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1) 중에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천리혜안으로 정세발전추이를 통찰하고 계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가 반드시 만주를 침공할 것이라고 예상하시었다. 조선을 먹은 다음에는 만몽을 먹고 다음에는 중국을 먹고 나아가서 아시아를 제패하려는 것, 이것이 일본의 야망이고 국책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다음부터 만주침략의 준비를 다그쳐왔으며 그 구실을 만들어내는데 골몰했다. 동북군벌두목 장작림폭사사건, 1931년에 들어와 조작한 만보산사건과 나카무라대위「실종」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취한 모든 강도적 행위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28년 5월에 일본관동군사령관 무라오카는 중국관내에서의 정세변화에 대처한다는 구실밑에 혼성제40여단을 봉천(오늘의 심양)에 진출시키고 자기네 군사령부를 그곳에 옮길 것을 획책한 데 이어 베이징으로부터 봉천으로 돌아오는 장작림군벌을 봉천입구의 남만철도와 경봉철도가 교차되는 철교에서 열차폭파사건을 조작하여 살해하였다. 1931년 봄 만보산사건 때에는 저들이 장춘에서 70∼80리가량 떨어져있는 자그마한 농촌마을에서 조선농민들을 부추겨 개답할 논에 이통하물을 끌어들일 수로공사를 강행케 하여 중국원주민들의 반발을 야기시켜놓았다. 일제는 이를 기화로 「조선인농민보호」, 「일본인권익옹호」라는 구실밑에 장춘영사관 경찰들을 현지에 내몰았다. 나카무라대위「실종」사건이란 「농학사」의 신분을 가지고 간첩활동을 하던 관동군 참모본부소속 나카무라대위와 부하 3명이 6월에 중국군대에 잡혀 처단된 사건이다. 이때에도 일본은 도적이 매를 드는 식으로 관동군병력을 심양에 집결시키고 공격태세를 갖추게 하는 소동을 벌렸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화룡, 연길, 왕청일대에서 대중정치사업에 힘을 넣고 계시었다.

그분께서 돈화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활동하고 계실 때 일제는 만주침략을 단행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심양 북대영서쪽 류조구에서 일본만철회사소유의 철도가 폭파되었는데 일제는 저들이 관동군 특무기관을 내몰아 선로를 폭파하고는 장학량군이 폭파하고 일본수비대를 공격했다고 꾸미었다. 이를 구실로 일제는 북대영을 점령하고 19일 아침에는 봉천비행장을 깔고 앉았다. 심양에 이어 동북지방의 대도시들이 연이어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닷새도 못 되는 사이에 일제침략군은 요녕, 길림 두 성의 방대한 지역을 거의 다 점령하고 전역을 넓히면서 금주방향으로 육박하였다.

9.18사변이 일어나자 세계여론은 주권국가에 대한 침략행위로 규탄하고 일본이 강점지역에서 철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괴이한 것은 침략을 당한 당사자들인 장학량과 동북변방군 30만대군이 하루밤사이에 저항없이 심양을 내주고 광대한 만주땅을 버리고 도주한 것이었다. 장개석남경정부도 중국사람들과 군인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평정과 인내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동경에 대표단을 보내어 일본이 다른 지역들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소중접경지대를 일본에 양도하는데 동의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사태발전을 주시하시며 그것이 조선혁명에 끼치게 될 영향을 두고 각방으로 분석하시었다.

일본의 만주강점으로 하여 이곳에 발을 붙이고 살며 혁명투쟁을 벌이던 조선인들과 혁명가들은 자기곁에 일본이라는 큰 적을 두게 되었다. 조선과 만주를 갈라놓고 있던 국경은 사실상 제거된 셈이었다. 일본이 만주에 괴뢰정부를 세우게 되면 그것도 하나의 큰 장애물이 될 것이었다. 일본군의 만주강점은 의심할 바 없이 혁명투쟁앞에 닥쳐온 난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불리한 것만 생각하지 않으시었다. 일본의 만주침략을 예견해오신 그분께서는 이때야말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여야 할 절호의 기회로, 항일대전의 포성을 울릴 절호의 기회라고 보시었다. 그것은 9.18사변으로 하여 조선인민의 반일감정이 더욱 격화될 것이고 수 억만 중국인민들이 반일항전에 떨쳐나 한전호에서 같이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일제는 통치구역이 더 넓어져 식민지통치에서 종전의 밀도를 보장하지 못할 것이고 불피코 통치력의 약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었다. 실지로 장학량군대의 총퇴각으로 군벌통치체계가 마비되고 일제가 전과확대에 급급하여 치안유지에 힘을 기울이지 못하다 나니 만주지방에는 한동안 무정부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사태들을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대전의 포성을 울릴 것을 결심하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때의 심경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시었다.

『나는 그때 어째서인지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는다.>는 조선속담을 생각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을 두고 터득하고 정식화 해놓은 그 인생철학이 나에게 심오한 진리를 귀띔해주었다.

(만주는 범의 굴로 되었다. 이 굴에서 일본제국주의라는 범을 잡아야 한다. 이제는 무장을 들고 투쟁할 때가 되었다. 이런 때에 싸워서 결판을 짓지 못하면 우리는 영영 사람구실을 못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어서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였다.』

그분께서는 이러한 결심으로 일제의 만주침공직후인 9월 21일 돈화에서 당 및 공청지도간부회의를, 이어 9월 하순에 송강에서 안도지구 혁명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그리고 10월 18일에는 함경북도 종성군 광명촌에서 국내정치공작원들과 혁명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시었다. 회의들에서 그분께서는 지금이야말로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하시면서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사업을 본격적으로 다그칠 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직적인 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전반사업을 조직영도 하시면서 간도지방에서 일어난 추수투쟁을 힘있게 이끌어주시었다.

이 추수투쟁은 주체20(1931)년 8월말 그분께서 연길현 태평구에서 간도농민들을 추수투쟁에로 불러일으킬 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신 데 따라 일어난 대중투쟁이었다. 추수투쟁에는 간도의 10여만 농민들이 참가하였으며 일제침략자들과 반동지주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고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추수투쟁을 확대발전시켜 동만각지 농민대중을 실천투쟁 속에서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더욱 튼튼히 다지게 하시었다. 이 투쟁 속에서 소박한 보통사람이 투사로, 혁명가로 자라나고 동만의 혁명조직들이 수많은 핵심들로 자기 대오를 튼튼히 꾸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훗날 유격대의 골간으로 되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추수투쟁을 지도하시는 그 다망한 속에서 무장투쟁에 대한 구상을 계속 심화시키시었다. 그분께서는 특히 무장투쟁의 형식을 선택하기 위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바치시었다.

그분께서는 광명촌회의후 유격전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계시었다. 국가가 없으니 정규군에 의한 항쟁은 바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당장 전민이 동원되어 무장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조건도 성숙되지 못 ./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그분의 마음은 자연히 유격전에로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레닌은 1906년에 집필한 「유격전쟁」에서 유격전을 대중운동이 이미 실지로 폭동에 이르렀을 때나 또는 국내전쟁에서 대전투와 대전투사이에 얼마간 중간기가 닥쳐오고 있을 때 불가피적으로 나타나는 보조적인 투쟁형태로 규정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상비적인 혁명무력에 의한 유격전을 무장투쟁의 기본형식으로 선택하는 경우 그 투쟁형태가 우리 나라 실정에 적합하겠는가 적합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여 보시었다. 그 과정에 「손자병법」도 보시고 「삼국지」도 다시 보시었다. 우리 나라 병서들 가운데서는 「동국병감」이나 「병학지남」과 같은 것을 보시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의 빨치산들의 투쟁과 우리 나라 의병출신 명장들이 적용한 다양한 전법들과 임진조국전쟁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시었다. 유격전을 기본형식으로 규정하는데 있어서 임진조국전쟁은 그분께 많은 것을 시사해주었다. 그분께서는 임진조국전쟁을 승리에로 장식한 의병들의 투쟁을 유격전의 역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하나의 모범이라고 간주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격전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키는 과정에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수적, 기술적으로 우세한 강도 일제침략군과 맞서 싸워 이기자면 변화무쌍한 유격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시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주체20(1931)년 12월 16일 연길현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시었다. 이 회의를 편의상 「겨울명월구회의」라고 부른다.

회의에는 차광수, 이광, 채수항, 김일환, 양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중권, 이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한 40여명의 혁명전위투사들이 참가하였다. 회의는 10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전개 할 데 대하여』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먼저 일제의 만주강점으로 조성된 주객관적 정세와 선행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교훈을 분석총화 하시고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 데 대하여 밝히시면서 전 민족을 항일무장투쟁에 총궐기시킬 데 대하여 가르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어 우리는 이제부터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신을 무장하면서 자체의 무장역량을 확대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하시고 유격전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 할 데 대한 전략적 방침을 제시하시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우리가 조선의 국경지대와 광활한 만주의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한다면 적은 역량을 가지고도 적의 무력을 부단히 소멸약화시켜 최후승리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유격전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무장투쟁을 조직전개 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설에서 유격전의 형식으로 무장투쟁을 벌이는 데서 나서는 과업과 방도들을 전면적으로 밝히시었다.

그분께서는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하여서는 적의 반혁명무력을 격파할 수 있는 자체의 혁명무력을 준비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할 데 대한 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히시었다.

『강도 일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자면 장기전에서 능히 자체의 역량을 보존 확대해 나갈 수 있고 적의 역량을 부단히 소멸약화시킬 수 있는 혁명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혁명무력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반일인민유격대의 성격과 사명을 밝히시면서 이 군대는 반드시 진정한 인민의 군대, 혁명군대, 정치적 군대, 노동자계급의 군대로 되어야 한다고 하시었다. 그리고 반일인민유격대를 우수한 청년공산주의자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시키고 선진적인 노동자, 농민, 애국청년들을 받아들여 유격대오를 끊임없이 확대하며 유격대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영도를 확고히 보장할 것을 강조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이 유격대조직사업과 병행하여 무장력의 2대요소의 하나인 무장을 갖추는 것이 무장투쟁의 성과를 좌우하는 기본요인의 하나라고 하시면서 『무장은 우리의 생명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신을 무장하는 동시에 자체로 무장을 만들 데 대한 과업을 밝히시었다. 그리고 처음에 소규모의 유격대를 지방마다 조직하고 그를 무장시키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면서 점차 대부대의 혁명무력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설에서 다음으로 유격근거지를 창설할 데 대한 방침을 밝히시었다.

그분께서는 유격전의 형식으로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위하여서는 유겨근거지를 창설해야 한다고, 유격근거지는 조성된 주객관적 정세와 투쟁이 벌어지는 환경과 조건 그리고 무장역량의 준비정도에 따라 각이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지금 형편에서는 해방지구형태의 근거지인 유격구역을 창설해야 한다고 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설에서 이밖에도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닦을 데 대한 방침, 조중인민의 반일통일전선을 형성할 데 대한 방침, 당조직사업과 공청사업을 강화할 데 대한 방침을 밝혀주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연설에서 제시하신 전략적 방침은 조성된 긴박한 정세와 반일민족해방투쟁발전의 요구에 맞게 무장투쟁을 개시함으로써 일제침략무력을 격파하고 조국광복을 이룩할 수 있게 하는 방침이며 모든 반일대중을 묶어세워 반혁명세력에 대한 혁명역량의 결정적 우세를 보장하고 혁명승리를 앞당기게 하는 가장 현명한 방침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사상, 선군사상에 기초하시어 식민지민족해방전쟁에서 나서는 전략전술적 문제들에 대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적인 해답을 주심으로써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은 물론 세계혁명적 인민들이 확고히 틀어쥐고 나가야 할 투쟁강령, 행동의 지침을 마련하시었다.

겨울명월구회의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문제는 무장투쟁의 형식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가 낙착되어야 무장조직의 형식과 근거지의 형태문제 같은 이여의 문제점들이 동시에 결정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국가적 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이 있어야만 유격전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고전가들이 내놓은 공식이었다. 이로부터 후방으로 될 국가도 없고 정규군도 없는 조선의 실정에서 유격전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 논쟁거리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이 문제를 독창적으로 푸시었다. 그분께서는 무장투쟁형태 가운데는 역사적으로 정규전과 유격전이 있었는데 정규전은 주도적인 것이었으나 유격전은 보조적인 것이었다는 것, 우리는 이 두가지 형태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 하는데 나 개인의 견해로 볼 때에는 유격전이 우리 나라 실정에 더 적합할 것 같다는 것, 정규전이 불가능한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는 기존관례에 구애됨이 없이 유격전이 주도적인 투쟁형태로 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변화무쌍한 유격전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본 무장투쟁형식이다. 국가가 없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정규전으로 일제와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군사기술적으로나 양적으로 열등한 무력으로 강대한 일제침략군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만큼 변화무쌍한 유격전을 해야 한다. 이외에 다른 출로란 있을 수 없다.』

그분께서는 몇몇 사람들이 탱크와 대포, 비행기와 같은 현대적인 정예무기로 장비된 수백만 대군을 국가적 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그것도 남의 나라 영토에서 유격대와 같은 비정규적인 무력으로 이겨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표시했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주시었다.

『우리는 국권도 영토도 자원도 다 빼앗긴 망국노의 아들들이다.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는 적수공권의 청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주저없이 도전해 나섰다. 무엇을 믿고? 인민을 믿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려고 결심하였다. 인민이 국가이고 인민이 후방이며 인민이 정규군이다. 싸움이 시작되면 전민이 병사가 되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벌이게 될 유격전은 인민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창적인 주체의 혁명원리, 심오한 인민위주의 철학적 원리와 혁명에 대한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이 넘쳐흐르는 그분의 말씀은 회의참가자들을 무한히 격동시키고 승리의 신심과 투쟁의지를 북돋아주었다. 회의참가자들은 그분께서 내놓으신 전략적 방침들을 전폭적으로 지지찬동하였다.

참으로 겨울명월구회의는 항일무장투쟁의 시초를 열어놓은 회의로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이 선군의 기치밑에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역사적인 회의였다. 카륜회의에서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그 최고단계인 무장투쟁에로 이행시키려는 조선민족의 의지가 확인되었다면 겨울명월구회의에서는 그 의지가 거듭 확인되고 『무장에는 무장으로, 반혁명적 폭력에는 혁명적 폭력으로!』라는 구호밑에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항일전쟁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바로 이 회의에서 유격전의 방향을 규정해 주는 전략과 전술적 원칙의 골자가 마련되었으며 그것을 기초로 하여 비상히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무장투쟁의 전법들이 창조되게 되었다.

항일대전의 선포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은 선군의 기치밑에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새로운 높은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명월구회의는 유격전의 형식, 유격대의 조직, 유격근거지창설 등 유격전의 방향을 규정해 주는 전략전술적 원칙들을 천명함으로써 식민지, 반식민지나라 인민들에게 반제민족해방위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을 명시해 주고 그들의 혁명투쟁을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바로 여기에 겨울명월구회의의 거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