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정일장군님과 민족대단결」중에서

 오늘 이역땅에 살고있는 조선사람의 수는 무려 수백만을 헤아린다.

그들모두는 비록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살아도 고독함과 외로움을 모르고 민족대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거족적으로 떨쳐나서고있다.

그것은 눈비에 젖을세라 바람에 질세라 애지중지 품어주고 따뜻이 보호해주는 자애로운 어버이의 위대한 사랑의 품, 마음의 보금자리가 있기때문이다.

해외동포들이 믿고 사는 마음의 보금자리, 위대한 사랑의 품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품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은 이역땅에 흩어져사는 수백만 해외동포들의 친어버이이시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외동포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이하게 생활하고있어도 한피줄을 이은 하나의 민족, 한겨레라는것을 어느 한시도 잊으신적이 없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같이 사는 자식보다 세간나간 자식을 더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심정그대로 이역땅에 흩어져사는 해외동포들을 념려하시여 그들에게 온갖 뜨거운 은정을 다 베풀어주고계신다.

이역땅에 살면서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사랑을 페부로 절감한 해외동포들가운데는 《배달신보》 발행인이며 국제태권도련맹 총재인 최홍희선생도 있다.

최홍희선생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 신음하던 그 시기 함경북도 화대군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서예와 함께 우리 나라의 고전무술인 택견에 취미를 가지고 그를 열심히 익히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

커가면서 그는 우리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게 되였으며 어떻게 하나 강한 힘을 키워 그들을 복수할 굳은 결의를 품게 되였다.

그러던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항일유격대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전해듣고 애국의 가슴을 불태우게 되였다.

하여 그는 유격대를 찾아갈 목적으로 뜻이 같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1944년 8월 《반일학도병무장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였으나 변절자의 밀고로 실패하고말았다.

그로부터 몇달후 조국이 해방되여 형무소에서 나온 그는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소대장, 련대장을 지내다가 미국의 포트릴리륙군종합학교를 졸업하고 군단장이 되여 《반북》일선에서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되였다.

하지만 조선민족의 강의함과 슬기를 자랑하는 태권도를 온 세상에 빛내이고싶은 욕망만은 누를길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 4월 민족무도인 태권도를 처음으로 만들어내게 되였다.

태권도는 우리 나라에서 삼국시기부터 전해져오는 무술인 수박희와 택견, 날파람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다른 권법들의 우점들을 도입한 조선민족고유의 무술이였다.

그후 최홍희선생은 태권도를 온 세계에 보급하기 위하여 1966년 3월 국제태권도련맹을 결성하고 그 총재로 활동하였다.

태권도가 군범위를 벗어나 민간인들에게 보급되고 미국과 유럽나라들에 널리 알려지게 되자 남조선당국은 교활한 모략사건을 조작하고 거기에 태권도관련인물들과 사범들이 관여했다는 여론을 류포시켜 그를 제거해버리려고 하였다.

하여 최홍희선생은 저주로운 남조선사회에 침을 뱉고 카나다로 망명하였다.

그의 망명과 함께 카나다로 본부를 옮긴 국제태권도련맹은 불순세력의 모해와 압력으로 인하여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것은 태권도를 세계적판도에로 보급하기 위한 활동에서 실로 커다란 장애로 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국제태권도련맹이 처한 실태를 보고받게 되시였다.

한없이 너그러운 아량을 지니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난날 민족앞에 씻을수 없는 죄를 범한 그의 과거를 백지화하시고 그를 자애로운 사랑의 넓은 품에 안아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69(1980)년 최홍희선생이 인솔하는 태권도사범단을 평양에 불러주시고 조국의 여러 곳에서 시범출연을 하도록 하여주시였다.

또한 국제태권도련맹산하에 조선태권도위원회를 조직하고 태권도를 널리 보급하도록 하시였으며 국제경기들에서 태권도조국의 영예를 빛내이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리고 태권도가 세계적판도에서 보급되도록 은정어린 조치들도 취해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태권도는 빠른 속도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수많은 나라들에 보급되게 되였다.

태권도가 자기의 지반을 튼튼히 다지고 광범히 보급되기 시작하자 그의 머리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희망하던 태권도기술의 종합체라고 할수 있는 《태권도백과사전》을 편찬하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의 마음속고충을 누구보다 먼저 헤아려주신분은 바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태권도백과사전》을 조국에서 편집발행할데 대한 크나큰 사랑을 돌려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따뜻한 보살피심속에 세계무술력사상 처음으로 전 15권의 방대한 《태권도백과사전》이 출판되게 되였다.

《태권도백과사전》이 나오게 됨으로써 태권도는 명실공히 우리 민족의 정통무도로 계승발전할수 있는 확고한 담보를 가지게 되였다.

행운중의 행운, 영광중의 영광을 받아안게 된 최홍희선생의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지난날 민족앞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죄많은 몸을 한품에 안아주신것만도 보답할 길이 없는데 이번에는 민족의 자랑인 태권도를 세계만방에 과시하고싶은 마음속소망도 헤아려보시고 태권도를 전면적으로 서술한 백과사전까지 출판하도록 하여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량없는 사랑에 그는 뜨거운 눈물로 두볼을 적시였다.

하여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을 민족의 령도자로 따르는 길에서 자기의 지혜와 정열을 깡그리 다 바치리라 굳게 결의다지였다.

그후 그는 해외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든 태권도를 보급하고 지켜내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리는 한편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하여 《배달민족회》 등을 조직하고 교포신문인 《배달신보》 발행인으로서 해외동포들을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나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태권도로 민족통일에 기여하려는 그의 소행을 두고 못내 기뻐하시면서 여러차례에 걸쳐 은정어린 조국방문의 길을 마련해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생일 70돐, 80돐을 맞을 때에는 사랑의 생일상도 보내주시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영광의 자리에 내세워주시였다.

진정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따사로운 빛과 열로 만물에 활력을 부어주는 위대한 태양의 사랑이였다.

주체89(2000)년 10월 10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선로동당창건 55돐경축 행사장에서 조국을 방문한 최홍희선생을 접견해주시였다.

열흘후인 10월 20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있는 그를 또다시 접견해주시고 친히 사랑의 오찬까지 베풀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빛같은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최홍희선생에게 자리도 권하시고 나이와 건강상태도 념려해주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생에게 이제는 북남관계가 개선되고 통일기운이 그 어느때보다도 높아진 조건에서 북과 남의 태권도를 합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최홍희선생은 나라일로 무척 바쁘신 그속에서도 자신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주시고 각별한 사랑을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하해같은 사랑과 은정에 너무도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와 함께 기념사진도 찍으시였다.

열렬한 인간애, 민족애가 뜨겁게 어려있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겨안으면서 선생은 절세의 위인을 모신 긍지와 자부심을 가슴뿌듯이 느낄수 있었으며 력사에 류례없는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이겨내고 강성대국건설의 도약대와 자주통일의 전환적국면을 마련한 장군님의 선군정치야말로 가장 위대한 애국애족의 정치라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하게 되였다.

하여 그는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 자신뿐만이 아닌 전체 해외동포들의 간절한 흠모의 마음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삼가 올리였다.

한번 정을 주시면 영원히 변함없는 무한대한 사랑을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평양에서 국제무도경기대회를 진행하도록 하시는 크나큰 은정을 또다시 베풀어주시였다.

세계무도력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제1차 국제무도경기대회는 무도인들사이의 교류와 협조를 더욱 강화하며 무도를 명실공히 인류공동의 무도로, 인류에게 참답게 복무하는 정의의 무도로 강화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최홍희선생은 자기의 여생에 값높은 흔적을 남기도록 하여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 삼가 감사의 편지를 올리였다.

그는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주체90(2001)년 5월 평양에 머무르는 기간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건설장을 찾아가 《조국통일에 태권도가 앞장서자》라는 글을 새긴 기념돌을 기증하였다.

그러던 그는 2002년초에 불치의 병이라는 뜻밖의 진단을 받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려 조국에 와서 치료를 받고싶어 한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러한 선생의 건강을 못내 걱정하시며 선생이 조국에 와서 치료를 받도록 해주시고 그 정형에 대해 수시로 알아보시면서 여러가지 고급약재와 신선한 과일들을 보내주시였다.

하지만 그의 병은 현대의학으로써는 도저히 고칠수 없는것이였다.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예감한 그는 국제태권도련맹의 일부 성원들을 모두 평양에 불러놓고 앞으로도 태권도는 조선을 중심으로 발전해야 하며 북남태권도를 꼭 통합하여 조선의 통일에 기여하여야 한다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리고 의식이 몽롱해지는 속에서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 안겨 따뜻한 사랑과 은정만을 받아안던 나날들을 감회깊이 되새겨보면서 마지막 혼신의 힘을 가다듬고 《조선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 부디 김정일장군님을 잘 모셔주오. …》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하였다는 비보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너무도 가슴이 아프시여 아무 말씀도 없으시였다.

다음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에게 그의 장례식을 크게 할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최홍희총재는 태권도를 가지고 조국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안고 수십년동안 해외에서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태권도활동을 열정적으로 해오다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것을 알고는 조국의 품에 안겨 생을 마쳤다고, 최홍희총재는 결국 인생의 마무리를 잘한셈이라고, 최홍희총재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는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일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처럼 조국의 품에 안겨 인생의 마무리를 하고싶어하던 최홍희선생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에 떠받들려 영생의 언덕에 오르게 되였다.

진정 해외에서 사는 평범한 동포를 한품에 안아 민족대단합실현의 길에 내세워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서사시적화폭을 펼쳐놓았다.

이것을 어찌 최홍희선생 한사람만이 받아안은 사랑이라 하겠는가.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속에 영생하는 해외동포들가운데는 음악으로 민족의 대단결과 조국통일에 이바지한 동포들도 있다.

윤이상, 리준무동포들의 실례가 바로 그러하다.

윤이상선생은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재도이췰란드동포 윤이상선생으로 말하면 1959년부터 도이췰란드에서 여러 음악대학의 교수,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동양음악과 유럽음악에 다리를 놓은 우리 민족의 재능있는 작곡가였다.

일찍부터 남조선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참가한 그는 1967년 6월 남조선의 《중앙정보부》(당시)가 조작한 《남조선적화공작단사건》으로 랍치되여 남조선에 끌려가 근 2년동안이나 옥중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그후 그는 남조선의 군사파쑈독재를 반대하고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으로서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한 범민련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91년 여름이였다.

그 시기로 말하면 동유럽에서 벌어진 사회주의붕괴의 영향으로 공화국앞에 엄혹한 시련의 파도가 밀려들고있던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윤이상선생의 생일 75돐을 계기로 윤이상음악당건물을 하나 크게 잘 짓고 윤이상음악연구소도 함께 있도록 하며 새 건물에서 음악연주회와 음악토론회도 해마다 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리하여 평양에서는 해마다 우리 겨레와 세계음악가들의 커다란 관심과 기대속에 윤이상음악회가 성황리에 진행되게 되였다.

제1차로부터 제11차까지 매번 조국에 와서 음악회에 참가한 윤이상선생은 자신의 애국애족적인 사상감정과 음악세계가 조국인민들과 교감하는 격동적인 순간들을 체험하면서 거기에 깃든 경애하는 장군님의 웅심깊은 뜻을 가슴뜨겁게 새겨안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음악회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강력한 연주집단인 국립교향악단에 작품연주를 맡기시고 독특한 곡상요구에 따르는 수십종의 타악기를 일식으로 마련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으며 공연을 TV로 방영하고 이름있는 평론가들의 관평도 신문에 내도록 해주시였다. 또한 윤이상선생의 창작활동과 사회활동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그를 원형으로 한 다부작예술영화를 만들도록 하시였고 영화가 완성되였을 때에는 일군들에게 영화와 함께 병치료에 좋은 약들을 가지고 베를린으로 가서 선생을 축하해주고 자신의 인사도 전하라고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은 그에게 있어서 생의 희열이였고 마를줄 모르는 열정의 샘이였다.

주체84(1995)년 11월 4일 통일애국의 길에서 그처럼 값있는 삶을 빛내여오던 윤이상선생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우리곁을 떠난것을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시며 중앙신문들에 부고를 크게 내게 하고 거기에 윤이상선생의 생애는 조국통일을 위한 한길을 꿋꿋이 걸어온 투쟁의 한생이며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한생이였다고 밝히게 하시였다. 이것은 그의 애국적한생에 대한 최상의 평가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토록 극진한 사랑과 다심한 보살피심속에 윤이상음악회와 윤이상음악연구토론회가 해마다 열리게 되였으며 그의 음악작품들은 민족의 재부로 더욱 빛을 뿌리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윤이상선생에게 돌려주신 고귀한 은정은 해외교포사회계를 커다란 감격과 흥분으로 설레이게 하였다.        

재미동포전국련합회 문화예술분과 위원장이며 《우륵교향악단》 단장인 리준무 역시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은정과 따사로운 손길아래 민족의 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한생을 바쳐가고있는 평범한 해외동포들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미국땅 한복판에서 《김정일장군의 노래》 연주를 지휘한 해외동포음악가이다.

절세의 위인들에 대한 그의 매혹은 노래로부터 시작되였다.

서울에서 음악대학을 나온 그는 1972년 미국으로 《이민살이》를 떠났다. 그러나 자기를 품어주는 진정한 조국이 없었던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생의 보람과 랑만이 없는 나날들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비데오로 조선예술영화 《월미도》에서 나오는 노래 《나는 알았네》를 듣게 되였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은 강렬한 충격속에 휩싸였다.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머니라 부르는 조국이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품이라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하게 되였던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주제가가 인연이 되여 그는 평양을 여러차례 방문하게 되였고 그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걸출한 위인상을 마음속에 깊이깊이 새겨안게 되였다.

절세의 위인들에 대한 흠모는 그대로 노래의 선률에 담겨지게 되였다.

그후 그는 주체86(1997)년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무대에 나섰다.

이 나날 리준무는 불멸의 혁명송가 《김정일장군의 노래》를 배우게 되였으며 공화국이 제노라 하는 미국을 통쾌하게 제압하고 모진 역경속에서도 기적같이 일떠선 성공의 비결의 하나가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정치와 함께 그이의 음악정치에 의해 이룩되였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체87(1998)년 12월 6일 미국땅에서 처음으로 《김정일장군의 노래》 송가음악회를 열었다.

뉴욕의 머르킨극장은 관람자들로 꽉 차있었다.

그는 위인숭배의 격정을 안고 《김정일장군의 노래》를 지휘하였다.

연주가 끝나자 극장에서는 떠나갈듯 한 박수와 환호소리가 터져나왔다. 공연이 끝났어도 사람들은 오래동안 자리를 뜰줄 몰랐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인상을 칭송하면서 훌륭한 노래를 지휘한 그를 격려하였다.

이렇듯 송가음악회는 미국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그해 12월 16일에는 벌가리아의 쁘라쨔예술극장에서, 1999년과 2000년의 2월과 12월을 비롯한 뜻깊은 계기들마다 김정일장군 송가음악회를 조직하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흠모하고 따르는 노래를 수많이 부름으로써 온 세계가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흠모열풍속에 휩싸이게 하였다.

그후 그는 주체90(2001)년 2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조국의 예술인들과 함께 미국의 5개 대도시들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외에서 오래전부터 애국적음악활동을 벌려온 그의 소행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고 그에게 크나큰 믿음을 베푸시였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9(2000)년 3월 18일 어느 한 일군에게 2월의 명절에 즈음하여 재미교포음악지휘자가 교향곡연주회를 진행하였는데 세계명곡들과 함께 우리 나라 노래 《조선의 장군》,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아리랑》 등을 성대히 연주하였다고 하시면서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 말씀에는 조국과 멀리 떨어진 이역땅에서도 민족의 넋을 귀중히 간직하고 애국적음악활동을 벌려나가는 평범한 한 해외동포음악가에 대한 최상의 믿음과 사랑이 담겨져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분에 넘치는 말씀을 받아안은 리준무는 한생을 장군님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휘하는것으로 빛내일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그후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께 삼가 드리는 송가  《21세기의 빛나는 태양 김정일장군》을 지어 제20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무대에 올렸으며 우리 겨레와 수백만 해외동포들속에 영원한 태양찬가가 높이높이 울려퍼지게 하였다.

이처럼 이역땅에 흩어져사는 해외동포들을 그 누구보다도 극진히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해빛보다 따사로운 품이 있어 재도이췰란드 최건국동포, 국제고려인통일련합회 위원장 강일, 재로씨야 정일심동포,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 림창영을 비롯한 수많은 해외동포들이 민족대단결성업에 떨쳐일어나 통일의 선각자로서 한몸을 불태울수 있었던것이다.

참으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품은 이역땅에 사는 모든 해외동포들이 조선민족의 한성원이라는 긍지를 간직하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애국의 길로 나아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는 은혜로운 어버이품이다.

오늘 해외동포들은 비록 이국의 거리에 문패를 걸고있어도 조국과 숨결을 같이하면서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에 보답할 일념으로 조국인민들과 어깨겯고 자주통일대행군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