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1) 중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으로 주체혁명위업의 출발점, 선군의 시원을 마련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혁명전위대오를 꾸리는데 큰 힘을 돌리시었다.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ㅌ.ㄷ」의 강령을 실현하자면 장차 총을 잡고 제국주의와 판가리싸움의 앞장에서 달려나갈 혁명전위대오가 있어야만 하였다. 이것은 역사의 닻을 올린 주체혁명위업의 절실한 요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전위대오를 튼튼히 꾸리는 사업을 선차적인 중대사로 내세우시고 길림을 중심으로 광범한 지역에서 이 사업을 줄기차게 벌여 나가시었다.

「ㅌ.ㄷ」를 결성하신 후 그분께서는 혁명활동의 중심지를 길림으로 옮길 것을 결심하시었다. 화전은 원대한 포부와 구상을 실현해가기에는 너무나 구석진 곳이었다.

당시 중국 길림성의 소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던 길림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은데다가 반일운동에 뜻을 둔 애국적인 청년들, 국내와 만주각지에서 공부하러 온 조선청년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민족주의운동자들, 행세식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많이 드나들었다.

반년만에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으로 가실 결심을 하신 것은 수령님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이었다. 이 결심을 「ㅌ.ㄷ」성원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김시우총관은 헤어지는 것을 몹시 섭섭해하면서도 찬동을 표시했다. 화성의숙 숙장은 처음에는 노여움을 타면서 야단을 하였다. 그는 성주와 같은 수재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학교라면 나도 이 의숙에서 물러가겠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인차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자기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아무튼 꼭 성공하라고 진정을 표시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머님계시는 무송에 들리시었다가 주체16(1927)년 1월 14일에 길림에 도착하시었다. 며칠 후 그분께서는 길림육문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시었다. 길림육문중학교는 중국의 신흥사회계에서 세운 사립학교로서 경향성이 비교적 좋았다. 그분께서는 학교에 적을 두시고 혁명활동을 폭넓게 벌여 나가시었다.

그분께서 길림에 오셨을 때 「ㅌ.ㄷ」의 몇몇 성원들이 그분을 반가이 맞이하였다. 그들은 화전에서 헤어질 때 훗날 길림에서 만나자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명심하고 이미 문광중학교를  비롯한 시내 학교들과 기관구, 선창 등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더없이 귀중한 그들 한사람한사람을 굳게 포옹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우리는 어둠에 뒤덮인 누리에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려고 결심품고 나선 혁명의 전위들입니다.

누리에 불길이 타오르게 하자면 곳곳에 불씨를 심어야 합니다. 우선 청년학생들의 가슴에 불씨를 심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타도제국주의동맹원들앞에 나서고 있는 중요한 과업은 우리자신들이 선진사상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청년학생들속에 널리 보급하며 점차 그들을 혁명조직에 튼튼히 묶어 세우는 것입니다.

「ㅌ.ㄷ」의 금후 활동방침을 밝히신 귀중한 가르치심이었다. 이 가르치심속에는 청년학생들을 선진사상을 보급하고 대중을 계몽각성시켜 혁명운동에로 추동하고 안내하는 교량자적 역할을 하는 보조적 역량으로 간주해온 선행이론과는 근본 다르게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청년학생들을 혁명의 주력으로 보시는 그분의 주체적인 견해와 입장이 어려있었다. 그리하여 청년학생들을 핵심으로 혁명운동을 개척해 나가는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새 세대의 혁명대오를 급속히 늘여 나갈 수 있는 넓은 길이 열려지게 되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의식화, 조직화사업을 잘하여 광범한 청년학생들을 혁명조직에 묶어 세우고 그들속에서 혁명전위대오를 확대하도록 큰 힘을 넣으시었다.

청년학생들속에 선진사상을 보급하는 것은 광범한 청년학생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며 혁명전위대오를 튼튼히 다지는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분께서는 먼저 화전에서처럼 육문중학교안에 비밀독서회를 내오시고 그후 문광중학교를 비롯한 시내 학교들에 확대하시었다. 이를 통하여 청년학생들속에 선진사상이 급속히 전파되어갔다. 청년학생들의 사상의식과 활동에서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청년학생들을 혁명조직에 묶어 세우기 위한 사업을 힘있게 밀고 나가시었다.

당시 길림에는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길림청년회, 조선인여길학우회, 소년회가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그분께서는 핵심을 먼저 키우고 그들의 자립적 역할을 높이며 합법적 조직활동과 비합법적 조직활동을 밀접히 결합시키고 합법적 조직에서 단련육성된 핵심성원들을 비합법적 조직에 받아들이는 원칙을 견지하도록 하시었다. 그리고 이미 있는 조직들가운데서 간판만 있고 활동을 하지 않는 조직은 무시하고 새롭게 꾸리며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는 조직은 그대로 두고 이용개편하는 방법을 취하도록 하시었다.

이에 따라 그분께서는 주체16(1927)년 4월 10일 조선소년들의 합법적 조직인 조선인길림소년회를 조직하시었다. 혁명적 소년조직의 결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무송에서 전해 12월 15일 우리 나라 첫 소년혁명조직인 새날소년동맹을 결성하시었었다.

그분께서는 주체16(1927)년 5월 8일에 민족주의자들의 후원을 받고 있던 조선인여길학우회를 조선인유길학우회로 개편하시었다. 유길학우회는 문화계몽사업을 하면서 겉으로는 조선인청년학생들의 친목단체로 표방했지만 실지로는 「ㅌ.ㄷ」의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인 학생청년조직이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불면불휴의 정력적인 활동에 의하여 길림은 혁명의 열풍으로 들끓게 되었다. 조선청년학생들이 선진사상으로 무장하고 혁명조직들에 망라되었으며 우수한 청년학생들을 핵심으로 하는 새 세대 혁명역량이 급속히 자라났다. 이것은 그대로 혁명투쟁에서 새로운 운동선으로 되었다.

길림에 새로운 운동선이 나타났다는 소문과 그것을 이끄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명성이 넓은 지역에 알려지자 국내와 일본, 연해주, 만주각지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그분을 찾아 길림으로 왔다. 독립군출신청년들, 일본에 가서 고학을 하던 청년들, 백파들과 싸우던 청년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주폭동에 참가했던 청년들, 국민당반동들의 추격을 피해 숨어 다니던 청년들, 레닌, 손문, 루소의 숭배자들 등 천태만상의 청년들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넓은 품에 안아주시고 혁명적으로 교양하시었으며 비밀독서회와 혁명조직들에서 자라난 선진청년학생들과 함께 타도제국주의동맹에 받아주시었다.

그분께서는 「ㅌ.ㄷ」의 하부조직들이 수많이 무어 지고 광범한 청년들속에서 혁명적 열의가 급격히 높아짐에 따라 주체16(1927)년 8월 27일에는 「ㅌ.ㄷ」를 보다 광범한 청년들을 망라하는 대중적조직인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하시었다.

반제청년동맹은 「ㅌ.ㄷ」의 구호를  그대로 내세우고 그 강령을 계승한 반제적이고 대중적인 비합법적 청년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조선인학생들이 있는 길림시내 모든 학교들과 강동, 신안툰을 비롯한 길림주변의 농촌지역은 물론 유하현, 화전현, 흥경현일대에 뿌리를 박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어 그 이튿날에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시었다.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은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을 골간으로 하고 여러 혁명조직들에서 단련되고 검열된 노동청년, 농민청년, 학생청년들로 무어진 반제민족해방과 공산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청년조직이었다. 그것은 조선청년공산주의자들의 선봉대로서 각계각층 청년단체들과 대중단체들을 조직지도하는 전위조직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청을 결성하신 후 그 조직망을 길림시와 그 주변은 물론 돈화, 흥경, 화전, 무송, 안도, 반석, 장춘, 할빈 등 만주의 넓은 지역과 북부조선일대를 비롯한 국내깊이에까지 확대해 나가시었다.

그리고 혁명에 뜻을 가진 우수한 청년핵심들을 공청조직에 묶어 세우시고 그들을 조직생활과 지하투쟁의 실천속에서, 자기 나라 인민의 힘을 믿지 않고 남의 덕에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 보려는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과의 사상투쟁속에서,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 등 일제와 중국반동군벌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속에서 단련시키시면서 참신한 혁명전위로, 지도핵심으로 육성하시었다.

그들속에는 최창걸, 김리갑, 계영춘, 박근원, 김원우, 이제우를 비롯한 「ㅌ.ㄷ」의 첫 성원들이 있었으며 차광수, 김혁, 김준, 채수항, 안붕, 허율, 박소심, 한영애 등 반제청년동맹과 공청의 핵심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각별한 믿음과 사랑속에 혁명전위투사대오에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차광수만 해도 그런 사람이다. 그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것은 주체16(1927)년 봄이었다. 차광수를 위대한 수령님께 소개한 것은 최창걸이었다. 최창걸은 그때 유하현 삼원포에서 독립군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이 일대 혁명사업을 맡아하고 있었다.

차광수는 10대에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공부를 한 사람인데 마르크스주의에 심취되어 공산주의운동에 발을 넣었으나 파벌싸움만 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끼고 서울을 거쳐 만주에 들어왔다. 그때 만주도 같은 꼴이어서 유하에서 시골훈장을 하며 아이들에게 민족정기나 넣어주며 조용히 살아가려고 했다. 그는 최창걸의 소개를 받고 길림에 올 때에도 길림에서 학생운동을 한다는데 중학생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알면 얼마나 알며 공산주의운동을 하면 얼마나 잘하랴 생각하고 한번 중떠보려는 마음을 안고 왔었다. 그런데 그분을 만나고 보니 그분이시야말로 자기가 찾던 지도자이시었다. 그는 이국땅에서 찬비를 맞으며 걸어갈 때 자기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올바른 투쟁노선과 지도자를 목마르게 기다렸노라고 고백하고 『성주, 우리 서로 믿음과 사랑속에 공산주의운동을 할 수 없을가? 분파와 헤게모니싸움이 없이 말이요!』라고 부르짖었다. 이것은 혁명의 길을 찾아 만리타향을 헤매이던 끝에 그가 찾은 인생총화이며 교훈이기도 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으시고 우리 새 세대들은 종파분자들처럼 분열의 길을 갈 것이 아니라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혁명의 곧바른 길을 가자고 격해서 말씀하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를 인차 「ㅌ.ㄷ」성원으로 받아주시고 길림주변에 있는 신안툰마을에 보내시었다.

차광수는 그분보다 나이는 일곱살이나 우이고 글도 잘 쓰고 연설도 잘하고 마르크스주의이론수준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그는 그분을 스승으로, 지도자로 진심으로 모시고 따랐으며 그분의 가르치심이라면 무조건 절대적으로 믿고 철저히 집행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신안툰을 비롯한 길림주변 조선인부락들의 혁명화사업을, 그후에는 길림을 축으로 하여 남만의 유하와 카륜, 고유수, 오가자를 비롯한 중부만주의 조선인거주지들에서 청년들을 집결시키는 사업을 책임적으로 맡아 수행하였다. 그는 후날 갓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의 남북만원정의 길에서 맹활약을 하다가 적들과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혁명시인 김혁도 그런 혁명전위투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 그를 소개한 사람은 차광수였다. 그들 둘은 동경유학때부터 벗으로 지냈다. 김혁도 차광수처럼 동양3국을 돌아다닌 풍운아였다. 그는 조선의 진로를 찾아 만리타향을 속절없이 떠다니었다. 상해 프랑스조계지의 어느 하숙방에서 남의 눈치밥을 얻어먹으며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차광수가 보낸 편지를 네번이나 받았다. 상해에서 아까운 인생을 썩이지 말고 길림으로 오라, 길림에만 오면 네가 찾는 지도자도 있고 이론도 있고 운동도 있다, 길림은 너의 이상향이다!…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길림을 찾아온 그를 뜨겁게 포옹하시었다. 불같은 사람인 김혁은 찾고 찾던 지도자를 만난 자기의 격동된 심정을 『성주, 나는 여기서 닻을 내리겠소. 내 인생은 이제부터요.』라고 쏟아놓았다.

그는 견문도 넓고 이론수준도 높았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그는 남들처럼 종이장을 놓고 썼다지웠다 하면서 시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첫줄부터 마지막줄까지 죄다 머리속에서 다듬은 다음 종이위에 옮기군 하였다. 그의 불같은 성격은 혁명실천에서 충실성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수령님보다 다섯살이나 우이고 일본에 가서 공부도 한 사람이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내지 않고 맡은 임무를 언제나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적들에게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자기를 참된 혁명의 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삶과 젊음을 다 바치었다.

차광수나 김혁만이 아니었다. 그분의 혁명동지로 된 모든 전위투사들이 그분을 향도성으로 우러러 따르며 전사의 의리와 충정을 바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께서 망국의 비운이 드리운 조선의 밤하늘에 솟아 삼천리강산을 밝게 비치는 샛별이 되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분의 존함을 한일자 별성자를 써서 김일성(金一星)동지 또는 한별동지로 불렀다. 이 뜨거운 마음을 담아 혁명시인 김혁은 노래 「조선의 별」을 창작하였고 혁명조직은 그것을 광범히 보급하였다.

조선의 밤하늘에 샛별이 솟아

삼천리강산을 밝게도 비치네

짓밟힌 조선에 동은 트리라

이천만 우리 동포 샛별을 보네
 

캄캄한 밤하늘 바라다보니

신음하는 조국산천 어리어오네

변치 말자 혁명에 다진 그 맹세

이천만 우리 동포 샛별을 보네
 

간악한 강도 일제 쳐물리치고

삼천리에 샛별이 더욱 빛날제

조선아 자유의 노래 부르자

이천만 우리 동포 샛별을 보네

청년전위투사들은 혁명송가를 부르며 군중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품속에는 붉은 색실로 오각별을 수놓은 흰색명주천이 간직되어있었다. 차광수는 그것을 나누어주면서 여기에 수놓아진 붉은별은 한별동지를 상징한 것이고 흰색은 그분을 따르는 우리 마음의 결백성을 상징한 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우리는 이 붉은별을 가슴에 소중히 품고 언제나 한별동지를 생각하자고, 우리들, 청년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누리에 붙는 불이 되고 철쇄를 마스는 마치가 되라고 하신 한별동지의 호소를 받들고 혁명의 향도성을 우러러 끝까지 싸워 나가자고 호소하였다.

혁명송가 「조선의 별」의 노래소리는 온 누리에 울려퍼졌다. 「한별」전위대오의 합창이 울리는 속에 선군혁명도 바야흐로 무르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