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민족을 사랑하시는 김정일장군」중에서

인간생활에서 가장 큰 고통의 하나는 하나의 혈육, 부모처자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 사는 것이다.

혈육의 헤어짐이란 곧 하나의 핏줄을 이은 부모처자들의 이별이며 나아가서는 같은 핏줄을 이은 민족의 분열이다. 민족스스로가 이러한 분열을 산생시킨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이러한 핏줄의 끊기움이 발생하고 그것이 수십연동안이나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는 것을 념두에 둔다면 우리 민족의 불행과 고통은 세계의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크나큰 불행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민족으로 되어 저 저주로운 38°선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의 혈육들이 오도가도 못하는 오늘의 민족적불행은 이제는 더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되고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천년동안 하나의 핏줄을 이어온 우리 민족의 분열이 그처럼 가슴아프시어 그것을 하나로 잇기 위한 민족사적위업에 모든 것을 바쳐오시었다.

하기에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의 본질을 규정하시면서 조국통일은 끊어진 민족의 핏줄을 하나로 잇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정식화를 주시었다.

끊어진 민족의 핏줄을 하나로 잇는 것이 곧 조국통일이라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에는 60여년을 갈라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 겨레의 아픔을 하루빨리 가셔주려는 애국애족의 뜨거운 마음이 깃들어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하나의 핏줄을 이은 겨레의 분열을 끝장내며 흩어진 부모처자들의 만남을 위해서 모든것을 바치시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과 노고야말로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민족대회상임대회장을 맡았던 남조선의 최기산은 개막연설에서 『분단의 고통속에서 이산1세대는 하나둘씩 눈을 감고 있다』고 하면서 『더이상 통일을 미루지 말고 6.15공동선언을 통일의 이정표로 삼아 화해와 평화, 자주와 통일의 길을 더욱 힘차게 개척해 나가자』고 호소하였다. 흩어진 가족, 친척들이 이제는 나이가 많아 더러는 죽은지 오래고 이제 또다시 생이별속에서 생을 마치게 되는 고통과 불행을 하루빨리 가셔버리자는 호소였다.

흩어진 혈육들의 고통을 하루빨리 덜어주시려는 장군님의 하해같은 사랑이 있어 북남간에는 수십연만에 흩어진 가족상봉이 평양과 금강산, 서울에서 연이어 진행되고 끊어진 하늘과 땅, 바다길이 열려지게 되었다.

남조선잡지 「주간조선」(2004년 1월 1일)은 『웃길줄 아는 사람이 리더가 된다』는 글을 실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글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2000년 6월 역사적인 평양상봉때 연회석상에서 일반석에 앉아있던 이희호를 친히 김대중의 옆으로 불러주시면서 「대통령」이 이산가족이 된 줄 알았다고, 여기 와서까지 이산가족이 되겠는 가고 유모어를 던지시며 장내에 「신선한 충격」을 주시였던 사실을 소개하였다.

역사적인 평양상봉때 연회석상에서 있은 이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유모어로만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그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도 장군님께서 하나의 핏줄을 이은 우리 민족의 분열을 얼마나 가슴아파 하시며 그것을 풀기 위하여 얼마나 큰 심혈을 기울이고 계시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역사적인 평양상봉이후 우리 민족끼리 시대가 펼쳐져 북과 남의 혈육들이 끊어진 핏줄을 다시 잇는 민족사적 사변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우선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교환사업은 1차에서 3차까지는 평양과 서울에서 진행되었고 4차부터는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에서 진행되었다.

북남적십자단체들의 합의에 따라 진행된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교환사업과 상봉은 그야말로 끊어진 민족의 핏줄을 하나로 잇는 민족사적 사변이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찍이 남측에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사업을 계기로 북남적십자회담을 재개하게 하시고 여기에서 남과 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의 고향방문단교환사업을 진행하도록 하시었다. 그리고 주체74(1985)년 9월 예술단, 고향방문단교환사업이 실현되었을 때에는 이 과정을 통하여 흩어져있던 겨레들이 혈육의 정을 나누도록 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서울에 나가게 되는 고향방문단성원들이 가족, 친척들의 사진과 편지도 가지고 가게 하며 북의 특산물들도 남녘혈육들에게 안겨주도록 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남에서 북으로 들어오게 되는 고향방문단성원들을 위해서는 평양고려호텔의 제일 좋은 방들을 리용하도록 관심하시였으며 그들속에 한 고령의 신자가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의 숙소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보살펴주시었다.

장군님의 깊은 관심과 사랑속에 1985년 9월 22일과 23일 이틀간에 걸쳐 평양과 서울에서는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북과 남의 흩어진 가족, 친척들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통일오작교」를 마련하여 주시였기에 자기들이 혈육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결같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이에 대해 남녘의 상봉자들은 한결같이 겨레의 만남을 마련해주신 장군님께 감사를 올리면서 그분께서 계시어 우리 민족의 핏줄은 영원히 하나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흩어진 가족들의 상봉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6.25조국해방전쟁시기에 의용군으로 용약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싸우다가 공화국의 품으로 들어온 이남출신 동포들은 가족, 친척들과의 상봉때마다 장군님의 해빛같은 사랑속에서 성장하고 삶을 빛내이는 자기들의 행복상을 남녘형제들에게 뜨겁게 전하였다.

그들속에는 공화국영웅이며 「김일성상」계관인, 인민예술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총지휘자인 피바다가극단 총장 김수조도 있으며 공화국의 유명한 교수, 박사, 인민배우 그리고 노력영웅들도 있었다.

그들은 만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 민족이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하나의 핏줄임을 확인하였으며 이 민족의 핏줄을 영원히 끊기워서는 안된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6.15통일시대에 들어서면서 혈육들의 상봉은 여러 갈래로 진행되었으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가족, 친척들의 주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흩어진 부모형제들을 하루빨리 더 많이 만나고 싶어하는 남녘동포들의 소원을 헤아리시고 몸소 화상상봉까지 마련해주시었다.

장군님의 이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봉과 핏줄의 이음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게 되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6.15통일시대를 열어놓으심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하나로 잇기 위한 역사적인 사업을 더욱 힘있게 전진시켜 나갈 수 있는 확고한 담보를 마련하여 주시었다.

6.15이전에는 단 한차례의 북남적십자예술단 및 고향방문단교환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무려 14년이라는 세월과 25차의 적십자예비회담, 10차의 본회담, 3차의 실무대표접촉을 비롯하여 수십차의 회담과 접촉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6.15이후에는 4년남짓한 기간에 4차례의 적십자회담을 통하여 10차에 걸치는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을 성사시켰다. 이것은 6.15시대가 안아온 커다란 결실이다.

남조선의 「KBS」방송은 2003년 8월 평양의 모란봉공원에서 북과 남이 함께 하는 「KBS」의 평양노래자랑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한마디로 남북은 역시 하나임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또 우리 민족은 춤과 노래를 즐기는 민족이라는 말을 실감이 나게 한 하루였다.… 분단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즐거운 노래자랑에 신명이 난 한마당을 만들어낸 이번 평양노래자랑은 우리 민족은 역시 하나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한 자리였다.』

장장 60여년 갈라져 서로 다른 사상과 문화속에 살았던 우리 민족은 한자리에 모여 앉아 민족이 함께 즐기는 선율과 가락을 찾아내며 기쁨을 함께 했다.

2000년 9월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되던 그 나날에 벌써 우리 겨레는 서로 떨어져서는 살수 없는 하나의 민족임을 확인했고 여러차례에 걸쳐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이 진행되면서 끊어진 핏줄의 이음이 진행되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통일오작교」를 타고 민족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었다.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북남상급회담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서 10여차례 진행되었고 6.15공동선언이행을 위한 당국과 민간, 각계층의 대화와 회합, 토론회들이 연이어 진행되게 되었다.

끊어진 민족의 핏줄을 하나로 잇기 위한 역사적인 투쟁에서 특기할 사변은 북과 남사이의 철도 및 도로연결이다. 주체91(2002)년 9월 18일 동서해 철도 및 도로연결의 착공을 알리는 발파소리가 반세기이상 얼어붙은 분열의 장벽에 파열구를 내기 시작했다.

주체92(2003)년 2월 5일에는 군사분계선 10m너비의 2.4km구간에 걸쳐 동해선 도로연결공사가 완공되어 금강산륙로관광을 위한 시범답사가 실현되었다. 6.15공동선언발표 3돌을 맞으며 동서해철도연결공사가 완공되어 주체92(2003)년 6월 14일에는 군사분계선에서 북과 남이 공동으로 레루를 연결하는 의식이 성대히 진행되었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의 「CBS」방송은 『오늘 궤도연결로 열차가 곧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단 반세기만에 남북의 혈맥이 다시 이어졌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북남간의 경제교류가 시작되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통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취하여 졌다. 주체92(2003)년 2월에는 개성공업지구건설착공식이 진행되었고 그것은 온 겨레의 크나큰 관심속에 앞으로 북과 남이 공동으로 공업제품들을 더 많이 대대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랜 기간 격폐되었던 저 분단선을 넘어서 축구경기, 태권도시범단의 교환방문, 제14차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제22차 대구세계대학생체육경기대회, 평양통일롱구경기대회, 제주도민족통일평화체육문화축전 등 체육행사들이 진행되었다.

수백명으로 구성된 북의 응원단과 선수단은 부산에서 진행된 제14차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여 우리 민족이 하나임을 과시하였다. 근 300명에 달하는 북의 응원단을 태운 「만경봉-92」호가 부산의 다대포항을 가까이할 무렵 남측의 100여척의 배가 통일기를 띄우고 마중나와 환영하였다. 항에는 부산땅이 생겨 처음 보는 환영군중이 모여들었고 북의 청년예술인들은 부산시민들앞에서 우리의 민요와 민족무용을 보여 온 부산땅이 통일의 열기로 끓어 번졌다.

북의 국립교향악단예술단, 교예단이 서울을 방문하여 민족정신과 민족의 슬기를 한껏 펼쳐 보였고 남측의 가극단, 명배우공연이 평양에서 공연무대를 펼치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북과 남의 비행기들이 서해항로를 따라 분계선을 넘어 오가는 희한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북의 선박들이 제주도해협을 통과하여 항로를 잡고 있으며 꽃게잡이철에는 북과 남의 어민들이 서해어장에서 공동어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저 저주로운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의 군대들이 수십연간 대치해있으면서 서로 상대방을 비방중상하며 대결을 고취하던 방송이 중지되는 희한한 현실이 펼쳐졌다.

평양으로는 세계적인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구경하러 만여명의 관광객들이 들어와 평양관광도 하고 공연도 보고 돌아갔다. 유명한 옥류관의 평양냉면은 이제는 평양사람들만이 아니라 남쪽의 동포들도 함께 맛을 즐기는 민족요리로 되었다.

북과 남으로 오가는 물자들을 통하여 민족의 뜨거운 정이 오가고 있다. 어제날에는 그처럼 첨예한 군사적 대치지점으로 되어있던 개성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배려에 의해서 남조선동포들이 오가는 관광지로 되었다.

명백히 말해서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사랑속에서 끊기웠던 하늘, 바다, 땅길이 열리고 북과 남의 겨레들이 오가며 끊어졌던 민족의 핏줄을 하나로 이어가고 있다. 통일의 밝은 앞날이 앞당겨지고 있는 것이다.

6.15가 열어준 통일의 길은 이제는 더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의 잡지 「시사져널」(2004. 12. 23)은 『피치 못할 지정학적 상황에서 우리는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 길이 얼마나 지난할 것이며 남과 북이 함께 짊어질 역사의 숙제는 얼마나 큰가.

그 첫번째 결실이 6.15공동선언이었다. 남과 북이 세계를 향해 약속한 그 선언은 갈등과 대결의 분단역사를 화해와 협력의 통일역사로 바꾼 대 전환이었다.

통일의 문을 열고 첫 발을 내디딘 그 찬란한 역사를 누가 감히 거스를 수 있으며 누가 감히 더럽힐 수 있을 것인가.』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