하고싶으셨던 모든 사연들이 그 한방의 총성에 담겨 밤거리에 울려퍼졌다. 그 총소리는 어머니조국앞에 드리는 상봉의 인사였고 강도 일제를 징벌의 마당으로 불러내는 호출신호였다.

그이께서 울리신 총성을 신호로 하여 력사적인 보천보전투가 개시되였다. 경찰관주재소의 경관놈들을 쓸어눕히는 기관총사격과 때를 같이하여 산림보호구, 면사무소, 우편국, 농사시험장, 소방회관 등 적기관들이 드센 공격을 받았다.

아군의 첫 타격이 어찌나 드세였던지 방금전까지 기세등등하던 경찰관놈들은 대항할 엄두도 못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너무도 급해맞아 돼지우리에 뛰여드는 놈이 있는가 하면 까투리새끼모양으로 구석에 틀어박혀있다가 나어린 녀대원의 총창앞에 손을 들고 나오는 놈도 있었다. 두팔을 번쩍 쳐들고 《고-상》, 《고-상》(항복이라는 뜻) 하고 웨치는 놈, 목숨을 건져보려고 땅바닥에 엎드려 손을 싹싹 비비는 놈, 약삭바르게 창문을 뛰여넘다가 거꾸러지는 놈, 별의별 놈들이 다 있었다. 말그대로 적들은 완전히 넋을 잃고말았다. 온 거리가 발칵 뒤집히고 여기저기서 삼단같은 불길이 타래쳐올랐다.

정치공작원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쓰신 《포고》《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거리의 곳곳에 붙이고 격문과 삐라를 살포하면서 힘있는 정치선동을 벌리였다.

삽시에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인민들이 떨쳐나와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시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억세게 싸워나가자》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보천보의 밤하늘에 타오르는 불길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연설하시였다.

《여러분! 저 불길을 보십시오. 거세차게 타번지는 저 불길은 놈들의 최후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저 불길은 우리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날강도 일제놈들과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고있습니다. 저 불길은 학대와 주림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희망의 서광으로 빛날것이며 투쟁의 불씨로 되여 온 삼천리강토에 퍼지게 될것입니다.》

그이께서는 계속하시여 투쟁만이 살길이며 민족재생의 유일한 길이라고 하시면서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 더욱 굳게 뭉쳐 침략자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광복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성전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하시였다. 보천보의 밤하늘에 폭풍같은 만세의 환호성이 또다시 터져올랐다.

위대한 수령님의 철수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헤여지기 아쉬워하는 인민들에게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면서 승리의 개가높이 보천보를 떠났다.

철수하던 부대가 곤장덕에 올랐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구령도 없었는데 대렬이 갑자기 흩어진것이였다. 대원들은 저마끔 흙을 움켜서 배낭에 넣고있었다. 지휘관들도 뒤질세라 조국의 흙을 간수하였다. 22만km²라는 나라의 땅덩어리에 비하면 한줌의 흙은 너무도 작은것이였다. 그러나 그 한줌흙에는 삼천리가 담겨있고 2천 300만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옹근 조국과도 같이 귀하고 소중한것이였다. 오늘은 우리 비록 한 거리를 치고 가지만 래일은 100개의 거리, 1,000개의 거리를 치리라, 지금은 우리 비록 한줌의 흙을 안고 가지만 래일은 온 나라를 다 해방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리라! 이런 맹세를 다지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보천보가 녹아났다는 급보를 받은 적들은 압록강연안 국경지대의 병력뿐아니라 두만강연안 무산지구에 쏠렸던 《토벌》력량까지 이 일대에 진출시켰다. 그리하여 무산지구에 진출한 조선인민혁명군 제4사부대앞에 조성되였던 위기도 해소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보천보전투가 있은 다음날 압록강을 건너 추격해오는 《국경특설경비대》를 구시산에서 몰살시키시고 주력부대를 지양개마을로 철수시키시였다.

일제가 치안유지를 장담하던 국내에 조선인민혁명군이 대부대로 진격하여 면소재지인 보천보의 적통치기관들을 일격에 소탕해버린것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체계를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력사적사변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거대한 의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그 의의는 일본놈을 몇명 죽인데 있는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신념을 북돋아주는 혁명의 서광을 비쳐준데 있습니다. 보천보전투는 조선사람은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다, <내선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놈과 조선사람은 <동조동근>이 아니다, 조선사람은 일본놈과 함께 중국을 침략하지 않는다, 조선사람은 모국어를 버리지 않을것이며 자기의 성을 일본놈성으로 바꾸지 않을것이다,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일본놈과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것을 전세계에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보천보전투의 전략적의의입니다. 여기에 보천보전투의 력사적의의가 있는것입니다.》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적독립과 자주권을 부활시키려는 조선인민의 혁명적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내외에 널리 시위하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조선혁명가들은 자기 활동의 전로정에서 시종일관하게 견지해온 투철한 반제적립장과 자주적립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선군혁명의 무장력인 조선인민혁명군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진실하고 참된 애국자들이며 민족해방위업을 승리적으로 완수해나갈수 있는 가장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투사들이라는것을 과시하였다.

보천보전투는 망국사의 흐름을 광복에로 돌려세운 결정적인 계기로 되였으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 빛나는 자욱을 남기였다.

보천보전투의 승리는 우리 민족에게 조국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안겨주고 전민족을 반일투쟁에로 힘있게 고무하였으며 일제에게는 돌이킬수 없는 심대한 타격으로 되였다.

당시 혜산경찰서장(시오다니)은 보천보에서 당한 참패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실토하였다.

《6월 4일 오후 11시 25분 … 가림주재소로부터의 급전화를 받은 찰나 예상하지 않았던 너무나 큰 중대사건도발에 흡사 후두부를 <쾅> 하고 단단히 얻어맞은것과 같이 전신은 굳어졌다. …생각하면 보천보사건에 관하여서는 천날에 걸쳐 베여낸 새초를 한순간에 재더미로 만든것과도 같은 감정이였다. … 아 아 6월 5일! 일생 잊지 못할 슬픈 기념일로 되였다.》(《함남경우》, 함경남도경찰부, 1937년, 17, 26페지)

백두산기슭 지양개마을에서 보천보전투의 대승리를 경축하는 성대한 군민련환대회를 진행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보천보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일제가 대병력을 동원하리라는것을 예견하시고 이 기회에 적들에게 다시한번 된벼락을 안겨 보천보전투의 승리를 더욱 공고히 할것을 계획하시였다.

그이의 예견은 틀림없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에 극도로 당황해난 일제는 조선주둔군에서 정예라고 하는 제19사단소속 함흥74련대와 위만군까지 동원하여 《토벌》에 내몰았다. 2,000여명이나 되는 적의 대병력이 수십대의 자동차를 타고 간삼봉방향으로 줄지어 밀려들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치공작원들과 혁명조직들을 통하여 적정을 료해하시고 대부대섬멸전으로 적들의 《토벌》기도를 철저히 분쇄할 결심을 내리시였다. 지휘관회의를 여신 그이께서는 적의 정규전법에 말려들지 말고 유격전법을 주동적으로 활용하며 림기응변의 전투행동으로 적을 족칠데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각 부대들에 전투임무를 하달하시였다. 그러시고 부대를 적의 공격을 물리치는데 유리한 간삼봉릉선에 배치하시였다.

6월 30일, 비가 내리는 속에 전투는 하루종일 진행되였다. 적들은 파장식공격으로 정면돌파도 시도해보고 좌우익측으로 포위도 시도하면서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정황을 효과적으로 리용하면서 안팎에서의 협공으로 적들을 호되게 답새겨 매번 무리죽음을 안기였다. 그러나 적들은 쉽사리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적들이 력량을 집중하여 마지막돌격을 준비하고있을무렵 아군진지에서 나팔소리에 맞추어 녀대원들이 부르는 《아리랑》노래소리가 전대오에 울려퍼졌다. 《아리랑》의 노래소리에 일제침략군 병사들은 공포에 질리였다. 부상자들속에서는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자들이 나타났고 한쪽에서는 도망병까지 생겼다.

이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부대에 반돌격명령을 내리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성난 사자마냥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 서슬푸른 기상앞에 완전히 기가 질린 적들은 갈팡질팡하다가 무리로 쓰러졌다.

결국 무훈을 세우고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적들은 간삼봉전투에서 쓰디쓴 참패를 당하였다. 간삼봉골짜기에 적들의 시체가 얼마나 많았던지 적들은 그 시체들에서 머리만을 잘라 마대에 넣어 날라갔다. 그러다가 인민들이 그것이 무엇인가고 물어보면 호박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세상에 《호박대가리》라는 일화가 생겨났다.

보천보전투를 기본으로 한 국내진공작전의 소식은 당시 국내외의 중요신문들과 출판물을 통하여 널리 전해져 전세계를 진감시켰으며 조국인민들과 각계인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서울에서 《중앙일보》 사장을 하던 려운형은 보천보전투소식을 듣고서는 너무나 격동되여 그달음으로 전투현장인 보천보로 가보고 《이제는 됐구나, 단군조선이 살아있구나.》 하며 무릎을 쳤다. 상해림시정부의 김구는 어찌나 흥분했던지 창문을 열어제끼고 배달민족은 살아있다고 몇번이나 웨쳤다. 그는 이제는 림시정부가 김일성장군을 후원해야겠다고 하면서 백두산쪽으로 사람을 보내여 위대한 수령님과 련계를 맺으려고 하였다.

실로 국내진공작전에서 이룩된 빛나는 승리는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전략전술의 독창성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힘있게 과시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영원한 승리의 홰불로, 조선민족의 긍지와 광복의 서광으로 깊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