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1) 중에서 





 

 

조선혁명군과 혁명조직들이 항일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사업을 활발히 벌리고 있을 때 돈화지구에서 8.1폭동이 일어났다.

종파사대주의자들이 일으킨 좌경모험주의적인 폭동이었다. 그들은 국제반전일을 계기로 1930년 8월 1일 돈화현 길돈철도연선지방을 중심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준비없는 인민들을 철도와 교량의 소각파괴, 전주와 전기줄의 절단, 경찰기관의 습격, 선전물의 배포에로 내몰았다. 이것은 지난 5월에 동만에서 종파사대주의자들이 정치적야욕과 탐위적 목적으로 조선농민들을 5.30폭동에 내몰아 숱한 피해를 보게 한 것과 같은 범죄적인 행위였다. 8.1폭동을 계기로 만주반동군벌당국은 군대와 경찰을 내몰아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체포, 투옥, 학살하고 혁명조직들을 파괴하였다. 폭압선풍은 돈화지구는 물론 동만, 할빈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휩쓸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사태의 엄중성을 헤아려보시고 지체없이 폭동이 휩쓴 지역들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시여 혁명군중이 종파분자들의 선동에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하시고 폭압선풍에서 혁명조직들을 지켜내기 위한 조치를 취하시었다.

한편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시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길에 나서시었다. 그때 동지들은 앞을 막아 서며 지금은 위험하니 자기들이 가보고 오겠다고 하였지만 그분께서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애써 씨를 뿌리고 키워온 혁명조직들이 위험에 놓여있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에 앉아만 있겠는가, 길림과 해룡, 청원, 교하, 할빈, 돈화일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은 곳들이다, 내가 꼭 가야 한다고 하시며 길을 떠나시었다. 그분께서는 길림에 가시여 며칠간 머무르시며 수습대책을 세우신 다음 해룡, 청원을 거쳐 교하에 가시고 이어 할빈에 가시었다. 할빈에서 그분께서는 이곳에 있는 국제당연락소에 찾아가 5.30폭동과 8.1폭동으로 하여 동만에 조성된 사태에 대한 통보도 하고 카륜회의정형도 알려주시었다. 그리고 지하에 숨어있는 조직성원들을 찾아내어 카륜회의방침도 해설해주시고 동지들사이의 연계도 지어주시었다. 그분께서는 할빈에서 사업을 마치시고 돈화에 가시여 제반 수습대책을 세워주시었다.

길림에서 돈화에 이르는 기간 그분께서는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겪지 않으면 안되시었다. 그때마다 동지들과 인민들이 헌신적으로 막아주었다. 길림에서 해룡, 청원으로 가실 때에는 열차안에서 뜻밖에 만난 무송소학교시절의 동창생이고 그분의 교양과 지도로 혁명의 길에 나선 중국인 청년 장울화가 그분을 1등칸에 모셔서 적들의 감시와 수색을 모면하도록 해주었고 해룡역에 내리실 때에는 가병까지 거느리고 아들마중을 나온 무송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장울화의 아버지가 고급마차에 그분을 모시고 일본영사관의 수사진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분께서 교하에 가시었을 때에는 이름도 모르는 한 아주머니가 희생적으로 나서서 경찰의 추적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8.1폭동으로 인한 피해를  수습하시는 한편 중부만주일대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대중적 지반축성사업을 적극 추진하시었다.

이 사업은 조선혁명군의 중요한 투쟁과업의 하나였다. 그분께서는 농촌혁명화를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서 선차적으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고리로 보시었다.

농민은 노동자계급과 더불어 혁명에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이었다. 그분께서는 길림시절부터 농사가 천하지대본인 것처럼 농민을 천하지대군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해오시었다. 간도지방인구의 80%이상이 조선사람이라면 그중 90%정도는 농민이었다. 이로부터 그분께서는 노동자와 함께 농민을 혁명의 기둥으로 보시고 농촌혁명화에 많은 힘을 기울이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19(1930)년 10월 중부만주의 회덕현 오가자에 가시여 그곳을 농촌혁명화의 본보기로 꾸리기 위한 정력적인 활동을 벌리시었다.

오가자는 민족주의자들이 「이상촌」건설을 한다고 하면서 개척한 마을로서 중부만주일대에서 민족주의세력의 마지막보루였다. 이곳을 혁명화하면 중부만주일대의 농촌혁명화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 경험에 토대하여 만주전역과 우리 나라 북부국경일대 농촌마을들의 혁명화를 다그칠 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가자마을 유지들과의 사업에 선차적인 주목을 돌리시었다. 오가자마을을 혁명화하는데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오가자를 개척한 유지들이 자기네의 이념이나 주의주장과 맞지 않는 사상조류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완고하게 막고 있는 것이었다. 마을에는 지방자치행정기관인 촌공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뒤에서 조종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사람이 변대우노인이었다. 그는 독립군에서 무장활동에 관여할 때 수령님의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과 연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대한독립단 선전부장, 민족독립군 부총재, 광복군 군법부장 겸 제1영장직을 거쳐 통의부의 실업부장직에 있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면서 소련의 원동지방에도 드나들었다. 그에게는 고려공산당에 관여했을 때 받은 당증도 있었고 「변트로츠키」영감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져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완고한 변대우노인과의 사업을 노숙하고 진지하게 하시었다. 그가 이치에 어그러지는 말을 하는 경우에도 반박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예절을 차리시면서 참을성있게 들어 주시었으며 「이상촌」건설에 바친 그들의 수고에 대하여 평가하시면서도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만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는데 대하여 사리를 따져가면서 진지하게 설명해주시었다. 그분께서는 특히 카륜회의에서 채택된 노선에 따라 사상과 신앙, 재산정도, 남녀노소의 차이를 가리지 않고 반일을 지향하는 모든 역량을 망라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2천만의 항전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해설해주시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진지하고도 꾸준한 사업방법, 한없이 소탈하고 순결한 인정미, 넓은 도량과 고결한 인품, 논리정연한 말씀에 감복한 변대우노인은 마침내 완고한 고집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마을유지들앞에서 이제는 우리를 대신하여 「이상촌」을 맡아줄 임자가 나타났다, 성주네가 그 임자이다, 그들이 하는 식이 사회주의라면 우리도 마음 놓고 받아 들일 수 있다, 성주를 나어린 청년으로만 봐서는 안되겠다, 우리들은 늙었고 시대에도 뒤떨어진 고물딱지들이니 젊은 것들에게 오가자를 통째로 떠맡기고 성주네가 하는 일을 힘껏 돕기나 하자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자기가 독립운동에 나선 후 저마다 우두머리라고 하고 저마다 애국자라고 하고 저마다 혁명가라고 하는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보았지만 김성주청년처럼 그렇게 이론이 밝고  정치적 수완이 원숙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참으로 지략과 덕망이 대단하다고 하면서 『이제 두고 보라구, 앞날의 조선을 이끌 사람은 그 김성주청년일걸세!』라고 단언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가자마을의 유지들을 돌려 세운 다음 대중단체들을 혁명적으로 개편하는 사업을 벌이시었다. 먼저 청년회를 개편하여 오가자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하시고 이어서 농우회를 농민동맹으로, 소년학우회를 소년탐험대로, 남만여자교육연합회 오가자지부를 반일부녀회로 개편하시었다. 그리고 촌공회도 혁명적인 자치위원회로 개편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중단체조직책임자들의 정치실무수준을 높이는 사업도 힘있게 조직지도하시고 무료교육과 야학, 혁명적 출판물과 연예대활동을 활발히 벌려 오가자인민들을 혁명적으로 계몽, 교양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정력적인 지도 밑에 오가자는 짧은 시일안에 혁명화된 농촌으로 전변되고 조선혁명군의 믿음직한 활동기지로 꾸려졌다. 마을유지들을 비롯하여 남녀노소 모두가 그분을 앞날의 조선을 이끌 태양으로 믿고 따랐다. 청년들은 손에 총을 잡고 일제와 싸울 그 날을 그려보며 패기와 정열에 넘쳐 군사를 배우고 일제와 반동군벌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의 앞장에 나섰다. 부녀자들은 가난한 생활속에서도 끼니마다 한술두술 쌀을 모아 조선혁명군을 원호하고 소년탐험대원들은 그들대로 적의 밀정이 마을에 기어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섰다.

민족주의의 영향 밑에 「이상촌」의 허무한 꿈을 꾸던 오가자가 이렇게 변모된 것을 놓고 사람들은 그분의 탁월한 영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사실 이무렵 위대한 수령님의 손길아래 오가자뿐 아니라 조선혁명군 대원들이 나가 활동한 모든 지역들이 혁명화되었다. 그리하여 중부만주의 여러 지역이 조선혁명군의 믿음직한 활동기지로 되었으며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이 확대되었다.

이 지대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절대적으로 경모하며 따랐다. 그들속에서는 그분의 존함을 두고 장차 조선을 이끌어나가실 그토록 위대하고 존귀하신분을 어찌 샛별에만 비기겠는가, 마땅히 온 누리에 빛과 열을 주고 만물에 생을 주는 태양에 비겨야 할 것이라는 진정어린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오가자의 변대우노인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구원하실 분은 그분밖에 없네, 이제 두고 보게, 그러니 그분을 어찌 별에만 비기겠나, 어두운 강산에 높이 솟은 태양이시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그분을 이를테면 일성(日成)이시라고 하였다.

혁명투사 차광수는 주체19(1930)년 가을 조선혁명군 성원들이 모인 기회에 중대한 문제를 하나 제기하겠다고 하면서 지금 오가자의 온 마을사람들이 한별동지를 우리 민족의 태양이라고 칭송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가자만이 아닌 길림과 카륜, 조선의 모든 겨레의 한결같은 마음이라고 말한 다음 『온 겨레가 우러러 따르는 위대한 한별동지를 어찌 샛별에만 비기겠소. 인민의 한결같은 염원을 담아 김일성동지의 명함을 한 일자 별 성자 대신 날 일자에 이룰 성자로 하여 김일성(金日成)동지로 할 것을 제기하오.』라고 흥분에 넘쳐 말하였다.

그러자 장내에서는 우렁찬 박수소리와 함께 『대찬성이요! 절대찬성이요!』라는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동서고금의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다. 역사에는 걸출한 위인, 지도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분처럼 10대의 나이에 동지들과 인민대중으로부터 태양의 존함을 받은 그런 위인, 지도자는 없었다.

김일성장군님! 그분은 그 이름 그대로이신 민족의 태양이시다.

『백두산에 장군별이 솟았다!』

항간에 이런 전설이 떠돌았다. 전설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종의 성산 백두산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강도 일제놈들을 족치고 계신다는 통쾌한 무훈담을 담은 것이었다. 무릇 전설이 그러하듯이 거기에는 우리 겨레의 염원이 깃들어있었다. 항일무장투쟁의 기치를 추켜드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열렬한 흠모와 지지의 뜨거운 마음이 전설로 된 것이었다.

『백두산에 장군별이 솟았다!』는 전설은 위대한 수령님의 이 시기 혁명활동을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사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0(1931)년 봄에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동만땅에 와계시었다.

백두산천지에 뿌리를 둔 두만강이 흐르고 백두산줄기가 뻗어있는 광활한 땅인 동만에는 조선사람이 주민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만으로 나오시기 전인 주체19(1930)년 12월 25일 회덕현 오가자에서 조선혁명군 지휘성원 및 혁명조직책임자회의를 소집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연설에서 카륜회의후 주체적 혁명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을 총화하신 다음 5.30폭동, 8.1폭동의 후과를 빨리 가시고  항일무장투쟁준비를 더한층 다그칠 데 대한 과업을 내놓으시었다. 그분께서는 회의에서 이 중대한 혁명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투쟁의 기본무대를 동만으로 옮기고 동만에서의 활동을 결정적으로 강화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오가자회의후 주체20(1931)년 봄에 동만으로 활동무대를 옮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준비를 더욱 본격적으로 다그쳐 나가기 위한 투쟁을 정력적으로 조직영도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돈화에서 조선혁명군 대원들과 혁명조직핵심들에게 무장투쟁의 준비를 다그치기 위한 조직정치사업방향과 방도들을 가르쳐주는 강습을 조직하시었다. 강습 후 그분께서는 안도, 연길, 화룡, 왕청일대를 거쳐 5월에는 국내 종성, 온성에 진출하시여 이 일대 혁명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시었다.

이 과정에 종파사대주의자들이 일으킨 좌경모험주의적인 5.30폭동의 후과와 각지의 구체적인 실태를 요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5월 20일 연길현 명월구(옹석라자)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시었다. 일명 「봄명월구회의」라고 하는 이 회의에서 그분께서는 『좌경적 모험주의노선을 배격하고 혁명적 조직노선을 관철하자』라는 연설을 하시었다.

여기에서 그분께서는 5.30폭동의 교훈을 전면적으로 분석하신 다음 폭동이 가져온 혹심한 피해를 빨리 가시고 항일무장투쟁을 담당수행할 수 있는 혁명역량을 충분히 준비할 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었다.

봄명월구회의는 한마디로 말해서 대중전취를 위한 회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대중을 전취하는데서 제일 큰 장애물이 좌경모험주의노선이었기에 그분께서는 용단을 내려 그 노선의 부당성에 대해 논박하신 것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 후 조선혁명군 성원들과 당 및 공청간부들을 간도 각 지구와 온성, 종성, 경원 등 우리 나라의 여러 지역에 파견하시고 여름부터 안도를 활동거점으로 하여 간도와 국내의 혁명사업을 지도하시었다.

안도는 철도와 대도로, 도시들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지대여서 일제의 마수가 덜 미치고 주변이 온통 험한 산악과 밀림으로 에워 싸여있어 연길, 화룡, 왕청, 훈춘지구와 무송, 돈화, 화전지구는 물론 육읍일대를 비롯한 국내의 조직들과도 연계를 가지기 유리하였고 유격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당조직건설사업을 추진시켜 나가는 데서도 매우 편리한 고장이었다. 주민구성도 대단히 좋았다.

더욱이 조종의 산 백두산이 가까이에 있으므로 조국을 한시도 잊으신적 없는 수령님께 있어서는 그 숭엄하고 장중한 모습에서 크나큰 정신적 위안과 고무를 받지 않을 수 없으시었다. 화창하게 개인 날이면 멀리 서남쪽 하늘가에 백두영봉의 은회색파도가 바라보이었는데 그 은은한 원경이 시야에 안겨올 때면 무장을 들고 조국을 한시바삐 찾고 싶은 충동으로 가슴이 세차게 고동치군 하였다. 비록 조국을 떠나 이역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하지만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항일의 총성을 울리고 싶으신 것이 그분의 뜨거운 심정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안도에 옮겨와 계시는 어머님과 동생들, 할머님을 뜨겁게 만나시었다. 할머님께서는 버선발로 달려나와 그분을 얼싸안으시었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그 해에 만주로 오신 할머님은 그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무송에서 어머님과 함께 계시다가 안도로 자리를 옮길 때 같이 이곳으로 오신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할머님과 어머님으로부터 무한한 격려와 고무를 받으시며 간도와 국내의 혁명사업을 지도하시었다.

그분의 현명한 영도에 의하여 안도지방에서는 혁명조직이 깊이 뿌리 내리고 대중을 조직화하기 위한 사업이 완료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각지와 종성, 온성지구를 비롯한 국내 여러 곳에서도 혁명조직노선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투쟁이 활발히 벌어져 혁명역량이 튼튼히 꾸려지게 되었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정력적이고 세련된 영도에 의하여 북부조선일대와 동만지방은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 수 있는 전략기지로 전변되게 되었으며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벌릴 수 있는 정치군사적 준비가 갖추어졌다.

항일대전의 포성이 울릴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