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1)중에서

 


 

혁명가는 자연과 사회, 인간을 개조하고 변혁하는 사람, 사회생활,  인간생활에서 나타나는 불의를 보고 증오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개조변혁할 결심을 품고 한몸을 바쳐 싸울 줄 아는 사람이다. 혁명적 세계관이 서있어 나라와 민족,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결심품고 나선 사람이 혁명가이다.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10대소년시절에 벌써 혁명적 세계관이 선 소년혁명가로 성장하시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당대의  사회적환경과 부모님들의 남다른 교양 그리고 자신의 생활체험이 그분의 세계관형성을 촉진시켰고 그분께서 어린 나이에 무장항전을 지향하는 소년혁명가로 성장할 수 있게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야수적이고 횡포한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다. 총칼로 재부를 강도적으로 약탈하고  인민의 피땀을 악착스럽게 짜내었다. 조선인민의 초보적인 생존권마저 짓밟고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을 유혈적으로 탄압하였다. 수많은 애국적 인민들이 학살당하고 온 나라가 피바다에 잠겼다.

그분께서는 나서 자란 만경대에서 그리고 아버님의 혁명활동노정을 따라 국내외의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일제의 야수적인 폭압만행과 식민지통치밑에서 신음하는 겨레의 비참한 처지를 수없이 보시었다. 그분께서는 어린 마음에도 울분을 참을 수 없으시었다. 하루빨리 총대를 틀어 잡고 일제를 때려 부수고 빼앗긴 조국을 찾으며 인민들을 도탄에서 구원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게 되시었다.

사회적 환경이 준 영향도 컸지만 보다 큰 영향을 준 것은 부모님들의 남다른 교양과 그분자신의  체험이었다.

반일민족해방투쟁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의 총대중시이념과 무장활동은 그대로 어리신 아드님께 있어서 으뜸가는 교양이었다.

무장활동을 조선독립투쟁의 가장 높고 적극적인 투쟁형태로 보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강반석여사와 함께 생명을 내걸고 한자루, 한자루의 총을 직접 마련하시었다.

한번은 압록강너머 국내조직원들이 구해놓은 권총과 탄약을 날라와야 할 일이 제기되었다.

강반석여사께서 이 일을 직접 맡아 나서시었다.

당시 압록강일대에는 적들이 물샐틈없는 경비진을 치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무기와 탄약을 가지러 압록강을 넘어 국내의 중강진으로 갔다 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기에 김형직선생님께서도 처음에는 여사의 이 제의를 승낙하지 않으시었다.

여사께서는 이런 일에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유리하다고 하시면서 작은 아드님을 업고 끝내 길을 떠나시었다. 여사께서는 왜놈헌병들과 경찰들이 몸수색을 할 때에는 중강진에 약소포를 찾으러 간다고 그럴 듯 하게 속여넘기시었고 돌아오실 때에는 권총 2자루와 50발의 탄약을 보에 싸서 허리에 띠신 다음 그위에 아드님을 업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시며 무기와 탄약을 무사히 운반해오시었다. 여사께서는 이렇게 날라온 귀중한 권총과 탄약을 나물바구니속에 넣어가지고 무장부대에 날라다 주시었다.

무장활동을 위해 바치시는 부모님들의 이러한 헌신성과 희생성은 위대한 수령님께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하여야 하며 총대는 생명을 내걸고 틀어쥐는 것이라는 것, 총대를 생명과도 같이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혁명원리, 투쟁의 진리를 새겨주었다.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여사께서는 혁명투쟁의 길에 나서신 이후 한순간도 신들메를 푸신 일이 없었으며 침식을 잊고 반일전구를 찾아가군 하시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105인사건」이라는 유명한 「조선국민회사건」으로 1년가까이 평양감옥에서 참기 어려운 옥고를 치르시면서도, 그후 또다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당하신 고문과 호송도중 탈출하실 때 입은 동상의 여독으로 몸을 운신하기 어려운 상태에서도 투쟁을 멈춘 적이 없으시었다. 선생님께서는 노동자, 농민들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각성시켜 조직에 묶어 세우고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키시었으며 고루한 민족주의자들, 그 영향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들도 만나 꾸준히 해설설복하여 무산혁명의 길로 이끌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시었다.

강반석여사께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김형직선생님께서 가시는 길이라면 이 세상 하늘땅 그 어디에라도 따라가실 일념으로 만경대에서 봉화리로, 봉화리에서 다시 만경대로, 중강진과 압록강을 건너 림강, 팔도구 그리고 무송으로, 이렇게 낯설고 물설은 여기저기를 옮겨가시면서 김형직선생님의 혁명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우시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참대밭에서 참대가 나오기 마련이고 참대밭에 사는 사람 마음도 참대같이 곧다고 하였다.

부모님들의 이러한 피어린 무장활동과 혁명적 교양은 어리신 수령님께 있어서 총대소년혁명가로 비범한 성장을 하게 한 비옥한 토양이었고 자양소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부모님들의 숭고한 뜻을 생활체험속에서 혁명의 진리로 파악하시었고 투쟁의 열정과 투지로 간직하시었다.

3.1인민봉기때 그분께서는 여덟살이었다. 그분께서는 이날 만경대고향사람들과 칠골외가마을사람들의 시위대열에 끼여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양 보통문앞까지 달려가시었다. 일제 기마경찰대와 군대들이 칼을 휘두르고 총탄을 마구 쏘아 숱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 날은 그분께서 태어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으로 보신 날이며 우리 민족의 유혈을 처음으로 목격한 날이었다. 어리신 그분의 가슴은 분노로 끓어 번졌다. 피를 토하며 독립만세를 부르짖던 인민들, 그 만세소리는 그분으로 하여금 나이보다 일찍 철들게 하였다. 시위군중과 무장한 적들사이의 격투로 불꽃을 일으키던 보통문 앞거리에서 그분의 세계관은 새로운 단계에로 도약하였다.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발돋움을 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던 그 시각에 그분의 유년시절은 벌써 끝났다.

하기에 그분께서는 팔도구소학교 2학년때 쓴 작문 「애국」에서 이렇게 토로하시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자면 많은 일을 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한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이 나라없는 백성은 금수보다도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은 우리들의 영광이며 의무로 된다.…』

그분께서는 3.1인민봉기후 중강진을 거쳐 압록강너머 중국의 림강, 팔도구에서 혁명활동을 하신 아버님으로부터 국내혁명조직에 보내는 통신연락도 맡아 수행하시고 국내에서 아버님께 보내오는 화약이나 탄알, 비밀문건을 받아오는 일도 수행하시었다. 이를 위하여 그분께서는 적의 삼엄한 경계속을 헤치며 깊은 밤에도 압록강을 건느시었다. 그리고 중강진이나 포평에 있는 순경이나 밀정들이 압록강을 건너 기어드는 것을 제때에 알아서 아버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었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제국주의타도, 조선독립의 대명제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타도, 조선독립, 이것은 소년혁명가 김일성장군님의 좌우명이었고 투쟁의 기치, 투쟁의지이고 혁명활동실천이었다.

그분께서 열네살되시던 주체14(1925)년 2월 3일이었다.

2년전에 4년제 팔도구소학교를 졸업하시고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 조국에 나와 창덕학교를 다니시던 그분께서는 아버님께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시었다는 뜻밖의 기별을 받고 「광복의 천리길」을 걸어 포평에 이르시었다.

그분께서는 압록강가 포평나루터에서 아래쪽으로 좀더 내려가있는 여울목에 서시었다.

폭이 백자도 되나마나한 얼음판을 건느면 8도구시가이다. 거기 강안거리에 두 동생을 데리고 어머님이 계신다. 그러나 성큼 강건너쪽으로 발을 옮겨놓지 못하시는 그분이시었다. 조국을 하직한다는 생각, 언제 다시 이 강을 건너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께서는 강둑위에 나뒹구는 조약돌을 하나 집어 들고 손바닥에 감싸 쥐시었다. 그분께서는 입속으로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강건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시었다. 그리고 설음과 비분을 안고 조국산천을 몇번이고 돌아보시었다.

(조선아, 조선아, 나는 너를 떠난다. 너를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수 없는 몸이지만 너를 찾으려고 압록강을 건는다. 압록강만 건느면 남의 나라 땅이다. 그러나 남의 땅에 간들 내 너를 잊을소냐. 조선아, 나를 기다려 다오.)

그분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는 다시 「압록강의 노래」를 불렀다고 하시며 그때 일을 회고록에 이렇게 쓰시었다.

『나는 그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가,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일가 하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니 어린 마음에도 비감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눈앞에 그려보며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맹세를 다지었다.』

그분께서는 일제경찰의 압송도중 탈출에 성공하여 무송에 가 계시던 아버님과 상봉하시었을 때에도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두번다시 압록강을 건느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씀드리시었다. 이 결심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독립을 이룩하고야 말리라는 투쟁의지이고 신념이었다.

그분께서는 무송제1소학교에 편입되어 공부를 하게 되시었는데 그해 봄 어느날 학교에서 교직원, 학생들의 들놀이를 조직하였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들판을 누비며 뛰놀았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식물채집도 하면서 여러가지 놀이를 하였다.

그분께서는 이날 봄의 정취를 느끼시며 즐거운 마음으로 숲속을 거니시었다. 아지랑이 피어 오르는 조국의 봄이 그리워지시었다. 그럴수록 왜놈이 증오스러웠고 조선독립을 이룩하고야 말 불같은 결의가 가슴에 차 넘쳤다.

그분께서는 주머니에서 손칼을 꺼내어 한그루의 큰 나무에 『일본제국주의 타도, 조선독립』이라는 글발을 새기시었다.

때마침 옆을 지나가던 교장이 이것을 보고 어린 학생이 어떻게 강대한 일제를 타도할 수 있는가고 물었다.

그때에도 그분께서는 조선인민은 누구나 다 왜놈을 미워하고 있다고, 『인민의 힘을 한데 모으면 능히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열네살 어리신 나이에 일제타도를 선언하고 그 방도와 가능성을 한마디로 밝히시는 그 담력과 신념, 예지앞에서 교장은 물론 교원들과 학생들은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한순간에 크나큰 진리를 터득한 것 같아 가슴이 후더웠다.

당시 무송제1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마가성을 가진 교원은 그 시절의 위대한 수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하였다.

『…날이 감에 따라 우리들은 김성주소년이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당시의  김성주소년은 총명하고 강직한 학생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큰 포부와 넓고 깊은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정치활동가였다. 사실 그분은 벌써 사물에 대한 인식과 분석에서 우리 선생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런 감탄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를 타도하고 나라를 독립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높고 원대한 목표이고 포부인가! 열네살의 어린 나이에 이런 숭고한 투쟁목표, 투쟁의지를 지닌다는 것은 참말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제국주의 타도, 조선독립』이라는 이 대명제에 애국, 애족, 애민의 사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발톱까지 무장한 대일본제국을 타도하자면 인민의 힘을 한데 모아야 하고 총대를 틀어 잡아야 한다는 확신이 넘쳐 나고 있었다.

소년혁명가 김일성장군님의 세계관은 이렇게 총대중시를 확고한 이념으로 하여 형성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