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태양 김정일장군」(3) 중에서


 

   

 영생은 사람들의 오랜 숙망이다. 그러나 바란다고 하여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수령의 영생은 나라와 민족,혁명과 그 장래와 관련되는 중대한 성업이다.

이 중대사는 수령께 무한히 충직한 위대한 후계자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진리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그대로 모신데서 깨달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영생을 보장해드리는데서 초미의 급선무는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그대로 모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순간도 지체시켜서는 안될 가장 긴절한 대업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과학기술이나 경험을 바로 정립해 놓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버이수령님을 뜻밖에 잃고 누구보다 절통한 비감에 싸여계신 장군님께서는 그 가슴터지는 통분속에서도 이 중대한 사업에 열화의 충정과 지성을 다 바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심장의 고동을 멈추신 직후부터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대로 영구히 모시기 위한 구상과 작전을 펴시었다. 비상대책도 취하시었다. 그이께서는 비통한 조의기간인 주체83(1994)년 7월 11일에도 한 일꾼에게 자신께서는 요즘 수령님의 영구옆에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떠나가신 수령님을 영구히 잘 모시겠는가, 어떻게 하면   수령님의 위대한 사상과 불멸의 업적을 고수하고 빛나게 계승발전시켜 나가겠는가 오직 이 한가지 생각뿐이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영원히 우리곁에 모셔야 한다고, 수령님의 그 모습그대로, 그 인자하신 영상을 그대로 모시어 수령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여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그대로 모시는 사업은 최신의학기술과 현대과학기술을 다 도입하여 최상의 수준에서 완전무결하게 실현해야 할 책임적인 성스러운 사업이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 직접 현대의학기술문헌들과 최신과학기술자료들을 연구하시었다. 그리고 의사, 과학자들과 담화를 하시며 그들에게 귀중한 가르치심도 주시었다. 뿐만아니라 비상대책으로 대표단을 무어 다른 나라에 파견해주시는 한편 재외대표부를 통해 다른 나라의 귀중한 과학기술문헌자료들과 그에 대한 연구실태자료들을 구하여 보내오도록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꾼들에게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그대로 영구히 모시는 사업이 위대한 사업이며 여기에 기본을 두고 모든 것을 복종시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시었다.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충정과 결심, 전격적이고 현명한 영도에 의하여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대로 모실수 있게 되었다.

주체89(2000)년 10월 10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금수산기념궁전에 나오시어 생전의 모습그대로 계시는  어버이수령님께 경의를 표시하시고 『수령님의 모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하시었다. 그러시면서 다른 나라의 권위있는 전문가들도 위대한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그대로 모신 우리의 의학 및 과학기술적 대책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대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격찬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영구히 모시는데서는 영구를 어디에 어떻게 모시겠는가 하는 문제가 나섰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누구보다 깊이 마음쓰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신 이후 우리 군대와 인민들은 이제 조의행사가 끝나고 영결식까지 한 다음에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금수산의사당에 계시면서 우리 혁명과 세계혁명을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래서 일부 일꾼들과 설계가들은 김일성광장이나 만수대언덕 아니면 만경대지구에 능을 새로 꾸리고 그곳에 위대한 수령님을 모실수 있지 않겠는 가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나라에서나 당 및 국가수반이 타계하면 그가 집무를 보던 청사는 공직과 함께 그 후임자에게 넘기고 서거한 영도자의 영구는 그가 생전에 활동하던 장소와 건물에서 떨어져 도시 중심부의 광장이나 일정한 곳에 묘 또는 능을 새로 꾸리고 거기에 안치했었다. 레닌묘와 모주석기념당, 호지명묘도 그들이 사업하던 곳에서 떨어져있는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베이징의 천안문광장, 하노이의 바딩광장에 꾸려져 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세계적으로 공인되어온 이러한 관례를 뛰어넘어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계시면서 사업하신 금수산의사당에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모실 결심을 하시었다.

원래 금수산의사당은 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는 수령님의 집무실이었다. 1970년대 중엽까지도 수령님께서는 일반청사에서 집무를 보시였고 많은 날 「인민행렬차」에서 지내시며 현지지도를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환갑을 넘기신 어버이수령님께 훌륭한 집무청사를 마련해드리려고 각방으로 마음쓰시었다. 그이께서는 여러날 수도의 모란봉일대와 대성산주변의 안학동일대를 밟아보시다가 합장강이 대동강과 합류하는 금수산기슭에 이르시었다. 절기는 겨울철이어서 눈이 깔렸다. 눈은 아주 정갈하였다. 그이께서는 눈에 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공기가 대단히 맑겠다고, 그뿐아니라 여기는 산도 끼고 강물도 흐르며 소음이 없는 명당자리라고 하시며 이곳에 금수산의사당의 터를 잡아주시었다.

건물이 완공되어 이곳으로 집무청사를 옮기시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세계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런   건물은 없을것이라고, 이 집은 우리 인민들의 소원을 담아 김정일동지가 나에게 지어준 선물이라고, 이 집을  금수산의사당이라고 부르자고 하시며 더없이 만족해하시었다.

그 나날을 더듬으시던 장군님께서는 확고한 결심을 담아 나는 금수산의사당을 어떻게 보존하고 이용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것을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금수산의사당은 명실공히 수령님의 집입니다, 나는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그대로 금수산의사당에 모시려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활동이 금수산의사당과 직결되어 있듯이 수령님의 영생도 금수산의사당에서 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의도이고 결심이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3(1994)년 7월 11일과 19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하신 담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우리는 전체 인민의 총의에 따라 수령님을 우리 공화국의 주석으로 높이 모시였고 전체 인민이 지성을 바쳐 이 주석궁을 건설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이곳 주석궁에서 사업하시였습니다. 그리고 금수산의사당이라는 이름도 수령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수령님을 영원히 모시고 이 주석궁을 영원히 수령님의 기념관으로 만들자는 것이 나의 결심입니다.』

장군님께서는 8월초에도 인민무력부 책임일꾼에게 나는 우리 인민들과 군인들을 위해서 한평생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신 어버이수령님을 그이께서 오래동안 계시면서 사업하시던 금수산의사당에 모셨으면 한다고, 나는 수령님을 생존해계실 때보다 더 잘 모셔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도덕관을 가지고 수령을 모셔야 하는가 하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려고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 충정의 결심에 따라 마침내 주체83(1994)년 8월 23일 금수산지구를 주체의 최고성지로 꾸리기 위한 성스러운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모실 방을 바로 선정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주체83(1994)년 8월 2일, 장군님께서는 일꾼들과 함께 수령님을 모실 방을 정하기 위하여 금수산의사당의 내부를 돌아보시었다.

장군님께서 수령님의 영구를 안치하고 조의행사를 한 중앙홀(오늘의 「울음홀」)에 이르시었을 때 일꾼들은 수령님을 이 홀 아니면 3호동에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올렸다.

장군님께서는 다른 방들을 다 돌아본 다음에 합의하자고 하시면서 1층부터 차례차례 매 방들을 주의깊게 돌아보시었다.

어느 한 홀에 이르신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었다. 홀에는 천만구슬을 뿌리는듯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기암절벽에 갖가지 꽃들과 단풍이 조화를 이룬 금강산을 형상한 벽화가 펼쳐져 있었다.

생전에 수령님께서 집무를 보시다가 국내의 일꾼들과 인민들을 만나시어 크나큰 믿음과 은정을 베풀어주시고 다른 나라의 국가수반들과 외교사절들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우리 나라의 아름다움과 유구함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시면서 기념사진도 찍어주시던 뜻깊은 「금강산홀」이었다.

그 나날의 어버이수령님의 모습을 그려보시는 듯 벽화를 한동안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대로 영구히 모실 장소는 여기에 꾸려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그후에도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금수산의사당에 나오시어 이 결심을 더욱 굳히시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사망한 국가수반을 지하에 안치하고 그위에 주석단까지 꾸려놓았기 때문에 행사때마다 영구위에서 행사를 하게 되어있지만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의사당의 높은 층에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모셔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혁명전사들이 지녀야 할 마땅한 의리이고 도덕이라고 하시었다.

이에 대하여 장군님께서는 훗날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대로 모신 방을 높은 곳에 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아래에서부터 돌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서 수령님께 인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수령님의 전사들인 것 만큼 마땅히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어버이수령님을 서거이후에도 생전과 다름이 없이 기념궁전(당시 금수산의사당)의 높은 곳에 사회주의조선의 시조로 가장 존엄 높게 모셔야 한다는 것이 그이의 숭고한 뜻이었다.

어버이수령님을 모실 방을 정하신 장군님께서는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처음 들어서서 뵈옵게 될 수령님의 입상을 모실 홀을 최상의 수준에서 훌륭히 꾸리도록 하시었다.

주체83(1994)년 8월 하순, 장군님께서는 홀을 돌아보시면서 홀의 종심이 깊지 못한 것을 헤아려보시고 홀을 크게 형성하도록 위치를 바로잡아주시었다. 그후 여러차례에 걸쳐 홀형성에서 나서는 구체적 문제들을 세심히 밝혀주시었다.

그리하여 홀의 대리석기둥과 그에 맞물려 두공과 판돌을 조화롭고 무게있게 쌓아올린 단식천정 등 우리 민족의 고유한 건축형식과 능건축의 전통적인 형식이 철저히 구현되게 되었고 홀의 넓은 대리석바닥도 웅장해 보이면서 따뜻하고 포근한 감이 나게 되었다.

10월 15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홀에 모실 수령님의 입상을 보아주시기 위해 또다시 기념궁전건설장에 나오시었다.

당시 일꾼들과 설계가들은 대원수복차림의 수령님입상원형을 형상하고 있었다.

그 입상원형을 한동안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대원수복을 입으시고 인민들앞에 나서신 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수령님의 입상은 우리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모습으로 형상하여야 한다고, 수령님께서 금수산의사당에서 손님들을 기다리실 때와 그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실 때의 모습이 우리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것만큼 그런 모습으로 입상을 형상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하시었다.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창작가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인민들을 맞아주시는 모습을 형상했다. 장군님께서는 이 입상원형을 보아주시고 금수산의사당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숭엄한 감정으로 옷깃을 여미고 수령님의 대리석상을 우러러보게 되는데 웃으시는 모습으로 형상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 숭엄한 자세로 서계시는 모습으로 형상할 데 대하여 다시금 가르쳐주시었다. 이렇게 되어 수령님께서 생전에 금수산의사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견해주시기 위하여 기다리실 때나 그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실 때 뒤짐을 지고 서계시는 모습으로 대리석상이 형상되게 되었다.

장군님께서는 숭엄한 모습의 입상에 맞게 배경도 독창적으로 처리하게 하시어 붉게 피어오르는 새벽노을을 배경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입상이 태양의 모습으로 안겨오도록 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입상홀을 지나 수령님을 뵈오려고 오르는 계단을 형상한 설계도안을 보아주시면서 계단은 넓으면서도 숭엄하고 무게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어버이수령님께서 사람들을 두팔로 껴안아주시는 것처럼 계단을 형성하면 좋을 것 같다고 손수 연필을 드시고 금을 그어가시며 가르쳐 주시었고 언제인가는 현장에 나오시어 몇번이나 계단을 오르내리시면서 가장 알맞는 폭과 높이, 너비를 정해주시었다.

이렇듯 경애하는 장군님의 다함없는 충정에 의하여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영구히 모실 방과 인민들에게 잘 알려진 생존시기의 영상을 숭엄하게 형상하여 모신 입상홀, 찾아오는 사람들을 포옹하는 형식으로 된 대계단, 최고성지로서의 면모에 어울리는 기념궁전외벽 등 모든 것이 훌륭히 꾸려짐으로써 금수산기념궁전은 명실공히 영원한 태양의  집으로 빛나게 되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위대한 사업을 소문없이 진행해오시다가 수령님서거 1돌을 앞두고 세상에 알리도록 하시었다.

주체84(1995)년 6월 12일,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랜 기간 계시면서 당과 국가사업, 조선혁명과 인류의 자주위업을 현명하게 영도하신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하여 여기에 위대한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그대로 모시며 금수산지구를 주체의 최고성지로 할 데 대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의 결정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영생의 모습으로 길이 모실 데 대하여』가 채택공포되었다.

이어 7월 8일, 수령님서거 1돌이 되는 날에는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금수산기념궁전개관식을 거행하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심혈과 현명한 영도에 의하여 금수산기념궁전은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모시려는 우리 군대와 인민, 우리 겨레와 진보적 인류의 절절한 염원에 맞게 모든 것이 최상의 수준에서 완벽하게 꾸려지게 되었다.

금수산기념궁전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의 모습으로 계시는 태양의 집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숭고한 뜻과 지성에 의하여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그대로 영구히 모시는 위업이 빛나게 수행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위업에 바치신 장군님의 심혈, 그 정성은 한없이 컸다. 장군님께서는 대국상을 당한 삼복의 무더위속에서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모시기 위하여 순간을 놓칠세라 모든 것을 다하시었다. 그 순간순간은 위대한 후계자의 열화같은 지성이 선대수령에게 아낌없이 바쳐지는 역사의 순간순간이었다.

금수산기념궁전 개관을 앞둔 주체84(1995)년 6월 23일, 장군님께서는 생전의 모습으로 계시는 어버이수령님을 오래동안 바라보시고 일꾼들에게 수령님의 모습이 생존해 계실 때와 별로 차이가 없다고, 얼굴모습도 그대로라고, 머리가 좀 희어 보이는데 수령님께서 연세가 많아지시면서 머리가 많이 희어졌다고 하시면서 『나는 오늘 수령님의 모습을 보면서 영구보존사업이 아주 잘되었으며 만점이라고 평가합니다. 매우 만족합니다.』라고 하시었다.

그 이튿날에 몇몇 책임일꾼들을 만나신 자리에서 장군님께서는 나는 수령님을 잃고 온 나라, 온 세계가 슬픔속에 잠겨있을 때 수령님을 영생의 모습으로 모실것을 결심하고 비상대책도 세웠드랬다, 이제는 우리 수령님을 영생의 모습으로 모시는 사업이 완전무결하게 결속되었다, 외국전문가들도 와서 보고 세계역사에 없는 기적이라고 탄성을 올렸다고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시었다.

만시름을 놓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환하신 모습을 우러르며 일꾼들은 약속이나 한듯 다같이 박수를 쳤다. 모두가 격정을 억제할 길 없어 눈물을 머금으며 열광을 표시해마지 않았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한결 숙연해진 표정으로 나는 어제 금수산기념궁전에 찾아가 세시간동안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수령님을 영원히 생전의 모습그대로 모실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갈리 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었다.

세시간동안이나 어버이수령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뜨거운 심중이 안겨와 일꾼들은 눈굽을 적시었다. 그것은 장군님께 드리는 감사의 눈물이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러는 그들에게 모레 오후쯤에 수령님의 제자들인 동무들이 먼저 나와 함께 어버이수령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자고, 그런 다음 우리가 상주가 되어  수령님서거 1돌추모행사를 조직하자고 말씀하시었다. 그이께서는 이 약속대로 이틀후에 그들에게 생전의 모습으로 계시는 어버이수령님을 맨 처음으로 찾아뵙는 특전을 베푸시었다.

그들은 어버이수령님의 영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을 체험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생전의 모습그대로 누워 계시었다. 꼭 집무를 보시다가 잠간 눈을 붙이신것만 같았다. 이제는 아무때 찾아와도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굽이 뜨거워 났다.

그렇다, 우리 수령님은 가시지 않으셨다,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금수산기념궁전에 모신 것은 수령영생위업에 쌓아올리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장 위대한 민족사적, 인류사적 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