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해외교포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와 같이 해외교포문제를 민족문제의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제기하고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존엄, 운명까지도 책임지고 보살펴주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개척하신 주체적인 해외교포운동의 업적과 전통을 빛나게 계승발전시키시어 재일동포들을 비롯한 해외동포들이 공화국공민으로서의 민족적 권리를 옹호하고 민족적 애국운동을 힘있게 벌여 나가도록 따뜻이 이끌어주시고 보살펴 주신다.

그 자애로운 손길이 있어 우리의 해외동포들은 민주주의적 민족권리를 당당히 행사하고 있으며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보람찬 투쟁의 길에서 참된 삶을 빛내이고 있다.

우리 해외동포들의 운명을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며 이끌어 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사랑은 이역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골고루 미치고 있다.

인류역사에는 경애하는 장군님처럼 해외동포들을 위해 그토록 심혈을 바쳐 헌신하시는 절세의 위인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이역의 길가에서 조약돌처럼 버림받고 짓밟히던 우리 동포들을 자주독립국가의 당당한 해외공민으로 내세워주시고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존엄을 찾아주신 분은 애국애족의 화신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이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동포애와 해외교포운동사상을 빛나게 이어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태양의 빛발로 해외동포들의 운명을 보살피시며 그들의 민족적 존엄과 민주주의적 민족권리를 굳건히 지켜주고 계신다.

해외동포들의 민주주의적 민족권리를 지켜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동포애는 해외교포조직을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철저히 대변하는 조직으로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커다란 심혈을 기울이시는데서 발현되고 있다.

해외동포들이 민주주의적 민족권리를 쟁취하고 고수해 나가자면 자기들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는 조직을 가져야 하며 조직에 뭉쳐 투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해외동포들이 자기들의 사는 나라와 지역의 구체적 조건과 현실에 맞게 교포조직을 꾸리고 강화해 나가도록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84(1995)년 3월과 5월에 발표하신 노작 『총련을 조직사상적으로 강화하는데서 나서는 몇가지 과업에 대하여』『재일조선인운동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 데 대하여』 등을 통하여 변화된 현실에 맞게 총련조직을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여 나가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명철하게 밝혀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노작들에서 밝혀주신 방향과 방도들은 총련조직을 변화되는 현실에 맞게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여 나가기 위한 강령적인 지침이었다.

그이께서 재일조선청년들을 비롯한 새 세대 동포들을 애국위업의 믿음직한 계승자로 키우시기 위하여 깊이 마음 쓰시며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것은 총련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노고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이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재일조선청년들은 총련애국사업의 계승자이며 교대자라고 하시면서 재일조선인운동의 명맥은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 의해 이어지며 총련의 앞날은 청년들을 어떻게 준비시키는가 하는데 달려있다고 간곡히 가르치시었다.

총련의 새 세대들을 애국위업의 믿음직한 계승자로 키우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은 끝이 없었다.

주체85(1996)년 1월 22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재일조선청년들을 위하여 목란관에서 성대한 연회를 마련해주시고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몸소 연회장에 나오시어 동포청년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재일조선청년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오늘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청년들이기 때문에 조선인민군협주단 공훈합창단(현재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의 공연을 보여주었다고 하시면서 공훈합창단의 공연을 아직 보지 못한 총련중앙의 책임일꾼들에게 오늘 공연을 본 소감을 이야기하고 자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시어 좌중에 유쾌한 웃음꽃이 피어나게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며 재일조선청년들은 이국땅에서 나서 자라는 자기들에게 투쟁의 진리와 사회주의조국의 숨결, 필승의 신념을 더욱 깊이 심어주시려고 마음 쓰시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이 안겨와 가슴이 후더워졌다.

이 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자애로운 어버이가 되시어 조청일꾼들의 사업과 생활을 하나하나 요해하시고 나서 재일본조선청년동맹사업에서 지침으로 삼을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으며 그들모두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와 조선노동당창건 50돌기념주화를 친히 수여해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총련일꾼들에게 애국의 계주봉을 넘겨받을 3세, 4세 젊은 동포들을 잘 준비시킬 데 대하여 거듭 강조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제 와서는 재일동포들의 절대다수가 영세하나마 상공인으로 되어있는 조건에서 총련은 기본군중인 상공인들과의 사업을 주선으로 틀어쥐고 나갈 데 대한 방침도 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과 방침이 구현되어 총련대오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총련의 위력은 비상히 커지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빛발이 있어 총련은 그 어느 나라 해외공민들도 가지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권위있고 위력한 해외교포조직으로 자라나 재일동포들의 자주적 권리와 존엄을 믿음직하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

해외동포들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는 교포조직을 강화발전시켜 나가는데 바쳐진 경애하는 장군님의 노고와 심혈은 동포들이 있는 곳이라면 지구의 그 어느 곳이나 미치고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보살피심속에서 독립국가협동체나라들에는 국제고려인통일연합회(국제고통련)가 주체78(1989)년 11월에 결성되었고 주체86(1997)년 3월에는 국제고통련 산하조직으로 원동고통련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주체80(1991)년에는 재중동포연합조직으로 재중조선공민총연합회가 결성되게 되였다. 그리고 아메리카와 유럽지역 등 세계 이르는 곳마다에 수많은 교포조직들이 결성되어 동포들을 묶어 세우고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적극 옹호해 나가고 있다.

해외동포들의 민족적 권리와 존엄을 지켜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뜨거운 동포애로 해외동포들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해 주시고 온갖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고 계신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언제인가 총련일꾼들과 만나시어 나는 어려울 때마다 사회주의조국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총련동무들을 생각한다고, 총련동무들도 난관을 겪고 있겠지 하고 생각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사로운 손길이 있어 주체56(1967)년말부터 3년이상 끊어졌던 재일동포들의 귀국의 뱃길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고 1990년대 중엽에 총련조직을 붕괴시키려던 일본반동들의 책동이 여지없이 파탄되게 되었으며 재일동포들의 민주주의적 민족권리가 고수되게 되였다.

해외동포들의 불행과 고통을 가셔주기 위한 은정어린 위문전문과 위문금을 보내주신 감동적인 이야기는 만 사람의 가슴을 울려주고 있다.

주체84(1995)년 1월 최대의 지진이 일본의 한신, 아와지지역을 순식간에 참혹한 페허로 만들어놓았을 때였다.

하루새벽에 휩쓸어버린 자연재해로 동포들가운데 121명이 희생되고 1,500여명이 부상당하였으며 2,225호의 동포들의 집과 공장, 점포들이 완전히 불타거나 파괴되고 4,200명의 동포들이 엄동설한에 피난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참변이 빚어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진피해로 총련동포들이 많이 희생된 것을 가슴 아파하시며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날인 1월 18일에 깊은 동정과 은정어린 사랑의 위문전문과 위문금을 보내주시었다.

사실 이 시기 제국주의연합세력의 악랄한 고립압살책동이 극도에 이르고 몇해째 자연피해를 겪고 있는 공화국의 형편에서 해외동포들을 재정물질적으로 도와준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재일동포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가셔주는 일이라면 아까울 것이 없다고, 설사 우리가 죽을 먹고 굶는 한이 있더라도 위문금을 많이 보내주어야 한다고 거듭 이르시고 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문을 친히 보내주시었다.

《나는 이번에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지진에 의하여 피해를 당한 모든 동포들과 유가족들에게 다시한번 심심한 위문과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나는 총련의 모든 조직들과 동포들이 더욱 굳게 단합하여 피해지역동포들을 적극 도와주며 그들이 하루 빨리 지진피해를 가시고 안정된 정상적인 생활을 이룩할 것을 진심으로 바라면서 위문금으로 미국돈 1백만딸라를 보냅니다.》

경제가 발전했다고 허장성세를 광고하던 나라들이 일본정부에 보낸 구제금이 기껏하여 50만US$미만일 때 100만US$의 위문금을 보내신 것도 사람들을 격동케 하였지만 그보다 더 동포들의 심금을 울려준 것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총련산하 동포들뿐 아니라 「민단」계동포들을 포함하여 모든 피해동포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위문금이 가 닿도록 해주신 것이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이 담긴 위문금은 이념과 단체, 소속에 관계없이 피해당한 동포들 그 누구에게나 전달되었다.

위문금을 전달받은 재일동포들은 위문금봉투를 부여 안고 우리에게는 어머니조국이 있다, 어버이수령님과 꼭 같으신 장군님품이 있다고 하면서 격정의 눈물을 흘렸다. 「민단」계동포들은 총련조직을 찾아와 자기들까지 돌봐주신 김정일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해 달라고 절절히 부탁하였다.

해외동포들의 운명을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동포애는 주체46(1957)년 4월부터 조국에서 재일동포자녀들에게 보내주고 있는 사랑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의 역사가 한시도 중단없이 흐르도록 하시어 그들의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권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신 데서도 뜨겁게 표현되고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잃고 온 민족이 몸부림치던 그때에도 총련에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수령님께서 계실 때와 꼭같이 보내주도록 하시었다.

가슴 저미는 비분으로 낮과 밤을 이어가던 대국상의 나날에 뜻밖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받아 안은 재일본조선인중앙교육회의 일꾼들은 격동된 심정을 터치며 『어려울 때 위인을 더 잘 안다고 하였는데 크나큰 슬픔속에서도 자신보다 재일동포자녀들을 먼저 생각하시며 예나 다름없이 극진한 배려를 돌려주시는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처럼 사랑 많으시고 인정깊으신 영도자는 동서고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오열을 터뜨렸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극진한 어버이사랑이 있어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은 70만재일동포들의 영원한 생명수가 되어 조국땅에서 이역땅으로 끝없이 흐르고 있으며 총련의 초급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민족교육의 화원이 만발하게 피어나 민족의 대, 애국의 대가 꿋꿋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절세의 애국자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해외동포들을 혈육의 정으로 따뜻이 보살펴주고 계신다.

사람이 어려서는 부모에게 의탁하고 젊어서는 부부간에 의탁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탁한다고 하여 예로부터  「3거의탁」이라고 말하여 왔다.

해외동포들의 생활과 운명을 극진히 돌봐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이 있어 총련일꾼들과 여러 해외교포조직의 일꾼들, 애국사업에 헌신하는 모든 해외동포들은  자신의 한 생과 후대들까지도 전적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 맡기고 사는 「일거의탁」의 행운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동포들을 혈육의 정으로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사랑은 해외교포일꾼들에게 뜨겁게 미치고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돈이 재산이 아니라 애국을 낙으로 생각하고 살고 있는 총련을 비롯한 해외교포일꾼들을 누구보다 대견하게 여기시고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온갖 사랑과 배려를 다 안겨주고 계신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총련일꾼들을 만나실 때마다 본가집이나 맏형네 집으로 알고 조국에 오라고, 적어도 1년에 한번씩은 조국에 오라고, 올 때 부인들도 데리고 오라고 정겹게 이르시고 총련일꾼들이 오늘은 나의 친구로, 동지로, 전우로 온 것만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껏 정을 부어주시며 조국에 머무르는 기간 피로를 풀고 마음껏 즐기도록 세심히 돌봐주시었다.

한덕수의장이 94살의 노년의 나이까지 건강한 몸으로 총련의장의 중책을 지니고 보람찬 삶을 누릴 수 있은 것도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러한 크나큰 사랑과 보살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덕수의장이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조국에 왔을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의장이 일본에서 언제 한번 편히 쉬어 보았겠는 가고 하시며 평양축전이 끝난 다음 조국에서 부인과 함께 한달쯤 휴식하고 돌아가게 하라고 이르시고 휴식은 금강산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은정으로 한덕수의장과 부인을 비롯한 23명의 가족일행은 훌륭한 조건에서 숙식하면서 외금강의 절경을 구경하고 해금강에서 섭죽놀이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으며 유명한 금강산온천에서 탐승의 피로를 풀기도 하였다.

한덕수의장이 나이가 들수록 그를 아끼고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더욱 극진해만 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0(1991)년  그가  재일조선인축하단  단장으로  조국에 왔을 때에는  온천에 가서   휴식하도록   이르시었으며 어버이수령님께서 의장에게 100살을 살수 있는 운동을 하라고 가르치시었는데 지금 84살이므로 잘하면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100살을 살수 있다고, 일본에서는 6∼7월이 제일 더운 계절이라는데 그때엔 조국에 와서 쉬도록 해야 하겠다고 참으로 은정깊은 말씀을 주시었다.

그 은정깊은 사랑은 한때 조국을 외면하고 등졌던 해외동포들에게까지 뜨겁게 미치고 있다.

국제태권도연맹 최홍희로 말하면 전 남조선군 군단장으로서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반공」을 부르짖으며 동족대결로 민족앞에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5.16군사정변」이후 파쇼독재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해외로 망명한 그는 퇴역장성들과 함께 「배달군인회」를 뭇고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했는가 하면 국제태권도연맹을 조직하여 태권도를 수단으로 하여 민족통일성취를 주장해 나서기도 하였다. 반파쇼의 정신이 강한 그였으나 「반공」의 이념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홍희총재가 이런 사람이지만 그가 나서 자란 고향을 찾아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 실현의 길을 열어 주시었고 고향방문에 불편이 없도록 직승기까지 마련해 주시었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화대군이었다.

고향방문에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그후 경애하는 장군님의 보살피심속에서 인민의 낙원으로 전변된 각지를 편답하면서 「반공」이념밑에 자기가 그토록 반대하던 사람들이 나라의 융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창조하는 참된 애국자들이라는 것을 페부로 느끼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족의 어버이를 경모하여 우러러 뵈옵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속소원을 헤아리시고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게 해주시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만나 뵈옵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은 그는 김일성주석님의 품에서 참 인간으로 이 세상에 두번 태어났다고 하면서 저같이 때묻은 사람에게 이처럼 인생의 최고행운과 재생의 활로를 열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사상과 위대한 인간적 풍모에 완전히 매혹되어 뜨거운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진정 그 눈물은 재생의 은인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의 눈물, 경모의 눈물이었으며 참다운 조국애로 지난날의 얼룩진 마음을 정화시키는 순결의 눈물, 인생의 새 출발을 선언하는 맹세의 눈물이었다.

하늘이 낸 위인이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은 곧 참다운 조국의 품이며 우리 온 겨레가 운명을 의탁할 위대한 품이라는 것을 심장으로 절감하였기에 그는 돌아가서 자기의 뜨거운 체험을 그대로 교포들앞에 토로하고 여생을 캐나다에 있는 수많은 교포들과 무도인들을 조국통일운동에 묶어 세우는 보람찬 애국위업에 다 바치었다.

최홍희총재만이 아닌 지난날 남조선의 정계와 군부의 상층에서 맴돌던 수많은 해외교포인사들도 바로 이러한 체험을 거쳐 애국애족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절세의 애국자로서의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태양의 빛발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서 위훈을 세운 해외동포들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고 영생의 삶을 빛내어주시는 데서도 발현되고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공헌한 해외동포들에게 「김일성훈장」을 비롯한 존엄 높은 공화국의 훈장을 안겨주실 뿐 아니라 주체71(1982)년 1월에는 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애국상」을 제정하고 공로있는 동포상공인들에게 상장과 금, 은메달을 수여하는 국가적 조치를 취해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또한 주체70(1981)년 11월에는 해외동포상공인들이 기증한 충성의 선물공장과 직장들에 충성비를 세울 데 대한 새로운 조치를 취하시어 그들의 애국지성이 길이 전해지도록 하여 주시었으며 통일애국의 길에 공헌한 해외교포인사들을 조국통일상 수상자대열에 세워주시었다.

공로가 큰 해외교포들의 이름을 거리와 대학, 병원과 공장들에 달아주어 그들의 애국적 활동이 세상에 빛나고 역사에 길이 전해지도록 해주신분도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이시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애국의 길에서 생을 마친 해외동포들에게 영생의 삶을 안겨주고 계신다.

신미리애국열사릉에 가면 「박정현, 김상기」라는 두 이름이 함께 새겨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묘비를 볼 수 있다.

여기에도 애국의 길에서 생을 마친 해외동포들에게 영생의 삶을 안겨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이 깃들어있다.

총련결성초기의 어려운 형편에서 6남매를 고생스레 키우면서도 애국사업에 몸바쳐 나섰고 그 길에서 한생을 걸어온 재일본조선민주여성동맹 박정현상임고문을 각별히 사랑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4(1995)년 7월 8일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1돌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국에 온 그가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켰을 때 공화국의 유능한 의료집단을 동원시켜 주시고 매 시간, 매 분마다 그의 병세를 알아보시며 애를 태우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을 때에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시었다.

그이께서는 그를 그대로는 보낼 수 없으시어 어버이수령님을 잃으신 크나큰 아픔을 안으신 채 7월 9일 몸소 영구를 조의방문하시고 총련일꾼들과 유가족들을 만나 고인의 애국의 한 생을 추억해 주시면서 그의 자식들을 잘 돌봐줄 데 대해서까지 뜨거운 말씀을 하여 주시었다.

며칠 후 박정현상임고문이 살아있을 때 일본에서 사망한 자기  남편 김상기의  유골을  조국땅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정현상임고문의 남편 김상기는 총련결성준비위원으로 적극 활동하였으며 총련중앙 감사위원, 조은도꾜신용조합 고문 등으로 있으면서 사망할 때까지 총련애국사업에 헌신하여 온 훌륭한 일꾼이라고 하시며 그의 유골을 신미리애국열사릉에 있는 박정현동무의 묘에 합장해 주도록 해야 하겠다고 은정넘친 조치를 취해주시었다.

그리하여 신미리애국열사릉에는 조국이 다 알고 인민이 사랑하는 「박정현, 김상기」라는 이름이 돌사진에 나란히 새겨지게 되였다.

해외동포들에게 죽어서도 영생하는 고귀한 삶을 안겨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이 숭고한 사랑은 윤이상, 임창영, 강일, 홍동근 등에게도 미치었다.

주체84(1995)년 11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재독일동포음악가 윤이상선생이 오랜 병환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으시고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며 「노동신문」에 그의 부고를 내도록 하시었다.

윤이상선생은 주체48(1959)년부터 독일에서 여러 음악대학의 교수,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동양음악과 유럽음악에 다리를 놓은 우리 민족의 재능있는 작곡가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찍부터 음악으로 조국통일에 이바지하려는 그의 소행을 귀중히 여기시고 각별한 은정을 베푸시었다.

그가 사망되기 전해인 주체83(1994)년 8월 9일과 24일에는 윤이상음악연구소창립 10돌기념행사를 잘 조직진행할 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에 우리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그토록 아끼고 온갖 사랑을 다 돌려주신 윤이상이 비록 병환으로 앓고 있지만 조국에서 그의 음악회를 비롯한 행사를 성대히 조직해줄 데 대하여 가르치시었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음악으로 한 생을 바친 그의 삶을 길이 빛내어주시기 위하여 성대한 음악회를 조직해주시었으며 윤이상의 박물관도 꾸려주고 거기에 그의 조각상도 세워주도록 하시었다. 또한 그에 대한 도서도 발행하도록 하시었다.

그의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5(1996)년 2월 12일 윤이상선생의 부인이 딸과 함께 평양에 왔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해당 부문 책임일꾼에게 그들을 뜨거운 동포애의 정으로 맞아줄 데 대하여 이르시었다.

그러시고는 여러 차례 걸쳐 해당한 조치를 취해주시어 그들이 조국의 여러 곳을 참관도 하고 불편없이 생활하도록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윤이상선생과 그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신 고귀한 은정은 해외교포사회에 크나큰 감격을 불러 일으키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5(1996)년 1월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 임창영선생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에 접하시고는 관계부문에서 유가족들에게 조전을 보내줄 데 대하여 서와 그의 추모행사를 잘 조직진행할 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었다.

당시 임창영의장은 고령의 몸으로 조선노동당과 공화국정부의 자주적인 조국통일방침과 대외정책을 지지선전하는 활동을 적극 벌이다가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추모행사에 자신의 명의로 화환을 보내주도록 하시었다.

그 해 12월 국제고려인통일연합회 강일 위원장이 사망하였을 때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장의식과 영결식을 크게 할 데 대한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었다.

강일위원장으로 말하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두번에 걸쳐 접견해 주시면서 기념촬영도 하여 주시고 오찬도 마련해 주시었으며 그들 부부에게 존함이 모셔진 귀중한 금시계도 채워주신 통일애국인사였다.

그가 사망한 것을 못내 가슴 아파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5(1996)년 12월 19일 한 책임일꾼을 전화로 찾으시고 국제고통련위원장 강일이 사망하였는데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우리는 그가 사망한 후에도 이미 조직되어있는 고통련을 변함없이 고수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애국인사의 고귀한 넋이 깃들어있는 고통련조직을 그가 살아있을 때처럼 사회주의조국과 조국통일위업에 충실한 조직으로 변함없이 강화발전시켜 나가시려는 숭고한 뜻이 어려있는 가르치심 이었다.

주체90(2001)년 11월 11일 재미동포 홍동근선생이 조국에 체류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에 접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며 미국에서 그의 가족이 조국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례식을 치르도록 하여 주시었다.

일찍부터 애국애족의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온 홍동근선생은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그리스도교 목사로서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한 공로있는 애국자였다.

이미 도서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와 「백두산의 노래」를 집필하여 만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그는 수령님탄생 90돌을 맞으며 「김일성주석 덕성일화 100」을 쓰기로 결심하고 불철주야로 집필활동을 벌이여 초고를 탈고하였으며 마지막 마무리작업을 위하여 조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긴장한 집필활동을 하던 중 오랜 기간의 병환을 이기지 못하여 책상을 마주한 채 조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11월 17일 홍동근선생의 가족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친 그의 삶을 길이 빛내어주시기 위하여 뜨거운 배려를 돌려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애국충정을 높이 평가하시어「통일신보」에 부고를 내도록 하시고 조의식장을 해외동포영접국에 꾸려놓고 조의를 표시하며 그의 유해를 애국열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여 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는 은정에 접한 선생의 안해는 저의 주인은 「내세의 천당」이 아니라 현세의 천당인 장군님의 품에서 영생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경애하는 장군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었다.

총련사업에 한생을 바친 한덕수의장과 이진규제1부의장, 문동진부의장, 허남기 재일조선문학예술가동맹 위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해외동포일꾼들과 애국인사들도 조국땅에 안치되어 영생의 삶을 빛내이고 있다.

참된 삶의 길을 찾아 헤매던 해외동포들을 은혜로운 사랑의 품에 안아 값높은 삶을 주시고 긍지를 안겨주시며 영생의 언덕에 높이 세워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야말로 해외동포들의 자애로운 은인이시다.

하기에 북과 남의 겨레들과 함께 해외동포들도 경애하는 장군님을 절세의 애국자,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칭송하며  따르는 것이며 그이의 품으로 찾아오고 자신들의 운명을 장군님께 의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