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 (1)중에서

1930년대 전반기에 조선인민혁명군의 기본활동무대는 동만으로서 주로 두만강연안에 창설되였던 유격구를 근거지로 하여 군사정치활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기에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무대가 국경일대와 국내에로 옮겨진 조건에서 항일대전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올리자면 새로운 전략적지대를 확보해야 하였다. 다시말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이 거점으로 삼고 군사정치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할수 있고 전반적조선혁명에 대한 령도를 원만히 실현할수 있는 강력한 혁명의 보루를 축성해야 하였다.

천재적예지와 비범한 통찰력으로 혁명발전의 요구를 깊이 헤아리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백두산지구를 강력한 혁명의 보루로 꾸릴데 대한 남호두회의방침에 따라 그 실현을 위한 작전을 펼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남호두회의에서 하신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에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창설하려고 합니다. 즉 백두산대산림지대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하여 활동할수 있는 밀영망을 형성하고 그 주변지역 인민들을 조직화하여 반유격구형태의 유격근거지를 꾸리자는것입니다. 이러한 유격근거지는 적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탄력성있는 혁명의 보루로 될것입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에 창설할 근거지는 그 내용과 형태에 있어서 1930년대 전반기의 유격근거지와 달랐다.

두만강연안유격근거지는 고정된 유격구를 유격활동의 본거지로 삼은 근거지로서 인민들은 인민혁명정부의 시책속에서 살았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공개적인 혁명근거지였다. 그러다보니 유격구방어에 큰 힘을 넣어야 하였다.

이와는 달리 백두산근거지는 대산림지대에 은페된 밀영들과 지하혁명조직들에 의거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하는 근거지로서 인민들이 표면상으로는 적의 통치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방침과 로선에 따라 움직이였다. 한마디로 비밀근거지였다.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은 근거지방어에 큰 힘을 넣지 않아도 되였다.

이것은 백두산근거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하여금 보다 광활한 지역에서 유격활동을 벌려나갈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하고 주동적인 공격자의 위치에 서게 한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라는것을 의미하였다.

백두산근거지는 실로 천재적군사전략가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이 내놓으실수 있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유격근거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백두산지구를 전략적지대로 선정하신것은 혁명의 강력한 보루를 축성하는데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가 가장 유리한 지역이기때문이였다.

우선 군사지형학적견지에서 볼 때 백두산은 천연요새일뿐아니라 주변지역 인민들의 반일감정도 높아 대중적지반도 좋은 곳이여서 유격전을 확대하기에 이보다 더 적중한 지대는 없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를 거점으로 삼고 조선과 중국 두 나라 지경을 넘나들며 종횡무진의 싸움을 벌린다면 일제에게 보다 큰 섬멸적타격을 줄수 있었다.

백두산은 또한 커다란 정신적의미도 가지고있었다.

백두산은 조종의 산으로서 조선의 상징이며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민족사의 발상지였다.

우리 민족이 조종의 산 백두산을 얼마나 우러러왔는가는 백두산 장군봉밑의 천지기슭 바위의 비석에 《대태백 대택수 룡신비각》이라는 글을 새겨놓은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나라의 생존이 심히 우려되였던 20세기초에 대종교나 천불교의 관계인물인 천화도인에 의하여 세워진 비석이다. 백두산을 지키는 천지의 룡신이 이 나라 사람들을 무궁토록 안정하게 해줄것을 기원한것이였다. 백두산에 대한 숭상은 곧 조선에 대한 숭상이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였다.

한편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대는 지리적으로 볼 때도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고 전반적조선혁명에 대한 령도를 보장하는데서 가장 유리한 지역이였다.

백두산지구를 타고앉으면 백두대산줄기를 따라 함경산줄기, 랑림산줄기 등 여러 방향으로 뻗어간 산줄기를 타고 국내깊이에로 무장투쟁을 확대할수 있었다. 그리고 백두산은 서간도와 국내, 북간도를 련결하는 삼각지점에 위치하고있어 이 일대만 타고앉으면 국내혁명운동과 서간도의 독립운동, 북간도의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지도에서 일원화를 보장할수 있었다.

그야말로 백두산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해야 할 지상제일의 보루였다.

그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화전시절부터 때가 되면 백두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독립성전을 벌리실 결심을 하고계시였다. 하지만 그이께서는 화전에서 《ㅌ.ㄷ》를 무으신 다음에도, 활동무대를 동만으로 옮기신 다음에도,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시였을 때에도 백두산으로 곧추 가는 길을 택하지 않으시였다. 백두산을 타고앉자면 대오를 늘이고 힘을 축적해야 한다고 보시였기때문이다.

이로부터 그이께서는 《ㅌ.ㄷ》를 무으신 때로부터 장장 10년동안 백두산으로 진출할수 있는 힘을 충분하게 축적하여오시였으며 마침내는 백두산을 타고앉아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올리기 위한 원대한 작전을 펴게 되신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두산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한 투쟁을 백두산서북부와 서남부일대의 적을 제압하기 위한 군사작전으로부터 시작하시였다.

그리하여 백두산서북부와 서남부일대에서는 두도송화강전투에 이어 로령전투, 시난차전투, 서강전투, 황니하자전투, 무송현성전투, 대덕수전투, 소덕수전투, 이도강전투 등 수많은 전투들이 진행되게 되였다.

작전의 나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매복전, 습격전, 포위공격전, 집중과 분산전술, 대부대와 소부대의 배합전술, 망원전술, 적군와해전술, 화공전술 등 다양하고 령활무쌍한 유격전법과 전술을 능숙하게 적용하시여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안기시였다.

주체25(1936)년 9월 2일에 진행된 소덕수전투때의 이야기이다. 그 전날 장백현 덕수골일대에서 대덕수전투를 성과적으로 치르고난 부대는 마등창수림속에서 휴식하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더니 15도구방향과 이도강방향에서 밀려온 적들이 남북 량쪽에서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다.

사태는 긴박하였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과 싸움을 건것이 아니라 부대가 마등창수림속에서 슬쩍 빠져나와 15도구골 등판으로 올라가도록 하시였다. 적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성한 숲을 리용하여 적들의 협공을 저들끼리의 골육상쟁으로 역전시키는 령활한 전술을 쓰신것이였다.

이날 적들은 서너시간동안이나 저들끼리 맹렬한 싸움을 벌리다가 상대편에서 부는 퇴각나팔소리를 듣고서야 사격을 중지하였다.

수백명의 유격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온데간데 없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노릇이 아닌가? 이 불가사의한 문제에 대한 해명을 적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둔갑술》을 썼다는데서 찾았다. 이때부터 국경지대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둔갑술》을 써서 《승천입지》하고 《신출귀몰》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하였다.

소덕수전투가 있은 날 적들은 담가가 모자라 주변마을의 집집마다에서 문이라는 문은 다 뜯어다가 저들의 시체를 거두어가지고 황황히 꽁무니를 뺐는데 그통에 이곳 사람들은 한동안 문대신 가마니짝을 달고 지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백두산서북부와 서남부일대에서 진행한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적공세앞에서 적들은 대경실색하였다. 장백지방 경찰기관들에서는 경찰들이 집단적으로 사직서를 내고 공직을 회피하는 리직은퇴바람이 불었는가 하면 이도강 같은 곳에서는 집단부락출입도 앞문으로가 아니라 뒤문으로 하는 정도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작전을 조직지휘하시는 한편 대중을 교양하고 결속하기 위한 조직정치사업도 함께 밀고나가시여 덕수골, 지양개골 등 여러곳과 국내도처에 조국광복회를 비롯한 혁명조직들을 꾸리도록 하시였다. 백두산주변의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한 이 조직들은 새로 창설되는 근거지의 믿음직한 정치적지반으로 되였다. 이렇듯 적극적인 군사적공세와 정치활동으로 강력한 혁명의 보루를 축성할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미 이룩하신 성과에 토대하여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시였다.

그이께서 이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주되는 힘을 넣으신것은 밀영건설이였다. 백두산근거지창설에서 밀영망건설이 가지는 의의와 중요성을 헤아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미 동강회의직후에 여러개의 소부대들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국경일대의 요소마다에 밀영지들을 선정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여 장백지구에 파견하시였었다.

그이께서는 임무를 받고 떠나가는 그들에게 밀영망을 적들에게 로출되지 않고 비밀이 보장될수 있게 형성하여야 하며 모든 밀영들을 적들의 공격에는 불리하고 아군의 활동에는 유리하면서도 혁명조직들과의 련계를 보장하는데서나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해나가는데서 편리한 지역에 건설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밀영망을 형성할 지역적범위와 지형조건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그리고 밀영망의 구성체계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선발대성원들은 장백지구에 나가 해당 지역의 적정과 지형들을 정찰하고 주민동향들을 장악하면서 알맞춤한 밀영후보지들을 탐색하는 한편 부대의 진출통로를 성과적으로 개척해놓았다.

이러한 준비밑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5(1936)년 9월 20일 부대를 거느리시고 국내의 첫 밀영후보지로 선정하신 백두산지구의 소백수골에 도착하시였다. 여기가 바로 미구에 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게 될 곳이였다.

산짐승들이 지나다닌 발자취조차 쉽사리 찾아볼수 없는 원시림지대, 적은 수월히 범접할수도 없고 어쩌다 가까스로 기여든다 해도 쳐물리치기 좋은 지세, 웅심깊고 아름다운 소백수협곡을 사이에 두고 높이 솟은 봉우리들, 과시 소백수골은 사령부밀영이 자리잡을만 한 명당자리였다.

이튿날 지휘성원들과 함께 밀영후보지를 돌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지휘성원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적극 다그칠데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하시였으며 구체적인 분공도 조직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소백수골에 꾸려지는 백두산밀영은 전반적조선혁명의 중심적령도거점으로 되여야 하며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북부조선일대와 서간도일대에 각이한 사명을 가진 밀영들을 건설하고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백두산근거지를 점차 백무고원, 개마고원, 랑림산줄기로 뻗어나가면서 국내의 종심깊이 확대할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후 조선인민혁명군 지휘성원들과 대원들을 백두산밀영건설에로 불러일으키시였다.

그이의 명령지시에 대한 결사관철의 정신을 지닌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밀영건설에 한사람같이 떨쳐나 놀라운 성과를 이룩하였다. 소백수골에서는 단 이틀이라는 짧은 기간에 사령부귀틀집과 대원실 2동을 훌륭히 건설하였는가 하면 도끼 하나만으로 1개 련대도 넉근히 숙영할수 있는 커다란 귀틀집을 2∼3일사이에 척척 지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헌신적투쟁을 벌린 결과 백두산일대에는 수많은 밀영들이 우후죽순처럼 일떠서게 되였으며 백두산밀영망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밀영망이 형성되게 되였다.

백두산밀영망의 심장부는 당시 《백두산1호밀영》으로 불리운 소백수골의 밀영으로서  여기에는 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있었다.(지금은 《백두산밀영》 또는 《백두밀영》이라고도 부르고있다.)

소백수골에 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은 때로부터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본거지로, 중심적령도거점으로 되였다.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책원지인 동시에 심장부였으며 중핵적인 작전기지, 활동기지, 후방기지였다. 바로 여기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침을 받고 권영벽, 김주현, 마동희, 박록금 등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혁명의 불길을 지피기 위하여 전국각지로 떠나갔으며 리제순, 박달, 박인진 등 수많은 인민의 대표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새로운 혁명의 불씨를 안고 다시금 인민들속으로 들어갔다. 또 여기에서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이 원쑤들을 찾아 출전의 길을 떠났고 혁명의 운명과 직결된 크고작은 모든 일들의 거의 전부가 백두산밀영에서 구상되고 설계되였으며 실천에 옮겨졌다.

백두산밀영망에는 사자봉밀영, 곰산밀영, 선오산밀영, 간백산밀영, 무두봉밀영, 소연지봉밀영 등과 같이 조선쪽에 꾸려진 밀영들과 곰의골밀영, 홍두산밀영, 지양개밀영, 이도강밀영, 횡산밀영, 리명수밀영, 부후물밀영, 청봉밀영들과 무송지구의 여러 밀영들처럼 서간도쪽에 꾸려진 밀영들도 있었는데 이 밀영들은 다 각이한 사명과 임무를 지닌 백두산밀영의 위성밀영들이였다.

어떤 밀영은 재봉소나 무기수리소, 병원과 같은 후방밀영의 역할을 하였으며 또 어떤 밀영은 공작원들의 중간련락소나 숙영소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자봉밀영과 같이 사령부의 보조밀영으로서 국내 여러 지역에 파견되여 활동하는 소부대, 소조, 정치공작원,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의 사업과 혁명조직들에 보낼 교양자료출판사업을 보장하는 사명을 지닌 밀영들도 있었다.

이렇게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하나의 생명유기체와 같이 결합된 밀영망이 형성됨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올리기 위한 확고한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밀영망건설과 함께 백두산주변지역에서는 지하혁명조직들을 조직하고 인민들을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이 더욱 힘있게 벌어졌다. 백두산주변 주민지대는 형식상 적들의 행정권이 미칠뿐 실제에 있어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장악통제하는 혁명화된 지역으로 전변되였다.

그리하여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국내와 서간도의 넓은 지대에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 백두산근거지가 창설되게 되였다.

백두산밀영이 창설됨으로써 백두산은 조종의 산, 민족사의 발상지로서의 상징적의미외에 새 의미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명실공히 백두산은 《광복혁명》의 용암으로 2천만 조선민족의 가슴에 반일항전의 불길을 지펴주는 광복의 활화산, 혁명의 성산으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