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 (1)중에서

 

항일대전은 조중인민의 공동위업이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민의 적인 동시에 중국인민의 적이였다. 이런 공통성으로 하여 중국인민은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고 항일의 포성을 울리자 이를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적극 지지성원하였다. 반만항일의 구호를 든 구국군을 비롯한 중국인반일부대들도 반일인민유격대와 손을 잡고 일제침략군과 위만군을 반대하여 공동작전을 벌려나갔다.

그런데 1933년에 들어와 반일부대들은 반일인민유격대와의 좋은 관계를 파기하고 련합전선실현에 난관을 조성하였다. 일제의 집요한 리간책동과 반일부대두령들의 빈번한 동요, 쏘베트좌경로선의 해독적인 후과가 그 요인이였다.

반일인민유격대와 반일부대와의 련합전선이 날로 강화되는데 당황한 일제는 그것을 허물어보려고 갖은 모략을 다 꾸미였다. 일제는 반일부대에 대한 귀순공작을 강화하는 한편 그들이 조선혁명가들을 적대시하도록 하기 위하여 《조선사람이 만주를 빼앗으려 한다.》, 《공산당은 구국군을 무장해제시키려고 한다.》는 등 터무니없는 악선전을 퍼뜨리였다. 일제는 반일부대에 대한 정치적공세와 함께 보다 대규모적인 군사적공세를 감행하여 그들속에 극도의 불안과 공포, 동요와 혼란을 조성시키였으며 그들이 반일의 기치를 줴버리고 저들에게 투항하게 하고 련합전선을 배반하도록 떠밀었다. 그 결과 1933년 1월 훈춘현 토문자에 주둔하고있던 반일부대 두령 왕옥진이 부대들을 거느리고 적들에게 투항하였다. 2월에는 소왕청에 있던 관부대의 반수가 귀순하여 만주국보위단과 공안국에 채용되고 대황구근처에서 활동하던 마계림부대의 수십명 장병들도 투항하여 하마탕자위단에 합류했다.

여기에 또한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반일부대와의 사업을 극좌적으로 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구국군과는 하층통일만 해야 한다.》느니, 《구국군병사들로 하여금 자기 두령을 죽이고 반변해나오게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지주, 자산계급인 장관들을 타도하라!》, 《병사들은 반변을 일으켜 유격대로 넘어오라!》는 구호를 망탕 줴쳤다.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왕청지구에서 활동하던 반일인민유격대의 한 부대에 강요하여 이 부대로 하여금 반일부대인 관영장부대 병사들의 총을 벗기려다가 반일부대 병사 몇명을 죽이는 불상사를 내게 하였으며 《보위단》에서 반일인민유격대에 의거하여온 중국인대원을 부당한 구실을 붙여 처단함으로써 반일부대와의 련합전선형성에 엄중한 해독적후과를 끼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격분하게 된 관부대두령은 자기 부대에 들어와 사업하던 조선혁명가들을 총살하였으며 부대에 명령하여 주둔지부근을 지나가는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죽이게 하였다.

1933년 4월 하순 동산호부대에서는 당시 별동대장으로 활동하고있던 리광을 비롯한 별동대전원을 왕청현 라자구 로흑산부근에서 집단적으로 참살하는 험악한 사태까지 빚어냈다.

조성된 사태는 매우 엄중하였다. 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반일부대들과의 전면적인 련합전선을 실현할것을 절박한 문제로 제기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구국군과의 관계를 적대적관계로부터 동맹관계로 전환시키는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혁명을 계속하느냐 마느냐 하는 운명적인 문제로 다시금 상정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일련합전선앞에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주체22(1933)년 5월 하순 소왕청 마촌에서 두만강연안 혁명조직책임자들과 반일인민유격대 지휘관들의 회의를 소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반일련합전선에서 조선혁명가들이 견지해야 할 근본립장과 원칙적문제들에 대하여 밝히시였다.

그이께서는 반일련합전선로선은 반혁명세력에 비한 혁명력량의 우세를 보장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전략의 하나라고 하시면서 구국군부대의 완고한 두령들과 토비근성을 버리지 못한 산림부대들이 많은 제한성을 가지고있지만 그들이 반일을 지향하는 한 우리는 인내성있게 그들을 반일련합전선에 인입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반일부대와의 사업에서는 병사대중과의 통일을 기본으로 하되 이를 위해서는 상층과의 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일부대와의 련합전선형성에서 가로놓인 엄중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전반적인 반일부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는 반일부대 두령 오의성과의 직접적인 담판을 성사시키는것이라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몸소 담판에 나설 결심을 내놓으시였다. 그러자 회의참가자들은 조선혁명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수령님의 신변이 념려되여 담판에 가시는것을 일치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일단 결심하신 뜻을 바꾸려 하지 않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일부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것은 혁명의 전도와 관련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또한 능히 해결할수 있는 문제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락후하고 일제의 민족리간책동에 속아 무분별한 행동을 감행하고있는것만큼 이 사업은 어렵고 복잡하며 위험을 동반하고있으나 그들과의 사업은 꼭 해야 할 혁명과업이므로 곤난이 있다고 하여 손을 떼는것은 진정한 혁명가의 태도가 아니라고 가르치시였다.

회의를 마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구국군전방사령인 오의성과의 담판을 위하여 주체22(1933)년 6월 하순 선발된 100여명의 대원들을 이끄시고 라자구로 떠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마를 타시고 맨 앞장에서 대오를 인솔하시였다. 유격대원들은 새 군복을 입고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짓고 행군해갔다. 대오가 태평구에 도착하자 그이께서는 반일인민유격대의 라자구입성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시고 오의성부대에 전령병을 파견하시였다.

다음날 라자구에서 담판을 하는데 동의한다는 내용의 통지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시여 훈춘에서 온 1개 중대를 태평구아래마을에 배치하신 다음 나머지 50명만 이끄시고 붉은기를 앞세우고 나팔을 불면서 위풍당당하게 라자구시내로 들어가시였다. 행군대렬이 라자구시내에 들어서자 감격에 휩싸인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솔하신 반일인민유격대를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당시 라자구에 자리잡고있던 반일부대사령부는 간도일대의 구국군은 물론 청산대, 해룡대, 코산대, 동산호 등 각지에 널려있는 산림대까지도 통솔하고있었다.

오의성은 처음부터 자기들의 세력이 크다는것을 믿고 담판에서 거만한 태도를 취하였으나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경탄의 기색만은 감추지 못하였다. 그는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않고 호랑이가죽우에 비스듬히 누워서 담화도 하고 차도 마시는 거만한 사람이였는데 그날은 격식을 차려 깍듯이 수령님을 맞이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첫인사로 구동북군에서 많은 부대들이 일본군에 투항할 때 사령네 부대가 항일에 나선것을 애국적장거로 높이 평가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오의성을 비롯한 반일부대 상층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감명을 주었다. 오의성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부관을 시켜 차를 가져오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도권을 확고히 틀어쥐시고 담판을 이끌어나가시였다.

오의성은 김대장이 일본놈과 잘 싸운다는 소문을 들어서 다 알고있다고 하면서 새 총을 메고 왔는데 그걸 몇자루 자기네한테 있는 낡은 총과 바꾸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꿀게 있는가, 그런것쯤은 거저 줄수도 있다고 그의 제의를 흔연히 받아들이시면서 그거 뭐 궁색스럽게 그런 놀음을 할거나 있는가, 일본군대와 한바탕 싸우면 될터인데,… 그렇지만 정 요구한다면 그까짓거 거저 줄수도 있다고 하시며 넌지시 꼬리를 다시였다.

그러자 오의성은 말머리를 돌려 이번에는 공산당이 상공당을 마스고 다니며 남자와 녀자의 구별이 없이 한이불밑에서 자고 남의 재산을 막 빼앗는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고 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도 나쁜 사람들이 꾸며낸 선전이라고 전제하시고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공산주의물을 잘못 먹은 몇몇 사람들이 지주의 땅이라면 친일, 반일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빼앗은 사실이 있는데 우리도 그걸 잘되였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또 지주라는것들이 소작인들이 굶어죽어가고있는데 선심이라도 써서 먹을것을 주어야지 저만 잘살겠다고 아닌보살을 하니 이게 도리가 됐는가, 지주들이 식량만 주면야 무엇때문에 들고일어나겠는가, 옛날 중국에서도 태평천국이라는 란리가 있었다는데 그것도 아마 그렇게 돼서 일어난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오의성은 위대한 수령님의 사리정연하고도 공명정대한 말씀에 공감을 표시하지 않을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비범한 지략과 호방한 기개, 탁월한 통찰력과 위대한 감화력에 경탄을 금치 못한 오의성은 그이를 《김사령》이라고 존대하면서 진지한 담판자세를 취했다.

오의성은 김사령네 공산당은 량반공산당이라고, 김사령은 참 공정한 군사가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오의성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기하신 반일련합전선형성에 전적인 동의를 표시하였다.

담판에서는 반일인민유격대와 반일부대와의 일상적인 련계를 보장하며 두 군대의 공동행동을 보장하는데서 조절자적역할을 감당하게 될 반일부대련합판사처라는 상설적인 기구를 내오기로 합의하였다.

반일부대두령과의 담판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으로써 항일혁명앞에 가로놓였던 큰 장애는 제거되였으며 조중 두 나라 민족의 무의미한 대립과 류혈은 종식되고 반만항일의 거세찬 흐름은 하나의 전선에 합류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의성과의 담판에서 거둔 성과에 토대하여 구국군에서 가장 완고한 세력인 채세영부대를 비롯한 다른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도 실현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담판이후 반일련합전선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동녕현성전투를 계획하시였다.

동녕현성은 한때 반일부대의 중요한 군사기지의 하나였으나 일제침략군에 의하여 빼앗긴 곳이였다. 그러므로 동녕현성을 공격하는것은 일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되는것은 물론 반일부대들의 원한을 풀어주게 되는것이므로 그들과의 련합전선을 공고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계기를 열어놓을수 있었다.

동녕현성전투승리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있어서도 특별히 중시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렇게 언급하시였다.

《우리는 이 전투를 항일유격대의 합법화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돌파구로 보았고 우리와 구국군부대사이에 맺어진 통일전선에 관한 협약도 이 전투의 승패에 따라 발효를 보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전투를 잘하면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이 반석같은 기초우에 서는것이요, 패전으로 끝나면 라자구담판의 성과는 허실로 돌아가고 축조과정에 있던 련합전선은 붕괴를 면치 못할것이였다. 동녕현성전투를 잘못하면 우리가 혈전을 통하여 힘들게  이루어놓은 항일유격대의 군사적권위에도 오점이 생길것이였다.…

우리로서는 사실 큰 시험을 치르는셈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녕현성전투를 위하여 주체22(1933)년 9월초 반일부대련합판사처를 통하여 오의성, 사충항, 채세영, 리삼협을 비롯한 반일부대지휘관들과의 련합회의를 소집하시고 이 회의에서 동녕현성전투의 목적과 의의에 대하여 상세히 말씀하신 다음 이미부터 구상하고 무르익혀오신 전술적방안들을 내놓으시였다. 반일부대지휘관들은 그이께서 내놓으신 련합작전계획에 전적인 동의를 표시하였다.

당시 동녕현성에는 500명정도의 일본관동군병력과 1개련대정도의 위만군병력이 있었고 그밖에도 위만경찰들과 자위단무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었다. 거기에다 적들은 대포를 비롯한 현대적무기로 장비된 견고한 성새속에 들어박혀있었다. 이 전투에는 왕청, 훈춘지구에서 활동하는 반일인민유격대 부대(각각 1개 중대정도)들이 주력이 되고 그밖에 1,000명에 달하는 반일부대들이 참가하였다.

동녕현성에 대한 공격은 위대한 수령님의 총적인 지휘밑에 주체22(1933)년 9월 6일 밤 9시에 시작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시내로 돌입한 유격대로 하여금 적병영을 봉쇄하게 하시는 한편 일부 력량을 포대북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화력을 분산시킨 다음 파괴조를 발동시켜 맹렬한 작탄공격으로 서산포대를 점령하도록 하시였다. 유격대원들은 적들의 발악적인 저항을 무릅쓰고 성시의 요새이며 관문인 서산포대를 들이쳐 부대의 진격로를 열어놓았을뿐아니라 전투의 앞장에서 용감하게 싸워 위기에 처했던 반일부대들을 구원하였으며 전투승리를 이룩하는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에 따라 아군련합부대가 시내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고있던 때였다. 반일부대 사충항려단장이 그만 중상을 당한채 성안에 쓰러져있었다. 그의 부하들은 모두 사지판에 려단장을 남겨둔채 성밖으로 도망쳐버리였으며 부관도 그를 돌보지 않고 살구멍을 찾아 성문을 빠져나갔다.

이에 대해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시 왕청중대에 사충항을 구원할것을 명령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유격대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원해낸 사충항을 화력으로 엄호하면서 부대를 고지쪽으로 무사히 빼돌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지휘밑에 진행된 동녕현성전투는 9월 7일 낮에 련합부대의 빛나는 승리로 결속되였다. 동녕현성전투에서 반일련합부대는 일제침략군 200여명과 위만군 300여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구국군은 조선혁명가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였고 그후부터 위대한 수령님을 《김장군》, 《김사령》이라고 존대해불렀다. 반일인민유격대에 의하여 사경에서 구원된 사려단장은 감격을 금치 못해하며 1933년 9월 7일은 내가 두번째로 생명을 받아안은 날이다, 지금까지의 생명이 부모들이 준것이라면 9월 7일부터의 생명은 김일성사령이 주신것이다, 김일성사령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고 항일유격대는 우리 구국군의 첫째가는 형제들이라고 자기의 격동된 심정을 토로하였다.

실로 동녕현성전투는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협동밑에 진행된 대규모적인 련합작전으로서 련합전선형성을 전면적단계에로 발전시키는데서 획기적계기를 열어놓은 력사적사변이였다. 또한 이 전투는 조중인민을 서로 리간시키고 반일인민유격대와 반일부대들을 호상 대립시켜 반일혁명력량의 단결을 파괴하려던 일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녕현성전투가 있은 후에도 대전자, 라자구, 로두구 등에 대한 대규모적인 성시습격전투들에 반일부대들을 참가시켜 반일련합전선을 더욱 공고발전시켜나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몸의 위험을 무릅쓰시고 몸소 반일련합전선형성을 실현하심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킬수 있는 귀중한 밑천이 마련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