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태양 김정일장군」 (4)중에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남녘겨레를 한품에 안아 뜨거운 은정을 부어주시고 그들을 통일애국의 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신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사로운 손길은 일본에서 활동하고있는 한 남조선녀가수에게도 뜨겁게 미치였다.

녀가수로 말하면 어려운 가정에서 태여나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였지만 자체로 노력하여 조선사람으로서 일본땅에서 이름을 떨치고있었다. 그는 해마다 뜻깊은 태양절을 맞으며 세계 5대륙의 수많은 명성높은 예술인들이 모여 진행하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싶은 마음속소원을 안고 몇년전부터 축전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반통일세력의 방해책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그의 이 마음속소원을 깊이 헤아리시고 풀어주신분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그의 소원을 헤아려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2001년 4월 제19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그를 불러주시고 그에게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녀가수가 준비해가지고온 공연종목들을 일일이 알아보시고 단독공연도 하도록 해주시였으며 가수일행의 참관일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돌리시고 옥류관의 이름난 평양랭면맛도 보도록 해주시였다.

장군님의 따사로운 은정속에서 뜻깊은 방문의 나날이 하루하루 흘러갔다. 그럴수록 가수의 가슴속에서는 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더욱 솟구쳐올랐다.

그가 바라고바라던 영광의 시각이 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현지지도의 바쁘신 길에서도 4월 11일 그의 공연을 몸소 보아주시였다.

커다란 흥분속에 무대에 나선 가수는 이 영광의 자리를 마련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끝없는 감사의 정을 안고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공연이 끝나자 장군님께서는 공연성과를 축하하여 꽃바구니를 전하시고 그의 일행을 접견해주시였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가수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지나온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조선사람으로서 일본땅에서 이름을 떨치고있다고 치하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날 가수에게 앞으로 아무때나 다시 평양을 방문하여 공연을 하라고, 다음해에 와서는 큰 극장들에서 공연을 많이 하여야 하겠다고 고무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북쪽에도 공연할 장소는 많습니다. 유명한 백두산에 가서도 공연할수 있습니다. 이제는 문이 열렸으니 누구도 그 길을 막지 못할것입니다.… 북쪽의 인민들도 같은 동포이니 노래로 서로 사귀도록 하여야 합니다.》

가수의 노래가 북과 남사이의 화해와 협력, 통일의 뉴대를 증진시키는 하나의 무지개다리로 되기를 바라시는 기대와 믿음이 어린 말씀이였다.

그는 현지지도의 바쁘신 속에서도 자기를 만나주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는 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또 올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가수일행을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세우시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어주시였으며 그들을 위하여 만찬을 마련해주시였다.

녀가수에 대한 장군님의 은정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다음해인 주체91(2002)년 제20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그를 또다시 불러주시고 공연조직과 참관사업 및 체류일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보살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4월 10일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녀가수일행을 또다시 접견해주시였다.

그는 꿈결에도 그립던 장군님을 또다시 만나뵙는 영광으로 하여 가슴이 세차게 끓어번졌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공연활동을 치하해주시고나서 그가 《우리는 하나》를 비롯한 좋은 노래들을 잘 불러 우리 인민들을 기쁘게 해준데 대하여 만족해하시며 앞으로 일본과 남조선에 《우리는 하나》노래를 널리 보급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가르치심에는 통일의 노래로 온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잇고 통일의 노래를 온 겨레가 함께 부르며 조국통일운동에 떨쳐나서게 하시려는 깊은 뜻이 어려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접견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간 녀가수는 위대한 장군님은 위인이시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앞으로 우리 민족의 노래, 통일의 노래를 더 힘있게 부르겠다고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녀가수의 공연을 보아주시고 노래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성업에 이바지하도록 고무해주신 감격적인 소식은 커다란 충격을 일으키며 급속히 퍼져 7천만겨레의 가슴속에 통일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남조선출판물들도 그가 받아안은 사랑에 대하여 널리 보도하였다.

남조선신문 《중앙일보》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녀가수와 그의 남편을 접견하여주시는 기념사진을 중앙에 모시고 접견소식을 크게 보도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크나큰 은정은 한생을 민족무도인 태권도와 함께 살아온 국제태권도련맹 총재 최홍희선생에게도 베풀어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91(2002)년 1월 최홍희총재가 불치의 병에 걸려 조국에 와서 치료를 받고싶어한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를 평양에 데려다 입원치료를 받도록 은정을 돌려주시였다.

그리하여 최홍희총재는 부인과 함께 그해 2월 조국에 와서 검진을 받은 다음 전문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3월 16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는 그의 병상태를 알아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 일군들에게 그와 그의 부인을 만나 병치료를 잘하기 바란다는 자신의 인사를 전하도록 하시고 산삼과 여러가지 과일들을 보내주시였다.

최홍희총재와 부인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에 눈시울을 적시면서 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였다.

얼마후 큰 수술을 받고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예감한 그는 자기가 있던 현지에 가서 태권도와 관련한 문제를 협의하고 오겠다고 하였다. 의료일군들은 수술환자로서 지나친 과로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단축할수 있기때문에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그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홍희총재가 좋은 사람인데 병에 걸리였다고, 우리가 그를 마지막까지 보살펴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본인의 희망대로 해주라고 이르시고나서 갈 때 우리 의사와 일군이 같이 가면서 편의를 보장해주며 현지에 가서 태권도관계자들에게 앞으로 할 과업에 대하여 알려준 다음 당면한 사업만 하고 인차 조국에 돌아와 료양을 하면서 회복치료를 받을데 대한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해 3월 30일 조국을 출발하여 카나다와 미국에서 태권도와 관련한 사업을 진행하고 5월 14일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병치료를 계속 받았다.

이렇게 병치료를 받던 그는 불치의 병으로 애석하게 사망하였다.

비보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91(2002)년 6월 16일 해당 부문 책임일군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최홍희총재는 … 태권도를 가지고 조국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고 수십년동안 해외에서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태권도활동을 열정적으로 해오다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것을 알고는 조국의 품에 안겨 생을 마쳤습니다.

최홍희총재는 결국 인생의 마무리를 잘한셈입니다.》

그러시고는 그의 장의를 사회장으로 하고 령구를 서장구락부에 안치하도록 하시였으며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도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그를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장하도록 하시였다.

조국의 품에 안겨 인생마무리를 하고싶어하던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에 의하여 조국의 유명렬사들과 함께 영생의 언덕에 오르게 되였다.

7천만겨레를 한품에 안아 민족대단결과 통일위업실현에로 걸음걸음 이끌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은정과 따사로운 손길은 한 해외동포음악가에게도 미치였다.

미국에서 교향악단을 지휘하고있는 그는 이미 1999년에 조국의 노래에 대한 연주회를 진행한데 이어 2000년 2월의 명절을 맞으며 또다시 조국의 음악을 가지고 연주회를 진행하였다.

장군님께서는 해외에서 오래전부터 애국적음악활동을 벌려온 그의 소행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고 그에게 크나큰 믿음을 베푸시였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9(2000)년 3월 18일 당중앙위원회의 한 책임일군에게  2000년 2월의 명절에 즈음하여 재미교포음악지휘자가 교향곡연주회를 진행하였는데 세계명곡들과 함께 우리 나라 노래 《조선의 장군》,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아리랑》 등을 성대히 연주하였다고 하시면서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조국과 멀리 떨어진 이역땅에서도 민족의 넋을 간직하고 애국적음악활동을 벌려가는 한 해외동포음악가에 대한 최상의 평가의 말씀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에 남아있는 비전향장기수들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그들에게도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주체90(2001)년 3월초 남조선의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있는 비전향장기수 권락기의 안해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그 녀성은 일찌기 민주화운동에 나섰고 남조선의 《전국련합》 대외협력위원장, 《통일을 여는 녀성모임》 회장으로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바쳐온 녀성운동가였다. 그는 17년간이나 옥살이를 한 비전향장기수인 남편과 감옥에 있는 동지들을 위해 모든 성의를 다하였으며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실현에 누구보다 앞장서 투쟁하였다.

이러한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사망과 관련하여 조의를 표시할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따라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와 그 공동대표 권락기에게 각각 조의문을 보내여 고인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면서 6.15북남공동선언의 기치밑에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싸우는 남녘의 각계층 인민들을 고무하였다.

그 녀성만이 아니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2004년 4월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 정순덕녀성이 사망하였을 때에도 조의를 표시하고 추도모임을 진행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장군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조의문을 보냈으며 4월 6일에는 비전향장기수구원대책조선위원회의 명의로 평양시안의 근로자들 400여명과 비전향장기수들의 참가하에 윤이상음악당에서 정순덕녀성의 추도모임을 진행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 정순택에게도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정순택은 감옥에 있을 때와 석방된 이후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반미, 미군철수, 《한미행정협정》철페, 전쟁반대, 《보안법》페지 등의 구호밑에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제주도아래 제일 남쪽에 있는 섬 마라도에 이르기까지 남조선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투쟁하였으며 광범한 대중을 반미자주, 통일운동에로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그는 혁명적신념을 지켜 굴함없이 투쟁하다가 애석하게 사망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에 있는 정순택에게 조국의 품에 안긴 비전향장기수들과 꼭같이 조국통일상과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하시였으며 2005년 10월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더없이 애석해하시며 그의 유해를 북에 들여다 장의를 사회장으로 하며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장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생전에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이처럼 그들은 몸은 비록 갔지만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에 의하여 오늘도 영생의 삶을 빛내이고있다.

이뿐이 아니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의 한 민족옷전문가의 소망을 헤아리시고 2001년 6월 4일과 6일 두차례에 걸쳐 평양에서 민족옷전시회를 성황리에 진행하도록 하시고 2002년 1월과 8월에는 남조선의 《KBS》측에서 제기한 《백두산해돋이촬영》문제, 《KBS교향악단》의 평양공연문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 대한 취재 등 남측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보고받으시고 그들이 제기한 문제를 다 풀어줄데 대한 따뜻한 동포애적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진정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7천만겨레를 한품에 안으시여 뜨거운 은정을 베푸시며 세심히 손잡아 이끌어주심으로 하여 그들은 조국의 통일과 륭성번영을 위한 애국애족의 길을 변함없이 힘있게 걸어나갈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