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1) 중에서 





 


 

강도 일제의 총칼에 무참히 짓밟히는 조국의 현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으로 하여금 일찍이 총대의 귀중함을 간직하게 하였다. 그분께서는 유년시절부터 총대를 틀어 잡을 강렬한 열망으로 심장의 피를 끓이시며 군사를 배우고 익히는데 마음쓰시었다.

김일성장군님의 유년시절은 총대영웅, 민족적 영웅으로의 성장을 지향하여 범상치 않게 흘러갔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만경대일가분들과 마을사람들의 소원을 담아 아드님의 이름을 성주라고 지으시었다. 나라의 기둥이 되어주기를 바라시는 뜨거운 마음에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손수 지으신  「자장가」에도 일가분들과 인민들의 이러한 기대가 어려있었다.

조선의 아가야

우리 아가야

무럭무럭 자라서

얼른 잠간 소학교

가정에는 효자동

이웃에는 화목동

나라에는 영웅동

우리 나라 영웅동

강반석여사께서는 어리신 아드님을 품에 안으시고  「자장가」를 부르시며 이다음 크거든 나라 찾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었다.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영웅동」으로의 남다른 성장의 길을 걸으시었다. 다섯살에 우리 글 자모를 통달하고 책을 읽으시며 그 뜻을 이해하시었고 여섯살에는 짧은 글도 지으시고 연설문도 거침없이 읽으시었다. 할아버님이 한문 두자를 배워주시면 4자를, 4자를 배워주시면 8자를 아시었다. 어떻게나 글을 빨리 익히고 잘 외우시었는지 사람들은 『<불학이문장>(배우지 않고도 잘 안다는 뜻)이란 말을 그저 옛말로 들어왔는데 증손이가 바로 그런 인물이로구나!』 하고 감탄을 금치 못해 하였다.

더욱이 사람들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군사놀이를 하시는 그분을 보고는 과시 조선군사를 통솔하실 장군감이라고 경탄하였다. 이런 감탄속에는 일제에 짓밟힌 나라를 구원해 주고 민족의 장래를 의탁할 구세주에 대한 갈망이 소박하게 담겨져 있었다.

강토는 일제의 군화와 대포바퀴에 짓이겨지고 사람들의 가슴에는 망국노의 설음이 꽉 차있었다. 망국의 천지에서 모진 수모와 억압, 약탈에 짓눌리고 신음하는 이 나라 백성들은 나라를 광복시키고 민족의 운명을 지켜줄 구원자는 마땅히 총칼로 무장한 왜놈들을 때려 부실 지혜와 지략, 담력과 힘을 겸비한 천하장수, 천출장군이어야 한다고 믿고 그런 영장의 출현을 바랐다. 겨레의 이 절절한 갈망이 어리신 수령님께 그대로 체현되었다.

그분께서는 어려서부터 군사적 예지와 지략, 통솔력이 뛰어나시었다.

무릇 이름난 군사가들은 일정한 군사교육과정에 군사를 배우고 익히면서 군사적자질을 갖추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특별한 군사교육과정이 없이 어린시절에 뛰어난 군사가의 자질을 겸비하시었다. 그분의 비범한 군사적 자질은 어린시절에 하신 군사놀이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만경대고향집 북쪽으로 100m가량 가면 큰 바위가 하나 누워있었다.

어리신 수령님께서는 이 바위를 왜놈잡는 군함이라고 하시었다. 이 군함바위가 그분께서 마을아이들을 거느리고 진행하신 유년시절의 군사놀이터였다.

그분께서 군함바위에 오르시어 수수대나 나무로 만든  긴 칼을 높이 드시고 『우리는 왜놈치러 가는 조선군대다. 우리 군함 앞으로!』하고 호령하시면 아이들은 일제히  「나가자!」 하고 외치면서 저마다 칼을 휘둘렀다.

그분께서 먼저 『만세! 조선군대 이겼다!』 하고 외치시면 아이들도 뒤따라 『만세! 만세!』, 『조선군대 이겼다! 만세!』 하고 목청껏 화답하였다.

바위를 힘있게 디디고 서서 꼬마군사를 지휘하시는 그분의 모습은 참말로 천만군사를 거느린 장군 같았다.

군사놀이는 어리신 그분의 가슴속에 덧쌓이는 일제에 대한 강한 증오심으로 하여 더욱 규모도 커지고 형식과 내용도 다양해졌다.

어리신 수령님께서는 본격적인 혁명투쟁에 나서신 아버님을 따라 주체6(1917)년 봄에 만경대를 떠나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당시 평안남도 강동군 고읍면 동삼리 내동부락)에 가시었고 3.1인민봉기가 있은 해 가을에는 압록강변의 중강진(오늘의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에 가시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상순에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임강으로, 그 다음에는 팔도구, 무송으로 옮겨 다니시며 공부도 하고 아버님의 혁명활동을 도우시었다.

그분께서는 가시는 곳 마다에서 군사놀이를 자주 조직진행하시었다. 이때 군사놀이는 유년시절의 군사놀이와는 대비할 수 없이 높은 수준의 군사놀이었다. 이 군사놀이마다에서는 뛰어난 군사적예지와 영군술의 천품적인 기질이 발현되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대장이 되시어 신통한 전술과 용병술로 지휘하시었다.

주체13(1924)년 10월 중순 창덕학교시절 어느날이었다. 이 날의 군사놀이는 두편이 약 200m 떨어진 곳에 진을 정하고 서로 자기의 대장을 보위하는 한편 상대편 대장을 납치해 오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대장이 된 그분께서는 대원들에게 탐정병(정찰병), 포옹병(납치병), 매복병의 임무를 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싸움에서 승리하자면 대장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여야 한다. 만일 명령을 위반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동무들에게는 벌을 내릴 것이다.』

군사놀이가 시작되자 그분께서는 탐정병들이 탐지해온 자료를 보고 받으시고 상대편의 움직임을 살피시다가 그에 맞는 전술을 쓰시었다. 상대편에서 약한 아이가 나오면 그를 넘어뜨릴 수 있는 힘센 아이를 내보내시고 상대편에서 강하다고 하는 아이가 나오면 여럿을 내보내어 포로해오게 하시었다. 상대편을 하나하나 격파하고 나중에 대장을 납치하게 하시어 전반전의 승리를 마련하시었다.

후반전에서는 전술을 바꾸시었다. 매복구역을 만들어놓고 유인병이 상대편을 유인하여 매복구역에 들어서게 하면 포옹병들이 일제히 나가서 모조리 잡도록 하시었다. 그리하여 후반전에서도 이겼다.

그분께서 지휘하신 군사놀이는 그저 놀이가 아니라 하나의 군사훈련이었다.

무송에서 진행한  「왜놈병영」을 습격소탕하는 군사놀이에는 아버님 김형직선생님께서 세우신 백산학교 학생들과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뿐아니라 무송제1소학교 학생들까지 참가했다. 수십수백명의 아이들이 서열을 지어 동문이나 남문밖의 넓은 공지에서 함성을 지르며  「왜놈병영」습격전을 벌릴 때면 정말 볼만 하였다. 길가던 사람들,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군사놀이를 지휘하시는 그분을 보고 보통인물이 아니라고, 『저렇게 많은 아이들을 통솔하는 것만 봐도 장차 큰 군사를 거느릴 위인이 분명하다.』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진행하신 소년시절의 군사놀이는 미래의 조선독립대장의 모습을 떠올린 그분의 남다른 성장의 일단이었다.

팔도구 뒷산에서의 군사놀이 때었다. 이날에도 그분께서 지휘하신  「조선편」이 이겼다. 그래서 늘 해온대로 아이들은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고는 대열을 짓고 노래를 부르며 마을로 내려왔다. 대열이 마을어귀에 들어서자 험상궂은 상통을 한 압록강건너 포평경찰관주재소 순사가 앞을 막아 서며 왜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는 가고 따지고 들면서 모두 감옥에 가두어 넣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겁이 나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으나 그분께서는 순사앞에 태연히 나서며 군사놀이에서 조선편이 이겨서 조선사람인 우리가 조선만세를 불렀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 가고 들이대시었다. 순사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두서없이 욕설만 퍼붓더니 어성을 낮추며 어디서 배웠는 가고 회유하려 들었다. 이 속심을 꿰뚫어보신 그분께서는  「조선독립 만세!」를 조선에서 들었다고 대답하시었다. 귀가 솔깃해진 순사가 조선 어디서 사는 누구한테서 들었는 가고 묻자 이번에는 3.1인민봉기때 거리에 나갔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무슨 수로 다 알겠는 가고 하시면서 조선사람이 이 만세를 부르면 왜 안되는 가고 물으시었다. 그분께서는 연이어 몇가지만 더 물어보자고 하시고는 일본사람들은 자기네 만세를 내놓고 부르는데 조선사람은 왜 만세를 부를 수 없는가, 조선말을 잘하는걸 보니 조선순사 같은데 조선순사들은 어느 나라 만세를 부르는 가고 따져 물으시었다. 순사는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숱한 아이들 앞에서 망신만 당한 순사는 다시한번 불렀다가는 다 잡아가겠다는 엄포를 하고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참으로 통쾌한 대결전이었다. 이 일을 통하여  「우리 대장」에 대한 격찬이 더욱 높아졌다.

어리신 수령님께서는 이 시기 벌써 가슴속에 총을 잡고 싸워 강도 일제를 쳐부셔야 한다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무송에서 벌리신 군사놀이가 이것을 잘 보여주었다. 그분께서 조직하신 군사놀이는 적과 싸우는 법을 배워주는 군사훈련이었다. 그분께서는 아이들에게 목총을 준비시키고 대열동작도 배워주시고 각종 사격동작과 약진법도 숙련시키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군사놀이에 참가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군사놀이를 장난삼아 하여서는 안된다. 군사놀이를 하는 것도 적과 싸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적은 어떤 놈들인가? 그것은 우리 나라를 빼앗고 우리 부모형제들을 고향에서 살지 못하게 내쫓은 악독한 왜놈들이다. 우리는 커서 왜놈들과 싸워 나라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군사놀이를 해도 왜놈과 싸워 이길 전법을 배우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겠다는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큰 다음에 왜놈들을 때려부시고 나라를 독립시킬 수 있다.』

그분께 이런 신념을 안겨주신 분은 아버님이시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아드님에게 어려서부터 총을 잡고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진리를 심어주시었다. 선생님께서는 아드님과 무릎을 같이하시고 일제를 몰아 내는 일은 조선민족자체로 해야 하며 그러자면 총이 있어야 하고 민중을 잘 조직동원하여야 한다고 자주 가르쳐주시었다.

아버님의 이러한 가르치심 그리고 아버님께서 벌리신 반일무장활동은 어리신 수령님께 반일무장항전정신과 투지를 북돋아준 사상정신적 자양분이었다.

어리신 그분께서는 군사놀이에서만 대장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우리 대장」이시고 아이들의 지도자이시었다.

학습은 물론 무슨 일에서나 그분께서는 조직자이시고 지도자이시었으며  「우리 대장」이시었다.

무송제1소학교에 다니시던 때의 일이었다. 이 학교는  중국소학교였다. 학교안에는 반동군벌에 추종하는 일부 교원들이 학생들의 자유로운 과외활동에 간섭하면서 부당하게 처신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지어 조선학교인 백산학교 학생들의 군사놀이와 가창대활동에까지 간섭하고 무송제1소학교 고급반 학생들의 과외활동을 공공연히 방해하였다.

1925년 가을 어느날에는 한 교원이 부당한 이유와 구실로 학생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학교자치회 회장을 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치회를 여시고 반동교원들의 부당한 처사를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발기하시었다. 신성한 학원에서 학생들을 구타한 사실을 학생들 앞에서 사죄하라, 학생들의 자유로운 과외활동을 보장하라, 조선인학생들에 대한 일부 교원들의 차별행동을 반대하며 모든 학생들을 평등하게 대하라, 그분께서 내놓으신 이러한 내용의 요구를 자치회 성원들이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즉시에 전교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전교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대중적인 투쟁이 벌어지자 교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교원들은 이에 공감하고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특히 교장은 동맹휴학을 주도하신 그분을 퇴학시키자고 한 반동교원들의 제기를 일축하며 『그 학생은 나무랄 데 없다.』고 하면서 학부형회의를 열고 교원들의 부당한 처사를 사죄하였으며 학생들을 학교에 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동맹휴학의 조직과 그 승리를 통하여  「우리 대장」에 대한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