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 (1)중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 시기부터 형제적중국인민과 굳게 손을 잡으시고 반일공동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혁명을 발전시키시였다.

그이께서는 1930년대 후반기 격변하는 정세속에서도 조선인민혁명군이 중국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항일련합군의 이름으로 반일공동투쟁을 조직전개하도록 하시였다.

이 시기 국제당은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것은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중항일무장부대를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로 갈라 재편성하고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인민혁명군이 독자적으로 활동할데 대한 지시를 내려보내였다.

만일 국제당의 지시대로 만주의 모든 유격부대들에서 조선사람들을 다 뽑아다가 순수한 조선인부대를 따로 편성한다면 그 력량만으로도 능히 조선을 강점하고있는 일제의 2개 사단력량과 대적하여 혈투를 벌릴수 있었다. 여기에 조선청년들을 비롯한 온 민족이 합세하면 전국은 달라지게 될것이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도 훨씬 앞당겨질수 있었다.

그러나 동북항일혁명은 커다란 손실을 입을수 있었다. 당시 항일련합군에서는 조선사람들이 핵심적역할을 하고있었다. 항일련군 제2군의 경우 90%의 군사인원이 조선인이였으며 다른 부대들에서도 비록 중국인들이 과반수를 차지하고있기는 하였으나 지휘성원들의 다수는 조선사람들이였다. 각 부대의 핵심력량 역시 조선인대원들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따로 갈라 부대를 꾸리게 되면 동북항일혁명이 손실을 입게 되는것은 물론 당장은 항일련합군부대들의 유지자체가 어려울수 있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중국인 항일무장부대들과의 공동투쟁을 포기하고 조선혁명에만 주력할것인가, 아니면 계속 한전호에 남아 공동의 위업을 위해 투쟁할것인가.

조선혁명가들이 조선혁명을 책임지고 수행하는것은 누구도 막을수 없는 신성한 권리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국제당도 지지의 립장을 표시하였고 중국혁명가들도 당연한것으로 생각하고있었다. 때문에 조선혁명가들이 조선혁명에 주력한다고 하여 그 누구도 시비할수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분권이 아니라 공동투쟁의 길을 택하시였다. 여러해동안 한전호에서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련합항일을 해온 혁명가들로서의 형제적의리, 전우의 의리를 저버릴수 없으시였던것이다. 그이께서 항일혁명투쟁을 령도하시면서 요구하신것은 자주권이였지 결코 분권은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국제당의 지시를 가지고 온 중국혁명가 위증민을 만나신 자리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나라 혁명에 대하여 말하는것은 결코 어떤 협애한 민족적리익만을 추구해서가 절대로 아니며 혁명의 민족적리익은 언제나 국제적리익과 결합되여야 하고 또 민족적리익과 배치되는 그 어떤 국제적리익도 있을수 없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항일무장부대를 민족별로 가르는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존중해서 제기하는것이라고 볼수 있는데 우리는 결코 문제를 형식적으로 고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싸우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활동하고있습니다. 그런 조건하에서는 형식적인 분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선국내와 동북의 조선인부락에 가서는 그대로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하고 중국인부락에 가서는 항일련군이라고 부름으로써 련군체계도 유지하고 국제당의 지시도 집행할수 있는 방도까지 밝혀주시였다. 이것은 한없이 넓은 도량과 숭고한 국제주의적의리를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이 내리실수 있는 결단이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적인 남호두회의에서 항일련합군의 이름으로 중국공산주의자들과 항일무장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신데 이어 항일련합군내 중국인부대들의 전투력을 높이도록 적극 도와주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도 취해주시였다.

이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은 조선국내와 중국동북의 조선사람이 많이 살고있는 고장에 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중국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고장에 가서는 항일련군의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였다.

남호두회의직후 수많은 우수한 정치군사간부들과 대원들이 고상한 국제주의적의무를 안고 항일련합군내 중국인 각 부대들로 떠나갔다. 사실 남호두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조선혁명의 전환기가 마련된 그때,  바야흐로 백두산일대에서의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이 벌어지게 될 력사적시각이 다가오던 때에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된것은 유능한 군사정치간부들과 준비된 대원들이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인민들과의 형제적의리를 그토록 중히 여기시였기에 백두산에로의 직선로정이 아니라 북만에로 북상행군을 하시여 그 일대에서 활동하고있던 중국인부대들에 수백명에 달하는 우수한 지휘관들과 대원들을 파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많은 지휘관들과 대원들을 항일련군부대안의 중국인부대들에 파견하시여 그들의 투쟁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시였다.

이것은 국제적인 반제공동전선실현의 빛나는 모범으로 되였을뿐아니라 중국혁명을 피로써 도와준 뚜렷한 실증으로 되였다.

중일전쟁의 발발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지휘하신 적배후교란작전도 중국혁명을 도와준 수많은 작전들중의 하나였다. 그때 중국혁명가들과 중국인민들은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침략의 불길을 점점 대륙깊이에로 확대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있었다. 군사정치적자질과 전투력의 견지에서 보나 이룩하고있는 전과로 보나 동북일대에 존재하는 각양각색의 항일무장부대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부대로 공인된 조선인민혁명군만이 침략전쟁에 미쳐날뛰는 일제의 기를 꺾어놓을수 있다는것이 그들모두의 공통된 심정이고 기대였다. 이러한 심정은 그가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다를바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숭고한 국제주의적의리로부터 출발하시여 두만강, 압록강연안일대를 비롯한 광활한 지역에서 적배후교란작전을 강화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국내에서의 적극적인 군사정치활동으로 일제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유격전의 방법으로 일제의 중국관내에로의 기동을 가로막고 일제가 감행하려는 전략작전을 파탄시키는것이 적배후교란작전의 중요내용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의 군경우두머리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새로운 활동방침을 세우고 부대를 개편하고 활동지역을 분담하였으며  8월 29일의 국치일을 계기로 만주의 주요도시들을 공격하고 국내에로 일제히 쳐들어갈것을 협의하였다고 하면서 그 대응책을 세우느라 복닥소동을 피웠다. 그만큼 일제에게 있어서 조선인민혁명군은 무서운 존재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지휘하신 적배후교란작전으로 일제는 도처에서 얻어맞았다. 장백, 림강, 통화, 몽강, 휘남 등 각지에서 장백현 신방자전투, 쌍산자부근전투, 휘남현성전투, 장백현 19도구 마순구부근전투, 장백현 13도구 서강성습격전투, 룡천리 류가동부근전투를 비롯하여 련이어 벌어진 크고작은 전투들은 일제를 당황망조케 하였으며 중국인민의 항일무장투쟁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결국 《일격론》, 《단기종전론》을 떠들며 중국을 단숨에 먹어보려던 일제의 꿈은 여지없이 파탄되고 일제는 장기전에 말려들어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련합작전도 적극 벌리시였다. 이미 1930년대초에 오의성, 사충항, 채세영 등 여러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작전을 승리에로 이끄시여 반일련합전선의 위력을 시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30년대 후반기에도 반일부대들과의 련합하에 대규모적인 전투들을 승리적으로 조직지휘하시였다.

그 대표적전투가 주체25(1936)년 8월에 있은 무송현성전투였다. 무송현성은 백두산서북부일대에서 일제의 가장 큰 군사적요충지였다. 그런것만큼 무송의 적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것은 장차 백두산지구를 장악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데서도 그렇고 중국본토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저지시키는데서도 의의가 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듯 중요한 전투를 만순부대를 비롯한 여러 반일부대와의 련합작전으로 진행하기로 결심하시였다. 그것은 적을 제압하기 위한 공동의 군사작전을 통하여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을 공고한것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였다.  

주체25(1936)년 8월 17일 새벽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와 중국인반일부대들의 병력 1,800여명으로 이루어진 공격력량이 무송현성으로 돌입하였다. 전투명령을 받아안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관문인 동산포대를 단숨에 점령하고 소남문방향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정황이 조성되였다. 성안으로 퇴각한 적들의 저항으로 전투가 더욱 치렬해지자 현성의 동문과 북문으로 공격해들어가던 반일부대들이 겁을 먹고 제멋대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적의 화력은 소남문쪽으로 집중되게 되였다. 치렬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날이 밝아왔다. 정황은 아군에게 불리하게 조성되였다.

조성된 사태를 예리하게 분석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견고한 성벽에 의지하여 발악적으로 저항하는 적들을 성밖으로 끌어내여 소멸할것을 결심하시고 부대들에 즉시 지형상 유리한 동산과 소마록구 릉선으로 철수할것을 명령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사태는 수습되게 되였다.

성안에서 발악하던 적들은 죽음의 함정으로 유인되여가는줄도 모르고 아군의 뒤를 미친듯이 따라왔다. 적들이 매복진에 완전히 들어섰을 때 복수의 불벼락이 쏟아졌다. 적들은 파장식돌격을 여러번 시도했으나 매번 주검만 남기고 물러서군 하였다. 그러자 적들은 총질을 멈추고 산기슭에 붙어 증원부대가 오기를 기다리였다.

드디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돌격명령을 내리시였다.

류창한 나팔소리와 함께 매복진에서 뛰쳐일어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적들을 닥치는대로 쓸어눕혔다. 반일부대 병사들도 사기충천하여 용감히 싸웠다. 이날 전투에서 적들은 전멸을 면치 못하였다.

후날 무송현성전투에 대하여 감회깊이 회고하시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나는 무송현성전투결과를 두고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털어놓고말해서 우리는 그 싸움의 승리가 가지는 군사실무적의의보다도 정치적의의를 더 중시하였다.

반일부대와의 공동전선을 강화한것, 백두산서북지구를 우리 손에 더 확고히 장악한것, 그 승리의 정치적의의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여 말할수 있을것이다.》

항일의 기치아래 조중 두 나라 인민들사이의 공동전선을 더욱 강화해나가시던 나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국제당의 지시를 조선혁명의 구체적실정과 결부하여 주체적립장에서 대하시면서 열하원정에 참가한 중국인 항일련군부대들도 성의껏 도와주시였다.

국제당에 들어앉아있던 일부 사람들은 주체25(1936)년부터 주체26(1937)년사이 여러차례에 걸쳐 항일련합군에 열하원정을 진행할것을 지시하였다. 열하원정은 동북지방의 항일무장부대들이 료서와 열하방면으로 나가 동정항일, 실지회복의 구호밑에 열하쪽으로 진격하는 로농홍군부대들과 련합하여 중국관내로 쳐들어가는 일제침략군을 제압한다는것이였다.

이것은 중국본토전체가 전쟁마당으로 된 당시의 군사정치정세와 유격전의 요구에도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것이였다. 이 무모한 좌경모험주의적로선에 따라 원정에 참가하였던 적지 않은 항일련군부대들이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열하원정이 제기될 때마다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발전시킬데 대한 방침을 확고히 견지하시면서 료서와 열하방면으로 진출한 중국인 항일무장부대들이 차지하고있던 남만의 일부 지역들에 생긴 군사적공백을 메우시며 원정부대들의 활동을 성실하게 뒤받침해주시였다. 한편 그이께서는 열하원정에 참가하였다가 와해될 처지에 빠진 동북항일련군부대들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시였다.

주체27(1938)년 봄 자기의 활동무대인 남만일대를 떠나 무모한 열하원정에 참가하였던 동북항일련군 1군은 갖은 고초를 겪던중 그해 7월 중순에 이르러 부대자체가 와해될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기와 군수물자를 마련한 다음 일부 부대들로 하여금 몽강현을 에돌아 금천, 류하현을 거쳐 통화계선으로 부분적인 군사적이동을 시작하도록 하시였다. 이 군사적이동은 1군부대들을 포위하고있는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고 1군의 전우들에게 포위를 돌파할 가능성을 주기 위한것이였다. 그이께 있어서 이 군사적이동의 목적은 원정계획을 어떻게 집행하는가 하는 문제에 앞서 1군의 전우들을 구출함으로써 동북항일력량을 보존하고 여러해동안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맺어진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사이의 전투적의리를 두터이 하는데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의도에 따라 곧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기 위한 군사적이동이 시작되였다. 일부 부대들이 적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면서 통화계선으로 진격하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주력부대는 8도강, 외차구, 내차구일대의 적을 소멸하고 련이어 무송현 서강전투를 벌려 적들의 력량을 각방으로 분산시켰다. 이 령활한 전술적이동은 적들로 하여금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을 종잡을수 없어 여기저기 병력을 끌고다니며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1군을 곤경에서 구출하기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술적이동과 일련의 작전적공세가 성공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후 중국의 혁명가들은 림강, 무송, 몽강일대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울린 총소리가 1군의 어려운 처지를 개선하는데서 결정적인 도움으로 되였다고 하면서 숭고한 국제주의적의리의 체현자이신 위대한 수령님께 거듭 감사를 표시하였다.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준엄했던 항일무장투쟁시기 공동의 목적을 위한 투쟁속에서 맺어진 형제적중국인민과의 전투적우애와 친선의 정을 변함없이 꽃피워오시였다.

그이께서 조중인민의 반일공동전선과 공동행동의 실현을 위한 길에 쌓아올리신 공적에 대하여 전 항일련군 4군 지휘원이였던 조서화는 자기의 회상실기 《항일년대에 새겨진 위인의 전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일찌기 인생을 론하며 국운을 우려하던 소시적부터 관조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가자로서 혁명에 몸을 담가온 본인은 곡절많은 동북항일혁명의 전로정이 김일성동지의 헌신적인 투쟁과 사심없는 지원속에 개척되고 전진하여 승리해온 로정이기도 하였다는것을 확언하게 된다.

실로 지니신 천부의 지략과 인덕으로 그분께서는 동북혁명에 부단히 약동의 활력을 부여하시며 도처에 인간미덕의 화원을 펼치시였으니 산전수전 다 겪어본 왕덕림도 김일성동지를 <동북항일의 령수>, <동북항일군민의 성인군자>로 추앙한것은 응당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 어찌 조서화 한사람의 의사이랴.

이것은 숭고한 국제주의적의리와 사심없는 지원으로 조중친선의 고귀한 전통을 마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는 중국인민들의 다함없는 감사와 흠모의 표현이였다.

정녕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은 숭고한 국제주의적의리의 위대한 귀감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