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1) 중에서 





 


 

겨울명월구회의가 끝나자 회의참가자들은 각기 안도, 왕청, 연길, 화룡, 훈춘, 길림, 돈화, 녕안 등지로 떠나갔다.

떠나면서 그들은 김일성장군님의 손을 굳게 잡고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서 선구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실 것을 바랐다.

그때 일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렇게 회고하시었다.

『<첫 시작은 김일성이 떼라. 무슨 일이나 표본이 있고 시범이 있는 법이 아니냐.>

동무들은 이런 말로 나와의 작별인사를 대신하였다.』

마디마디에 자기 지도자에 대한 크나큰 믿음, 충정이 담긴 작별인사였다. 생사를 같이할 맹약을 한 혁명동지들만이 나눌 수 있는 작별인사였다. 하기에 그분께서는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을 잊지 못해하신 것이었다.

열혈혁명동지들을 떠나보내신 다음 안도에 돌아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님께서 유산으로 남기신 두 자루의 권총을 땅속에서 파내시었다. 그분께서는 그 두 자루의 권총을 쳐들고 동지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자,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아버지는 의병도 아니고 독립군도 아니었지만 세상을 떠나시는 날까지 이 총을 가지고 있었다. 왜? 무장투쟁이야말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최고의 투쟁형태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총적인 지향은 무장투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 두 자루의 권총을 물려받을 때 아버지가 지향했던 것을 내가 대신하여 실현시키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이 두 자루를 밑천으로 삼아 독립행군을 시작해보자. 지금은 이 두 자루가 전부이지만 이것이 새끼를 치고 또 쳐서 200자루, 2,000자루, 2만자루로 될 날을 생각해보라. 총 2,000자루만 있으면 능히 나라를 해방할 수 있다. 밑천이 있으니 이것을 자꾸 굴려 2,000자루, 2만자루가 되게 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두 자루의 권총을 억세게 틀어 잡으시고 무장대오를 꾸리고 무기를 마련하는 사업 등 겨울명월구회의방침들을 관철하기 위한 사업을 줄기차게 벌이시었다.

안도에 오신 그분께서는 흥륭촌과 소사하, 대사하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두만강연안의 넓은 지역에서 활발히 벌어지는 반일인민유격대창건준비사업을 정력적으로 지도하시었다. 그분께서 계시는 안도지구로는 국내와 만주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공작원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으며 그분께서 파견하시는 통신원들이 또한 매일같이 그곳을 떠나갔다.

그분께서는 무장대오를 꾸리는 사업에서 사람이 기본이라고 하시면서 여기에 선차적 관심을 돌리시었다.

무릇 무장대오라 할 때 사람과 무기가 가장 중요한 두가지 필수적 요소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군사정치적으로 준비된 인간을 의미한다. 정치를 알고 군사를 아는 사람,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장기간 무장을 들고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청년들이다.

그분께서는 그런 청년들을 묶어 세워 항일유격대의 첫 대오를 마련하기 위한 사업을 벌이시었다.

당시 형편에서 무장인원을 꾸리는 사업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국가적 권력을 쥐고 있다면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으로 필요한 군사인원을 손쉽게 충당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식민지민족해방혁명에서는 법적 수단으로는 사람들에게 총을 메울 수 없다. 이 혁명에서는 혁명을 영도하는 수령과 선각자들의 호소가 법을 대신하며 매개 사람들의 정치도덕적 자각과 전투적 열정이 참군을 결정하게 된다. 대중은 그 누구의 요구나 지령이 없어도 자기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총을 멘다. 이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인민대중의 본성적 행위인 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원리에 기초하시어 무장대오를 꾸려 나가시었다. 그분께서는 새 세대 청년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각성시켜 그들의 자각적인 입대열의를 북돋아주고 그들가운데서 정치군사적으로 준비된 청년들을 선발하여 무장대오에 받아들이시었다. 이와 함께 그분께서는 노동자계급 본위의 기성이론에 구애됨이 없이 농민이나 학생출신의 청년들을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무장대오에 받아들이도록 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1「1932」년 3월 상순 안도현 소사하에서 차광수, 김일룡, 박훈, 김철「김철희」, 이영배를 비롯한 18명의 핵심들을 골라 그들로써 먼저 소규모 유격대「유격대소조」를 조직하시었다. 이와 함께 연길, 왕청, 화룡, 훈춘지방에서도 같은 형태의 무장대오를 꾸리도록 하시었다. 그리하여 현마다 10∼20명안팎의 인원으로 되는 무장대오들이 꼬리를 물고 태어나게 되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장력의 2대요소의 하나인 무장을 갖추기 위한 투쟁을 이끌어주시었다.

곤란하다 곤란하다 하여도 무기를 해결하는 일처럼 그렇게 큰 난관은 없었다. 무기를 대줄 국가적 후방도, 정규군의 지원도 없었고 총 한자루 사올 돈도 없었다. 또한 외부로부터 최소한의 무장원조도 받을 수 없는데다가 일제는 한자루의 총도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밝히고 있었다. 무기를 얻는 문제가 일정에 오르자 어떤 사람들은 이미 꾸려놓은 혁명촌들에 나가 농민들에게 호소하여 돈을 모아 무기를 사오는 것이 가장 좋은 출로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의견을 따르지 않으시었다. 부자들에게 호소하여 자금을 뽑아낸다면 몰라도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무기를 산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목숨을 내대고 총을 탈취하는 것보다는 돈을 모으는 일이 훨씬 쉬울 수도 있었다. 그분께서는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택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무장은 우리의 생명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구호밑에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하는 한편 자체의 힘으로 무기를 만들기 위한 투쟁을 벌이도록 하시었다.

적의 무기를 탈취하는데서 첫 목표는 안도 소사하본부락에 있는 지주 쌍병준의 집이었다. 그놈은 40명가량의 보위단원을 두고 있는 대지주였다.

그분께서는 주체21「1932」년 3월 하순 어느날 유격대소조 성원들과 적위대원들로 습격조를 편성하시고 불의에 기습하도록 작전을 펴시었다. 전투서열은 3개조로 나누고 한개조는 지주집토성밖의 보위단병영을, 두개조는 토성안의 기본병영을 치도록 하시었다. 습격전투는 신속하게 진행되어 보위단을 제압하고 10여자루의 총을 탈취하였다.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투쟁은 두만강연안의 모든 곳에서 군중적 운동으로 힘차게 벌어졌다. 유격대소조성원들, 적위대원들, 소년선봉대원들, 지방돌격대원들을 선두로 남녀노소 할 것없이 모두 떨쳐 일어나 일제침략군대와 일만경찰들, 친일지주들과 반동관료배들의 무기를 빼앗는 투쟁을 벌이였다.

무장을 얻기 위한 투쟁은 전민항쟁개시를 위한 서막이었고 예비적인 싸움이었다. 혁명이 무기를 요구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군중은 서슴지 않고 이 싸움에 떨쳐 나섰다. 이 과정에 그들은 각성되고 자기자신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자각하게 되었다. 물론 어려운 싸움이었고 가슴아픈 희생도 있었다. 그때 마련된 한자루한자루의 총에는 애국의 뜨거운 피가 스며있었다.

그분께서는 자력갱생의 구호를 드시고 무기를 자체로 만들기 위한 투쟁도 동시에 벌이도록 하시었다. 이 역시 간고한 투쟁이었다.

이 간고하고도 시련에 찬 나날들에 발휘한 혁명가들과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그분께서는 만일 어느 문필가가 무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 인민이 발휘한 무비의 희생성과 대담성, 임기응변의 기지와 비상한 창발성에 관한 일화들을 종합하여 형상적 화폭으로 펼친다면 그것은 아마 하나의 장엄한 서사시로 엮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무장대오를 꾸리고 무장을 갖추는 사업과 함께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사업도 매우 중요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두만강연안의 넓은 지역을 장차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는데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정하시고 이 일대의 농촌들을 혁명화하는데 큰 힘을 넣으시었다.

인민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튼튼히 준비시키는 것은 혁명발전의 필수적 요구였으며 광범한 대중이 자각적으로, 거족적으로 동원될 때 항일전쟁의 승리도 담보되는 것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1「1932」년 2월부터 3월까지의 사이에 몸소 푸르허마을을 혁명화하시어 농촌혁명화의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시었다.

푸르허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있어 앞으로 유격활동을 벌이는데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은 안도에서 돈화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이 동네를 거치지 않고서는 돈화지방이나 남만일대로 자유롭게 내왕할 수 없었으며 이 마을을 혁명화하지 않고서는 소사하, 대사하, 유수하를 비롯한 인접마을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유능한 공작원을 여러명 파견하였는데 가는 쪽쪽 다 실패하였다. 거기에 조직을 박아 넣어야 하겠는데 누구든지 들어가기만 하면 다 잡혀서 목숨을 잃으니 난사였다.

이런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이 마을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시었다. 그러자 동지들이 한결같이 그분의 신변을 염려하여 만류해 나섰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결심을 굽히지 않으시었다. 그분께서는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송씨성을 가진 조직원을 불러 마을에 돌아가면 집에 일손이 딸려서 머슴꾼총각을 하나 얻어온다고 소문을 퍼뜨리라고 일깨워주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직원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렇게는 안된다고 말씀드리자 이렇게 절절하게 말씀하시었다.

『혁명을 위해 한 목숨 바치기로 결심한 우리가 <머슴꾼>노릇을 좀 하면 뭐랍니까. 그곳은 반동이 심한 마을이니만큼 철저히 위장을 해야 합니다. 동무는 주인으로서의 처신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며칠후 그분께서는 푸르허마을에 「머슴꾼」으로  들어가시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분을 진짜 머슴으로 알고 차별을 하였다. 마을여인들은 반말까지 하며 우물주변에 얼어붙은 얼음까지 까 달라고 하였다. 그분께서는 마을에서 달반가량 「머슴살이」를 하시면서 마을에 조직도 꾸리고 핵심청년들도 발동시켜 밀정도 청산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푸르허마을의 혁명화를 통하여 혁명가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란 있을 수 없으며 범을 잡자면 범의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시었다. 비범한 사업수완과 강철의 의지, 한없이 넓은 도량과 인민적 풍모를 지니신 그분의 푸르허공작은 동만 농촌들의 혁명화를 힘있게 떠밀어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농촌혁명화를 추진하시면서 동만의 인민들을 실천투쟁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키도록 하시었다. 그분께서 주체21「1932」년 봄에 조직지도하신 춘황투쟁은 동만지방 인민들의 혁명화사업을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시켰다.

1931년의 전례없는 흉작과 그에 따르는 혹심한 기근은 동만지방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일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

그분께서는 추수투쟁에서 앙양된 군중의 투쟁기세를 늦추지 않고 일제와 친일지주를 반대하는 춘황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하시었다.

그분의 지도밑에 정치공작원들과 혁명조직들은 투쟁위원회를 튼튼히 꾸리고 춘황투쟁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었다. 이무렵 일제는 견결한 혁명투사였던 이태극, 곽영희를 무참히 학살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그들을 추모하는 추모모임을 열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규탄하며 분노한 인민들을 일제히 춘황투쟁에로 일떠 세우게 하시었다.

10여만 군중이 떨쳐 나선 이 투쟁은 처음에는 지주들에게 식량을 꾸어 달라고 요구하는 차량투쟁으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놈들의 양곡을 빼앗아내는 탈량투쟁으로 넘어가고 나아가서 일제와 반동군벌들을 반대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수천수만의 군중이 대오를 짓고 「조중빈농 및 고농들은 먹을 것을 요구한다!」, 「친일지주와 반동지주의 창고를 헤쳐 쌀 없는 조중빈고농에게 나누어주자!」, 「일제와 중국반동군을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마을과 거리들을 누비며 나아갔다. 이 기세에 질겁한 지주와 경찰들은 도시로 도망쳤다. 폭동군중은 반동지주들의 창고를 헤치고 식량을 빼앗아내고 주구들을 청산하였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농민들의 투쟁에 강력한 연대성을 표시해 나섰다. 춘황투쟁은 원수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승리적으로 끝났다.

춘황투쟁에서 단련되고 검열된 우수한 노동자, 농민들, 청년들이 무장대오에 망라되었다. 혁명조직들과 인민들의 각성이 한층 높아지고 단련됨으로써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이 보다 튼튼히 다져졌다.

안도를 중심으로 현들에 유격대의 무장대오가 조직되고 무장도 해결된데다가 동만 농촌들이 혁명화되어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이 축성됨으로써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할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와 정력적인 활동이 낳은 빛나는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