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 (1)중에서

 

주체27(1938)년 가을 조선혁명의 앞길에는 최악의 시련이 닥쳐오고있었다.

이 시기 일제는 후방의 안전을 도모한다고 떠벌이면서 관동군 주력사단들의 대부분과 위만군, 지방무장경찰부대까지 총동원하여 압록강, 두만강연안의 군사전략상 중요지대들에 들이밀어 항일무장부대들에 대한 《토벌》을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토벌》의 기본대상으로 삼고 군사적공세와 함께 집단부락의 건설, 교통통신시설의 신설완비 등으로 혁명군의 생존조건을 봉쇄하는 《치본공작》, 공산주의사상 및 반만항일사상을 말살하는 《사상공작》과 《귀순공작》 등을 골자로 하는 《문화토벌》을 집요하게 벌리는 동시에 도처에서 혁명조직과 애국적인민들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과 학살만행을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1938년 한해동안에만도 무려 4만 4,000여명에 달하는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이 검거투옥되였다. 이러한 적의 반혁명적공세는 무장투쟁을 비롯한 전반적인 항일혁명의 발전을 심히 억제하고있었다.

좌경모험주의가 빚어낸 열하원정의 후과도 컸다. 당시 국제당이 강요한 좌경모험주의적로선에 따라 열하방면으로 원정을 떠났던 남만의 중국인 항일련군부대들이 적의 포위에 들어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됨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은 백두산서남부일대에 증강된 적의 대병력과 거의 단독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맞받아나가는 혁명적전략으로 부닥치는 난관을 뚫고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끊임없는 앙양에로 이끄시였다.

방어나 후퇴, 우회의 방법이 아니라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술로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는것은 그이께서 시종일관 견지해오신 혁명적전략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조선혁명을 계속 앙양에로 이끌어올리기 위한 실천적대책을 세울것을 결심하시고 몽강현 남패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시였다. 회의에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군정간부들도 참가하였다.

주체27(1938)년 11월 25일부터 10여일간에 걸쳐 진행된 회의에서는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고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기 위한 대책이 토의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회의에서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고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자》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설의 첫 부분에서 당시 조성된 정세와 열하원정의 좌경모험주의적인 본질과 엄중한 후과를 분석하시고 조선혁명의 주인으로서의 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시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시급히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로 진출할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 백두산일대에로 진출하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조선혁명을 계속 줄기차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난관과 위험이 앞을 가로막아도 그것을 용감히 뚫고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광활한 지역에서 군사정치활동을 더 활발히 조직진행할데 대하여, 군사활동에서 유격전의 기본요구를 옳게 구현하고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다 리용하여 대중정치사업을 활발히 벌릴데 대한 과업과 그 실현을 위한 방도에 대하여 명철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외에도 그이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력량을 재편성할데 대한 문제, 모든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불요불굴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할데 대한 문제, 혁명적동지애에 기초한 대오의 통일단결을 확고히 보장하며 인민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리익을 적극 옹호할데 대한 문제 등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회의에서는 새로운 전략전술적방침이 제시된데 맞게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을 방면군으로 편성하고 그 지휘관들을 임명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제6사는 제2방면군으로, 제4사, 제5사는 제3방면군으로 편성되였으며 독립련대도 편성되였다. 이러한 부대의 재편성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구성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지난 시기 조중항일련합군으로서의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제1군과 제2군으로 구성되여있었는데 그안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은 제2군의 대호를 가지고 활동해왔다. 그러나 남패자회의를 계기로 조선인민혁명군이 제2군의 대호를 없애고 전체 부대를 2개의 방면군으로 편성하게 됨으로써 이미 제1군을 1개 방면군으로 개편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모두 3개의 방면군으로 활동하게 되였으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대오구성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은 압도적비중을 차지하고 그 기본주력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부대들의 활동지역과 임무를 구체적으로 분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국내와 압록강, 두만강연안의 주요방향에서 활동하게 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인 제2방면군을 친히 지휘하기로 하시였다. 그리고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지휘간부들에게 조선인민혁명군 성원들을 수많이 보충하여 경위련대를 새로 개편해주시였으며 지어 그들에게 전령병들까지 파견하시여 그들의 전투력과 사기를 높여주시고 조중 두 나라 혁명가들과 군대사이의 친선과 우애를 더욱 두터이하시였다.

이렇듯 남패자회의는 조선혁명의 주체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로선적문제를 토의함으로써 일제의 반동공세와 좌경모험주의의 해독적후과로 말미암아 조성된 난국을 주동적으로 타개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인 조선혁명을 계속 앙양에로 이끌어올리는데서 새로운 리정표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패자회의를 성과적으로 결속하시고 각 부대들을 자기의 활동구역으로 떠나보내신 다음 주체27(1938)년 12월초 제2방면군을 친솔하시고 압록강연안 국경지대에로의 행군을 개시하시였다.

력사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것이다. 주체27(1938)년 12월초부터 주체28(1939)년 3월말까지 100여일동안 진행된 고난의 행군은 그 간고성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행군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몽강현 남패자로부터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행군은 행군기간으로 보나 그 간고성으로 보나 종래의 행군들과는 대비도 할수 없는 간고한 행군이였습니다. 행군기간이 100여일이나 되기때문에 이 행군은 <100일행군>이라고도 불리우고있습니다. 기간을 보면 사실 110여일이나 되는 행군이였습니다. 고생이 너무도 막심했기때문에 그 행군을 가리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항일무장투쟁력사를 돌이켜보면 주체21(1932)년 가을에 있은 안도에서 왕청에로의 행군과 주체26(1937)년 초봄의 무송원정을 비롯하여 어려운 행군이 여러차례 있었다.

그러나 남패자에서 북대정자에 이르는 고난의 행군은 종래의 행군들과는 대비도 할수 없는 시련의 혈로였다.

남패자에서 도보로 대엿새면 가닿을수 있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있는 북대정자까지 무려 100여일만에야 도착하였다는 사실은 고난의 행군이 얼마나 간고한 행군이였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고난의 행군이 이처럼 류례없이 어려운 행군으로 된것은 그것이 적들의 끊임없는 추격과 포위속에서 진행된데 있었다. 일제는 열하원정을 통해 동북항일련군 1군은 다 녹아나고 얼마 없으니 이제 남은것은 김일성부대뿐이라고 하면서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혁명군이 진출할수 있는 길목마다에 집중배치해놓았다. 그리고 지상부대와 항공대의 협동작전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을 사면팔방으로 협격할 태세를 갖추고 통신수단으로 비둘기까지 날리면서 악착스럽게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백두산지구와 국경일대는 일제의 총검으로 숲을 이루고 조밀한 《토벌망》으로 뒤덮이게 되였다.

적들의 《토벌》전술도 이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인민혁명군의 행동방향을 탐지한 다음에야 여기저기에서 병력을 끌어왔고 그러다가 반격을 받게 되면 물러가기도 했지만 이해 겨울에는 처음부터 《맹공장추전술》을 썼다. 《맹공장추전술》이란 맹렬한 공격과 지꿎은 추격을 배합한 전술로서 여기서 기본은 진드기처럼 검질기게 달라붙어 상대를 못살게 구는 《다니전술》이였다. 《토벌대》를 요소마다에 미리 배치해놓고있다가 유격대가 나타나면 치고 또 일단 발견한 유격대는 꼬리를 물고 끝까지 따라가며 소멸한다는 《다니전술》은 유격대가 쉬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계속 쫓겨다니며 얻어맞다가 기진맥진해서 녹아나게 하기 위해 고안해낸것이였다.

적들은 이런 전술로 끈질기게 달라붙었는데 어떤 날에는 20번이상의 전투를 한적도 있었다. 그러다나니 유격대는 쉴짬도 먹을 짬도 없이 계속 싸워야 하였다.

행군의 간고성은 여기에만 있지 않았다. 이해에는 추석전에 첫 서리가 내리고 추석이 지나서는 벌써 첫눈이 크게 내려 온 산판을 뒤덮은데다가 추위가 얼마나 심한지 초겨울 강추위에 박달나무가 얼어터질 정도였다.

식량난 또한 행군대오의 앞길에 커다란 난관을 조성하였다. 원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해 겨울식량을 충분히 마련해놓으시였지만 남패자회의기간에 많은 량이 소비되고 먼저 떠나는 부대들에 모두 나누어주시다나니 그이의 친솔부대에는 거의 식량이 떨어진 상태였다. 추운 겨울이여서 산나물이나 풀잎따위의 신세도 질수 없었다. 그래서 행군초기부터 혁명군대원들은 하루 두끼씩 죽을 쑤어먹다가 얼마 못 가서 하루 한끼로 줄이였으며 나중에는 그 한끼마저 먹지 못하고 생눈을 삼키면서 행군하였다. 적을 치고 빼앗은 말고기도 불을 피울수 없어 날것으로 먹어야 했다. 게다가 일제는 《귀순공작반》과 같은 간첩집단을 밀림속에 들여보내고 비행기로 삐라를 뿌리면서 인민혁명군을 내부로부터 와해해보려고 하였다. 지어 적들은 행군대오가 소금이 없어 고통을 겪고있다는것을 탐지하고는 독약을 친 소금을 들여보내는 악랄한 살인모략까지 꾸몄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준엄한 시련과 엄혹한 난관이 앞을 가로막아나섰지만 강철의 의지와 백절불굴의 혁명정신, 확고한 신념과 드놀지 않는 배짱으로 언제나 주도권을 틀어쥐시고 고난의 행군을 승리에로 이끄시였다.

력량의 집중과 분산, 이동의 배합 등 그이께서 능숙하게 활용하시는 령활한 유격전술에 걸려 일제는 늘 궁지에 몰리군 하였으며 요란스럽게 광고하던 《전술》이라는것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적들의 《다니전술》을 격파하기 위하여 적용하신 전법은 갈지자전법이였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해 겨울은 어찌나 눈이 많이 내렸는지 앞사람이 눈을 다지며 길을 내야만 행군할수 있었다. 그러니 적들도 어차피 혁명군이 낸 외통길을 졸졸 따라오는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실태를 예리하게 포착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행군로를 갈지자모양으로 잡아가다가 길이 꺾이는 대목마다 기관총을 휴대한 2∼3명의 전투소조를 매복시켜 적들이 매복조의 사격권안에 들어와 횡대로 늘어서게 될 때 사격을 퍼부어 적들을 소멸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는 매복조를 이동시켰다가 적들이 다가오면 다시금 같은 방법으로 소멸하군 하도록 하시였다. 갈지자전법은 눈이 몇길씩 쌓인 만주산지에서 뒤따라오는 적을 타격하는데 가장 적합한 전법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전법으로 몽강현 오도차, 사도차의 적을 소탕하신데 이어 림강현 요구집단부락습격전투, 마의하부근전투, 왕가점습격전투를 비롯하여 무수한 전투들을 진행하시면서 주체28(1939)년 1월초 장백현 7도구치기에 이르시였다.

적들은 여기에서 비행기와 다른 지방에서 대기하고있던 《토벌대》력량까지 끌어들여 포위진을 치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와의 최후대결전을 벌리려고 하였다. 앞에도 적이고 뒤에도 적이고 옆에도 적이였으며 하늘에도 적이였다. 정황은 매우 위급하였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제2방면군 간부회의를 소집하시고 집단행동으로부터 분산행동으로 넘어갈데 대한 새로운 전술적방침을 내놓으시였다. 이에 따라 제2방면군은 다시 세개의 방향으로 갈라져 행군하게 되였으며 고난의 행군은 제2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경위중대와 기관총소대로 구성된 사령부직속부대를 거느리시고 다양한 전법과 전술로 적들에게 련속 심대한 타격을 가하시며 장백현 가재수방향으로 대오를 이끌어가시였다.

이 나날 그이께서는 행군도중에 행처를 감추기 위해 발자국자리를 메우거나 지워버리면서 슬쩍 사라지는 방법, 넘어진 강대나 진대나무를 타고 옆으로 빠지는 방법 등 여러가지 기묘한 전법으로 적들을 골탕먹이군 하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통쾌한 방법은 적들이 제편끼리 싸우도록 싸움을 붙여놓고 슬쩍 빠지는 방법 즉 망원전술이였다.

바로 이 망원전술에 걸려들어 장백현 홍토산자와 부후물등판에서 수많은 적들이 녹아났다. 부후물등판에서의 싸움을 치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이 밀림지대에 병력을 집중하고있다는것을 포착하시고 부대가 밤새 강행군을 하여 야산지대인 가재수쪽으로 쭉 빠져나가도록 하시였다. 실로 령활무쌍한 전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쓰신 령활무쌍한 전법은 이뿐이 아니였다. 그이께서는 언제인가 아군의 행처를 알아낸 적들의 포위에 들수 있는 불의의 정황이 조성되였을 때에는 무연한 벌판을 대낮에 대담하게 돌파하여 적들을 아연실색케 하셨는가 하면 갑자기 앞뒤에서 적이 나타났을 때에는 선손을 써서 적들을 호되게 답새기기도 하시였다.

이렇듯 천변만화하는 전술과 전법으로 달려드는 일제군경들을 걸음마다 짓부셔버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8(1939)년 2월 중순 장백현 13도만 집단부락습격전투를 진행하시여 위만군 1개 중대를 완전히 소멸하신데 이어 3월 상순 장백현 13도구 집단부락을 들이쳐 분산활동을 하고있는 부대들에 사령부의 위치를 알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 집결한 주력부대를 이끄시고 장백현 간삼봉부근과 오반도일대를 중심으로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신 다음 주체28(1939)년 3월 북대정자에 이르시였다.

이렇게 되여 력사적인 고난의 행군은 승리적으로 결속되게 되였다.

고난의 행군에서의 승리, 이것은 강철의 신념과 의지, 무비의 담력과 배짱을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인 유격전법과 탁월한 령군술의 빛나는 승리였다. 또한 이것은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지닌 투철한 수령결사옹위정신과 백절불굴의 혁명정신,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과 혁명적락관주의정신, 혁명적동지애와 인민들의 열렬한 사랑과 원호가 가져온 고귀한 결실이였다.

고난의 행군이 승리적으로 결속됨으로써 손에 총을 든 조선의 아들딸들이 일제와 싸워 승리하고있다는것이 만천하에 과시되고 인민들은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수 있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였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진두에서 이끄신 고난의 행군은 부대의 이동을 위한 단순한 행군이 아니라 옹근 하나의 전역과 맞먹는 규모가 큰 군사작전이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의 축도였다고도 말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