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1) 중에서 




 

갓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앞에 나선 중요한 문제는 유격대의 행동방향을 결정하는것이였다.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주체21(1932)년 5월 15일 안도현 소사하에서 반일인민유격대 지휘성원, 당 및 공청지도간부회의를 소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의 거대한 의의에 대하여 언급하시고 반일인민유격대를 급속히 확대강화할데 대한 과업과 구체적인 방도들을 밝히시였다.

그이께서는 갓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를 확대하고 정치사상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화하며 유격근거지창설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갈데 대하여 일일이 가르치시였다.

그이께서는 반일인민유격대를 확대강화하며 전반적인 항일무장력량을 강화하기 위하여서는 당면하여 남만에 있는 조선독립군부대와 통일전선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반일인민유격대를 남만으로 진출시킬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남만지방은 그이께서 초기혁명활동시기부터 혁명의 터전을 마련해오신 지역이였다. 거기에는 유격대가 의거할수 있는 군중적토대도 있었고 공청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을 비롯한 선진청년들이 활동하고있었다. 남만에는 리홍광, 리동광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항일무장부대들도 있었고 일정한 력량을 가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군부대들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만원정을 통하여 반일인민유격대의 위력을 널리 시위함으로써 남만일대 혁명조직들과 반일군중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닦고 선진청년들을 널리 받아들여 무장대오를 빨리 늘일것을 타산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특히 통화에 있는 량세봉독립군부대와 반일공동전선을 맺는것을 남만원정의 주되는 목적으로 삼으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회의에서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립군부대들과의 통일전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인민유격부대를 그들이 활동하고있는 남만 통화로 진출시키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그이께서는 남만진출부대를 편성하시고 필요한 정치군사훈련을 진행하게 하시는 한편 대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련의 전투를 조직하시였다.

5월에 안도-명월구사이 소영자령에서 진행된 위만군마차수송대에 대한 습격전투가 그러한 전투의 하나였다. 이 전투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여 처음으로 진행한 비교적 규모가 큰 최초의 매복전투였다. 12대의 말파리로 편성된 수송대를 족친 이 전투에서 위만군 10여명을 살상하고 그만큼 한 인원을 포로하였다. 그리고 보총 17정과 권총 1정, 100여명이 한달가량 먹을수 있는 많은 량의 밀가루와 천, 군화 등을 로획하였다. 첫 전리품으로서는 대단히 푸짐한것이였다.

그보다 첫 싸움에서 승리한 기쁨과 흥분이 컸다.  그날밤 12시가 넘어 우등불을 피워놓고 마당에 빙 둘러앉아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국을 먹으며 첫 전투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는데 근시경밑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등불을 들여다보고있던 차광수는 갑자기 그이의 손을 덥석 틀어잡더니 목멘 소리로 《이것 보,… 겪어보니 별게 아니구만.》라고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하시였다.

《이것이 첫 전투에 대한 참모장의 소감이였다.

나의 소감도 한마디로 집약하면 그런것이였다. 싸움이란 별게 아니다, 총이 있고 담만 있으면 누구나 할수 있는것이다, 적은 결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것처럼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보라, 그들이 우리앞에 손을 들고 투항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신심을 가지고 더 큰 싸움을 준비하자, 우리는 이길수 있다, 우리는 승리할수 있다 하는것이 나의 심정이였다.》

소영자령전투를 통하여 백두산기슭에서 승리의 총성을 높이 울리게 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6월초에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남만진출의 길에 오르시였다.  이때 우사령부대의 류본초참모장이 이끄는 200명의 구국군이 동행하였다. 그들은 남만에 있는 당취오자위군과 합작을 실현하고 그들에게서 무장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첫 목적지를 통화로 정하시였다. 안도에서 통화까지는 먼 로정이였다. 적들과의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기 위하여 행군로정을 주로 험한 산악지대로 정했으므로 그 거리는 천리가 가까왔다. 안도에서 무송까지는 장백산줄기가 뻗어있었고 무송에서 통화까지는 험한 령들로 이어진 룡강산줄기가 첩첩히 가로놓여있었다. 이런 산줄기들을 타고 부대는 한달가까이 행군하였다. 낮에는 대도로를 피해 산악행군을 하고 밤에는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부락들에 들어 정치공작과 전투훈련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오의 앞뒤를 오가시며 대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였으며 불의에 맞다드는 적들과의 조우전에서는 령활무쌍한 작전으로 전투승리를 마련하시였다.

일본군과의 유격대의 첫 조우전이 그러한 싸움의 하나였다.

통화를 향해 떠난 유격대는 류가분방이라는 마을에서 하루밤 로숙하고 이튿날 행군하다가 이도백하부근에서 숙영하고 도로를 따라 행군을 계속하였는데 유격대의 척후대가 불시에 나타난 일제침략군과 맞다들었다. 무송에서 안도방향으로 이동하는 일본군대의 척후인 경계구분대였다. 그리하여 적아간에 화력전이 벌어졌다.

원정의 목적으로 보나 유격전의 기본원칙으로 보아도 충돌을 피하는것이 좋았다. 옛날 병서에도 《피실격허》라고 강한 적은 피하고 약한 적은 치라고 하였다. 왜놈군대 척후뒤에는 한개 중대병력이 따라오고있었고 유격대에는 탄알이 얼마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피하는 길을 택하지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적의 기본력량이 들이닥치기 전에 유리한 지형을 먼저 차지하는것이 전투의 주도권을 틀어쥘수 있는 최선의 방도라는것을 간파하시고 척후대가 총격전을 벌리고있는 고지 북쪽릉선으로 부대를 재빨리 이동시키시였다. 그다음 일부 력량을 도로 남쪽으로 진출시켜 적의 척후대를 도로의 남쪽과 북쪽에서 일제사격으로 족쳐버리게 하시였다.

저들의 척후대가 녹아난것을 알고 달려온 한개 중대 잘되게 보이는 적들이 포위진을 치며 필사적으로 발악할 때에도 그이께서는 령활한 작전으로 전부대에 돌격명령을 내리시여 적을 전멸시키도록 하시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자못 크고 놀라운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대해서도 이렇게 회고하시였다.

《력사가들은 안도-무송현경전투를 조우전을 령활하게 반공격으로 전환시켜 한개 중대의 적을 완전히 소멸한 성공적인 전투라고 평가하고있다. 물론 그것은 의심할바없이 승리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의의는 비단 청소한 반일인민유격대가 한개 중대의 정규군을 완전히 소멸해버리였다는 거기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유격투쟁사상 처음으로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일본군의 신화를 깨뜨려버렸다는 거기에도 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통하여 일본군이 강한 군대인것만은 사실이지만 결코 무적도 아니고 불패도 아니며 불퇴도 아니라는것과 우리가 유격전의 특성에 맞는 전법으로 전투를 능숙하게 진행한다면 적은 력량을 가지고서도 강대한 일본군을 얼마든지 타승할수 있다는 신심을 얻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통화근방의 이도강에 이르러 원정대에 숙영을 명령하시였다. 원정대가 원기를 회복한 다음 질서정연하게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통화시내로 행진해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이께서는 통화에 있는 량세봉사령에게 련락원을 파견하시여 독립군과의 합작을 위해 반일인민유격대가 안도를 떠나 통화근방에 도착하여 휴식중이라는것을 통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유격대의 통화입성을 환영한다는 량세봉사령의 통지를 받으시고 통화에로 향하시였다.

그날은 6월 29일 저녁이였다.

독립군들은 곳곳에 《반일인민유격대를 환영한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을 독립시키자!》 등의 구호를 써붙이고 성대히 환영하였다. 수백명의 독립군병사들과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었다.

통화에 입성한 반일인민유격대원들은 조선사람들이 사는 집들에 분숙하고 류본초가 데리고 온 구국군병사들은  자위군의 안내로 중국사람들의 집으로 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조직을 통하여 그곳 형편을 료해하신 후 량세봉사령의 집을 방문하시였다.

량세봉은 조선독립군의 사령이였다. 그는 민족주의자들의 정치단체인 《조선혁명당》의 요직에도 있었고 휘하에는 병사들도 많았다. 그는 원래 위대한 수령님의 가정과는 남다른 사이였다. 수령님의 아버님과는 화전에서 의형제를 맺었고 서거하시였을 때에는 앞장에 서서 장례를 치르어주었다. 그리고 수령님께서 육문중학교를 다니실 때에는 찾아와 손에 돈도 쥐여주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위대한 수령님을 무척 반가이 맞아주었고 륭숭한 대접을 해드렸다. 그는 그이를 대장으로 부르며 정중히 대해주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그의 집에서 하루밤을 류숙하시고 이튿날 아침식사를 하신 후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이야기의 꼭지는 량세봉사령이 먼저 뗐다.

《대장도 알다싶이 지금 만주땅은 벌둥지가 됐네. 숱한 벌들이 일본이라는 불청객을 쏘겠다고 독을 물고 일어났네. 당취오, 리춘윤, 서원원, 손수암, 왕봉각, 등철매, 왕동헌 … 이건 다 동변도의 벌들이구 동만과 북만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벌들이 일어났나. 이런 때에 우리두 합세해서 잘 싸우면 이길수가 있다고 보는데 대장생각은 어떤가?》

《합세해서 싸우자는 사령님의 말씀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저희들도 사실 이 문제를 의논해보려고 사령님을 찾아왔습니다. 조선의 무장부대들이 서로 합세하고 중국의 무장부대들도 서로 합세해서 조중 두 나라 애국자들과 인민들이 한덩어리가 되여 싸우면 능히 일제를 타승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장이 동감이라면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 서로 진지하게 의논해보세.》

《그런데 사령님, 시국은 단결을 요구하는데 우리 민족내부는 유감스럽게도 단결을 이루지 못하고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내부도 단결이 안되고 민족주의자들의 내부도 단결이 안되고 또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호상간에도 단결이 안되고있으니 이렇게 해가지고서야 일본이라는 강적과 싸울수 있겠습니까?》

량세봉사령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편견을 숨기지 않으면서 단결이 안되는것을 다 좌익에 섰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실책으로 밀어붙이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해온 온갖 폭력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만이 할수 있는 말이였다.

그러나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그가 로동자, 농민들을 적대시하고 지주나 자산가들을 동정하는데로부터 그런 말을 하는것이 아니라고, 그가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폭력투쟁을 비난하는것은 공산주의리념자체를 반대하기때문도 아니며 또 반대의 리념인 자본주의사상을 옹호하기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하시였다. 그가 조소하고 비판하는것은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운동방식이나 투쟁방법이였지 공산주의리념 그 자체는 아니였다. 그이께서는 그와의 담화를 통하여서도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기성세대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얼마나 막심한가 하는것을 다시한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대중투쟁과정에 범한 좌경망동일반을 민족의 단결을 파괴하는 해독행위로 묘사하는 그의 편견에 대해서도 바로잡아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시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량세봉의 안내를 받으며 환영모임에도 참석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연설에서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을 광복하며 이 성스러운 투쟁의 길에서 모든 청년들이 대오의 앞장에 설데 대하여 열렬히 호소하시였다.

그이의 연설은 독립군지휘관들과 병사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은 독립군지휘관들과 병사들은 그이를 사령관으로 모신 반일인민유격대를 무척 부러워하면서 《김일성장군님의 말씀은 어느 하나도 그른것이 없다.》, 《김일성장군님의 부하가 되여 힘껏 싸워봤으면 한이 없겠다.》, 《김일성장군님을 따라야 나라를 독립할수 있다.》라고 격동된 심정을 터놓았다.

환영모임이 끝난 후 량세봉은 몇몇 참모성원들을 데리고 반일인민유격대를 방문했는데 뜻밖에도 반공연설을 하는 바람에 모처럼 마련되였던 환영분위기가 적대적분위기로 바뀌여졌다. 유격대원들이 분개하여 국민부의 죄행을 들며 반격을 가하자 그는 노여움을 타면서 례의에 어긋나게 행동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내성있게 그를 설복하시였다.

량세봉의 그릇된 편견으로 회담이 결렬된 그날 밤 통화시내에 있는 조직원으로부터 독립군이 반일인민유격대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량세봉이 그런 음모를 꾸민다고는 믿을수 없으시였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그이께서는 독립군과의 충돌을 피해 그날 밤으로 부대를 통화에서 철수시키시였다.

반일인민유격대와 량세봉독립군과의 합작이 실현못된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였다. 사실 량세봉은 공산주의에 대한 몰리해와 본의아닌 적대감에 포로되여 반일인민유격대와의 합작을 결심하지 못했다. 그는 수하의 참모가 반일인민유격대와의 합작을 류산시키려고 작간한것도, 유격대의 무장을 해제할 모의까지 꾸민것도 몰랐다. 그는 후날 수하참모가 꾸민 일제의 유인계책으로 살해되는 때에야 자기의 실책을 뉘우쳤다. 그는 운명직전에 부하들에게 《나는 죽어서 항일을 할수 없지만 너희들은 살아서 김일성사령을 찾아가라. 살길은 그 길밖에 없다!》라는 유언을 남기였다. 그것은 그가 반공의 벽을 부시고 뛰쳐나와 애국자의 량심으로 절규한 련공선언이였다.

통화에서 철수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대를 이끄시고 삼원포, 고산자, 류하, 해룡, 몽강을 거쳐 안도에 이르는 귀환로정에서 중국인반일부대인 당취오자위군과의 반일공동투쟁, 유격대오를 확대강화하며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꾸리기 위한 사업을 적극 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유격대원들로 정치공작소조를 무어 지방들에 파견하시여 혁명조직들의 사업을 적극 도와주시고 광범한 대중속에서 정치사업을 진공적으로 벌려 그들을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키시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청년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유격대를 찾아와 입대를 청원하였으며 인민들은 모든 성의를 다하여 유격대를 도와나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류하에 머무를 때에는 리홍광, 리동광과의 련계를 위하여 반석지방에 련락원을 파견하시였고 몽강에서는 본격적인 군사정치활동으로 자위군을 통하여 적지 않은 무장도 해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대를 이끄시여 이해 8월 하순 몽강에서 무송을 거치지 않고 안도현 량강구로 돌아오시였다. 이로써 반일인민유격대의 남만진출은 빛나게 결속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만원정을 통하여 통화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독립군을 비롯한 민족주의세력에 혁명적영향을 주어 그들이 장차 반일민족통일전선에 적극 나설수 있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반일인민유격대 주력부대의 대오를 확대하시고 전투력을 강화하심으로써 혁명무력전반을 확대발전시킬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놓으시였다.

안도를 떠날 때 4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대오는 몽강에 이르러서는 150명으로 늘어났고 유격대원들은 멀고도 험난한 원정과정에서 사상의지적으로, 육체적으로 더욱 단련되였으며 전투와 행군, 숙영 등 군사활동의 귀중한 경험을 체득하였다. 그리고 남만원정과정에 원정대는 이르는 곳마다에서 혁명조직을 확대하고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보다 튼튼히 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