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 (1)중에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은 북부조선과 그 주변의 국경일대, 중국 동북지방의 북만과 동만 그리고 남만과 서간도일대를 비롯하여 광활한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정치군사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 활동하든 총적인 지향점은 늘 조국진출과 조국해방이라는 목표에 두고있었다. 무산지구진공작전은 이러한 목표를  지향해가는 과정에 진행된 대표적인 작전들중의 하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주체28(1939)년 4월초 장백현 북대정자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간부회의에서 또다시 대부대로 국내진공작전을 벌릴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 회의에서 하신  력사적인 연설 《적극적인 반격전으로 일제침략자들을 련속 타격하고 조국으로 진군하자》에서 고난의 행군과정에 이룩된 성과와 경험, 승리의 요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시고 이 빛나는 성과에 기초하여 적들을 련속 타격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적들은 동기<토벌>작전에서 만회할수 없는 참패를 당하고 사방에 분산된채 제 소굴에 처박혀있습니다. 우리는 적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적극적인 반격전으로 넘어가 일제침략자들에게 련속 타격을 가하고 조국으로 또다시 진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공세로 국경일대와 국내에 진격하여 적들의 뒤통수를 호되게 타격하게 되면 그것은 광범한 인민대중을 반일투쟁에로 더욱 힘있게 고무하고 조선혁명을 다시금 앙양에로 이끌어올리는데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게 될것입니다.》

대부대로 또다시 국내진공작전을 벌릴데 대한 이 방침은 조선혁명을 다시금 앙양에로 이끌어올리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방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국내진출의 후보지에 대하여서도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당면하여 압록강연안과 국경일대에서의 적극적인 춘기공세로 적의 요충지들을 타격하고 국내진공작전준비를 갖춘 후 무산지구로 진출할데 대한 전투적과업을 제시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무산지구진공작전을 결속한 다음 련이어 백두산동북부에서 대부대에 의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할데 대한 문제, 조선인민혁명군대오를 정치사상적으로 더욱 강화할데 대한 문제 등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 무산지구를 국내진출의 후보지로 선정하신것은 두가지 리유에서였다.

무엇보다도 국내진출의 효과가 매우 크다는 점이였다.

물론 보천보전투가 있은 후 일제가 이 지대에 가장 악질적인 수비무력을 몇배로 증강하는 등 삼엄한 경계조치를 취하고있었으므로 대부대가 이곳을 뚫고들어간다는것은 사실상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였다. 하지만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이 지구에 진출하여 적들을 요정내게 되면 북부조선의 어느 지구로 진출하는것보다 효과를 몇배로 크게 낼수 있었다.

다른 하나의 리유는 무산지구에 철광로동자들과 수전공사로동자들, 벌목로동자들을 비롯하여 로동계급의 대부대가 집결되여있었으므로 이 일대에서 총소리를 내게 되면 로동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수 있고 그 소식이 그들을 통하여 전국각지에 급속히 퍼질수 있다는 점이였다. 몇방의 총소리로 무산의 로동계급과 함경북도의 로동자, 농민들을 각성시키며 온 민족을 항일혁명에로 더 힘있게 불러일으키자는것이 그이의 의도였다.

이처럼 적들을 수세에 몰아넣고 조선혁명을 계속 앙양시켜나갈수 있는 적극적인 방침을 제시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8(1939)년 4월 일제의 중요《토벌》거점인 장백현 구가점에 대한 습격전투로부터 춘기반격전의 서막을 여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령활무쌍한 공격앞에서 15도구, 반절구 등 압록강을 따라 배치된 일제의 국경요충지들이 련이어 녹아났다. 이것은 일제에게 조선인민혁명군 부대가 다시금 백두산서남부와 압록강연안의 북부국경일대에서 큰일을 벌리려고 하는듯 한 인상을 조성하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작전적구상에 따라 진행된 전투들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관동군사령부와 그 휘하에 있는 위만군 제1군관구 《토벌사령부》는 압록강연안의 방어를 강화하기에 분주탕을 피웠다.

통쾌한 춘기반격전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승리적으로 진행할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놓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탄약과 식량, 피복 등 군수물자도 넉넉히 마련함으로써 조국진군을 위한 만단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시였다.

한편 그이께서는 그해 5월초 백두산지구비밀근거지의 간백산밀영에 나오시여 국내진공작전의 시기와 로정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시였으며 5월 상순에는 이곳 사령부귀틀집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지휘성원회의를 소집하시고 무산지구진공작전과 작전후 주력부대의 활동무대를 백두산동북부에로 확대할데 대하여 밝히시였다.

그이께서는 이어 곰의골밀영에서 주력부대의 제7련대, 제8련대, 독립대대, 경위중대의 700여명으로 구성된 조국진출대오를 편성하시고 5월 15일 조국을 향하여 출발하시였다. 조국진출대오는 5월 16일 압록강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24도구부근에 이르러 목재소와 위만군수송대에 대한 습격전투를 진행하여 적의 이목을 그쪽으로 쏠리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적들의 국경경비진에 혼란을 조성한 다음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주체28(1939)년 5월 18일 5호물동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국땅으로 나오시였다.

절기가 좀 늦게 찾아오는 북부조선의 5월은 진달래꽃이 한창이였다. 꿈결에도 그려보던 조국땅,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빙설천지와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일제와의 혈전을 벌리던 나날 언제 한번 잊은적이 없는 고국산천이였다. 사랑하는 조국땅을 밟은 대원들은 끝없는 격정에 휩싸였다. 모두가 그러하였지만 남보다 꽃을 사랑하는 녀대원들의 감정은 류다른것이였다. 진달래무데기앞에 앉아 꽃구경을 하면서 웃는 녀대원이 있는가 하면 아예 두팔을 크게 벌려 진달래를 무데기채로 안고 눈물을 흘리는 녀대원도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본 진달래는 단순한 자연의 꽃이 아니였다. 그것은 외적에게 강탈당한 조국의 한 부분, 하나의 살점과도 같은것이였다. 그날 유격대원들은 이 꽃을 그저 진달래라고 하지 않고 조국의 진달래라고 불렀다.

조국의 진달래, 이 말속에는 조국과 인민을 끝없이 사랑하며 해방의 봄을 앞당기고 해방된 조국강산에 인민의 행복한 락원을 일떠세우려는 선군혁명투사들의 열렬한 념원이 담겨져있었다.

조국진군대오는 조국땅에서의 첫날밤을 청봉에서 보내였다. 이날 숙영준비를 끝낸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나무껍질을 벗기고 거기에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조국으로 나온 한없는 격정과 일제격멸의 의지를 담은 구호들을 써놓았다. 선군혁명의 첫 세대들이 남긴 이 구호들은 후날 우리 인민들이 후손만대를 두고 영원히 보존하고 교양자료로 하는 만년재보로 되였다.

청봉에서 하루밤을 숙영한 대오는 다음날 건창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이 시각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에 들어왔다는것을 알고 숱한 수비대와 경찰대를 투입하여 밀림속을 샅샅이 뒤지고있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있을수 있는 적의 준동에 대처하여 부대의 행동방향을 위장하기 위한 전술적조치를 취하시였다. 즉 두개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한 소부대는 포태리방향에 나가 적을 타격함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이 여러곳에서 활동하고있다는 인상을 주어 적들을 혼란시키며 다른 소부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 장백쪽으로 빠진것처럼 발자국을 내고 자취를 감추도록 하시였다.

다음날 새벽 건창을 떠난 대오는 행군을 계속하여 베개봉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정을 알아보기 위해 정찰조들을 파견하시였다. 얼마후 정찰조들은 그이께 베개봉 동쪽의 원시림속에서 기막히게 멋있는 신설도로를 발견했다는 자료를 보고드리였다.

갑무경비도로라고 하는 그 도로는 갑산과 무산의 무인지경을 련결하는 비상경비도로로서 그 사명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에 진출할 경우 기동수단을 동원하여 필요한 지점까지 《토벌》력량을 급송급파하는데 있었다. 도로공사가 갓 끝났기때문에 청소를 말끔히 해놓고 준공검사를 기다리는중이여서 통행을 일체 금지시키고있었다. 일제가 국경일대에 총연장길이가 120km나 되는 갑무경비도로까지 건설해놓고 삼엄한 경계망을 늘이고있는것으로 보아 자칫하다가는 적의 완전포위의 그물에 걸려들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단숨에 무산지구로 진출할수 있겠는가.

이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묘안을 내놓으시였다. 그것은 적들이 방금 닦아놓고 준공검사를 기다린다는 갑무경비도로를  대낮에 통과하여 무산지구로 최대급행을 하는것이였다. 말하자면 일행천리전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리둥절해있는 지휘관들에게 우리가 갑무경비도로를 따라 능히 대낮에 행군을 할수 있다는것은 이 자리에 모인 동무들의 태도가 증명해주고있다, 동무들은 내가 대낮에 대로행군을 하자고 하자 다들 아연해하였다, 적들도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부대가 자기들이 특설한 경비도로로 백주에 대오를 지어 행군해가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것이다, 바로 이 점에 백일대로행군의 확실한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적들이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것을 대담하게 강행하는 여기에 이 행군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전술적담보가 있다고 하시며 신심을 북돋아주시였다.

갑무경비도로에서의 일행천리전술, 이 대담무쌍한 전술은 무비의 담력과 비상한 통찰력, 탁월한 군사적예지를 지니신 희세의 령장만이 내놓으실수 있는 전술이였다. 조국진군대오는 곧추 뻗은 경비도로를 따라 근 100리길을 대낮에 보무당당히 행군하여 그날로 두만강기슭의 무포에 이르렀다. 일제는 후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저들이 닦아놓은 경비도로를 따라 대낮에 행군을 했다는것을 알고서는 《미증유의 괴사》라고 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포에서 열린 지휘관회의에서 행군과정을 총화하시고 대홍단지구로 진격할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면서 먼저 신사동과 신개척일대에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도록 하시였다. 그에 따라 7련대는 신개척방향으로 가고 그이께서는 경위중대와 8련대를 거느리시고 신사동으로 진출하시였다.

신사동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을에서 제일 큰 목재소로동자합숙을 찾으시여 이곳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도 료해하시고 밤깊도록 그들과 따뜻한 담화도 진행하시였으며 신사동인민들앞에서 《조국의 광복을 앞당기기 위하여 반일투쟁에 적극 떨쳐나서자》라는 격동적인 연설도 하시였다. 그리고 《조국광복회창립선언》《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등사한 선전물들을 로동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시고 마을인민들과 한자리에 어울리는 유쾌한 오락회도 조직하시는 등 조직정치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리시였다.

신사동인민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시며 이곳을 떠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홍단벌로 향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신개척으로 진출한 오중흡7련대에 얻어맞은 적들이 반드시 추격해오리라는것을 예견하시고 지형상 유리한 대홍단벌에서 적을 소멸할 결심을 하시였던것이다.

주체28(1939)년 5월 23일 이른아침 대오를 거느리시고 대홍단벌에 이르신 그이께서는 둔덕진 곳에 매복진을 치시고 신개척으로 간 오중흡7련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였다.

바야흐로 격전의 시각이 다가오고있었다. 새벽노을이 산마루를 붉게 물들일무렵 마침내 신개척에 나갔던 7련대가 매복진을 치고있는 대홍단벌에 나타났다. 신개척방향으로 나갔던 7련대는 그곳의 적들을 모조리 요정내고 일본십장들까지 여러명 잡아가지고 돌아오고있었다. 승리한 기쁨으로 하여 좀 들뜨다보니 적들이 부대의 뒤를 은밀히 따르는것도 모르고있었다. 그것은 신개척이 녹아났다는 급보를 받고 출동한 국경수비대와 창평경찰대였다. 적들이 7련대의 뒤를 아주 바싹 물었기때문에 잘못하다가는 아군의 총알에 7련대가 피해를 입을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적아의 간격이 버그러질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수도 없었다. 만일 시간을 끌게 되면 그사이 적이 선손을 써서 7련대에 먼저 달려들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후위에 선 후방조성원들과 유격대를 도와 짐을 지고 오는 목재소로동자들도 큰 피해를 입을수 있었다. 이것은 뜻밖의 정황이였다. 림기응변의 전술과 단호한 결심이 필요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렬에 있는 7련대 대원들을 그냥 매복진앞으로 지나가도록 하신 다음 대렬후위에 있는 후방조성원들과 목재소로동자들에게 엎디라는 신호를 하시고나서 사격명령을 내리시였다. 순간 수백정의 총들이 요란한 총성을 내며 일시에 불을 뿜었다. 대홍단의 번번한 새초밭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의의 타격을 받은 적들은 무리로 나가넘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7련대의 후위를 담당했던 대원들은 그 자리에 엎디여 바싹 접근한 적들을 향해 명중탄을 퍼부으면서 짐을 지고 온 로동자들에게 둔덕뒤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머리우로 총알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비발치듯 하는 속에서도 로동자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지 않고 완강하게 아군이 있는쪽을 향하여 기여왔다. 7련대의 후위를 담당했던 대원들은 적들과 결사전을 벌리여 로동자들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마침내 짐을 지고 온 로동자들은 모두 무사히 안전지대로 빠지였다.

7련대와 짐을 지고 온 로동자들까지 교차사격권내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전부대는 더욱 맹렬히 적들을 답새겼다. 아군의 화력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적들은 머리도 쳐들지 못하고있다가 삼장과 무산쪽에서 력량을 보강받고서야 겨우 대오를 수습해가지고 다시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가지 못하였다. 자기들이 울리는 총소리를 온 나라가 다 듣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온몸에서 힘과 격정이 용솟음쳐오른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들씌우는 불벼락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거세여졌던것이다. 더는 견디여배길수 없게 된 적들은 끝내 사분오렬되여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조국강토를 강탈한 일제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을 안고 복수의 명중탄을 련속 안겨 적들의 대부분을 대홍단의 진펄속에 처박아놓았다.

이날 전투에 내몰린 적들은 거의 전멸되였으며 대홍단전투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커다란 승리로 끝났다.

대홍단전투소식이 전해지자 일제는 대경실색하였다. 일본군부와 경찰계에서 한다하는 두뇌진들을 동원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이 래일은 어디서 무엇을 하리라는것까지 점을 치고있었는데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백두산기슭, 그것도 국경수비무력이 어마어마한 진을 치고있는 무산지구에 나타나 《토벌》에 내몰린 군경의 무리들을 일격에 쓸어버리고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졌으니 어찌 아연실색하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무산지구전투는 보천보전투와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에서 진행한 군사작전들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의의가 큰 전투였다. 무산지구에서 울린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소리는 《혜산사건》의 여파로 일시적으로나마 위축되고있던 국내혁명에 새로운 활력을 부어주었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이 다 망했다고 떠들어대던 일제의 선전이 완전한 허위임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무산지구전투가 있은 뒤로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국내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하는 한 조국광복의 새날은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항일혁명의 흐름속에 앞을 다투어 뛰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