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1) 중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남만진출부대는 안도현 량강구에 머물러있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반일부대들이 일본군의 공세앞에서 와해되거나 투항하여 일제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있었다. 일제에 투항하지 않고 큰 세력으로 남아있은것은 왕덕림부대였는데 그 부대마저 일본군의 포화가 미치지 않는 만주의 동쪽변두리 동녕과 쏘련경내로 퇴각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사태에 대처하여 반일부대와의 사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리기 위한 대책을 세우시였다.

이때 우사령휘하 구국군의 한개 련대의 주력이 량강구에 왔다. 맹탄장부대라고 부르는 이 련대에서 탄장의 비서로 있던 진한장이 함께 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시였다. 혁명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그이를 위대한 스승으로, 동지로 받들어온 진한장은 멀리서부터 두팔을 벌리고 이게 얼마만인가고 환성을 지르며 달려와서는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안도에서 우사령과 담판한 후 헤여지고 석달만에 만난것이지만 그는 그 석달을 삼년이나 삼십년으로 착각한것처럼 우정에 함뿍 젖은 눈으로 그이를 바라보며 기쁨을 금치 못하는것이였다.

맹탄장부대가 량강구에 온것은 왕덕림의 명령에 따라 얼마동안 이곳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량강구에서 진한장, 리광, 호진민 등 구국군내부에 파견되여 활동하던 정치공작원들과 동만 각 현에서 온 군정간부들을 참가시켜 반일병사위원회 회의를 두차례에 걸쳐 여시고 반일부대와의 사업에서 나서는 대책적문제들을 토의하시였다. 회의에서는 반일인민유격대부대와 오의성부대, 맹탄장부대와의 련합으로 돈화현성과 액목현성을 습격하는 전투를 벌릴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돈화현성전투는 9월 2일 새벽 3시에 시작되였다. 돈화현성에는 일본수비대, 위만군 길림경비 제3려단본부와 4련대, 9련대, 비행장경비대, 일본령사관 경찰과 위만경찰을 비롯한 막대한 무력이 주둔하고있었다.

전투에는 반일인민유격대부대와 함께 맹탄장반일부대가 참가하였다. 남문과 서문, 북문으로 일제히 돈화현성에 돌입한 부대들은 적들의 지휘처를 습격한 다음 적려단지휘부와 령사관 본관, 경찰분서를 일거에 소탕하고 적려단구분대병력에 강력한  타격을 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투의 주도권을 튼튼히 쥐시고 전투승리를 이끌어나가시였다. 두대의 적비행기가 날아와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마구 퍼부어 구국군대원들속에서 혼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진한장, 호진민에게 급전된 전투정황을 설명해주시고 차지하고있는 계선에서 철수하여 유인전으로 적들을 소멸할 새로운 전술적방안을 제시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령활한 지휘로 돈화현성전투는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돈화현성전투는 조중인민의 공동투쟁력사에서 항일유격대가 중국인반일부대와의 협동작전으로 일본군을 타승한 첫 현성전투라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돈화현성전투가 있은 후 한주일가량 지나서 액목현성전투가 진행되였는데 역시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성과에 그치지 않고 반일부대와의 사업을 계속 강화해나가도록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9월 25일과 26일에 량강구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지휘간부들과 반일부대들에 파견되여 사업하는 정치공작원들의 회의를 소집하시였다.

회의에서는 반일인민유격대 주력부대의 남만진출과정에서 이룩된 성과들이 총화되고 두만강연안 각 지구 유격대오들의 투쟁성과와 결함들이 분석되였다. 그리고 반일인민유격대의 활동거점을 왕청으로 옮기며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보다 심도있게 진행할데 대하여, 동만일대에서 급속히 확대되는 유격투쟁을 옳게 지도하며 혁명근거지창설사업을 다그치고 그것을 튼튼히 지킬데 대한 과업이 제시되였다. 특히 중국인반일부대와의 사업에서 나타나고있는 편향을 극복하고 그들과의 공동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이 중요한 문제로 토의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일부대와의 사업을 포기하려는 현상에 대하여 엄하게 비판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시였다.

우리는 혁명의 근본리익의 견지에서 반일부대문제를 보아야 하며 앞으로도 계속 인내성있게 그들과의 사업을 밀고나가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회의후 동만의 여러 지방들에 사람들을 뽑아보내시고 라자구의 구국군부대들에도 유능한 공작원을 여러명 파견하시였다. 왕청에는 별동대를 하나 더 만들어 들여보내시였다. 그리하여 백수십명에 달했던 친솔부대는 40명선으로 줄어들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량강구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시였다. 그사이 량강구의 산과 들은 하루가 다르게 가을빛이 짙어갔다. 락엽이 깔리고 서리가 내려 미구에 닥쳐올 사나운 겨울을 예고해주었다.

계절이 바뀌고 날씨도 차지니 그이께서는 은근히 병상에 계실 어머님이 걱정되시였다. 그러나 생각뿐이지 하루길밖에 안되는 소사하에 다녀올 엄두는 내지 못하시는 그이이시였다.

그러던 어느날 차광수참모장이 첩약꾸레미를 가져다 올리면서 토기점골에 다녀오시라고 절절히 말씀드리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지들의 간곡한 권고로 소사하 토기점골로 향하시였다. 첩약을 들고 내처 걸음을 재촉하시면서도 걱정되는것은 어머님께서 이 약을 보시면 또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쓴다고 꾸짖지나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남만원정을 앞두고 앓고계신 어머님을 찾아뵈왔을 때 어머님께서는 심각한 어조로 《내가 보니 너는 이전보다 좀 달라졌다. 네가 쌀자루까지 지고 다니며 어머니를 부양하게 될줄을 나는 몰랐다. 앓고있는 이 에미걱정때문이겠지. 너의 효성이 지극하니 고맙기는 하다만 그만한것으로 위안을 받을 내가 아니다. 부녀회를 늘이려고 무송에서랑 네 손목을 잡고 험한 령을 넘어다닐 때에 오늘 이런 위안이나 받자구 그랬겠느냐? 너에게는 더 큰일이 있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야 하지 않겠니.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조선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내 걱정은 말구 어서 네 갈길이나 빨리 가거라.》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맹물같은 미음조차 잘 삭이지 못하시던 어머님께서 그사이 차도가 없었다면 지금쯤은 중태에 계시여 이전보다 더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계시지나 않겠는지 가슴을 조이는 불안한 생각을 하시며 걸음을 재촉하시였다.

심장의 피가 얼어드는듯 한 이 불안과 긴장감은 야속하게도 비통한 슬픔으로 이어졌다. 토기점골의 초가집에서  그이를 기다린것은 어머님께서 지난 7월 31일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신 비통한 소식이였다.

그이께서는 토방돌우에 첩약꾸레미를 떨어뜨리고 통곡하는 두 동생을 으스러지게 그러안으시였다. 억이 막혀 한동안 아무 말씀도 못하시였다.

그이께서 오셨다는것을 알고 달려온 이웃집 김씨녀인이 다음과 같은 어머님의 유언을 전해주었다.  

《…내가 죽은 후에 우리 아들 성주가 오거든 내가 대하듯 해주세요. 왜놈들이 살아있고 조선을 독립하지 못한채 오거든 내 무덤을 파가지도 못하게 해야 해요. 아니, 문전에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지요. 그렇지만 내 자식이라고 자랑은 아니지만 성주는 싸우다가 그저 돌아오지는 않을거예요.》

뜨거운 사랑과 간절한 소망, 철석같은 믿음이 깃든   어머님의 유언을 받아안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뼈를 깎는것 같은 아픔을 느끼시였다. 그이께서는 어머님께서 남기신 유언이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동생들에게 물으시니 철주동생은 손등으로 눈두덩을 문지르고 목쉰 소리로 《형을 잘 도와드리라고 했어요. 우리가 형을 잘 도와드리구 형과 같은 혁명가가 되면 지하에 가서도 편히 잠들수 있다구…》라고 대답하였다. 그러고보면 어머님의 모든 정신력은 마지막순간에도 오직 혁명 하나만을 위해 소모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받쳐오르는 설음을 누르시며 그달음으로 두 동생을 데리시고 마을앞에 자리잡은 어머님의 분묘를 찾으시였다.

(어머니, 성주가 왔습니다. 불효막심한 이 아들을 용서해주십시오. 남만에 갔던 걸음이 늦어져서 이제야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그이께서 군모를 벗어쥐고 주저앉아 이런 속대사를 하시는데 철주동생이 느닷없이 묘우에 엎드려 손으로 떼장을 우벼내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뭘 그러고있느냐고 물었는데 동생은 대답대신 눈물을 뚝뚝 떨구며 형님이 들고온 첩약봉지들을 봉분밑에 무데기로 파묻는것이였다. 동생의 그 말없는 행동이 그이의 가슴에 연기처럼 서려있던 비애를 사정없이 건드려놓고야말았다. 그이께서는  봉분우에 엎드려 오래도록 서럽게 우시였다. 어머님에 대한 추억들로 가슴이 미여지는듯 하시였다.

그날 밤 그이께서는 한 지하조직원의 집에서 동생들과 함께 한밤을 지새우시면서 자식들을 위하여 바치신 어머님의 로고, 혁명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오신 어머님의 한생을 더듬으시였다.

지하활동을 하던 때 일도 생각되시였다. 그때 4∼5명의 공청원들과 함께 무송시가에서 적의 포위에 드신적이 있었다. 포위를 헤치고 싸움을 하면서라도 현성밖으로 나가야 하겠는데 그이께는 무기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님에게 말리허에 있는 동지들한테 가서 무기를 받아올수 없겠는가고 부탁하시니 그까짓것 못하겠니, 내가 가서 가져오마라고 선뜻 나서시는것이였다.

어머님께서는 그달음으로 말리허에 가서 권총 두자루에 장탄까지 해가지고 소고기갈피속에 넣어 이고 무사히 돌아오시였다. 어머님께서는 적들의 검문에 걸리면 한놈이라도 쏴죽이고 자신께서도 죽을 생각을 하시고 장탄을 하고 안전장치까지 풀어놓게 하신것이였다. 자식들이 하는 일에 대한 리해와 열렬한 공감이 없이는 감히 엄두도 낼수 없는 용기였고 참사랑이였다.

진정 어머님의 한생은 모진 고생속에서 모든것을 오직 조국의 광복과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식들의 혁명투쟁을 받들기 위하여 바치신 고결한 생애였다. 그 크나큰 로고와 심혈, 끝없는 심려와 사랑을 줄기차게 관통한 넋은 애국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날 아침 동생들의 손목을 잡으시고 어머님의 묘소앞에서 기어이 총대로 조국광복을 이룩하고야말리라는 철석같은 맹세를 다지시고 동생들을 소사하에 남겨두신채 량강구로 돌아오시였다.

어머님의 서거는 유격대오에 모진 슬픔을 주었다. 강반석녀사는 유격대원모두의 어머니,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이시였다. 그리하여 활기에 넘치던 대오는 자애로운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아픔으로 비감에 잠겼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누구보다 슬픔이 크셨지만 의지의 힘으로 이겨내시고 대오안에 활기가 넘쳐나도록 마음을 쓰시였다.

그이께서는 주력부대의 북만진출을 위한 준비사업을 진행하시였다.

주력부대의 북만진출은 일본군대가 안도로 들어오는것이 시간문제로 되고 맹탄장부대에 산을 끼고 초원이 있는 라자구, 왕청방향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9월말에 량강구에서 열린 반일병사위원회 회의에서 이미 토의결정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회의에서 반일인민유격대 주력부대의 총적인 지향은 왕청으로 활동거점을 옮기는것이지만 당분간은 퇴각하는 반일부대들이 집결되고있는 라자구에 틀고앉아 거기서 반일부대와의 사업을 전개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반일인민유격대 주력부대가 북만에로 진출할데 대한  방침을 내놓으시였다.

북만진출준비가 한창일 때 그이께서는 찾아온 철주동생을 만나시였다. 동생은 형님네 부대를 따라가고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동생의 그 청을 받아주실수가 없었다. 동생의 나이 열여섯살이니 총을 메워주면 군인생활을 할수도 있었지만 아직 뼈가 채 여물지 않아서 유격대에 짐이 될수 있었다. 더구나 동생은 안도지구에서 공청사업을 추켜세워야 할 무거운 책임을 걸머지고있었다.

그이께서는 동생을 그대로 돌려보내실수 없어 못가에 있는 객주집에 가시여 술과 언두부를 청해놓고 동생과 마주앉으시였다. 문풍지소리가 궁상스럽게 붕붕거리는 썰렁한 방안에서 마시지 않던 술로 아픈 마음을 달래시며 그이께서는 동생에게 말씀하시였다.

《철주야, 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이 형을 용서해다구. 낸들 왜 너를 데리고 다니구싶은 마음이 없겠니. 너를 떼두고 가자니 내 가슴도 아파서 찢어질것만 같구나. 그렇지만 철주야, 섭섭한대로 우리는 여기서 또 헤여져야겠다.》

이렇게 그이께서는 조국의 운명, 혁명의 운명을 먼저 생각하시여 동생과 작별하는 괴로움도 참으시였다.

이것은 동생과의 마지막작별로 되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랑하는 동생이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다가 주체24(1935)년 6월 14일 장렬하게 전사하시였다는 비통한 소식을 들으시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주체21(1932)년 10월초 북만진출준비를 끝낸 반일인민유격대의 주력부대 40명 대오를 친솔하시고 북만진출의 길에 오르시였다.

량강구를 출발하신 수령님께서는 대오를 이끄시고 돈화와 액목을 거쳐 산발을 타고 남호두방면으로 북상하시였다. 대오는 북만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일제에게 타격을 주고 인민들에게는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반일부대들에 혁명적영향을 주어 그들이 반일투쟁에 적극 나서도록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관지부근과 남호두지방에 북상하여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하신 다음 왕청지구로 나오시였다. 이곳에 나오신 그이께서는 당, 공청조직들과 대중단체들의 사업을 료해하시면서 각계각층 인사들과 얼굴을 익히시였다. 이것은 장차 왕청에 활동거점을 잡기 위한 기초작업이였다.

그이께서는 왕청에 계시면서 반일부대와의 사업을 늦추지 않으시였다. 왕청에는 반일부대인 관보전부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리광의 별동대가 총 몇자루를 해결하려고 한 사건으로 하여 조중무장부대들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조성되였는데 그이께서는 이에 대한 사죄도 하고 공동투쟁을 위한 방도도 의논하시려고 관보전부대를 찾아가시였다. 그런데 관보전은 항일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100명쯤 되는 병사들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돈화에서 일본군대를 족친 김일성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보자고 하면서 찾아왔다. 그이께서는 그들앞에서 연설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연설에서 왕청별동대가 무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영장부대의 병사들에게 손을 댄것이 비우호적인 처사였다는것을 인정하시고 조중인민의 공동투쟁과 반일부대의 사명과 관련한 허심탄회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 연설은 반일부대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에서 나타난 좌경적편향을 없애고 그들을 반일련합전선에 더 많이 인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왕청현 라자구에서 12월말에 반일병사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시였다.

회의에서 반일부대들의 퇴각을 저지시키며 반일련합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였다. 그때 동녕현성에 집결된 반일부대들이 쏘련을 경유하여 중국관내로 퇴각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후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동녕현쪽으로 후퇴하는 반일부대를 항일의 길에 돌려세우기 위하여 로흑산방면으로 진출하시였다. 주체22(1933)년 1월 상순 태평구를 떠나 로흑산지구에 이르신 그이께서는 어찌할바를 몰라 헤매이면서 후퇴만 하는 중국 반일부대상층들과 주동적으로 접촉하여 그들에게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며 빼앗긴 강토를 되찾기 위하여서는 반일의 기치를 계속 높이 추켜들어야 한다고 인내성있게 설복하시였다. 그리하여 동요하던 반일부대안에서는 점차 반일항전의 기운이 소생하여 혼란이 가셔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일부대와의 사업을 끝마치신 다음 대오를 이끄시고 왕청지구로 향하시였다.

왕청지구로 나오는 길은 시련에 찬 길이였다. 험한 산발을 타고 전진하는 대오의 앞을 일본군 《토벌대》가 사방에서 포위하고 달려들었다. -40℃를 오르내리는 혹한, 허리를 치는 눈 그리고 식량난이 앞을 막아섰다. 1월 하순 라자구등판에 이르러서는 더는 전진할수 없게 되였다. 이때 마가성을 가진 로인이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길수 있게 해주었다.

로인은 일제의 학정을 피해 인적없는 심심산골에 들어와 숨어살았다. 그는 대오를 이끄시는분이 김일성장군님이심을 알게 되자 유격대를 도와 온갖 지성을 바쳤다. 식량도 해결해주고 적정도 탐지해다 알려주고 휴식할 조건도 마련해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인의 안내로 50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 있는 산막으로 가시여 20일동안 군정학습을 조직진행하시였다. 이 군정학습은 불리한 정황을 극복하고 투쟁의 앞길을 헤쳐나가며 유격대원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준비시키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 라자구등판에서의 시련을 잊을수 없어 그때 일을 돌이켜보군 하시였다. 그 겨울에 라자구오지에서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고 총탄에 맞아죽지 않은것은 참으로 기적중의 기적이였다.

그이께서는 그때 무슨 힘이 시련속에서 우리를 일어서게 하였는가, 무슨 힘이 우리를 패배자나 락오분자로 만들지 않고 승리자로 만들어 항일의 기발을 그냥 추켜들게 하였는가고 자문하시고는 그것은 혁명에 대한 책임감이였다고, 그 책임감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눈구뎅이속에 그대로 주저앉아 두번다시 일어나지 못했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회고록에 쓰시였다.

《나는 그때 우리가 주저앉으면 조선이 다시 소생하지 못한다는 자각을 가지고있었다. 우리가 죽어도 조선을 구원할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우리는 라자구등판의 눈사태속에 파묻혀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을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만진출에 이어 진행된 북만진출과 군정학습을 통하여 억센 투사들로 단련육성된 유격대오를 이끄시고 주체22(1933)년 2월 요영구를 거쳐 소왕청 마촌으로 돌아오시였다.

이때로부터 소왕청 마촌에 혁명의 사령부를 두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에 대한 전략적지도를 강화해나가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