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정일장군님과 민족대단결」중에서

 

 

   

지금 7천만 우리 겨레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마련하여주신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계기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서로 자유롭게 래왕하고 접촉하면서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적극 떨쳐나서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동포들사이의 래왕과 접촉, 대화와 련대련합을 널리 실현하는것은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중요한 방도의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내부에 비록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동포들이 자유로이 래왕하고 접촉하며 대화를 하고 련대련합을 강화해나가면 서로의 리해와 신뢰를 두터이 하고 민족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뜻과 힘을 합칠수 있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나라의 분렬로 인하여 기나긴 세월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뿌리깊이 남아있는 오해와 불신을 하루빨리 가시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우리 민족끼리 서로 자유롭게 래왕하고 폭넓게 접촉하는 새시대를 펼쳐놓으시였다.

그리하여 민족분렬사상 처음으로 남에서는 북녘땅을 다녀가고 북에서는 남녘땅을 밟아보는 희한한 화폭이 펼쳐지게 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먼저 남녘의 수많은 관광객이 민족의 명산 금강산으로 쉬임없이 찾아오고있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돌이켜보면 남녘동포들에게 있어서 금강산에 한번 올라가 그 일만경치를 마음껏 부감해보는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한갖 꿈으로만 간직되여있었다.

이것은 외세에 의하여 초래된 민족분렬이 가져다준 또 하나의 비극이 아닐수 없었다.

하기에 남녘의 겨레들은 민족의 재부이며 자랑인 금강산을 제 나라, 제땅에 가지고있으면서도 언제 한번 찾아가볼수도, 올라가볼수도 없었다.

남녘동포들의 이러한 마음속소원을 헤아려주신분은 바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이미 주체87(1998)년 11월 18일 민족분렬사상 처음으로 금강산관광을 위한 사랑의 배길을 열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평양상봉이후 금강산관광에 대한 남녘겨레의 기대와 관심이 날을 따라 더욱 높아지는데 따라 금강산을 단순히 관광을 위한 금강산이 아니라 북과 남을 잇는 무지개다리로, 온 민족이 자유로이 래왕하며 서로 만나는 통일오작교로 되게 하시기 위하여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9(2000)년 9월 선군령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남조선의 《현대그룹》 정몽헌회장을 비롯한 《현대》관계자들과 함께 고성항을 비롯한 금강산지구의 여러곳을 돌아보시면서 금강산관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와 세심한 보살피심에 의하여 북과 남은 내외의 분렬주의세력들의 악랄한 책동을 짓부시고 금강산관광사업과 관련한 의정서와 합의서 및 부속합의서들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2월 5일에는 남조선의 《현대》관계자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륙로관광을 위한 시험답사를 진행하였으며 2월 14일에는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사들과 내외신기자들로 구성된 관광단이 시범관광을 진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남조선의 《CBS》방송은 《금강산륙로관광을 위한 사전답사단 86명이 한꺼번에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민간인이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은 일은 있었지만 판문점외의 군사분계선통과는 이번이 처음이다. 판문점으로는 기껏해야 한두명씩 통과했지 이번처럼 대규모인원이 넘은것은 역시 처음이다.》라고 전하였으며 미국의 《로스안젤스 타임스》는 《남북은 요새화된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금강산관광도로의 공식개통으로 또 하나의 력사를 만들었다.》고 보도하였다.

그후 금강산관광은 북과 남사이에 동서해선의 철도와 도로를 련결하는 사업이 힘있게 추진되는데 따라 배길로만이 아니라 륙로를 통하여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되였다.

그리하여 민족의 명산 금강산으로는 해마다 수많은   남녘동포들이 앞을 다투며 찾아오게 되였다.

금강산관광이 시작된 때로부터 2006년 10월말까지 금강산을 다녀간 남녘동포들의 수는 무려 140여만명에 달하였다.

남녘의 겨레들은 천하절승 금강산에 올라 그 경치를 마음껏 부감하면서 민족의 명산에 대한 소중함과 자부심을 다시한번 새롭게 간직하게 되였으며 오랜 세월 눈으로만 그려보고 마음속으로만 오르던 금강산관광길을 열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 너도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리였다.

이처럼 금강산에 오르고싶어 하는 남녘겨레의 간절한 소원을 현실로 꽃피워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금강산을 북과 남, 해외의 우리 겨레들이 서로 자유롭게 래왕하고 접촉하는 장소로, 민족의 화해와 대단합을 실현하는 민족대회합의 무지개다리로 되게 하여주시였다.

그리하여 금강산에서는 조선직업총동맹대표들과 남조선의 《전국민주로동조합총련맹》, 《한국로동조합총련맹》대표들사이의 실무협의, 16차례에 걸치는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 북남적십자단체들사이의 실무접촉, 민족통일대축전, 민족통일대토론회를 비롯하여 각종 상봉모임들과 행사들이 헤아릴수없이 진행되였다.

그중에는 2002년 10월 금강산에서 진행된 북남녀성통일대회도 있다.

10월 16일부터 17일사이에 북과 남, 해외의 녀성대표들은 금강산에 모여 《6. 15공동선언실천과 평화를 위한 북남녀성통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통일조국건설에 당당히 이바지하려는 자부심을 안고 한달음에 달려온 100여명의 북녘녀성대표들과 《통일련대》, 《반미녀성회》, 《민화협녀성위원회》, 《자주녀성회》, 《통일을 일구는 녀성들》, 《평화를 만드는 녀성회》, 《전국녀성로조》, 《세계평화녀성련합》 등을 비롯한 130여개 단체들에서 선발된 370여명의 남녘의 녀성대표들이 참가하였다.

또한 통일조국의 그날을 앞당겨오기 위하여 멀고먼 이국땅에서 금강산으로 달려온 총련과 재중, 재오스트랄리아를 비롯한  22명의 해외측 녀성대표들도 참가하였다.

북과 남, 해외의 녀성대표들은 토론들을 통하여 통일문제해결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한쪽 수레바퀴를 떠밀고나가는 힘있는 통일애국력량으로 떳떳이 등장한 자기들의 긍지높은 모습을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였다.

또한 그들은 조국통일의 새로운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6. 15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통일운동에 적극 떨쳐나설데 대한 문제, 이 땅에서 새 전쟁을 막고 평화와 안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일데 대한 문제,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녀성들사이의 련대와 단합을 적극 도모해나가는 문제, 남녀가 평등한 통일사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고 이를 공동결의문으로 채택하였다.

비록 녀성의 몸이지만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위한 길에 자기들의 적은 힘이나마 다 바치고저 크고작은 일을 모두 뒤로 미루고 금강산으로 달려온 그들이 6. 15북남공동선언을 맨 앞장에서 실현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나가겠다는것을 선포하자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마다에서는 통일의 꽃물결이 파도쳐 설레이는듯 하였다.

실로 북남녀성통일대회는 반세기가 넘는 민족분렬사상 처음으로 북과 남, 해외의 광범한 녀성들이 참가한 뜻깊은 대회합이였다.

2006년 11월 29일 민족분렬이후 처음으로 조국의 명산 금강산에서 진행된 북남언론인토론회도 그 대표적실례의 하나이다.

오전 10시 《반갑습니다》의 노래를 부르며 토론회장에 들어선 북과 남의 언론인들은 《6. 15공동선언실천과 남북언론인들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6. 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부위원장은 축하발언에서 내외의 기대와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금강산에서 6. 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토론회를 진행하는것은 그 력사적의미가 크다고 하면서 민족분렬이후 처음으로 북남언론인토론회를 개최하게 된것을 열렬히 축하하였으며 남측언론본부 상임대표는 《남과 북은 떼여놓을수 없는 하나의 생명체다.》라고 하면서 《남북 상호화해를 위해 지속적인 공동사업, 협력사업을 계속 리행할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어 북남언론인들은 6. 15시대의 흐름에 맞게 언론인들의 역할을 높이기 위하여 나서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진지하게 토의하고 공동성명을 채택하였다.

공동성명에서 북남언론인들은 6. 15공동선언을 지지하고 실천하는데 언론인들이 적극 앞장서며 공동선언을 후퇴시키고 동족사이에 대결과 긴장을 불러올수 있는 불순한 보도를 배격하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라의 평화와 통일에 이바지하는 방향에서 공정하게 보도한다는 등의 결의들을 내외에 엄숙히 선포하였다.

토론회를 마친 뒤 남측의 어느 한 회장은 《이번 행사가 갖는 큰 의미는 남북언론인, 기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만나게 됐다는것》이라고 자기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이처럼 금강산은 해마다 북과 남의 로동자, 농민, 지식인, 체육인, 예술인, 언론인, 종교인, 경제인 등을 비롯한 수많은 각계각층이 서로 만나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토의하는 래왕과 접촉의 장소로 되였다.

이 과정에 남녘겨레의 마음속에는 금강산을 단순히 관광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자랑으로, 재부로 더욱 소중히 간직하고 끝까지 지켜내려는 굳은 의지가 싹트게 되였다.

남조선잡지 《민족21》(2007. 1)은 지난 2006년 10월 중순 서울을 방문한 크리스토퍼 힐 미국무부 차관보가 《개성공단사업은 북 개혁측면에서 리해하지만 금강산관광은 북 정부 관계자들에게 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것 같다》고 하면서 금강산관광사업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사실에 반박하면서 이 사업을 변함없이 진행해나갈 남녘겨레의 굳은 의지를 이렇게 표명하였다.

《6. 15남측위는 10월 11일 열린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을 지켜내는데 힘을 모으기로 했다.…》

북과 남을 서로 다녀가고 다녀오는 새로운 화폭은 다음으로 남녘의 수많은 동포들이 자유롭게 평양을 방문하고 북녘의 각계 인사들이 남녘땅을 밟아보고있는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지난 시기 남조선인민들은 북을 방문하였거나 북의 동포들과 마주앉아 통일에 대한 의견을 서로 교환하기만 하여도 《보안법》위반으로 가혹한 처형을 당해야만 했다.

이것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이룩하는데서 실로 막대한 후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실태를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마련하시고 6. 15자주통일시대를 펼쳐주시여 남녘의 각계각층이 자유롭게 평양을 방문할수 있도록 하여주시였다.

그리하여 남조선의 언론사대표단과 《대통령》의 특사들, 일본에 있는 남조선녀가수 김련자일행 등을 비롯한 수많은 남녘의 각계 인사들이 평양을 방문하게 되였고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뵈옵는 최상의 영광을 지닐수 있었으며 온 민족이 대단합하여 나라의 통일위업을 앞당겨 실현해나갈데 대한 그이의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게 되였다.

평양방문을 통하여 남녘겨레들은 민족의 어버이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지니신 한없이 넓은 도량과 아량, 뜨거운 동포애와 숭고한 민족애에 대하여 다시한번 가슴뜨겁게 느낄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야말로 공화국의 동포들만이 아닌 남녘겨레모두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안아주시고 빛내여주시는 온 민족의 태양이시고 민족대단결의 중심이시며 조국통일의 위대한 구성이시라고  토로하면서 감격과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남녘동포들의 열화와 같은 흠모심은 그들로 하여금 너도나도 평양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각계각층의 수많은 남녘겨레들은 지난날과는 달리 소규모적인 범위에서가 아니라 대규모적인 범위에서 대표단과 방문단을 구성하여 평양방문의 길에 오르고있다.

실례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사이에 평양을 방문한 남조선의 방문단과 대표단은 제주도민방문단, 남측태권도시범단, 《KBS》교향악단과 《MBC》공연단, 《이웃사랑회》방문단, 《전국교직원로동조합》대표단, 《우리 민족 서로돕기운동》방문단, 청년학생대표단, 《남북어린이 어깨동무》방문단, 《우리 겨레 하나되기운동본부》대표단, 《동아시아미래재단》대표단 등을 비롯하여 수없이 많다.

남조선신문 《한겨레》(2004. 6. 14)는 북과 남사이에 자유로운 래왕과 접촉이 활발히 진행되고있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면서 6. 15북남공동선언발표이후 2004년 5월말까지의 기간에 북에서 남쪽을 방문한 인원수는 공동선언발표 이전까지의 10년간에 비해 근 5배, 같은 기간에 남쪽에서 북쪽을 다녀간 인원수는 금강산관광객(65만여명)을 빼고 4.5배 늘어난것으로 된다고 전하였다.

그런가 하면 남조선잡지 《민족21》(2007. 2)은 《미싸일발사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였지만 2006년에 남북을 왕래한 인원이 10만 1 708명이다. 그것도 금강산관광객을 제외한 수다. 2005년의 8만 8 741명에 비해 15.1%가 증가한 수자이다.》라고 밝혔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평양상봉이후 불과 몇년사이에 래왕과 접촉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졌는가를 충분히 알수 있게 한다.

각계각층의 남녘의 동포들은 여러차례에 걸친 평양방문을 통하여 민족적뉴대를 더욱 공고히 하고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개화발전시켜 민족의 대단결을 하루빨리 실현하기 위한 건설적인 문제들을 서로 토의하고 합의하였으며 북녘의 여러곳을 다녀보고 참관하는 과정에 6. 15공동선언의 리행을 위하여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 높이 힘차게 투쟁해나가고있는 북녘의 현실에 대하여 더  깊이 깨닫게 되였다.

이처럼 북과 남사이에 자유로운 래왕과 접촉이 전민족적범위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그것이 사회전반분야에로 급격히 확대됨으로써 온 겨레의 마음속에는 서로 리해하고 신뢰하는 감정이 서서히 자리잡게 되였으며 이것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이룩하는데서 더없이 귀중한 토대를 마련해놓았다.

한편 북과 남사이에 폭넓은 접촉과 자유로운 래왕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속에 북녘의 수많은 각계각층 대표들이 남녘땅을 밟아보았다.

그것은 북과 남사이에 진행된 다양한 체육문화축전들이 실증해준다.

2002년 9월말 북녘의 선수단과 응원단은 남조선의 부산에서 열리는 제14차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였다.

9월 29일 저녁 부산의 상공 높이에는 백두산에서 채화된 아시아경기대회의 성화가 온 남녘땅을 환하게 밝히면서 장엄하게 타래쳐올랐다.

북과 남의 선수들이 손에 손을 잡고 공동으로 경기장에 들어서자 수많은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끝없는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그 순간은 정녕 우리 겨레는 민족도, 피줄도, 언어도, 력사도, 문화도, 땅도 하나라는것을 만방에 과시하는 력사적순간이였다.

이 광경을 두고 남녘의 겨레들은 《부산은 이미 통일이 됐다. 아니 온 남녘땅이 통일되였다.》, 《백두-한나에 통일무지개가 비꼈다.》고 하면서 격정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가 하면 부산아시아경기대회의  전기간 북과 남의 응원단은 언제나 하나가 되여 응원하였다.

북측응원단이 《우리는-》 하면 남녘의 응원단은 《하나다!》라고 응답했다. 이 통일의 함성은 부산땅만 아니라 온 남녘땅을 진감하였다.

남녘의 겨레들은 북녘 응원단의 눈부신 활동을  직접 목격하면서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이 보낸 일당백의 응원단》, 《붉은 미녀》, 《최고인기군단》, 《아시아게임의 최고스타》라고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남조선의 언론들은 북녘동포들의 부산아시아경기대회참가로 남조선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던 부산시민의 90%이상이 북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가지게 되였다고 크게 보도하였다.

그후 2003년 8월 대구에서 열린 제22차 세계대학생체육경기대회와 2003년 10월에 열린 제주도민족통일평화체육문화축전때에도 북녘의 대규모선수단과 응원단, 대표단은 또다시 온 남녘땅에 민족화해와 단합의 열풍이 차넘치게 하였다.

7천만 우리 겨레는 이를 통하여 민족의 대단결만이 이 땅에서 외세를 하루빨리 몰아내고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는 길이라는것을 심장깊이 간직하게 되였다.

이처럼 북과 남의 수많은 각계각층이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그것도 수백명씩 한꺼번에 래왕하고 접촉하며 민족적뉴대를 공고히 할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온 민족의 대단합을 위해 마음쓰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탁월한 령도가 있었기때문이다.

우리 겨레는 앞으로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자유로운 래왕의 길을 따라 서로 찾아오고 찾아가며 더 많은 접촉을 진행함으로써 민족대단결위업을 반드시 실현하고야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