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민족을 사랑하시는 김정일장군」중에서

 


 

통일애국인사들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그분의 민족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무한대하고 뜨거운 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남조선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공화국북반부인민들과 해외동포들의 기억속에는 한생을 통일애국위업에 몸을 깡그리 바쳐온 문익환목사가 있다. 문익환목사의 호는 늦봄이다. 늦봄 문익환목사는 고령의 몸임에도 결단을 내려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만나뵈려고 평양을 찾아왔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온 문익환목사의 감격은 이루 헤아릴 수없이 컸으며 조국통일에 대한 위대한 주석님의 숭고한 뜻과 의지를 받아 안은 그는 금방 통일의 대문이 열릴 것과 같은 환희에 휩싸여있었다.

문익환목사는 이제는 통일이 미완료형이 아니라 완료형이 되었다고 하며 위대한 민족의 구세주가 계시어 통일은 확정적인 것으로 되었다는 확신을 안고 남으로 돌아갔다. 남조선당국은 그를 「보안법」위반죄로 감옥에 가두고 박해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신 분은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었다.

평양을 방문하고 위대한 주석님을 만나뵙고 돌아간 문익환목사는 감옥에서 생일 71돌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시게 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8(1989)년 6월초 어느날 한 일꾼을 전화로 찾으시고 문익환목사의 의로운 행동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목사가 남조선에 나가서도 당국의 탄압과 박해를 무릅쓰고 민족적 양심과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고 높이 평가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목사가 평양에서 생일을 쇠였더라면 우리가 생일상을 크게 차려주었겠는데 그는 지금 생일상은 고사하고 죄수복을 입고 감방에 갇혀있다고,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말씀하시었다.

계속하여 장군님께서는 그는 비록 지금 철창속에서 생일을 보내고 있지만 통일된 조국땅에서 생일을 쇠게 될 날은 멀지 않았다고, 그때 자신께서 생일상을 크게 차려주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노목사의 불행을 두고 그처럼 마음쓰시며 크나큰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시는 장군님의 심중은 무겁기만 하시었다.

그처럼 위대한분들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에 문익환목사는 숨지는 마지막순간까지 통일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용감하게 싸울수 있었다.

늦봄이 돌아간 이후 봄길은 그의 뜻을 이어 통일애국의 길에 몸을 담그었다. 봄길 박용길여사는 늦봄 문익환목사의 생전의 염원대로 민족의 태양이 빛나는 평양길을 택하였다.

용길여사는 문익환목사가 걸어온 북행길을 자신도 걸어야겠다는 결단을 안고 반통일세력들의 온갖 도전과 위협을 무릅쓰고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서거 1돌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을 찾은 것이었다.

이러는 박용길여사의 뜨거운 심중을 깊이 헤아려주신 분은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었다.

주체84(1995)년 7월 위대한 주석님의 서거 1돌을 맞으며 고령의 몸으로 평양을 찾아왔을 때 장군님께서는 조의식장에 나가시기에 앞서 박용길여사를 몸소 만나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박용길여사의 두손을 뜨겁게 잡으시고 어려운 길을 헤쳐온데 대해 사의를 표시하신 다음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한생을 고스란히 바친 문익환목사의 애국적 지조와 절개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고 목사를 잃은 아쉬움에 대해 절절하게 말씀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박용길여사를 만나신 자리에서 위대한 주석님의 유훈을 높이 받들어 주석님의 혁명위업을 꿋꿋이 이어 나가실 것을 바라는 여사의 축원을 남녘땅인민들의 크나큰 기대로 여기고 주석님의 제자, 전사로서의 본분을 다하시려는 의지와 신념을 피력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남조선당국자들이 여사의 평양방문을 문제시하여 사법처리할 수 있다는 실정을 고려하여 중앙추모대회참가를 보류시켰다고 양해의 말씀을 하시었다.

박용길여사는 주석님의 영전에 남조선인민들의 이름으로 인사를 올리고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뵙고 돌아간 다음에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무섭게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씀올리었다.

장군님께서는 문익환목사에게 사랑을 못다 주신 것이 그처럼 가슴아프시어 박용길여사에게 뜨거운 은정을 아낌없이 돌려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여사가 남으로 돌아가 감옥에서 온갖 박해를 받을 때에는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시었다.

장군님께서는 「통일의 꽃」 임수경에게도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시었다.

임수경은 우리 겨레에게 「통일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조국통일을 가로막는 미제와 내외반통일세력의 반민족적 책동으로 하여 남조선사람들이 38°선을 넘는다는 것은 그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누구든지 반드시 깨여버려야 할 그 분단의 장벽을 넘은 사람은 애어린 남녘의 처녀대학생 임수경이었다.

임수경은 남녘의 청년대학생들과 인민들의 통일염원을 한가슴 안은채 의로운 결단으로 주체78(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리는 평양으로 용약 달려왔다. 빨간색T셔츠에 흰 바지를 입은 애어린 남녘의 처녀 임수경은 고려항공기를 타고 비행장에 내리면서부터 북녘의 형제들을 찾으며 조국통일 만세를 소리높이 부름으로써 장장 수십년 얼어붙었던 분열장벽을 녹여내기 시작했고 온 겨레에게 통일의 신선한 바람, 뜨거운 열기를 불어넣었다.

저 원한의 분계선을 넘을수 없어 지구를 한바퀴 돌아 평양을 찾아온 임수경에 대한 북녘인민들의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임수경이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린 5.1경기장에 들어서자 15만석 관중들과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외국대표들까지 일제히 일어나 그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내었다.

북녘의 인민들은 임수경을 「통일의 꽃」이라고 부르며 다시 남녘땅으로 가게 되는 그에게 뜨거운 지성과 사랑이 담긴 위문편지와 기념품을 아낌없이 보내었다. 그것은 헤아릴 수없이 많고 큰 것이었다. 「통일의 꽃」에게 보내는 수많은 편지와 기념품들에는 통일을 바라는 북녘형제들의 뜨거운 열망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바로 그러한 때인 7월 30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꾼들을 부르시어 인민들로부터 임수경에게 보내온 것들을 그가 남조선으로 나갈 때 주어 보내면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가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로 나갈 날을 며칠앞둔 주체78(1989)년 8월 11일이었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한 일꾼을 부르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임수경학생은 통일의 신념이 강한 조선의 딸입니다. 나어린 임수경학생이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제 한몸을 바쳐 투쟁하는 것을 보면 정말 기특하기 그지없습니다.

임수경학생은 통일의 꽃이며 민족의 장한 딸입니다. 나는 임수경학생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임수경에게 「통일의 꽃」이라는 가장 귀중한 칭호를 안겨주시었다. 남녘의 이름없는 처녀대학생 임수경은 통일을 그처럼 바라시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시는 장군님의 사랑을 가슴 한껏 받아 안은 것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임수경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기쁨을 주고 힘을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다고 하시면서 그가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임수경학생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다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임수경에게 줄 선물로 보석금목걸이를 준비해놓았는데 어떨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었다.

보석금목걸이, 그것은 「통일의 꽃」, 「민족의 장한 딸」에게 안겨준 장군님의 끝없는 사랑의 결정체였다.

장군님께서는 그 다심하신 사랑에 감격하며 기쁨을 금치 못하는 일꾼에게 그 보석금목걸이에는 임수경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담겨져 있다고 하시면서 그가 보석금목걸이를 목에 걸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로 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그 다음날인 8월 12일 일꾼은 보석금목걸이를 받은 임수경을 만나 그의 굳은 통일의지와 애국의 높은 정신세계를 고무해주었다.

장군님께서는 그가 판문점을 넘어 남으로 넘어가게 될 날이 다가오자 그의 신변을 두고 몹시 걱정하시었다.

일꾼은 그분의 마음을 담아 북에 남아있거나 3국에 나가 살도록 타일렀으나 임수경은 자기의 한몸으로 판문점의 장벽을 뚫어보려는 굳센 통일의지를 꺾지 않았다.

일꾼으로부터 임수경의 견결한 의지에 대해 보고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는 임수경학생이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에 나가면 감옥에 갇혀 콩밥을 먹게 될 것이 뻔한데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어떻게 그대로 내버려두겠는 가고 하시면서 그를 설복하여 여기에 그냥 남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었다고 하시면서 그런데도 나어린 임수경학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판문점군사분리선을 넘어 서울로 나가겠다고 한다, 그가 만일 서울로 나가지 못하면 고려호텔 옥상에서 떨어져 죽겠다고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임수경은 정말 보기 드문 조선의 딸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리하여 임수경학생의 소망대로 판문점문을 열어놓아야 하며 남조선에 돌아간 다음 그의 신변안전을 담보하여야 하며 그의 판문점통과를 한사코 가로막아 나선다면 모든 후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성명들이 연이어 선포되었다.

드디어 한겨레인 북반부인민들과 한집안식구처럼 정이 들었던 임수경학생이 평양을 떠나 판문점으로 향하는 시각이 다가왔다. 수천수만의 평양시민들이 떠나는 그를 바래우며 눈물을 흘리었다.

평양을 떠나면서 임수경은 통일조국의 길에서 우리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다시 만날 것이라고 외쳤다. 헤어지기 아쉬운 괴로움, 그의 신변의 위험을 막아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눈물로 되어 빗물처럼 흘러내렸고 환호성으로 되어 울렸다.

후날 장군님께서는 일꾼에게 나는 임수경학생이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평양을 떠나는 장면을 록화로 보고 민족의 장한 딸을 영원히 품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온밤을 자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시었다.

8월 15일 오후 2시 20분 임수경은 문규현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남쪽땅에 들어섰다. 온 겨레가 숨을 죽이며 그 역사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당시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했다가 도꾜를 거쳐 서울로 돌아간 통일의 지사 문익환목사는 안양교도소 철창속에 있으면서 임수경이 판문점을 거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백범 김구선생이 밟고 가셨던 길

  이번에는 네가 밟고 건너왔구나

  아 예뻐라

  세상 어디에도 없는 꽃이여

임수경학생이 판문점군사분리선을 넘어 남쪽으로 간 사실을 헤아리신 장군님께서는 일꾼에게 이제 남조선파쇼분자들이 그를 체포하여 철창속에 가두어 넣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 이런 자랑스러운 조선의 딸이 통일의 꽃으로 피어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임수경학생에 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은 실로 그 무엇으로써도 헤아릴 수 없는 깊고도 뜨거운 것이었다.

임수경이 판문점을 넘어갔을 때 남조선의 파쇼교형리들은 그의 목에서 보석금목걸이를 강압적으로 빼앗아냈다.

그러나 그의 몸에 간직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은 빼앗아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