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중에서

일제의 패망이 하루하루 다가오고있던 시기 조선인민의 마음은 백두산으로 쏠리고있었다.

그것은 백두산이 민족의 태양이신 조선독립대장 김일성장군님께서 항일대전을 조직령도하시는 혁명의 성산이기때문이며 그이를 따르는 길만이 애국의 길, 독립의 길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애국적인민들은 전민이 떨쳐나 조국해방위업을 성취할데 대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전략적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떨쳐나섰다.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내부의 애국력량이 최대한으로 단결되고 발동된 거족적인 반일항전, 이것이야말로 1940년대 전반기 우리 혁명발전의 새로운 모습인 동시에 특출한 성과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시기 반일투쟁의 중요한 특징은 일제의 최후발악적인 식민지통치정책과 전쟁정책을 반대하고 놈들의 군사력과 군사적잠재력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여 일제를 멸망에로 몰아넣기 위한 투쟁으로 일관된것이였다.

당시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거듭되는 패전으로 인한 전선에서의 막대한 인적손실과 군수부문 로동력의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살인적인 《징병》, 《징용》제도를 강화하고 조선의 모든 청장년들을 전쟁대포밥으로 내모는데 미쳐날뛰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 정치공작원들과 조국광복회 조직성원들은 조선인민의 불타는 적개심을 더욱 불러일으켜 인민들을 일제의 전쟁정책을 반대하는 투쟁에로 힘차게 조직동원하였다.

그리하여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은 적들이 발급하는 《징집》령장을 찢어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해외로 떠나갔으며 일제가 강요하는 《징집적령자신체검사》에서 꾀를 부려 불합격하거나 《징병환송회》놀음을 분쇄하고 집단적으로 기피하였다.

일제가 극히 축소하여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주체33(1944)년 10월의 불과 10일동안에 조선안에서만 《징용령위반자》로 일제의 경찰당국에 검속된 청장년들의 수는 무려 1만 2,000명이나 되였다.(《조선인 강제련행 강제로동 기록》일문, 현대사출판회, 1974년판, 86페지)

《징병》, 《징용》을 반대하는 투쟁은 강제징집당하여 일제놈들에게 끌려간 청장년들속에서도 힘차게 벌어졌다. 쏘만국경일대와 중국관내전선, 남양전선을 비롯하여 조선국내와 일본본토 등에 널려있던 《징병》자들속에서 무장을 들고 집단도주하는 청장년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으며 군사시설공사장과 탄광, 광산들에서 고역에 시달리던 《징용》자들가운데서 도주자들이 매해 10여만을 헤아렸다.

일제의 전시생산책동을 파탄시키기 위한 인민들의 대중적진출도 전례없이 강화되였다.

일제침략자들을 무찌르고 조국해방의 날을 앞당기려는 혁명적열의에 불타는 애국적인민들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침략군의 병영과 비행장, 군항, 요새지 등 군사시설과 군수공장들에 대담하게 육박하여 그것들을 폭파하거나 불살라버리는 과감한 투쟁을 벌리였다.

일제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주체32(1943)년말에 로동자들에 의하여 일제의 중요군수공장이였던 흥남질소공장 산소충진실폭파사건(11월 2일)을 비롯하여 조선제강주식회사(경상남도 통영군) 대화재사건(11월 28일, 공장 4동, 창고 4동 기타 기계류, 원료 등이 불타버림), 조선중공업주식회사(경상남도 부산) 대화재사건(12월 7일, 공장 6동이 불타버림), 삼척탄광 갱내수세시설방화사건(12월 13일), 조선전기수리공장(평안북도 강계) 방화사건 등 12건에 달하는 군수공장방화투쟁이 전개되였다.(《고등외사일보》 49호, 일문,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78∼79페지)

국내인민들과 함께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로동자들도 일제의 전시생산을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힘차게 벌리였다. 그중에서도 혹가이도 유바리탄광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재일조선인로동자들의 반일투쟁기세를 훌륭히 과시하였다.

일제의 전쟁정책을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을 통하여 그 어떤 폭압과 살인적인 책동도 조선인민의 반일반전기세를 막을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적극적인 군사정치활동과 그에 고무되여 일떠선 인민들의 반일투쟁에 의하여 일제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더 깊숙이 빠져들어갔으며 거세차게 타오른 반일항쟁의 불길에 휩싸여 일제의 식민지통치는 전면적인 와해상태에 들어갔다.

이처럼 인민들은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최고절정에 이르러 놈들의 발악적인 폭압만행이 전례없이 감행되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김일성장군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조국해방의 구성으로 높이 우러러모시며 수령님께서 조선혁명을 령도하시는 한 조국해방의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는 굳은 신심을 가지고 일제와의 최후결전의 길에 힘있게 떨쳐나섰다.

일제와의 판가리싸움이 박두하고있던 시기 인민들속에서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흠모, 신뢰는 그 어느때보다도 두터워졌다.

조국땅 그 어디에 가나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이 조선인민에게 소생의 날을 가져다주실수 있다고, 전설적영웅으로 명성이 높으신 수령님께서는 일본제국주의가 격멸되고 조국이 해방된 다음에도 조선에서의 위대한 령수로서 삼천리조국땅우에 부강하고 번영하는 독립국가를 세워주실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시기 위대한 수령님을 흠모하는 구호들이 평양과 서울, 청진, 부산, 신의주, 대구, 전주, 공주, 대전, 해주 등 국내도처에는 물론 일본과 만주의 넓은 지역에서 거리와 마을, 공장과 광산, 학교를 비롯한 여러곳에 벽서와 삐라의 형태로 널리 전파되였다.

주체33(1944)년 5월 대구지방법원 원장놈의 집앞마당에 있는 돌우에 《김일성장군님께서 오신다》, 《조선독립 만세!》라는 글발이 씌여지고 그해 초여름 서울 남대문에는 《근일 김일성대장 조국개선》이라는 글발과 《김일성장군 만세!》의 구호가 큼직하게 씌여졌다.(1945년 5월 9일 경상북도 경찰부장이 경무국장에게 한 보고, 경북고, 제1268호, 《불온락서발견에 관한 건》)

1944년 경상남도 진해의 일제해병단 병영에는 《김일성장군 만세!》, 《멀지 않아 조선이 독립되고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하신다》는 삐라가 뿌려졌으며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끼를 오가던 관부련락선 《고안마루》의 3등침실천정에는 큰 글씨로 《조선독립대장 김일성》이라고 씌여졌다.

주체34(1945)년 1월초 청진원철공장에는 헌병, 경찰들과 관리들이 도사리고있는 사무실 흑판에까지 《김일성장군 만세!》의 구호가 씌여졌으며 충청남도 서천군에서는 《경방단》단원들이 모이는 건물안벽에 《조선청년들아! 오랑캐 일본을 따르지 말고 김일성장군님께서 쳐들어오시기를 기다리라!》는 구호가 나붙었다.

이러한 구호들은 인민들에게 민족재생의 희망과 투쟁의욕을 북돋아주었으며 일제침략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이 시기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까운 시일안에 조국을 해방하실것이라는 내용의 전설적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대표적으로 주체34(1945)년 평안북도 동림군 인민들은 당시 압록강이북지대로부터 남으로 울려나온 지진현상을 위대한 수령님에 의한 조국해방의 징조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지동이 남으로 내울린것은 백두산에서 싸우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군사를 거느리시고 남으로 진격하여 일본총독부를 때려부시고 조선을 해방하시는 작전을 펴시는 신호》라고 하면서 수령님의 령도따라 일제를 격멸하는 성전에 한몸바쳐 싸울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또한 충청북도 단양군 인민들은 《백두산의 김일성장군님께서 수많은 조선군대를 거느리시고 신출귀몰하는 전법을 쓰시여 귀신도 꼼짝 못하게 하는 조화를 일으키시니 일본놈들은 멀지 않아 망하게 될것이다. 조국이 해방되면 김일성장군님은 우리 나라의 대원수가 되시여 우리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정사를 하시게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열렬한 흠모의 정이 가득찬 전설적이야기는 재일동포들속에서도 날을 따라 널리 퍼지였다.

당시 시모노세끼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독립대장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명산 백두산천지의 맑은 물을 마시고 조선의 장수로 태여나시였다. 그분은 백두산에서 조선군사를 지휘하시여 우리의 온 겨레를 독립의 한길로 이끌고계시는 조선의 희망이시다. 장군님은 반만년 우리 나라의 력사우에 찍힌 국치일을 지우고 해방절을 마련하시기 위해 오늘도 조선과 만주에서 왜놈군경들을 삼대베듯 격멸하고계신다.
장군님께서 계시기에 조선인민은 가까운 앞날에 반드시 독립을 성취할것이며 일본에 끌려온 우리들도 조국에 돌아가 살기 좋은 제 나라를 일떠세우며 잘살게 될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받드는 인민들의 마음은 백두산으로부터 한나산에 이르는 조선의 모든 도시와 농어촌들에서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과 지식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모든 인민들의 가슴마다에 차고넘치고있었으며 《징용》, 《징병》에 강제징집되여 일본을 비롯한 여러곳에 끌려간 동포들의 심장속에도 깊이 간직되여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한 어용학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7년전(1944년도)에 나는 남부조선의 어느 지방 소학교에서 6학년생과 중학 2학년생을 모아놓고 강연을 한 다음 <너희들은 현재 일본사람으로서(조선사람까지 포함하여) 누가 제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있는가. 무기명으로 정직하게 투표해보라. 절대로 무서워하거나 겁나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켜놓고 무기명으로 투표를 시켜본즉 놀랍게도 그의 67%가 김일성이라고 씌여있었다.》(《조선신화》일문, 창원사, 1952년판, 384페지)  

이것은 멸망에 직면한 일제가 최후발악을 하는 엄혹한 환경속에서도 조선인민은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 계시는 백두산을 우러러보면서 승리의 신심을 굳게 간직하고있었으며 벌써 조국해방의 기쁨과 독립된 새 조국에 펼쳐질 행복을 느끼고있었음을 보여준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