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중에서

191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회령은 일제의 조선침략무력의 집결지로서 지방폭압통치기구들과 경제략탈기구들이 집중된 곳으로 변하였다. 북관6진중의 하나로 알려진 이 유서깊은 요새지가 일본군 라남19사단소속의 75련대본부와 비행대가 자리잡은 군사적요충지로 되였다.

일제는 1917년 10월에 저들의 통치기관인 회령면사무소를 내온것을 비롯하여 군내 8개의 면에 면사무소를 설치하였고 1918년 12월에는 회령군청을 앉히였으며 1919년 8월에는 새로 경찰서를 개설하고 관내에 7개의 경찰관주재소들과 4개의 출장소 또는 파출소를 두었으며 인민들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그무렵 회령에는 2 000여명의 왜놈들이 1 062호의 주택을 쓰고 살았다.

이 지역의 무진장한 자연부원을 탐낸 일제는 1918년 9월에 계림탄광주식회사를 설치한것을 비롯하여 봉의탄광, 회령탄광, 팔을탄광, 화풍탄광, 죽포탄광, 회령전기회사, 회령영림창출장소, 두림제지회사, 회령종묘장과 같은 수많은 경제략탈기관들을 두고 석탄과 목재 등을 제멋대로 략탈해갔다.

일제의 식민지략탈책동과 지주, 자본가를 비롯한 친일주구들의 착취와 억압, 악랄한 수탈로 하여 회령인민들은 생사기로에서 헤매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망국의 고통으로 강산이 몸부림치던 당대 사회상은 어리신 김정숙녀사의 가슴에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증오심과 일떠서 싸워야 한다는 애국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이러한 녀사의 성장에, 세계관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것은 바로 독립운동자이신 아버님의 교양이였다.

3.1인민봉기를 전후하여 두만강연안 북부조선일대와 간도지방에는 인민들의 반일기운이 팽배해지고 각이한 명칭을 가진 독립운동단체들이 활동하고있었다.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1920년 봄 간도 룡정과 명동일대를 거쳐 회령에 나오시여 독립운동자들의 모임을 여시고 독립운동단체들의 단합과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며 광범한 민중을 조직동원하여 독립성전에 떨쳐나서도록 이끌어주시였다.

회령을 비롯한 북부조선일대와 간도지방에 독립운동의 불길이 그 어느때보다 세차게 타오르고있던 시기 김정숙녀사의 아버님이신 김춘산선생님께서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자들과 련계를 맺으시면서 나라찾는 위업에 한몸바쳐 나서시였다.

반일독립운동에 나서신 아버님께서는 한해치고 집에 오시는 때가 별반 없으시였지만 자제분들 가운데서도 제일 총명하고 때이르게 철이 드시는 김정숙녀사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어리신 가슴에 애국의 넋을 심어주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시였다.

오산덕의 제일 높은 마루에는 옛 봉화터가 있었다.

오랜 세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에 신호의 불길을 올리던 곳이였다.

일제침략자들은 회령에 기여든 후 이곳에 있던 봉화터도 무참히 짓밟아버리였다. 예로부터 외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것으로 간주되여온 봉화터가 그대로 있는것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제놈들은 성벽처럼 쌓았던 돌들을 마구 헐어서 제놈들의 관사를 짓는데 써버리였다. 그리하여 옛 봉화터에는 얼마간의 돌밖에 남지 못하였다.

1921년초 집에 들리시였던 아버님께서는 김정숙녀사와 함께 봉화터에 오르시여 애국의 뜻이 깊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였다.

아버님께서는 봉화터에 놓인 바위돌을 가리키시며 이 돌은 원래부터 이 오산덕에 있은 돌이 아니라 옛날 할아버지들이 먼산에 가서 소발구로 실어온 돌이라고 일러주시였다.

어리신 김정숙녀사께서는 무엇때문에 큰 바위돌을 가져다가 여기에 쌓아놓았는가고 물으시였다.

아버님께서는 외적이 쳐들어오고 란리가 나면 다른 마을에도 알리고 서울에도 알려야 하겠는데 그때는 우편국이 없는 때여서 전보도 칠수 없고 전화도 걸수 없었다고 하시면서 여기에 큰 불을 지펴놓으면 다른 마을에서 그 불을 보고 또 불을 지펴 그다음 마을에 알리는 방법으로 온 나라에 알리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며 봉화터에 있는 바위돌들이 단순한 돌이 아니라 외적을 물리치는데서 큰 역할을 한 돌이라는것을 아시게 된 김정숙녀사께서는 이끼오른 그 바위돌 하나하나가 매우 귀중하게 생각되시였고 녀사의 마음속에는 봉화터를 마구 헐어버린 일제에 대한 가증스러운 분노가 끓어오르시였다.

아버님께서는 그후에도 녀사의 가슴속에 일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심어주시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시였다.

한번은 아버님을 따라 오산덕에 오르신 김정숙녀사께서 짐을 가득 싣고 달리는 기차를 보고 무엇을 실어가는가고 물으신적이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어리신 따님을 안아올리시며 《… 똑똑히 보아라. 저것은 일본놈들이 우리의 쌀과 석탄, 소, 돼지를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가는것이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잠시 생각하시던 김정숙녀사께서 《왜놈들은 우리를 못살게 하는 나쁜놈들이야요.》라고 말씀하시자 아버님께서는 《네가 옳게 말했다. 왜놈들은 진짜 나쁜놈들이다.》라고 하시였다.

자주 오산덕에 오르시여 일제의 폭압기관들이 있는 큰 건물들을 가리키며 왜놈들을 하루빨리 몰아내야 우리 조선사람들이 마음편히 살수 있다고 깨우쳐주시는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시며 김정숙녀사께서는 어린시절부터 《왜놈들은 우리를 못살게 구는 제일 나쁜놈들》이라는 의식을 지울수 없이 가슴속에 깊이 새기게 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봄이면 온 시가지가 백살구꽃속에 묻히군 하는 그처럼 아름다운 고향 회령에서 불과 몇년밖에 살지 못하시였다.

녀사께서 고향과 조국을 뒤에 두고 이국땅을 찾아 두만강을 건늘 때는 대여섯살의 어린 소녀였다.

김정숙녀사의 일가가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것은 조국땅에서 더는 살아갈수 없게 된 어려운 생활처지때문만이 아니였다. 가정을 회령에 두고서는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할수 없다고 보신 김정숙녀사의 아버님께서 가족들을 간도로 이주시킬것을 결심하시였던것이다.

아버님께서 인편을 통하여 간도로 들어오라는 기별을 보내왔을 때 어리신 김정숙녀사께서는 더없이 슬프고 마음이 괴로우시였다.

하지만 나라찾는 일에 나서신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그 한가지 생각으로 슬픔과 괴로움을 애써 참으시였다.

주체11(1922)년 4월 김정숙녀사께서는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고향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시면서 두만강을 건느시였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느라면 별의별 설음을 다 겪기마련이다. 그러나 그 모든 설음가운데서도 가장 큰 설음은 나라를 잃은 설음이며 망국노가 되여 조국을 떠나는 설음이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아직은 철도 들기 전인 너무도 어리신 나이에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정든 고향, 어머니조국의 품을 하직하는 수난자의 집단, 류랑민행렬의 일원이 된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정숙녀사께서는 그처럼 아름다운 고장 회령에서 몇년밖에 살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철이 들면서부터 그의 눈에 비쳐든것은 마적들이 먼지를 뿌옇게 일구며 싸다니는 북간도의 거치른 산야였다고 서술하시였다.

두만강을 건느신 김정숙녀사의 일가분들은 북간도의  여러 고장을 옮겨다니시며 소작살이를 하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정숙녀사의 마음속에 애국의 넋과 원쑤 왜놈을 미워하는 정신을 심어주시려는 아버님의 교양은 계속되였다.

그때 왜놈들의 고문으로 하여 운신조차 못하게 되신 아버님께서는 집으로 돌아와계시였는데 김정숙녀사께 총을 든 일제와는 반드시 총으로 맞서야 한다는데 대하여 알기 쉽게 깨우쳐주시였다.

아버님께서는 자제분들을 몸가까이 불러앉히시고 망국의 비운이 짙게 드리운 조국에 대하여,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아야 할 력사적사명이 피끓는 조선의 남녀청년들에게 있다고 자주 말씀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실 때마다 아름다운 조국땅을 짓밟고 우리 인민에게 노예의 멍에를 들씌운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으로 가슴불태우시였다.

어느날 김정숙녀사께서는 조용한 기회에 아버님으로부터 의병들과 독립군들의 투쟁이야기를 들으시였다.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나서 김정숙녀사께서는 이렇게 물으시였다.

《녀자는 총을 들고 싸우는 군대가 될수 없습니까?》

아버님께서는 한동안 김정숙녀사를 정겹게 바라보시다가 나라를 사랑하고 원쑤를 미워하는 마음이 녀자라고 다르겠느냐, 녀자도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군대가 될수 있다고 하시였다.

아버님께서는 따님의 가슴에 힘있게 움터자라는 강의한 의지와 반일애국의 넋, 투쟁의 갈망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름있는 녀걸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였고 독립군안에도 남자들 못지 않게 총검을 비껴들고 일제군경놈들을 요정내는 싸움에서 이름을 날린 녀성군사가 있었다는것을 알려주시였다.

그 말씀을 들으신 김정숙녀사께서는 또다시 물으시였다.

《지금은 녀성군대가 없습니까?

밝은 세상을 가져오기 위하여 싸운다는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순간 아버님께서는 놀라운 시선으로 따님을 바라보시였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님께서는 따님의 장래를 준비시키기 위하여 이야기하신것인데 녀사께서는 그것을 현실적인 요구로 감수하시고 당면한 문제로 제기하시는것이였기때문이다.

아버님께서는 남달리 영특하시여 한 가정의 기둥으로만이 아니라 나라의 기둥감으로 내세우고싶으셨던 따님에게 자신의 한생에 대한 총화라고도 할수 있는 의병과 독립군운동의 쓰라린 패배와 피의 교훈에 대하여 숨김없이 알려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시였다.

《네가 묻는 그 사람들은 지금 거의 없다. 총을 들고 왜놈들과 싸우던 그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다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모두 무기를 감추고 초야에 흩어졌거나 이 아버지처럼 병만 얻고 집에 파묻힌 몸이 되였다.

왜 그렇게 되였겠느냐? 뜻을 품고 나서는 사람들, 2천만의 우리 겨레들을 한덩어리로 튼튼히 묶어세워 이끌어나갈 출중한 령수가 없기때문이였다.…》

아버님께서는 림종의 시각에 뜻을 이루지 못한채 이역땅에 묻히게 되였으니 분하고 원통하다고 하시면서 왜놈들을 몰아내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망국노의 치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독립혈전에 몸바쳐나서서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이 조국을 찾을데 대하여 당부하시였으며 싸움에서 이기자면 그 싸움을 옳게 이끌어갈 령수를 잘 받들어야 한다고 절절히 강조하시였다.

흐느껴우는 따님의 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다가 아버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였다.

《나는 죽더라도 조선에 묻히고싶었다. 흙이 되더라도 조선의 흙이 되고싶었다. 그런데 그 소원마저 이룰수 없을것 같구나. 너는 어데 가서나 고향을 잊지 말고 조선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조선을 위해 싸워라.》

조선을 위해 싸워라!

이 말속에는 의병과 독립군운동의 쓰라린 패배와 피의 교훈을 잊지 말고 총을 든 원쑤를 반드시 총으로 때려눕혀야 하며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기어이 찾아야 한다는 아버님의 일생의 념원과 절절한 당부가 깃들어있었다.

아버님의 서거, 그것은 김정숙녀사께 있어서 너무도 가슴아픈 상실이였다.

온 집안의 기둥이며 희망이던 아버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늦은 밤, 이른새벽을 가림이 없이 이국의 광야를 줄달음치시던 아버지, 병석에 누워서도 늘 나라찾는 싸움에 몸바쳐나서야 한다고 일깨워주시던 아버지!

그러한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다니…

김정숙녀사께서는 너무도 원통하시여 몸부림치며 우시였다.

눈물속에 아버님을 영결하시며 어리신 김정숙녀사께서는 어디 가서도 고향을 잊지 말고 조선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하신 아버님의 절절한 유언을 가슴깊이 새기시였다.

(사랑하는 조국과 그리운 고향을 짓밟고 아버님을 빼앗아간 원쑤 일제를 쳐부시는 싸움길에 내 기어이 나서리라!)

참으로 아버님의 유언은 나어린 김정숙녀사에게 반일애국의 뜻, 조선독립의 뜻을 깊이 심어주었으며 그것은 후날 김정숙녀사로 하여금 모진 풍상고초를 다 겪으시면서도 굴함없이 무장투쟁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나갈수 있게 한 마음의 기둥으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