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에서는 군대가 「비사상화」, 「비정치화」의 간판밑에 당의 군대, 혁명무력으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잃게 되었다.

이것은 총대가 사회주의전취물도 노동자계급의 당의 운명도 지켜내지 못하는 비극을 빚어내게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경애하는 장군님에 의하여 수령님께서 이룩하신 혁명무력건설전통이 더욱 튼튼히 옹호고수되고 빛나게 계승발전되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건군사상과 건군업적을 100% 계승해 나가는 것을 군건설의 근본원칙으로 삼으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정력적으로 벌이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그 사업의 일환으로 수령님께서 군건설에서 이룩하신 업적들과 귀중한 사적물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며 그를 통한 교양사업을 강화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주체76(1987)년 1월 어느 날 장군님께서는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찾으시었다.

새롭게 꾸려진 사적관의 내부진열상태를 돌아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이 인민군대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의 현명성, 군건설에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의 노고와 업적으로 군인들을 교양할 수 있게 다시 꾸려진데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혁명사적관에 수령님께서 인민군대를 창건하시고 영도하여 오신 전기간의 혁명사적자료와 사적물가운데서 조국해방전쟁 이후의 것부터 전시함으로써 인민군대의 특성에 맞게 꾸려졌다고 하시면서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은 이렇게 꾸려야 조선혁명박물관이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과 중복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었다.

이 날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다 돌아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꾼들을 둘러보시며 『새로 꾸린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이 마음에 듭니다. …혁명사적관은 인민무력부에서처럼 자기 단위의 특성에 맞게 꾸려야 합니다.』라고 다시금 치하해 주시었다.

일꾼들은 그분의 말씀을 새기면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 건설을 발기하시고 터전을 잡아주신 때부터 사적자료와 사적물전시에 이르기까지 몸소 세심히 지도해 주시던 지난 일들이 되새겨져 가슴 뜨거워짐을 금할 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건설할 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신 것은 주체71(1982)년 어느 날이었다.

인민군대의 책임일꾼들을 부르시어 사상사업실태를 요해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군인들 속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군건설업적교양을 폭넓게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태를 아시게 되시었다. 이것은 결코 무심히 스칠 수 없는 문제였다.

일찍이 혁명의 길에 오르시어  주체적인 첫 혁명적 무장력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 후 그것을 현대적인 정규무력으로 강화발전시키시고 혁명발전의 매 단계마다 올바른 건군노선을 제시하시어 인민군대를 일당백의 무적강군으로 키워오시었다.

세계에는 나라도 많고 군대도 많지만 우리 수령님처럼 혁명무력과 그 강화발전을 위하여 그처럼 장기간 크나큰 노고와 심혈을 바쳐오시면서 세기적인 업적을 이룩하신 수령은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군대의 역사에도 없다.

실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쌓아 올리신 불멸의 건군영도업적은 우리 인민군대를 당의 군대, 혁명의 군대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만년재보이고 인민군군인들을 수령결사옹위정신으로 튼튼히 무장시키기 위한 혁명적 양식이다.

그러나 인민군대안의  사상사업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이렇듯  빛나는  군건설업적을  집대성하여  놓고  이를  통하여  모든  군인들을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한 혁명전사로 튼튼히 준비시키기 위한 사상교양사업을 폭넓게 벌여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꿰뚫어보신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군건설업적을 통한 사상사업의 거점으로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새로 건설할 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그러시고는 몸소 현지에 나오시어 터전도 잡아주시고 사적관건설에서 제기되는 걸린 문제들을 즉석에서 다 풀어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후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건설이 끝나고 내부전시까지 다 되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주체74(1985)년 7월 9일 다시 현지에 나오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먼저 건물의 외부를 보시고 나서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건물을 아주 멋있게 지었다고 하시며 사적관건설에 동원되었던 군인들을 치하해 주시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1층 중앙홀과 총서관으로부터 사적관에 전시된 사적자료들과 사적물, 사적문헌들을 차례로 돌아보시고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인민군대의 특성에 맞게 잘 꾸리지 못한 부족점에 대해 지적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일꾼들에게 혁명사적관은 자기 단위의 특성을 살려 내용이 있게 꾸리고 잘 운영하여야지 건물이나 번듯하게 지어놓아서는 쓸데없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이라면 마땅히 인민군대의 특성에 맞게 꾸려야 합니다.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에는 사적물도 인민군대의 사적에 맞는 것을 가져다 놓아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혁명사적관은 내용을 잘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혁명사적관을 역사를 개괄하는 식으로 꾸리는 현상을 없앨 데 대하여 간곡하게 말씀하시었다.

말씀을 받고서야 일꾼들은 장군님께서 의도하시는대로 인민군대의 특성에 맞게 사적관을 꾸리지 못했다는 것을 심각히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일꾼들을 둘러보시며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었다.

『아마 수령님께서 평양학원을 세워주신 첫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민군대를 정규적 혁명무력으로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영도하여 오신 전기간의 사적물이 몇천 몇백 만종은 될 것입니다. 수령님께서 인민무력부에 남긴 사적물만 전시하여도 지금 건설한 혁명사적관을 다 채우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그분께서는 인민군대에 있는 사적자료와 사적물들을 전시하여 인민군대사적관을 특색있게 잘 꾸릴 데 대한 과업과 방도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었다.

장군님께서 이 날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돌아보시면서 주신 가르치심은 혁명사적부문 사업에서 나타나고 있는 편향을 바로잡고 혁명사적관을 자기 단위의 특성에 맞게 내용있게 꾸리며 그를 통한 사상교양사업을 착실하게 해 나가는 데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치심이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현명한 가르치심과 세심한 지도에 의하여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은 특색이 있는 사상교양의 거점으로 새롭게 꾸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꾼들은 그 나날들을 되새겨보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군건설업적이 집대성된 사적교양사업의 위력한 거점을 마련해 주심으로써 모든 인민군군인들을 혁명적 수령관이 확고히 선 주체형의 혁명가로 더욱 튼튼히 키울 수 있게 하여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날 완공된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돌아보시면서 일꾼들에게 혁명사적관에 수령님께서 보아주신 사적무기들과 사진자료들을 많이 전시할 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었다. 그리고 앞으로 혁명사적관을 잘 운영하면 많은 사람들을 교양할 수 있다고,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강조하시었다.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의 관리운영과 사적관참관사업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신 장군님께서는 새로 꾸린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사람들이 조선혁명박물관이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만 보아서는 수령님의 군건설업적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수령님의 군건설업적을 깊이있게 체득하자면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에 와보아야 합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가르치심과 정력적인 영도가 있어 위대한 수령님의 군건설영도업적이 집대성된 국보중의 국보가 마련되게 되었으며 인민군대의 사상사업에서는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주체76(1987)년 3월 9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군지휘성원들과 함께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밑에 마련된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돌아보시었다.

사적관강사의   해설도  주의깊게  들어주시고  전시된  사적물들도   세심히   보아주시면서   잊지   못할  나날들을    감회깊이   회고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꾼들에게 김정일동지가 당사업을 맡아보기 전에는 지금처럼 혁명사적물을 보존하는 체계가 서있지 못하였으며 그 누구도 사적물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우리 나라에서 혁명사적물보존체계는 김정일동지가 당사업을 맡아보면서 철저히 세워놓았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수령님께서는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을 잘 꾸려놓은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인민무력부혁명사적관, 그것은 수령님의 건군위업을 가장 빛나게 계승완성해 나가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영도가 안아온 고귀한 결실이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군건설영도업적을   빛내이고   그를  통한  교양사업을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심도있게   해  나가도록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노고는 끝이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준엄했던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을 역사적인  승리에로 영도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영도업적을 통한 교양사업이 실속있게 진행되도록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을 잘 꾸리게 하시고 그를 통한 교양사업을 강화해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전쟁시기 최고사령부가 자리잡았던 사적지를 원상대로 잘 꾸리고 수령님의 전쟁시기 혁명사적을 통한 교양사업을 힘있게 벌여 나가도록 하시었다.

주체76(1987)년 8월 9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사적지를 몸소 찾아주시었다.

차에서 내리시어 낯익은 길을 따라 사적지의 산발들과 몰라보게 자란 산자락의 숲을 둘러보시며 조국해방전쟁시기 최고사령부가 자리잡았던 건물로 걸음을 옮기시던 장군님께서는 이 사적지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곳입니다, 사적지에 오래간만에 와보니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라고 감회깊은 말씀을 하시었다.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군인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높이 받들고 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며  미제침략자들과  결사전을  벌이던  시기 장군님께서는 이곳에서 수령님을 몸 가까이 모시고 전쟁의 불길을 함께 헤치시며 강대한 미제국주의를 타승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탁월한 전략전술과 전법을 체득하시면서 선군영장으로서의 자질과 품격을 키워 나가시었다.

알뜰하게 잘 가꾸어진 정원과 갖가지 아름다운 꽃나무들, 관상용의 이채로운 정원수들, 키높이 자라 설레이는 변두리의 숲들을 둘러보시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던 장군님께서는 관리도 잘 하고 나무도 잘 가꾸었다고, 그러나 사적지를 너무 공원화한 것이 부족점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아마 청소년학생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와보면 가열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최고사령부가 공원속에 들어가있은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난 전쟁시기에는 여기에 건물들만 있었지 지금처럼 이렇게 나무가 무성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이 사적지는 가열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최고사령부가 있었던 곳인 것만큼 공원처럼 꾸리면 안된다고, 이 사적지는 그저 수수하게 꾸려놓고 보존관리를 잘 하면 된다고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날 여러 사적물들을 돌아보시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영도하신 혁명사적지들 가운데서 이 사적지가 기본이며 매우 중요한 혁명사적지라고 하시면서 사적지를 잘 꾸릴 데 대하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사적지를 원상대로 꾸려놓고 그 보존관리를 잘 할뿐 아니라 사적지에 대한 참관사업을 광범히 조직하여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영도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통하여 광범한 군인들과 인민들을 교양하는 사업을 강화해 나가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 주시었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군건설영도업적을 가장  빛나게  계승발전시켜 나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시어 나라의 도처에 혁명전적지, 혁명사적지들이 원상대로 꾸려져 수령님의 군건설영도사가 전면적으로 체계화되고 이를 통한 교양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게 되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위대한 수령님의 군건설영도업적을 옹호고수하는 데서 언제나 선차적 의의를 부여하신 것은 항일의 혁명전통이었다.

당과 혁명의 역사적 뿌리인 혁명전통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순결하게 계승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수령이 개척한 군건설위업, 사회주의위업을 끝까지 완성하기 위한 근본요구이다.

1980년대 후반기 이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에서 혁명의 배신자들이 수령을 모독하고 당의 혁명전통을 왜곡 말살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이런 엄중한 사태발전은 우리 나라에서 주체의 혁명전통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더욱 빛내어 나갈 것을 절박하게 요구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마련하신 주체의 혁명전통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더욱 빛내이기 위하여 백두산지구를 비롯한 전국적 범위에서 항일혁명투쟁시기의 사적과 유적유물들을 발굴보존하고 군인들 속에서 그를 통한 교양사업을 강화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항일혁명전적지들과 혁명사적지들을 전면적으로 조사발굴하여 왕재산혁명사적지와 삼지연혁명전적지를 혁명전통교양의 거점으로 꾸리게 하시고 그것이 군인들과 인민들을  혁명전통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도록  하시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80년대에 들어와서도 항일혁명사적조사발굴사업을 계속 줄기차게 밀고 나가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가장 중시하신 것은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한 백두산일대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이었다.

백두산밀영은 1930년대 후반기와 1940년대 전반기에 전반적 조선혁명의 중심적 영도거점으로서 조선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불멸의 자국을 아로새긴 선군혁명의 성지였다.

기묘한 자연지리적 조건과 울창한 수림으로 위장된 백두산밀영은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와 경위중대를 비롯한 주력부대 성원들만 드나들고 일체 외부와는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전기간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조선혁명의 영도거점으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었다.

항일혁명투쟁시기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백두산밀영을 발굴하여 원상대로 꾸리고 그를 통한 교양을 강화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항일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길이 빛내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구였다.

그런데 이렇듯 중요한 백두산밀영이 1980년대 초반까지 발굴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백두산밀영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었다. 오랫동안 백두산일대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진행하였으나 천험의 원시림속에서 세월의 풍상에 묻혀버린 옛 자취를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두산일대를 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백수골안을 유심히 살펴보시다가 이 골안이 낯이 익다고 하시면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백두산밀영을 꾸렸던 곳 같으니 한번 조사해 보라고 이르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뜻을 받드시어 일꾼들에게 소백수골안을 잘 답사하여 원래의 백두산밀영자리를 기어이 찾아내자고 하시면서 강력한 역량으로 조사발굴대를 무어 주시었다. 그리고 주도세밀한 조사계획을 작성하게 하시고 만단의 준비에 기초하여 소백수골 어귀에서부터 발굴에 착수하도록 하시었다.

조사발굴대원들은 장군님께서 밝혀주신 조사계획에 따라 햇빛도 스며들지 못하는 천험의 수림지대를 샅샅이 답사하면서 발굴사업을 진행하였다.

마침내 소백수골안에서만도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구호나무들과 집터자리, 천막자리, 탄피와 군용밥통을 비롯한 많은 유적유물을 찾아냈으며 그곳 밀영이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백두산밀영이라는 것을 확증하게 되었다.

일꾼들의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었다. 백두산밀영이야말로 항일혁명투쟁을 상징하는 사적물의 핵이고 혁명의 재보중의 재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사실을 지체없이  수령님께  보고  드리는  한편  백두산지구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더욱  심화 시키도록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항일혁명투사들을 백두산지구에 파견하여 발굴된 숙영지자리와 혁명유적유물, 구호나무들에 대한 고증도 철저히 진행하게 하시었다.

이리하여 소백수골의 백두산밀영지에서 사령부귀틀집자리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탄생하신 고향집자리가 발굴고증되었으며 이어 사자봉밀영, 간백산밀영, 곰산밀영, 선오산밀영, 소연지봉밀영, 무두봉밀영, 압록강안밀영, 대각봉밀영, 쌍두봉밀영 등 국내의 백두산지구에 분포된 여러 밀영자리들이 발굴되게 되었다.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정연한 밀영망을 이룬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가 발굴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의 일대 앙양기와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역사적 전환기에 혁명의 책원지가 국내에 있으면서 전반적 조선혁명을 승리적으로 조직영도하였다는 것이 뚜렷이 확증되게 되었다.

이것은 항일혁명전통을 계승발전시키고 수령님의 군건설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완수하는 데서 거대한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었다.

백두산밀영은 40여년 전의 원상그대로 복구되어 주체76(1987)년 2월에 개영되었다.

주체77(1988)년 여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로 발굴된 백두산밀영을 찾으시었다.

못 잊을 그 날을 그려보시는 듯 수령님께서는 사령부귀틀집과 어리신 장군님을 안아 키우시던 생가귀틀집을 돌아보시고 그 마당가에서 소백수로 뻗은 오솔길이며 우뚝 솟아있는 「정일봉」마루도 오래도록 더듬으시었다. 그리고 경위대원실을 비롯한 밀영의 여러 귀틀집들을 차례로 돌아보시었다.

수십년 세월이 흘렀어도 옛 모습이 그대로 헤아려지는 소백수골의 풍치와 유적, 유물을 유정한 눈길로 살펴보신 수령님께서는 백두산밀영을 좀 더 일찍이 찾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해방 직후부터 백두산밀영을 찾으려고 하였지만 그때에는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건당, 건국, 건군사업을 하느라고 시간이 없었고 그 후에는 미제를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과 전후복구건설,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영도하다보니 짬을 내지 못하여 백두산밀영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자신께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백두산밀영을 찾도록 항일혁명투사들을 여러 차례 파견하시었다고 회고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날 백두산밀영을 훌륭히 발굴하여 복구한 것을 보시고 매우 만족해 하시면서 백두산일대에 있는 사적지들을 모두 원상대로 복구하고 혁명사적들을 잘 정리하여 혁명전통교양의 거점으로 꾸리도록 세심히 가르쳐주시었다.

주체77(1988)년 8월 18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백두산밀영을 찾으시었다.

수십년 만에 유서깊은 혁명의 성지를 찾으신 것이 못내 감회깊으신 듯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소백수골의 낯익은 산발과 무성한 수림, 소백수의 맑은 물을 둘러보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20년전에만 소백수골에 있는 이 밀영을 찾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백두산밀영을 찾으시기 위해 오래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오시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이윽고 숭엄한 안색으로 한동안 깊은 감회에 잠겨 계시던 장군님께서는 사령부귀틀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시었다.

귀틀집앞에 이르신 그분께서는 집안팎을 살펴보신 다음 사령부귀틀집을 원상대로 잘 꾸린데 대하여 치하하시면서 백두산밀영에 있는 사령부는 1930년대 후반기와 1940년대 전반기에 전반적 조선혁명의 중심적 영도거점이었다고, 수령님께서는 이 사령부귀틀집에서 1930년대 후반기 조선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 당조직건설을 위한 투쟁,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 조선혁명에서 주체적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비롯한 전반적 조선혁명에서 새로운 앙양을 일으키기 위한 투쟁을 조직영도하시었으며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의 주체적 역량으로 조국해방의 역사적 위업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조직영도하시었다고 하면서 백두산밀영사령부의 전략적 사명과 역할에 대하여 밝혀주시었다.

사령부귀틀집을 돌아보신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옮기시어 생가앞에 이르시었다.

아득히 먼 유년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내시려는 듯 생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시던 장군님께서는 문을 여시고 부엌에 들어서시었다.

어머님의 손길이 스며있는 소박한 부엌세간들을 살펴보신 다음 밖으로 나오신 장군님께서는 이어 경위대원실을 찾으시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통나무로 벽체를 쌓고 지붕을 이은 자그마한 경위대원실을 돌아보신 그분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백두산에서 추위를 이겨내며 싸우느라고 고생인들 얼마나 하였겠는가, 평양에 있는 좋은 살림집에서도 15년동안 사느라면 불편한 점이 많겠는데 백두산지구와 같은 추운 곳에서 15년동안이나 지내면서 일제와 싸운다는 것이 간단치 않다고 하시면서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은 이렇게 간고한 투쟁속에서 이룩되었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백두산밀영의 한줌의 흙, 이름없는 나무가지마다에 어려있는 항일선열들의 백절불굴의 혁명정신과 열화와 같은 조국애를 그 누구보다 뜨겁게 감수하시는 그분이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경위대원실도 원상대로 잘 꾸려놓으니 실감이 난다고 하시며 벽에 써붙인 구호들을 읽으시었다.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셨던 그분께서는 심중한 어조로 새로 발굴된 구호나무에 씌어있는 구호들을 그대로 옮겨놓기는 하였는데 구호글씨가 지금 우리 사람들이 쓰는 글씨와 비슷하므로 나무에 있는 글씨를 본따서 구호를 다시 쓰는 것이 좋겠다고 이르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날 소백수골의 혁명유적유물들을 다 돌아보신 후 일꾼들이 만들어 올린 소백수골형성안을 보아주시며 소백수골을 잘 꾸려야 하겠다고, 소백수골은 백두산혁명전적지들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인 곳이라고, 소백수골을 잘 꾸리는 것은 수령님의 혁명업적을 길이 전하며 우리 인민들을 교양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시었다.

『소백수골을 꾸리는 데서 중요한 것은 해당한 역사적 시기의 원상을 보존하는 원칙에서 꾸리는 것입니다. 사령부귀틀집을 비롯한 혁명전적지들은 대를 이어 길이 전하여야 할 우리 당의 귀중한 혁명적 재보인 것만큼 원상대로 꾸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러시면서 그분께서는 소백수골을 지금 예견한 것처럼 꾸리게 되면 원상과는 달리 유서깊은 혁명사적지가 공원화, 도시화될 수 있고 자연풍치도 파괴될 수 있으며 시대감도 나지 않게 된다고 하시면서 소백수골을 원상대로 꾸리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었다.

그분의 가르치심에는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를 꾸리는 데서 반드시 견지하여야 할 원칙적인 문제가 밝혀져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오늘의 세대들은 물론 앞날의 후대들도 언제나 백두의 혁명정신을 지니고 대를 이어 변함없이 혁명의 길을 곧바로 걸어 갈수 있게 하시려는 숭고한 뜻이 깃들어 있었다.

일꾼들은 주관적인 욕망만을 앞세우면서 소백수골과 같이 귀중한 혁명전적지를 원상대로가 아니라 공원화, 도시화할 번 했던 자신들의 그릇된 처사를 심각히 뉘우쳤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날 아직은 발굴대원들밖에 밟아보지 못한 잡초무성한 길 아닌 길을 헤치시며 구호나무들을 돌아보시었다.

구역구역에 껍질벗긴 구호나무들은 많이 서있었으나 글자들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슨 글발인지 알아볼 수 없는 구호나무들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그분께서는 우리가 한 20년전에만 구호나무를 찾아냈어도 지금처럼 지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구호나무를 많이 발굴한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좀 더 일찍 발굴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시며 못내 아쉬워하시었다.

잠시 후 구호나무들의 글발들을 잘 볼 수 있게 형광투광장치를 해놓은 건물안에 들어서신 장군님께서는 현출되는 구호글발들을 주의깊게 살펴보시며 형광투광장치로 구호나무에 썼던 글발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하시며 만족해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과학원 과학전시관을 찾으시어 구호나무의 구호를 형광투광장치가 없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노출시키는 방법을 연구할 데 대한 과업을 주시고 연구사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다 풀어 주시었다. 그리하여 형광투광장치가 없이도 시약을 가지고 구호문헌을 원상대로 노출시키는 과학연구성과가 이룩되게 되었다.

장군님께서는 과학자들이 이룩한 주체적인 연구성과에 토대하여 전국적 판도에서 혁명유적유물발굴사업과 함께 혁명적 구호문헌발굴사업을 힘있게 벌이도록 이끌어 주시었다.

그리하여 혁명사적사업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발굴사업이 전당적, 전군중적인 사업으로 벌어졌다.

발굴사업에 참가한 일꾼들과 과학자들은 험준한 산발과 골짜기들을 수없이 타고 넘으며 혹한과 무더위속에서도 한그루의 나무, 하나의 흔적도 놓칠세라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 바치었다. 그리하여 소백수골에서 백두산밀영이 발굴된 때로부터 2년남짓한 기간에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평안남도와 평양시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지역들에서 수많은 구호문헌들과 혁명유적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밑에 백두산지구를 중심으로 한 전국적 판도에서 수많은 비밀근거지들과 혁명적 구호문헌, 혁명유적유물, 혁명역사문헌자료들이 발굴수집됨으로써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밑에 조직진행된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사적들이 사료적으로 입증되게 되었으며 항일의 혁명전통을 더욱 빛내일 수 있게 되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8(1989)년 3월 19일 또다시 백두산지구를 찾으시고 당중앙위원회, 양강도당위원회 책임일꾼회의를 소집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이 날 회의에서 당의 혁명전통을 사상이론적으로 철저히 옹호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일 데 대하여 강조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이 사업은 당과 혁명의 역사적 뿌리로 되는 혁명적 재부를 지키고 우리 혁명의 명맥을 이어 나가며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완성해 나가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일꾼들에게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를 새로 발굴하는 사업도 중요하지만 대외적으로 혁명전통을 사상이론적으로 옹호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항일혁명투쟁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그릇된 역사관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투쟁을 학계에서 학술적인 논쟁을 벌이는 방법으로 진행할 데 대해서와 그에 필요한 자료들을 충분히 준비하며 이 부문 일꾼들이 항일혁명투쟁시기의 혁명역사를 깊이 학습할 데 대하여 밝혀주시었다.

그리하여 혁명전통을 사상이론적으로 철저히 옹호고수하기 위한 대외활동이 주동적으로 벌어졌으며 우리의 사회주의를 고립압살하려는 적들의 책동이 날로 우심 해지고 있던 시기 당과 혁명의 만년초석인 주체의 혁명전통이 견결히 옹호고수되게 되었다.

참으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영도밑에 1980년대 후반기 우리 나라에서 백두산지구를 비롯한 전국각지에 수많은 혁명전적지, 혁명사적지들이 원상대로 꾸려져 그를 통한 혁명전통교양이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게 되었으며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 백두산총대혈통이 대를 이어 굳건히 이어져 수령님의 군건설영도업적을 더욱 빛내일 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마련되게 되었다.

    

 

영광스러운 항일혁명, 선군혁명으로 닻을 올린 주체혁명은 반세기가 넘는 장구한 기간 줄기차게 발전해 왔다.

이 장엄한 역사의 건군노정에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운명의 태양으로 높이 모시고 청춘도 생명도 다 바쳐 싸운 항일혁명열사들의 빛나는 업적이 깃들어 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의 해방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선군의 총대를 잡고 빛나는 한생을 바쳐 싸운 항일혁명열사들을 영생의 언덕에 높이 세워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을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안치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인민의 마음속에 영생의 모습으로 살아있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었다.

그 영생의 언덕에 1980년대에 들어와 사망한 항일의 백전노장인 최현동지를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이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반세기의 장구한 기간 혁명의 군복을 입고 선군위업에 한생을 바쳐온 그들이 사망했을 때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시며 그들을 혁명열사릉에 안치하도록 해주시었다.

최현동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너무도 비통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한 일꾼을 부르시어 최현동지의 서거에 대한 부고를 낼 데 대한 가르치심을 몸소 주시었다.

『최현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충실한 혁명전사, 친근한 혁명전우, 훌륭한 혁명동지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충직한 아들이다.…』

부고의 마디마디에는 그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최대의 존경이 깃들어 있었고 그의 빛나는 업적에 대한 최고의 영예가 담겨져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장의식을 온 나라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깊은 애도속에 국장으로 전례없이 크게 거행하도록 하시고 영결의 조총이 울리는 가운데 그를 혁명열사릉에 안장하게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항일혁명열사들을 잊지 못하시어 늘 회억하시었으며 그들을 영생의 언덕에 더 높이 내세워 주시려고 마음 쓰시었다.

그리하여 장군님께서는 혁명열사릉 개건확장공사를 몸소 펼치시고 조선노동당창건 40돌을 계기로 준공식을 성대히 거행하도록 하시었다.

『혁명열사릉』현판이 붙은 민족적 형식의 크고 넓은 능대문이며 위대한 수령님의 친필비와 헌시비, 공화국영웅메달을 부각한 화환진정대와 조각군상들 그리고 생전의 모습그대로 세워진 혁명열사들의 동상과 그 배경에 휘날리는 붉은 깃발…

혁명열사들의 영생의 기념비로서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춘  대성산혁명열사릉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몸소 구상하시고 세심히 지도하시어 개건된 대기념비이다.

원래 대성산혁명열사릉은 숭고한 혁명적 의리를 지니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의 뜻을 받드시어 조선노동당창건 30돌을 계기로 대성산 주작봉마루에 건설하게 하신 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 충성다한 항일혁명열사들을 영생의 언덕에 더 높이 내세워주기 위하여 깊이 마음 쓰시는 장군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지성이 모자라는 것만 같으시어 당창건 40돌을 맞으며 혁명열사릉을 보다 웅장하고 현대적으로 개건확장할 데 대하여 구상하시었다.

그분께서 혁명열사릉을 개건확장하실 결심을 하신데는 가슴 뜨거운 사연이 있었다.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의 깊은 밤,  집무에 열중하시던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으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함박눈이 쏟아지니 산에서 싸우던 때가 생각난다고 하시면서 항일무장투쟁의 나날 적후공작에 나갔던 전사들이 돌아오지 않아 밀영밖에서 눈을 맞으며 그들을 기다리던 일을 감회깊이 추억하시었다. 수령님께서는 그때를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모두가 잠에든 이 밤에 누구에게 전화를 하겠는가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날 밤에 전화로 항일의 나날들을 회고하시며 한시간나마 이야기를 나누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그 날 밤 잠 못 이루시는 수령님을 생각하시며 그리고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했던 항일혁명열사들을 생각하시며 집무실에서 한밤을 지새우시었다.

이튿날 일꾼들을 부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들에게 밤에 있은 일을 이야기해 주신 다음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많은 투사들이 희생되었다고,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잊지 못해하신다고 하시면서 열사릉을 더 잘 건설하여야 하겠다고 결연히 말씀하시었다.

이렇게 되어 대성산혁명열사릉을 새롭게 개건확장하는 사업이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드시고 혁명열사릉을 새롭게 꾸리는 사업을 몸소 지휘하시면서 혁명열사릉이 항일혁명열사들의 고귀한 혁명정신과 투쟁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할 수 있게 손색없이 잘 꾸려지도록 하는데 특별히 주의를 돌리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현장에 나오시어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일일이 바로잡아 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주체73(1984)년 여름 어느 날 시범적으로 제작하여 전시해 놓은 항일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을 보아주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이 무렵 일꾼들은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을 어떤 재질로 제작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다가 원가가 적게 들면서도 영구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본 인조대리석과 동착색을 한 알루미늄으로 만든 반신조각상을 제작하였는데 이 날 그것을 전시해 놓았다.

그분께서는 손수 반신상을 만져도 보시고 두드려도 보시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시었다가 반신상을 인조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으면 우리의 양심이 허락치 않는다고 하시며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을 다른 재질로 만들지 말고 동으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다고,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은 동으로 만들어 세워야 무게도 있고 보기도 좋다고,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을 동으로 하면 오래 보관하는 견지에서 보아도 좋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우리의 정성이 깃들게 되고 그 품위와 정중성도 더욱 높아지게 되어 좋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혁명열사들을 영생의 모습으로 시대와 역사앞에, 조국과 인민앞에 더 높이 그리고 영원히 내세워 주시려는 그분의 숭고한 의리와 한량없는 은정은 그 무엇으로써도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날 혁명열사릉 맨 윗부분의 배경처리에 대한 형성안을 요해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변풍치와 어울리게 키낮은 소나무와 잔디를 심으려고 한다는 일꾼의 보고를 들으시고 대성산혁명열사릉에서 맨 윗부분의 배경처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대성산혁명열사릉 윗부분의 형성을 의의있고 특색있게 잘 살리자면 세차게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형상하여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혁명열사들이 소나무밭속에 있다는 것보다 붉은 기폭에 싸여있다고 하면 혁명열사들을 추모하는 의의도 크고 대성산혁명열사릉이 한층더 숭엄해질 것입니다.』

이때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열사릉의 배경처리문제를 한 순간에 해결해 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빛나는 예지에 일꾼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항일혁명선열들의 신념의 상징이었고 승리의 기치었으며 죽어서도 안기고 싶은 혁명의 품이었던 붉은 깃발로 그들을 영원히 감싸 안아 품어주고 빛내어 주시려는 그분의 불보다 뜨거운 사랑과 은정에 마음의 격동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분의 말씀대로 세차게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화폭으로 형상하여 놓으면 혁명열사릉전반의 면모를 더욱 숭엄하게 만들고 혁명열사들을 추모하는 의의를 비상히 높일 수 있었다.

항일혁명열사들을 영생의 언덕에 높이 내세워주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의리깊은 사랑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 완공을 앞둔 대성산혁명열사릉 개건확장공사장을 또다시 찾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종합화환진정대에 오각별을 형상한 것을 보시고 혁명열사릉에 안치될 열사들 가운데 항일혁명투쟁시기에 희생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다 공화국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오각별을 형상하는 것보다 공화국영웅메달을 크게 부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르시었다.

그분의 말씀에 따라 대성산혁명열사릉의 종합화환진정대에는 오각별대신 공화국영웅메달이 목란꽃장식속에 숭엄하게 부각되어 혁명열사들의 위훈을 더욱 찬연히 빛내어주게 되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항일혁명선열들의 고귀한 혁명정신과 위훈이 길이 빛나도록 해주시기 위하여 혁명열사릉에 위대한 수령님의 친필비를 새로 모시도록 하시었다.

『항일혁명열사들의 숭고한 혁명정신은 우리 당과 인민들의 심장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어린 친필비와 더불어 항일혁명열사들은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대오에서 참된 삶을 영원히 빛내이게 되었다.

장군님께서는 능대문에 친필로 된 현판 『혁명열사릉』을 달게 하시어 대성산혁명열사릉의 기념비적  풍격을  더욱  숭엄하게  부각시켜 주시었다. 그분께서 몸소 쓰신 옥필의 찬연한 현판글은 선열들의 위훈을 칭송한 불멸의 노래로, 숭고한 의리의 결정체로 세월의 언덕을 넘어 길이 빛날 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와 세심한 보살피심에 의하여 대성산혁명열사릉은 일찍이 능건설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기념비로 완공되었다.

주체74(1985)년 10월 4일, 이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준공식에 앞서 대성산혁명열사릉을 찾으시었다.

능대문으로부터 붉은 깃발이 바라보이는 반신상구역에 이르는 모든 건축물들과 형상물들을 일일이 다 돌아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대성산혁명열사릉은 비록 묘지이지만 하나의 예술작품과 같다, 여기에 안치된 혁명열사들이 비록 오늘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먼저 갔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평양시전경을 낮이나 밤이나 늘 내려다보게 되어 한이 없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혁명열사릉은 수령님께서 혁명전사들에게 돌려주신 크나큰 신임의 표시이고 선물이며 그들의 투쟁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의 상징입니다.』

혁명열사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상의 영광을 담아 하시는 말씀이었다.

얼마 후 완공된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오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성산혁명열사릉을 아주 잘 꾸렸다, 세계적으로 이런 열사릉이 우리 나라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더없이 만족해 하시었다.

참으로 혁명열사릉은 당과 수령을 위하여, 조국과 혁명을 위하여 고귀한 생을 바친 혁명열사들을 영원한  충신의  모습으로 빛내어 주시기 위하여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베푸시는 뜨거운 사랑과 은정, 가장 숭고한 도덕의리를 안고 일떠선 불멸의 기념비이다.

이렇듯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뜨거운 사랑과 의리속에서 혁명열사들의 삶은 영원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