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 (1) 중에서
 


(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을 무르익히시며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을

키우시던 시기의 위대한 김일성주석님)




 

1920년대에 들어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은 새로운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10월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한 후 우리 나라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면서 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반면에 부르즈와민족주의운동은 3.1인민봉기를 계기로 조락의 길을 걸었다.

간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는 확대발전되는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을 말살하려고 식민지통치체계를 재정비하는 한편 「치안유지법」을 비롯한 각종 살인악법들을 조작하고 각지에 검찰 및 재판기관, 감옥들을 증설하였다. 일제는 또한 강점군을 늘이고 헌병, 경찰, 특무망으로 강토를 뒤덮었으며 인민들은 총칼앞에 쓰러지며 피를 토하였다. 자기의 총칼이 없어 당하는 수난이었다. 제 고향, 제 나라 땅에서 살길이 막힌 사람들이 남부여대하고 압록강, 두만강, 현해탄을 건너 이역의 하늘아래로 피눈물을 뿌리며 흘러갔다.

이런 속에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은 김형직선생님께서 밝히신 방략에 따라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에로 방향전환을 지향하여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이때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일제경찰에 체포되셨다가 압송도중 탈출하시어 무송에서 혁명활동을 계속하시었다. 선생님께서는 일제의 모진 고문과 탈출도중 입은 심한 동상으로 운신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잠시도 혁명활동을 멈추지 않으시었다.

「광복의 천리길」을 걸으시어 압록강을 건느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병고를 무릅쓰시며 순간의 휴식도 없이 활동하시는 아버님의 투쟁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으시었다. 그이의 가슴속에는 아버님께서 지향하시는 무산혁명에 대한 열망, 무장을 잡고 민족자력으로 일제와 싸워 나갈 데 대한 열망이 끓어 번졌다.

그럴수록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깊어가는 아버님의 신병이 걱정되시었다. 아버님께서는 분과 초를 다투어가시면서 하루하루를 다른 때보다 몇갑절 더 일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아버님자신은 벌써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신 것 같았다.

아버님께서는 그후 얼마 안되어 중환으로 하여 1926년 봄부터 완전히 병석에 누운 몸이 되시었다.

수령님께서는 아버님의 침상을 지켜드리시며 참으로 귀중한 가르치심들을 받으시었다. 아버님의 말씀은 혁명활동과정에 얻은 경험과 교훈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다 아드님에게 혁명의 대를 이어주는 유언이었다.

어느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아드님을 곁에 앉히시고 말씀하시었다. 그 자리에는 김형권선생님과 독립운동자들도 있었다.

『일제놈들과 싸워 나라를 찾자면 무장을 잡아야 한다. 맨주먹으로는 신식무기를 가진 왜놈들을 당하지 못한다. 말만 하여가지고서는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 총을 잡은 몇몇 사람의 힘만으로는 조국을 광복할 수 없다.

민중을 불러일으켜 하나의 힘으로 묶어 세워야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님으로부터 혁명투쟁에서 좌우명으로 삼을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 안으시었다.

수령님께서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하시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혁명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3대각오에 대한 말씀이다.

<혁명가는 어디 가나 항상 3대각오를 가져야 한다. 아사, 타사, 동사, 다시말하여 굶어 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를 가지고 처음 먹은 원대한 뜻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나는 아버지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들었다.

벗과 우정에 대한 아버지의 말씀도 교훈적인 것이었다.

<사람은 어려울 때 사귄 벗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집에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대문을 나서서는 벗들에게 의지하라고들 하는데 다 뜻이 있는 말이다. 생사고락을 같이할 진정한 벗은 사실상 형제보다도 더 가깝다.>』

그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벗과 우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장시간 하시었다.

아버지는 동지를 얻는 일로부터 투쟁을 시작하였다, 돈이나 육혈포를 얻는 것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어데 가서나 좋은 동지들부터 물색하였다, 좋은 동지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금이나 보석을 캐내듯이 힘을 들여 스스로 찾아내야 하며 키워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평생 조선과 만주벌판을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닌 것이다, 너희  어머니도 그래서 한뉘 손님시중을 드느라고 배를 곯으며 고생하였다,

나라와 민중을 위한 진심만 있으면 좋은 동지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뜻이고 마음이다, 돈은 없어도 뜻만 통하면 서로 동지가 될 수 있다, 백만금을 가지고서도 얻지 못하는 우정을 단 한모금의 숭늉이나 한알의 감자를 가지고 얻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아버지는 재산가도 아니고 세력가도 아니지만 좋은 친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아버지는 재산가운데서도 제일 큰 재산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는 동지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도 목숨을 걸고 아버지를 보호해주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가지가지의 풍상고초를 이겨내며 광복운동에 헌신할 수 있은것은 동지들이 아버지에게 사심없는 방조를 주었기 때문이다.…

수령님께서는 아버님의 말씀을 자자구구 뇌리에 새겨 넣으시었다.

이해 5월말에 들어서면서 김형직선생님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럴수록 선생님께서는 아드님을 더 자주 가까이 불러 앉히고 말씀을 하시었다. 선생님께 있어서 아드님은 자식만이 아닌 조선혁명의 운명을 떠메고 나갈 혁명동지이시었다. 하기에 선생님께서는 병환으로 운신조차 하기 어려운 몸이었지만 생일을 맞는 아드님을 앞세우고 상점에 나가 회중시계를 사주시고 이렇게 당부하시었다.

『너도 이제는 시계를 찰 때가 되었다. 나라를 찾는 싸움에 나선 사람이 아껴야 할 것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동지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을 귀중히 여기라는 뜻으로 주는 생일선물이니 잘 간수해라.』

이것은 임종을 예감하신 선생님께서 시계와 함께 평생의 로고가 바쳐진 독립의 위업을 아드님에게 넘겨주신 것이었다.

방향전환의 새로운 조선독립방략을 세우시고 무장항전의 활무대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쓰러져 영영 다시 일어설길 없으니 통한이면 이보다 더 큰 통한이 어디에 있으랴.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몸도 마음도 끌끌한 혁명가로 성장해가는 아드님을 보시며 마음이 든든함을 금할 수 없으시었다.

병세가 악화될 수록 선생님께서는 더 자주 아드님과 대화를 나누시었다.

우리 나라의 혁명은 무산혁명의 길로 나가야 한다,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한 다음에는 착취와 압박이 없고 만민이 행복하게 사는 무산민중의 새 사회, 공산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등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전반을 포괄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꼭 명심하겠다고, 아버지가 그토록 염원하시는 무산혁명의 길을 개척하여 기어이 조국광복위업을 성취하고야 말겠다고, 그리하여 조국땅에 무권리한 사람들을 위한 새 세상을 세워놓겠다고 말씀드리시었다.

민족수난의 어둠이 짙어가던 주체15(1926)년 6월 5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님의 유언을 받게 되시었다.

아버님께서는 강반석여사에게 『우리가 고향을 떠날 때는 독립을 이룩하고 함께 돌아가자고 하였는데 나는 못 갈것 같소. 나라가 독립되면 당신이 성주를 앞세우고 고향에 가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자니 시름이 안 놓이요. 성주를 부탁하오. 내가 성주를 중학까지 공부시키자고 했는데 글러진 것 같소. 당신이 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을 먹더라도 중학까지는 공부시켜 주오. 그다음 그 아래동생들은 성주가 할 탓이요.』라고 하시고는 늘 차고 다니던 권총 두자루를 꺼내놓으시며 말씀을 이으시었다.

『내가 죽은 다음 이 총이 나지면 재미가 없으니 땅속에 묻었다가 성주가 커서 투쟁의 길에 나설 때 주도록 하오.』  

선생님께서는 세 아드님에게 마지막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다. 그러나 너희들을 믿는다. 너희들은 언제든지 나라와 민족의 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시었던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이렇게 혁명의 대를 물려주시는 역사의 유언과 유산을 남기시고 애석하게 서거하시었다.

아버님의 서거는 커다란 슬픔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님의 영전에서 목놓아 우시었다. 그이께 있어서 아버님은 한 가정의 아버지이기 전에 혁명을 알고 나라와 민족을 알게 한 위대한 스승이시고 혁명동지이시었다.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셨던 조선독립이라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자제분들의 어깨에 넘겨주신 혁명의 선대지도자이시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아드님에게 물려주신 유산은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고 그 누구도 줄수 없는 가장 귀중하고 훌륭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렇게 회고하시었다.

『<지원>의 사상, 3대각오, 동지획득에 대한 사상, 두자루의 권총, 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 그것은 모진 고생과 희생을 전제로 하는 유산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유산이 없었다.』

그 유산은 한순간에 아버지를 잃고 스승을 잃고 지도자를 잃으신 그이를 비탄의 눈물속에서 일으켜 세워주었다.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막막하고 암담한 슬픔속에서도 그이께서는 그 유산에서 힘을 얻고 갈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시었다.

「지원」의 사상과 3대각오, 동지획득사상과 더불어 특히 두자루의 권총은 칼든 놈하고는 칼을 들고 싸워야 하고 총을 가진 놈하고는 총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는 아버님의 반일무장항전의 숭고한 뜻이 어린 혁명의 계주봉이었다. 거기에는 칼이 없고 총이 없어 무참히 숨져간 이 나라 민중의 뼈에 사무친 원한, 무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쳐 물리치고 조국광복을 기어이 이룩하여야 한다는 겨레의 열망이 담겨져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유산이라고 하면 재물이나 금전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 물려받으신 유산은 그런 범속한 유산이 아니라 오직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어이 빼앗긴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투철한 혁명사상이고 그 투쟁방도를 밝혀준 것이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두자루의 권총을 조국과 겨레가 주는 유산으로, 광복성전의 무기로 무겁게 받아안으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두자루의 권총에 담겨진 총대중시이념을 사상정신적 원천으로 삼으시고 선군혁명의 길을 개척하시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 훗날 선군사상을 창시하시고  선군의 포성을 울리심으로써 두자루의 권총은 선군의 역사적 뿌리로, 시원으로 빛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