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 (1)중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넋은 귀중하다. 넋을 잃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민족의 경우에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된다. 자기 민족의 넋을 간직한 민족은 어떤 역경속에서도 재생의 길을 찾고 번영을 이룩해나갈수 있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민족은 민족으로서의 존재자체를 상실해버리게 된다.

이로부터 제국주의자들을 비롯한 력사의 반동들은 다른 나라와 민족에 대한 지배정책을 실시함에 있어서 해당 민족의 넋을 뽑아버리기 위해 집요하게 책동한다. 력사에는 이러한 실례들이 허다하다. 고대 로마의 통치자들이 정복당한 민족들의 문화재들을 불태워버린것도, 19세기 중엽 영제국주의자들이 중국대륙에 아편을 대대적으로 들이민것도 다 민족의 넋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모든것들은 조선을 강점한 일제가 조선민족의 넋을 없애버리기 위해 감행한 책동과는 비길바가 못되였다. 특히 1930년대 중엽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조선민족에게 실시한 식민지정책은 력사에 전무후무한것이였다. 이 시기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조선민족의 넋을 뿌리채 뽑아버리고 조선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데 집중되고있었다. 일제는 《내선일체》, 《동조동근》을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조선민족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일본정신》을 주입시키기 위해 위협공갈과 회유기만, 모략선전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량속은 물론 우리 말과 글까지 없애기 위한 일제의 책동은 그야말로 간악하기 그지없는것이였다. 민족의 정신이라고 할수 있는 민족어를 말살하는 행위는 민족의 전체 성원들에게서 혀를 잘라내고 얼을 뽑아내는것과 같은 잔악무도한짓이였다.

일제의 이러한 책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속에 빠져들어갔으며 일제가 만주를 단숨에 삼켜버리는것을 본 적지 않은 사람들속에서 일본과 같은 강국과 맞서는것은 닭알로 바위를 깨겠다고 덤벼드는것과 같은 황당하고 무모한짓이라고까지 생각하고있었다.

한마디로 조선민족은 정신이 무너지는 가장 무서운 비극적사태를 강요당하고있었다. 우리 민족은 민족의 넋을 지키느냐, 아니면 뿌리채 뽑히우고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였다.

전대미문의 식민지통치밑에서 신음하는 조선동포들을 일으켜세워 조국해방전선에 떨쳐나서도록 하자면 그들에게 조선민족에게는 조국해방을 이룩할수 있는 조선의 혁명군대가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어야 하였다. 그러자면 조선인민혁명군이 대부대로 국내에 쳐들어가 일본군이 강군이기는 하지만 치면 꺼꾸러뜨릴수 있고 괴멸시킬수도 있다는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어야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진행하신 국내진공작전은 간악무도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부터 조선민족의 넋과 얼을 지켜내고 조선민족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강도 일제를 격멸하고 반드시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실현하고야말것임을 내외에 선언한 력사적장거였다.

이 력사적장거의 서막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기슭에서 열리였다. 백두산에로의 진출과정에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해나갈수 있는 준비들을 갖추어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제의 《동기대토벌》을 격파하는것으로부터 국내진공작전을 펼치시였던것이다.

당시 일제는 장백일대의 항일무장부대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밑에 《3대정책》이라는것을 내놓았다. 이 《3대정책》으로 말하면 조선총독 미나미와 관동군사령관 우에다사이에 벌어진 《도문회담》이라는데서 모의된것으로서 국경경비의 강화, 대규모적인 공동《토벌》작전의 전개, 서간도일대의 집단부락화를 주되는 내용으로 하고있었다. 그 핵심내용이 바로 1936년의 《동기대토벌》이였고 《동기대토벌》의 기본목표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백두산이였다. 《동기대토벌》에 내몰린 각양각색의 《토벌》부대들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에 대대적으로 투입되였다. 달구지나 발구, 말파리같은것이나 겨우 드나들던 백두산일대 산간오지의 오솔길에 대포바퀴와 치중마차들이 굴러다니고 밀림속 곳곳에 군마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지기 시작하였다. 말그대로 백두밀림은 《토벌대》들로 쫙 깔리였다. 일제는 《토벌》에 항공대까지 동원하였다.

《동기대토벌》을 계기로 《치안을 결정적으로 확립한다.》는것이 일제의 기도였다. 일제의 이 기도를 짓부시지 않고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성과적으로 진행할수 없었다. 하지만 보편적인 군사상식과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런 정황에서 공격은 설정될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강철의 담력과 의지를 지니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기성관례와 상식을 뛰여넘어 공격위주의 새로운 전법으로 적들을 수세에 몰아넣을것을 결심하시였다.

그이께서 새로운 전략전술적방침을 제시하신것이 바로 주체25(1936)년 11월 곰의골밀영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당시를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1936년 11월에 곰의골밀영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남호두회의이후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군사정치활동을 총화하는 한편 적의 <동기대토벌>공세를 격파하고 백두산근거지를 공고발전시키기 위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우리의 기본전략은 적의 량적, 기술적우세를 사상적, 전술적우세로 격파하는것이였다.》

곰의골회의를 결속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시에 실천적행동으로 넘어가 수많은 전투들을 령활하게 조직지휘하시여 일제의 《동기대토벌》을 걸음마다 분쇄해버리시였다.

곰의골어귀전투도 그 수많은 전투들중의 하나였다. 일제는 1936년 11월 라남19사단 산하 일본군《토벌대》와 이도강에 주둔하고있던 위만군《토벌대》를 내몰아 포사격의 엄호밑에 곰의골로 쳐들어왔다.

이 시각 곰의골밀영쪽에 나가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정찰조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밀영근처에서 체포한 적밀정의 진술을 통하여 적들의 흉계를 낱낱이 꿰뚫어보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아군의 행처를 똑똑히 모르고 산중에서 헤매고있는 적《토벌대》의 약점을 제때에 포착하시고 적들을 곰의골어귀의 좁은 골안에 유인하여 족쳐버리기로 계획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부대들이 일만혼성군의 후방에서 일제히 교란행동으로 넘어가게 하시는 한편 주력부대의 기본력량을 곰의골어귀에 배치하시였다. 이 골안은 잘룩한 병모가지처럼 생긴데다 골짜기 량옆은 벼랑을 이루고있어 그곳을 차지하고있으면 그 어떤 대부대의 적들도 빠져나갈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을 아군의 매복권안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골짜기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허위진지를 만들고 그곳에 몇명의 대원들을 배치하여 날이 어슬어슬해진 다음 마치 주력이 있는것처럼 불도 피우고 소리도 내게 하시였다. 그리고 유인조를 파견하여 적들을 매복진으로 끌어오도록 하시였다.

1936년 11월 12일 오후 5시경 그이의 신묘한 유인술에 걸려든 적《토벌대》가 곰의골로 기여들었다. 적의 력량은 아군에 비하여 5배도 더 되였다.

적들이 매복권에 완전히 들어서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격명령을 내리시였다. 순간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일제사격과 과감한 돌격으로 삽시간에 대부분의 적을 소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겨우 살아나 10리가량 떨어진 삼개골부근으로 도망쳐가서 증원부대를 기다리며 숙영하던 적들도 위대한 수령님의 과업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습격조의 야간습격에 의하여 거의 전멸되였다. 곰의골어귀전투에서 황천객이 된 적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패잔병들은 시체들을 다 운반할수가 없어 머리만 잘라서 마대에 넣어가지고 마차에 싣고 달아나버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곰의골어귀전투를 성과적으로 결속하신데 이어 대부대활동과 소부대활동을 배합하여 장백현일대에서 14도구시가습격전투, 13도구상촌기습소탕전을 비롯한 많은 전투를 벌려 적들에게 계속 심대한 타격을 안기시였다. 적들은 이 전투들에서 어찌나 혼쌀이 났던지 그후 두석달동안은 백두산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였다.

일제가 백두산근거지의 밀영지들에 다시 범접하기 시작한것은 1937년에 접어들어서부터였다. 만주와 조선의 북부국경지대들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항일무장세력들을 일격에 소탕해버리려던 기도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일제는 천황의 특별사신까지 파견하여 현지시찰을 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총독 미나미와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그리고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 고이소 등과 함께 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공세를 강화할 대책을 모의케 하였다. 특별사신의 행차를 계기로 일제는 《토벌》에 더 열을 올리였다. 일제가 홍두산밀영에 대한 《기습》토벌을 감행한것도 이무렵이였다.

때는 주체26(1937)년 설을 맞이하던 시기라 조선인민혁명군의 후방부성원들은 명절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백두산최후밀영인 횡산밀영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회의에서 그동안의 군사정치활동을 총화하시고 적의 《동기대토벌》공세를 격파할데 대한 당면투쟁과업을 제시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대원들과 함께 설명절을 보내시고 홍두산밀영으로 돌아오신지 얼마 안되였을 때였다.

망원초쪽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리더니 500여명이나 되는 적《토벌대》가 불의에 달려들었다. 망원초에서 적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이미 적들이 아군을 제압할수 있는 망원초고지에 거의다 오른 뒤였다. 정황은 긴박했고 형세는 아군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시 대원들에게 남쪽릉선을 재빨리 차지하도록 하시는 한편 망원초에 있는 대원들이 적들에게 길을 열어주면서 철수하되 반드시 적들의 눈에 띄우게 칼릉선을 타고 내려오게 하시였다. 이와 함께 남쪽릉선의 비탈을 얼음강판으로 만들도록 하시였다. 이 일대의 형세를 리용하여 홍두산골짜기를 적들의 《함정골》로 만드는 령활한 전법을 쓰시려는것이였다.

칼릉선은 한발자국이라도 헛디디면 깊은 골짜기의 눈속에 굴러떨어져 파묻힐수 있는 외통길로서 여기로 적들을 유인하게 되면 한사람이 100명, 1,000명도 능히 제낄수 있었다. 그리고 홍두산 남쪽릉선은 칼벼랑으로 달려드는 적을 손금보듯 내려다보면서 적을 답새길수도 있고 적들이 퇴각하면 릉선아래 골바닥에 몰아넣고 모조리 족칠수도 있는 전술적지탱점이였다.

순간에 역경을 순경으로,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활무쌍한 지략에 탄복을 금치 못해하면서 대원들은 그이께서 주신 명령에 따라 신속정확히 움직이여 적들을 칼릉선으로 유인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칼릉선과 남쪽릉선사이의 골짜기는 문자그대로 적들의 《함정골》로 되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보통 군사상식으로 보면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 이 싸움에서 수백명의 적들을 살상포로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두산전투가 있은 다음에도 유인과 매복, 대부대와 소부대와의 배합전술, 적의 대부대를 여기저기 끌고다니다가 토막내여 소멸하는 토막치기전술 등 기묘하고 령활한 전술과 전법을 활용하여 도천리전투, 류가동전투, 리명수전투 등 수많은 전투들을 승리적으로 조직지휘하심으로써 일제의 대규모적인 《동기대토벌》을 여지없이 격파해버리시였다.

그이께서 쓰시는 유격전술과 전법앞에서 일제는 완전히 넋을 잃었다.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천변만화하는 유격전술에 대해 《신출귀몰》이니, 《승천입지》니 하고 아우성을 치며 벌벌 떨었다. 그중에서도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것은 《라와전법》이였다. 《라와전법》은 일만군경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가장 대표적인 유격전법의 하나인 매복전에 대하여 하는 말이였다. 《라와》라는것은 라망의 중국식발음인데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빠질 곳이 없는 천라지망 즉 포위망, 함정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매복전에 걸려 곰의골어귀와 도천리에서 수많은 일만군경들이 황천객이 되였던것이다.

《동기대토벌》의 격파, 실로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조하시고 적용하신 독창적이며 령활무쌍한 유격전술과 전법, 그이께서 창설하신 백두산근거지의 불패의 위력이 가져온 빛나는 결실이였다.

일제가 전력을 다하여 꾸미고 감행한 《동기대토벌》이  격파됨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으로 진출할수 있는 통로가 개척되게 되였다.

조국진군의 력사적시각이 하루하루 다가오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