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중에서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소부대활동으로 넘어간 이후시기 소부대, 소조들의 활동내용의 하나로 적구정찰활동을 규정하시고 이것을 조국해방작전을 승리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군사적과업으로 내세우시였다.

특히 그이께서는 국제련합군이 편성된 유리한 조건과 환경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집중적인 군정훈련과 함께 일제와의 최후결전준비를 한층 더 다그치기 위한 정찰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리도록 하시였다.

일반적으로 군사작전준비에서 정찰은 부대의 눈과 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사람이 눈과 귀가 밝아야 정황을 잘 판단하고 그에 맞게 행동할수 있는것처럼 군대는 정찰활동을 통하여 늘 적정을 전면적으로 꿰뚫고있어야 하는것이다. 그러자면 적들의 병력배치상태와 군사시설물의 전개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주변환경, 적들의 심리상태까지 환히 알고있어야 하며 그래야 그에 맞게 작전계획을 면밀하게 수립하고 모든 전투작전에서 승리할수 있다. 그래서 군사가들은 응당 정찰에 깊은 주의를 돌리는것이며 정찰의 운명에 작전의 운명이 있다고 말하는것이다.

이 시기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일제의 전략적기도를 제때에 알아내기 위하여 국내깊이에는 물론 쏘련과의 접경지대인 만주와 일본본토에까지 군사정찰활동의 폭을 넓히도록 하시였다.

이것은 당시의 정세로부터 제기된 절박한 문제였다.

1940년대 전반기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앞둔 조선인민혁명군앞에는 종전과는 대비조차 할수 없는 방대한 정찰과제가 제기되고있었다. 1∼2개 또는 3∼4개 대상에 대한 습격전, 파괴전, 매복전을 위주로 하던 지난 시기의 싸움에서는 승산이 있는 대상들만 골라쳤기때문에 정찰대상도 거기에 국한되여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총공격을 목적으로 하고있었기때문에 적주둔지와 요새구역, 비행장, 포화력진지를 비롯한 모든 요충지들과 군사대상들을 다 정찰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어는 반동단체집결처와 그 구조적특징, 민심의 동향까지도 다 정찰대상이 되여야 했다. 일본군대의 기동이 빈번해지고 지휘기구가 자주 교체되고있었던 사정은 적정에 대한 정찰을 그 어느때보다 강화할것을 요구하고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김일성장군님의 작전적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만주와 국내의 넓은 판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필요한 정찰자료들을 수많이 수집하였다.

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들은 일제가 물샐틈없이 구축해놓은 요새구역을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며 감쪽같이 뚫고들어가 영구화점의 콩크리트쪼각까지 떼가지고 오는가 하면 적정배치를 손금보듯 장악해가지고 돌아오군 하였다. 소부대, 소조들은 또한 국경일대에 구축된 요새구역뿐아니라 라진, 청진, 원산일대와 멀리 조국남단에 있는 진해, 마산, 부산일대의 요새들까지 정찰하였다. 그들은 넓은 지역에 전개되여있는 요새들과 거기에 배치된 병력과 포무력, 비행장과 비행기의 대수까지 알아냈고 항구시설, 적함들의 종류와 t수, 항구출입질서, 통신결속소 위치, 군수물자창고를 비롯하여 알아낼것은 다 알아냈다.

특히 소부대, 소조들은 웅기, 라진, 청진, 흥남, 평양 등 적의 요새지와 요충지들의 군사시설물들과 병력배치 및 그 이동정형, 북부조선의 항만시설들과 연해의 수심, 비행장시설과 능력 등을 탐지하는 정찰활동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소부대활동시기 군사정찰활동에 참가하였던 한 항일혁명투사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적병력이 집중되여있는 지대들에 대한 정찰활동을 여러차례 진행하였는데 1942년 4월 5일에는 최현동지네 소부대에 망라되여 싼차거우, 로흑산, 라자구일대에 가서 정찰활동을 하였다.

당시 사령부에서는 로흑산부근 국경일대에 적들이 큰 비행장을 건설하고 수백대의 비행기들과 대포, 자동차들을 집결시키고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그 정확한 무력배치상태를 몰라 작전준비에서 큰 지장을 받고있었다.

그리하여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일대의 적의 무력배치상태를 구체적으로 정찰할데 대한 임무를 주시였던것이다.

산에서 쌍안경으로 내려다보니 듣던바와 같이 공장에서 금방 나온것 같은 새 비행기 100여대와 200여대의 새 자동차들이 출동준비를 갖춘듯 줄지어 서있는것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도 100여대의 신형포들이 어마어마한 자태를 드러내고있었다. 실로 굉장한 무력이였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무장장비들을 다 로출시키고있는것이였다.

물론 위력을 시위하기 위한것이기도 하겠지만 어딘가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또한 이상한것은 무장장비에 비해서는 놈들의 경계가 그리 심하지 않은것이였다.

그리하여 우리 소부대정찰조원들은 직접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놈들의 경계망을 뚫고 비행장으로 접근해갔다.

가까이 가보니 그것들은 진짜비행기들이 아니라 전부 나무로 만든 가짜비행기였다.

우리는 그곳을 나는듯이 빠져나와 수림속으로 달려갔다. 그때 무전수임무를 지니고왔던 나는 깊은 수림속에 들어가자바람으로 정찰자료를 사령부에 보고하였다.

우리는 사령관동지로부터 축하전보문을 받는 커다란 영광을 지니였다.

우리는 그이의 새로운 지시를 무전으로 전달받고 한동안 이 일대를 류동하면서 중요한 적정을 장악하였다.

그후 우리 정찰조는 상세한 국경도시지도와 조선철도지도까지 구해가지고 사령부로 돌아왔다.》

소부대, 소조들은 림시비밀근거지에 의거하여 군중과의 사업을 주동적으로 전개하면서 그들을 정찰활동에 많이 인입하기도 하였다. 지어 적기관복무자들까지 대담하게 인입하여 적후공작을 벌리였다.

대일작전을 위한 적후정찰활동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였으며 사선의 고비를 헤쳐야 하였다.

정찰활동을 벌리던중 로출되여 적들의 추격을 받는 속에서 정찰자료와 동지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단신으로 적을 유인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친 대원도 있었고 임무수행과정에 눈속에 굶어쓰러져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한 대원도 있었다.

언제인가는 적후정찰활동의 나날에 적들과의 싸움을 벌리다가 모두가 영웅적으로 희생된 정찰조원들도 있었다.

훈련기지로부터 수백km 떨어진 곳에서 정찰활동을 벌리면서도 지정된 날이 되면 무전으로 정찰결과를 꼭꼭 보고하던 이 정찰소조는 어느날 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비상전문을 보내여왔다.

《정찰조는 적들의 포위에 들었다. 무전기는 산꼭대기에 위치하고있는데 마지막정보자료를 보내니 빨리 받아달라. 지금 적들이 무전기가 있는 산을 포위하고 가까이 접근하고있다. 젊은 대원이 먼저 나가 결사전을 벌리다가 전사했다. 아바이대원도 전사했다. 나도 자료송신을 끝내고 수류탄묶음을 폭파시켜 달려드는 적들을 한놈이라도 잡고 죽겠다.》

이러한 무전을 보내고 장렬하게 전사한 무전수는 남만출신의 처녀대원이였다. 꿈결에도 그리던 해방된 조국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이름없는 산중에 쓰러진것이다.

일제와의 최후공격작전을 위한 정찰자료들은 이렇게 꽃나이 청춘과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투사들에 의하여 마련되였다.

군사정찰활동은 대일작전이 박두해옴에 따라 더욱 적극화되였다.

패망전야에 일본정계와 군부에서는 《조선을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였는데 그들은 조선이 자활자전체제에서 대륙전쟁의 병참기지, 최종전쟁거점으로 될뿐아니라 일본 최후의 운명수혈로 된다고 하면서 끝까지 내놓지 않겠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조선사수론》은 조선을 마지막지탱점으로 해서라도 끝까지 싸워 잔명을 유지하겠다는것이였다. 이른바 《조선사수론》이 실천에 옮겨진다는것은 곧 조선땅이 일제를 격멸하는 최후결전장으로 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실정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국내정찰에 더 많은 력량을 투입하여 적들의 중요한 군사비밀을 새롭게 밝혀내는데 큰 힘을 넣으시였다.

그리하여 웅기, 라진, 청진을 비롯한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와 해안지대, 국내의 깊은 종심과 만주일대에 수많은 정찰조들이 파견되였다.

혁명군정찰병들은 청진과 길주, 회령, 평양을 비롯한 국내 여러곳에 건설된 적군용비행장에 대한 자료수집, 사진촬영 등을 활발히 벌렸다.

주체34(1945)년 여름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임무를 받은 한 정찰소조는 최후공격작전의 주요공격방향인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와 함경북도일대의 적정을 구체적으로 정찰하기 위하여 국내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조국의 참담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안고 감시정찰, 직접조사, 주민들과의 담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정찰활동을 벌려나갔다.

이 정찰소조는 평양거리복판에 있는 일제침략군의 병영, 동평양비행장과 비행대병영을 정찰하는 과정에 본래 제20사단의 1개 련대가 주둔하고있던 곳에 평양사관구가 신설되고 그 산하부대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사리원, 신의주, 해주 등지에 배치되여있다는 자료와 평양비행장의 공군부대들의 배치상태 그리고 인민들의 사상동향에 대한 구체적자료를 얻게 되였다.

귀로에 오른  정찰소조는 함경남도 함흥일대에 이르러 신설된 일제침략군 제34군사령부와 사단의 배치 및 그 병력상태, 정평에 이동해온 사단의 배치상태, 일제침략군의 사상동향에 대한 자료 등을 정찰확정하였으며 후치령산발과 함경산줄기를 타고 라남에 이르러 라남사관구의 조직과 그 관하부대들의 배치상태를 확정하고 청진비행장을 비롯한 청진일대를 정찰하였다.

이 시기 국내의 다른 지역들과 만주일대에 파견된 정찰소조들도 적의 깊은 종심에서 정찰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들이 수집한 수백수천건에 달하는 정찰자료들은 최후결전을 위한 작전계획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러한 대담하고 폭넓은 정찰활동이 없었더라면 100만관동군을 격파하는 대일작전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승리적으로 결속될수 없었을것이다.

참으로 1940년대 전반기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의 작전적구상에 따라 진행된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들의 적극적인 군사정찰활동은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빈틈없이 갖추는데서, 일제와의 최후결전의 마당에서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