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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김정일장군님과 민족대단결」중에서

바다로는 수천수만줄기의 강물들이 쉬임없이 흘러든다.

그 수많은 강물들중에는 맑은 물도 있고 흐린 물도 있다.

그러나 바다는 그 모든 강물들을 어느것 하나 외면하거나 물리치지 않고 자기의 품에 다 받아들여 정화시킨다.

바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은 바다와 같이 넓은 도량과 포옹력으로 지난날 민족앞에 죄를 지은 사람들까지도 한품에 안아 뜨거운 사랑과 믿음을 베풀어주시는 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 안겨 인간의 참된 삶을 마음껏 향유한 사람들가운데는 지난날 남조선에서 《반북》일선에 서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가운데는 해방전에 장개석국민당군대에서 독립 대대장(대령)으로도 복무하고 해방후에는 리승만《정부》의 《국군》상층부에도 있었으며 그후에는 《국군》 군단장으로,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내며 《반북》일선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온 최덕신선생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자기의 리념이 반민족적인 리념이라는것을 깨닫고 미국으로 건너간것은 1976년이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최덕신선생은 늦게나마 민족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저 위대한 수령님께서 밝혀주신 민족대단결리념을 받들어 련공합작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배달민족회》를 조직하고 그 의장으로 일하면서 해외에 사는 교인들을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위한 길에 나서도록 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한해두해 세월이 흐를수록 최덕신선생의 마음속에는 두고온 고국산천에 대한 그리움이 못견디게 사무쳐왔다.

하여 최덕신선생은 만리창공을 자유로이 훨훨 날아예는 기러기떼에 자기의 절절한 애수를 실으며 비내리는 이역의 거리를 홀로 거닐었다.

그의 이러한 고민과 번뇌는 날로 더해만갔다.

최덕신선생의 이러한 마음속고충을 헤아려주신분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덕신선생의 얼룩진 과거경력보다 인생말년에나마 조국앞에 떳떳한 일을 하고싶어하는 그의 민족적량심을 더 소중히 여기시고 그를 한없이 넓은 품에 안아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뜨거운 사랑과 믿음속에 주체70(1981)년 6월 23일 최덕신선생은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여있는 선친의 묘를 찾는 행운을 지닐수 있었다.

선친의 묘를 제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의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드디여 그는 아버지의 묘비에 얼굴을 비비며 오열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아버님, 죄많은 덕신이가 오늘에야 아버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님봉분우에 흙 한줌 못 얹었는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애국지사의 릉원을 여기에 쌓아주시였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신하로 세상을 떠난 아버님의 뜻을 이제야 깨달은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사실 최덕신선생의 부친 최동오선생으로 말하면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아온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최동오선생은 일찌기 1920년대에 화성의숙 숙장을 지낼 때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니신 출중한 인품과 명석한 두뇌, 비범한 활동력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우리 민족의 앞날에 재생의 빛을 주실분은 위대한 수령님 한분밖에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한 그였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혁명의 진로를 개척하시기 위해 길림으로 떠나실 때에도 작별의 아쉬움속에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자신은 상관하지 않으며 아무튼 꼭 성공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는 자기의 속마음을 수령님께 절절히 아뢰였던것이다.

그리고 몇해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반동군벌에 체포되시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그이의 신변을 걱정해드리기도 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시기에는 상해《림시정부》 인사들과 함께 백두산에 보낼 군자금도 모금하면서 수령님을 물심량면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최동오선생의 기대와 믿음은 결코 헛된것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대전의 총성을 울려 천도교인들을 비롯한 온 민족을 하나의 력량으로  묶어세우시고 무장으로 일제를 격멸소탕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최동오선생은 무릎을 치며 《조선의 하늘에 대통운이 텄다.》고 환성을 올렸다.

해방후에도 그는 어버이수령님을 변함없이 따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동오선생과 화성의숙에서 맺은 깊은 인연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그를 남북련석회의에 불러주시였으며 그가 미제와 리승만의 영구분렬책동을 반대하여 투쟁하도록 따뜻이 이끌어주시였다.

그후 최동오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 그이의 사랑속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사업하면서 인생말년을 나라의 통일성업에 다 바칠수 있었다.

최덕신선생은 자기 부친을 애국지사로 불러주시고 죽어서도 영생하는 언덕에 높이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친어버이심정으로 그의 숙식조건과 생활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그 나날 최덕신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는 크나큰 영광도 지닐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을 방문한 최덕신선생을  몸소 접견해주시고 오찬도 마련해주시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치아가 나빠서 음식을 먹는데 불편을 느끼고있다는것을 아시고 못내 걱정하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되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가 조국방문의 나날에 새로 이발을 해넣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는 은정을 받아안은 최덕신선생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써도 표현할수 없었다.

치아는 건강의 기초라고들 한다.

최덕신선생은 로년기에 이가 나빠서 남모르는 고통을 겪어왔다. 그러나 망명자의 한사람에 불과한 그의 건강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자기 신상의 불편까지 헤아리시여 새 이발까지 해넣도록 하여주시니 최덕신선생은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으로 하여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최덕신선생의 마음속에는 자기자신만이 아닌 온 민족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길 진정한 어머니품은 오직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품이라는 절대불변의 의지가 고요히 자리잡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최덕신선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눈에 흙이 들어가는 마지막순간까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따르리라 굳게 다짐하고 공화국에 영주할 결심을 내렸다.

그러나 최덕신선생은 자기에게 어떤 행운이 차례질것인가에 대해서는 미처 몰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5(1986)년 9월 17일 공화국에 영주한 최덕신부부의 소행을 두고 못내 기뻐하시며 그들부부에게 고급살림집을 마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최덕신부부에게 마련해주신 집은 영사실과 당구장, 식당과 응접실, 침실과 서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품이 구색을 맞추어 갖추어져있어 아무 불편없이 생활할수 있게 되여있었다.

풍치수려한 보통강기슭에 자리잡은 집으로 새집들이하던 날 최덕신부부는 다시한번 세찬 감격과 흥분속에 휩싸였다.

그들이 집에 들어서자 방한가운데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이 차려져있었다.

후날 최덕신선생은 감격에 울던 그때를 회고하여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본인도 잊고있던 생일날 새집을 받고 그분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앞에까지 마주앉고보니 손님들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이 사람은 그저 목이 메여올라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누구나 세상에 태여난 사람치고 생일없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언제 한번 인상에 새겨진 생일날은 없었다.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타향으로 류리표박할제 무슨 축복받을만 한 인생이라고 생일날을 기념하였을것인가. 고달픈 해외망명생활에서도 생일은 해마다 찾아왔으련만 역시 인상에 남은적은 없다. 심지어 한번밖에 없는 환갑날조차 하도 경황없고 정신상의 여유가 없어 먼 유럽땅에서 라면 한그릇으로 굼때였고 안해는 그것이 한으로 맺혀 늘 가슴아파하곤 하였다. 그런데 김정일령수께서 이 사람이 새 생활을 시작하는 날을 뜻깊게 해주시려고 이렇게 새집을 주시고 생일상까지 보내주시여 타향에서 맺힌 설음을 한꺼번에 가셔주시는것이 아닌가. 곁에 앉은 안해도 손수건을 눈언저리에 갖다대고 머리를 숙이는것이였다. 일군들이 건네는 축배잔을 받으며 나는 끝내 참았던 오열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오늘은 일흔두번째 생일이 아니라 이 최덕신이 세상에 다시 태여나는 날이올시다. 이 백골난망의 은혜를 제 어찌 다 갚으리까.…〉》

최덕신선생에게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날을 따라 더해만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덕신선생에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신분증을 수여하도록 하시였다.

최덕신선생이 고백한바와 같이 이것은 단지 직함의 증서만이 아니라  크나큰 아량으로 그의 어지러운 과거를 백지화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영원한 동지로 믿어주시고 내세워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이 어린 보증이였다.

이역땅에 살면서 별로 한일도 없는 자신에게 살림집과 생일상을 보내주신것만 해도 보답할길이 없을진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중책을 지닌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도 마련해주시였으며 저녁에는 옥류관에서 있은 애국렬사유가족들을 위한 연회에 그들부부를 또다시 초대하여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최덕신선생과 그의 부인은 너무도 뜻밖에 펼쳐진 이 모든 현실앞에서 마치도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하여 그들부부는 밤새도록 이 방, 저 방을 돌아보기도 하고 응접실과 현관에도 나가보면서 곡절많던 지난날들을 감회깊이 돌이켜보았다. 그러면서 최덕신선생과 부인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뜨거운 육친적사랑에 반드시 보답할 굳은 결의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더해만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에 그들내외는 또다시 흐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덕신선생의 건강과 독서, 문화정서생활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으며 그를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는 영광의 자리에도 여러차례 내세워주시였다.

그리고 부친 최동오선생의 생전의 모습이 담겨져있는 기록영화와 그 부분을 사진으로 합성하여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도 돌려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또한 주체76(1987)년의 새해를 맞는 그들부부에게 사랑의 선물도 보내주시였으며 한 일군을 부르시여 최덕신선생의 생활에서 불편한 점은 없는가에 대하여서도 친히 알아보시면서 일군들이 그의 집을 자주 찾아가보기도 하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즐겁게 지내도록 할데 대하여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최덕신부부가 당구치기를 좋아하면 당에서 당구를 보내주겠다고, 그들이 어떤 당구를 좋아하는지 알아보라고, 구멍에 넣는 당구인지 네알을 가지고 맞히기를 하는 당구인지 알아보라고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당구대를 받아안은 최덕신부부는 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해하며 그이의 사랑이 어린 당구대를 쓸어보고 또 쓸어보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인간이 받아안을수 있는 온갖 사랑과 최상의 믿음을 다 베풀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주신 사랑이 적으신듯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최덕신선생을 원형으로 한 영화를 만들도록 하여주시고 영화가 세계적인 걸작으로 완성되도록 걸린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 풀어주시였으며 영화가 완성되여 내외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시였다.

최덕신선생에게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이뿐이 아니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앓고있는 급성취장염을 걱정하시여 중앙의 큰 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적인 치료를 받도록 하여주시였으며 그가 퇴원한 후에는 혹시 병이 재발할가 념려하시여 평양시를 벗어난 먼거리에 다니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그를 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 보내여 계속 치료를 받도록 하여주시고는 매일과 같이 병상태를 알아보시고 병의 증상에 따르는 고급약재와 보약도 아낌없이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선생이 그 나라의 음식에 잘 적응되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신선한 남새와 두부, 콩나물 등 조선음식감까지 매주 특별비행기로 보내주시는 한량없는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최덕신선생에게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이처럼 뜨겁고 위대한 어버이사랑이였다.  

이렇듯 최덕신선생은 공화국영주의 닻을 내린 때로부터 불치의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3년동안밖에 생활하지 못했지만 경애하는 장군님의 다심어린 사랑의 품속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무소속대변지 《통일신보》 명예사장으로 사업하면서 보람있는 삶을 누릴수 있었다.

최덕신선생이 사망하였을 때 그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신분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른새벽에 관계부문 일군들을 부르시여 선생의 사망에 대한 부고를 내도록 하시고 우리를 믿고 온 선생이였으니 우리가 장례식을 잘해주어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의 묘지를 애국렬사릉의 좋은 위치에 정하도록 일군들에게 거듭 당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보살피심속에 최덕신선생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였다. 유가족들은 물론 장례식에 참가한 조객들은 뜨거운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베푸신 믿음과 사랑은 그후 그의 가족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덕신선생의 장례식이 끝난 후 남편을 잃고 적적해할 그의 부인과 유가족들을 념려하시여 지성어린 선물도 보내주시고 맏아들의 생일날에는 몸소 생일상과 갖가지 과일들을 가득 담은 과일바구니도 보내주시였다.

또한 주체80(1991)년 2월 14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생일 70돐을 맞는 최덕신선생의 부인 류미영에게 사랑의 생일상을 보내주시였다.

그때 그는 남편도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도 외지에 있어 70돐생일을 쇨 생각조차 못하고있었다.

그러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외에서 늘 떠돌이살이를 하면서 환갑날조차 외국의 어느 한 음식점에서 동포들이 차려주는 상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에게 은정어린 생일상을 보내주시였던것이다.

최덕신선생의 부인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정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사랑으로 평범한 미망인에 불과한 자기를 극진히 아끼고 관심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또한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는 그의 마음속고충도 헤아리시여 해외에 있던 그의 아들을 조국으로 데려오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으며 여러 일군들을 집으로 보내여 그들을 축하해주도록 하시였다.

최덕신선생의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이뿐이 아니였다.

주체83(1994)년 9월 어느날 오후였다.

이때로 말하면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신지 두달밖에 안되던 때여서 온 나라, 온 겨레가 크나큰 상실의 아픔에 싸여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덕신선생의 부인을 전화로 찾아주시였다.

너무도 뜻밖이여서 그가 미처 인사도 올리지 못하고있는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건강부터 념려해주시였다.

순간 류미영은 코마루가 찡해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을 잃은 민족의 대국상으로 누구보다 가슴아프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으시고 한갖 미망인에 불과한 자기와 같은 한 늙은 녀인의 건강에 대해 먼저 물어보시니 가슴속에 뜨거운것이 북받쳐올랐던것이다. 그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대답을 올리자고 옷깃을 여미는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류미영위원장은 휴양을 가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대국상을 당해 사람도 강산도 다 오열하고있는 때에 휴양이라니, 너무도 뜻밖의 말씀에 류미영은 그만 돌처럼 굳어져 아무 대답도 올리지 못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러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 지난해에 류미영위원장에게 삼지연에 같이 가서 휴양하자고 하시였는데 수령님의 유훈대로 휴양을 떠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자신께서 겪고계시는 크나큰 슬픔보다 먼저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에 하신 약속을 먼저 생각하시며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은정에 정녕 류미영은 두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그가 너무도 감격에 겨워 흐느껴울고있는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들이 언제 오는가, 아들이 오면 자신께 알리라고 하시면서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시였다.

그리고 아들이 인차 온다는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는 아들이 조국에 오면 10월까지 그와 같이 휴양을 가도록 해야 하겠다고 거듭 이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전화로 말씀하신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류미영은 온 우주의 사랑을 자기 혼자서 독차지한것만 같았다.

그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 서거 2돐 중앙추모대회때에도 그를 친히 만나주시고 그의 건강을 또다시 념려해주시면서 부디 몸조심해서 일하라고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그 사랑, 그 믿음이 하도 고마와 그가 눈물을 그치지 못하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자꾸 그러면 나는 어쩌는가고 그를 따뜻이 위로해주시였다.

예로부터 미망인은 고독하다고 전해왔다.

하지만 류미영은 낳아키워준 부모와 남편의 사랑을 다 합쳐도 비기지 못할 위대하고 무한대한 사랑과 인덕의 품이 있어 비록 늙은 몸이지만 오늘도 외로움을 모르고 민족대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애국위업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치고있다.

이처럼 어버이수령님과 최씨일가사이에 맺어진 깊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대를 두고 길이 전할 한없는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정녕 끝이 없었다.

《반북》으로 얼룩진 지난날을 참회하고 통일을 위한 투쟁에 나설것을 확약한 《세계평화련합》 문선명총재의 경우도 최덕신선생과 다를바 없다.

문선명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연면 상사리(오늘의 정주시 원봉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월남한 그는 부산시 동구범일동의 《범내골 토담집》을 무대로 선교활동을 벌리다가 그후 서울에서 《통일교》를 새로 내왔으며 그 교주로서 한생을 《승공통일》, 《공산주의소멸》의 구호를 내걸고 남조선의 력대 당국자들의 비호밑에 극우익단체들과 야합하여 공화국과 통일애국력량을 반대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온 사람이였다.

하지만 남조선과 해외에서 인생길을 굽이굽이 에돌아 로년기에 이른 문선명의 마음속에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있었다.

문선명의 공화국방문의향이 날로 표면화되자 사람들속에서는 사상과 리념에서 《반북》적인 그를 공화국이 과연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우려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한없이 넓은 도량과 포옹력을 지니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요구를 쾌히 받아들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선명이 비록 《반북》으로 일생을 살아왔고 지난날 민족앞에 큰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사상과 리념의 차이에 앞서 한피줄을 이은 조선사람의 마음속에 간직된 민족애를 더 중시하시였던것이다.

어떤 사상을 가지고 어떤 리념에 충실해왔건 관계없이 민족의 대단결을 위하여 통일운동에 나선다면 그가 누구든지 따사로운 한품에 안아주고 내세워주시는것이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이렇듯 경애하는 장군님의 넓으신 아량과 자애로운 인품에 이끌리여 문선명은 주체80(1991)년 11월 30일 평양을 방문하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평양방문에 아무런 불편도 없도록 특별비행기를 보내주시는 한편 가족친척들의 비행장마중으로부터 시작하여 고향방문, 금강산유람, 민족대단결과 평화통일을 위한 공동성명채택, 위대한 수령님과의 접견과 기념촬영, 오찬 등에 이르기까지 동포애의 정을 담아 따뜻하게 보살펴주시였다.

그 나날 문선명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보살피심속에서 고향을 방문하고 가족친척들을 만나 감격적인 상봉도 하였으며 절세의 위인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는 최상의 행운을 지니였다.

문선명은 민족앞에 지은 죄도 순간에 씻어주시고 한없이 넓은 아량과 포옹력으로 자기를 따뜻이 품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덕망에 완전히 매혹되였다.

하여 그는 조선해외동포위원회 위원장과 조국통일은 외세의 개입이나 간섭이 없이 자주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실현하여야 한다는것, 제도가 다른 남과 북이 서로 공존, 공영하는 기초우에서 같은 민족으로 하나의 통일국가를 세우는 방법으로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민주주의적으로 조국통일을 이룩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원칙에서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고 힘있는 사람은 힘을,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조국통일실현에 적극 이바지한다는것 등의 10개 조항으로 된 공동성명까지 채택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을 방문한 문선명을 친히 만나주신 소식은 남조선과 해외교포들은 물론 국제사회계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처럼 문선명은 민족앞에 씻을수 없는 대죄를 지은 사람까지도 자애로운 한품에 안아주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대해와 같은 사랑에 크게 감동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 안겨 재생의 참된 길을 찾은 사람들가운데는 남조선의 이전 천도교 교령이며 《국민회의》 상임고문이였던 오익제선생도 있다.

오익제선생으로 말하면 오래동안 남조선의 정계, 종교계에서 활약해온 인물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이러한 그가 공화국북반부에로 인생의 좌표를 정하게 된것은 그 어떤 일시적인 충동이나 우연적인 동기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 아니였다.

오익제선생의 고향은 평안남도 회창군 대곡리이다.

그의 아버지는 곡창주재소 순사로 있었는데 무엇때문이였는지 경제범으로 서울감옥에서 복역하다가 형기중에 옥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머니와 함께 힘겹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려서 반일감정이 높았던 그는 《소년저축회》라는 반일학생조직을 뭇고 반일활동에 필요한 자금확보를 위해 화전을 일구고 거기에 강냉이를 심는 일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1950년 가을 어느날 그는 어머니와 안해 그리고 2살난 딸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났다.

그때로부터 그는 근 반세기동안 본의아니게 《반북》을  일삼는 정계에도 몸을 담으며 정처없이 방황하였다.

그러던 그는 뒤늦게야 민족앞에 지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공화국의 품에 안길것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공화국을 배반하고 《반북》의 편에 섰던 자신을 공화국에서 과연 어떻게 받아줄것인가 하는 마음속위구심에서였다.

오래동안 고민하던 그는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벌을 받아도 공화국의 품에서 받고 땅에 묻혀도 제 고향땅에 묻히자.…》

하여 오익제선생은 1997년 8월 3국을 거쳐 공화국의 품에 안기였던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의 소행을 애국적장거로 높이 치하하시면서 그를 사랑의 한품에 따뜻이 안아주시였다.

그는 자기의 의거입북동기를 묻는 국내외 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 특히 강조하고싶은것은 본인의 월북결행이 이남에는 따를만 한 령도자가 없지만 이북에는 영명한 령수가  계신다는 이 특기할만 한 사실에서 비롯되였다는것이다.

진리도 힘이 있어야 실현된다. 그 힘은 바로 령도자의 령도력이다. 이남에는 진리, 애국과 정의가 없을뿐아니라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을 실현할수 있는, 국민을 이끌수 있는 령도자가 없다.

그러나 이북에는 위대한 령수가 계신다.

민족의 장래도 김정일령도자님께 있으며 민족의 통일도 김정일령도자님께 있다.

저는 민족의 령수이신 김정일령도자님을 숭앙하여 이북에 왔음을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당당히 선언하는바이다. …

그후 그는 자기의 의거는 통일을 위한 결행이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피력하였다.

《분단의 비극에 가슴을 치며 통일운동에 동참해나서는 사람만이 이 나라의 참된 애국자이고 이 민족의 참된 정치인이라 할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익제선생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에 안기게 된 동기였다.

하지만 오익제선생은 자기가 안긴 품이 어떤 품인가에 대해서는 미처 몰랐다.

민족을 위해 장한 일을 한 사람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으시고 다 돌려주고계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난날 그가 버리고 갔던 안해와 딸 그리고 사위와 손자가 한지붕아래서 살수 있도록 현대적이고 아담한 3층짜리 고급살림집을 마련해주시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그쯘히 갖추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또한 해방전에 아버지가 순사노릇을 하다가 경제범으로 옥사한 사실을 두고 일생 괴로와하는 오익제선생의 마음속고충도 널리 헤아려보시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하여 해당 부문에서 구체적으로 알아볼데 대한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확인결과는 실로 뜻밖이였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이시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이끄신 《조선국민회》의 소관하에서 군자금모집에 헌신한 인사들이였으며 부친의 일제경찰기관복무 역시 일종의 위장경력이였다는것이 밝혀지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동아일보》(1923. 8. 23)에는 그의 조부인 오상준이 서울 민립대학건설에 자금 50원을 희사했다는 내용이 실렸는데 조선독립을 위한 실력양성을 위해 건립되는 이 대학에 대한 지원은 곧 반일애국의 표시였다.

그리고 순사노릇을 하던 부친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한것도 결국 반일투쟁에 관여하였기때문이라는것이였다.

오익제선생은 그런줄도 모르고 선친을 탓하며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오익제선생은 뿌리도 모르고 《반북》일선에서 정처없이 방황한 자기와 같은 못난 자식에게 인생의 새봄을 찾아준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덕이 너무도 고마와 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크나큰 격정속에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또 올렸다.

이처럼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과 믿음속에서 오익제선생은 청춘의 기백과 활력을 되찾을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를 주면 열백을 더 주고싶어하시는 친어버이사랑을 지니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중요한 직책도 맡겨주시였다.

또한 그에게 조국통일상도 수여해주시고 사랑의 고급승용차도 선물로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가족들의 미래까지도 다 맡아안으시고 그의 자손들이 희망에 따라 마음껏 공부할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뿐이 아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언젠가 추석을 맞아 오익제선생이 선친들의 묘소를 찾아갈 때에는 그의 편리를 위하여 직승기까지 띄워주시고 그가 공화국의 품에 안겨 처음으로 맞이한 생일날에는 생일상도 친히 보내주시였으며 그가 생일 70돐을 맞을 때에는 또다시 은정어린 생일상을 보내주시였다.

그런가 하면 그가 동해천리를 비롯한 공화국의 이름난 여러 명승지들에서 마음껏 휴식하도록 하여주시고 북반부의 여러곳도 참관하면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에 대하여 더 잘 알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또한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실명의 위험에 직면해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그를 즉시 외국에 보내여 병치료를 받도록 하여주시였으며 외국의 어느 한 당에서 선물로 보내온 남방과일까지도 고스란히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오익제선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친어버이사랑에 너무도 목이 메여 뜨거운 눈물로 두볼을 적시였다.

그후 그는 공화국에서 겪은 생활과 체험을 적은 《현세의 한울님》이라는 제목으로 된 책에서 위대한 력사의 주도자, 민족자주의 수호자로서의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인상을 격조높이 칭송하였다.

또한 그는 지난날 민족앞에 죄를 지은 자신을 한품에 안아 재생의 참된 길을 걷게 하여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하해같은 사랑이 너무도 고마와 그이의 탄생일을 맞으며 단군민족의 성지도 민족의 정통성도 오로지 북에 있으며 경애하는 장군님 계시여 민족의 존엄과 영예가 빛나고있다는 내용을 담은 축하의 편지를 경애하는 장군님께 삼가 올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현지지도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그가 올린 소박한 편지를 보아주시고 사랑의 친필을  보내주시였다.

무랍없이 올린 자기의 편지까지 보아주시고 친히 사랑의 친필서한도 보내주시니 오익제선생은 온 우주를 통채로 받아안은것같은 심정에 휩싸였다.

하여 선생은 무상의 행복에 휩싸여 그후 경애하는 장군님께 올린 편지에서 이렇게 아뢰였다.

《산같이 머리들어 떳떳해지고 하늘처럼 가슴열어 마음 든든해지는 저의 이 심정을 무슨 말로 아뢰였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공화국이 경애하는 김정일령도자님의 존함과 더불어 영원을 사는 불멸의 나라임을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되였습니다.…

저는 자랑찬 공화국의 이 력사속에서 충심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 결초보은하겠습니다.》

그는 이 맹세대로 오늘도 경애하는 장군님을 받들어 민족대단합을 위한 통일애국의 길에 헌신하고있다.

이처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없이 넓은 도량과 숭고한 포옹력으로 그들모두에게 재생의 활력을 부어주시고 민족대단합을 위한 거족적인 조국통일성전에 적극 내세워주신다.

진정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은 민족적량심을 지니고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다 안아주고 품어주는 어머니품, 민족단합의 위대한 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