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분열되어 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분열의 연륜이 그렇듯 무수히 새겨졌지만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마음은 언제나 남녘인민들에게 가 계시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남녘동포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계시던 어버이수령님의 불보다 뜨거운 동포애를 그대로 체현하시고 분열의 장벽을 넘어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녘의 겨레를 친어버이사랑으로 극진히 보살펴주고 계신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겨레에 대한 사랑은 분열의 장벽도 막을 수 없는 강렬한 것이며 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변하여도 식을 줄 모르는 한없이 뜨거운 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언제나 남녘인민들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생활과 운명을 따뜻이 보살펴주고 계신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었다.

『우리는 남녘동포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쁜 일이 생겼을 때도 그렇고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도 그렇고 늘 남녘동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가까이에 있는 자식보다 불행에 우는 자식에게 더 마음 쓰는 친부모의 심정으로 민족분열로 하여 고통을 겪는 남녘동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기쁜 일이 생겼을 때에는 함께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가슴 아파하시고 그들에게 불상사가 생겼을  때에는 동족이 당하는 불행을 두고 잠을 이루지 못하시며 그것을 가셔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신다.

주체84(1995)년 6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한 일꾼으로부터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려앉아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으시었을 때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날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사고의 경위와 피해정형을 여러 차례 알아보시었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어 한 일꾼을 전화로 찾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저녁시간에 물건을 사러 나왔던 가정부인들이 수백명이나 파묻혔다니 이런 큰 변이 어디 있습니까! 숱한 아이들이 어머니를 잃고 울고 있을텐데 그 애들이 누구보다도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새벽 6시에 퇴근하여 잠깐 쉬려고 누웠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전화합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런 불같이 뜨거운 사랑으로 남녘동포들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온갖 노고를 다 바치신다.

주체73(1984)년 여름에 수해가 났을 때 수재민들에게 수많은 구호물자를 보내도록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동포애의 정은 오늘도 남녘동포들과 온 겨레의 마음속에 사랑의 전설로 소중히 간직되어있다.

이해 8월말과 9월초 예년에 드문 대홍수가 서울일대를 비롯하여 넓은 지역을 휩쓸었다.

남조선당국의 공식발표에 의하더라도 300여명이 죽고 20만 7,000여명의 수재민이 났으며 3만 6천 7백여채의 살림집이 파괴되는 참상이 빚어졌다. 피해지역에서 거처할 데없이 한지에 나앉은 수재민들은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 수재에 뒤따른 병마가 수재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남조선인민들이 흉년으로 고생할까봐  걱정하시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남조선인민들이  물난리를  겪을까봐  걱정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바쁘신 현지지도의 길에서 이 기막힌 참상에 대한 통보를 받으시고 한지에 나앉은 수재민들을 생각하니 밥을 먹어도 목에 걸린다고 하시며 일꾼들에게 무슨 조치를 취했으면 좋겠는지 연구해보라고 하시었다.

다음날 아침 제기된 대책안을 보고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꾼들에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는데 한 핏줄을 이은 남녘동포들에게 보다 큰 구제대책을 세우라고 하시면서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남녘의 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이르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어 남조선수재민들에게 보낼 구호물자의 품종과 수량, 실현방도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뜻을 담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결정 제32호가 발표되었다.

쌀 5만석, 천 50만m, 시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을 보낼 데 대한 공화국의 구제조치는 120여년간의 국제적십자구제운동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큰 규모의 것이었다. 당시까지 적십자구제운동최고기록이 주체72(1983)년에 수해를 입은 인도에 스웨덴이 제공한 75만US$였다. 여기에 비하면 공화국의 구호물자는 US$로 환산하면 1,800만US$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때 미국과 일본이 남조선에 제공한 구제금은 각기 2만US$와  10만US$였다.

고결한 동포애가 낳은 이 방대한 구호물자를 두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수재민들에게 보내는 구호물자가 아무리 많아도 아까울 것이 없다, 우리가 저축해두었던 것을 남조선동포들을 구제하는데 쓰지 않고 어디에 쓰겠는가, 뭐니뭐니해도 민족이 제일이다, 도와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그렇듯 뜨거운 동포애의 정이 있어 해방직후부터 28차례나 공화국정부의 동포애적 구호조치를 외면해온 남조선당국도 구호물자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숭고한 사랑을 담아 알알이 고르고 오리오리 다듬어서 보낸 구호물자는 군사분계선장벽을 넘어 일대 파문을 일으키며 남조선수재민들에게 가닿을 수 있었다.

민족분열사상 처음으로 되는 이 역사적사변은 오직 남녘동포들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 나가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동포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남녘동포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덜어주시려고 마음 쓰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은 민족의 분열로 하여 생겨난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봉에도 뜨겁게 미치고 있다.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아픔은 그대로 민족분열의 비애였다.

민족분열로 하여 그 누구보다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아픔을 전민족적인 비애로 받아들이시며 조국통일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군 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흩어진 가족, 친척들이 당하는 불행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민족의 혈맥을 이어나가시기 위하여 마음 쓰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측에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사업을 계기로 북남적십자회담을 재개하게 하시고 여기에서 남과 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의 고향방문단교환사업을 실현하도록 하시었다. 그리고 주체74(1985)년 9월 예술단, 고향방문단교환사업이 실현되었을 때에는 이 사업을 통하여 우리 겨레가 뜨거운 혈육의 정을 나눌 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돌리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서울로 나가는 북반부의 고향방문자들이 가족, 친척들의 사진과 편지도 가지고 가며 전하는 말을 녹음도 하고 북의 특산물도 가지고 가도록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정깊은 배려는 남쪽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미치었다. 평양에 오는 동포들에게 새로 지은 평양고려호텔의 제일 좋은 방들을 내주라고 관심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측고향방문자들속에 한 고령의 신자가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의 숙소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보살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깊은 관심과 사랑속에 주체74(1985)년 9월 22일과 23일 2일간에 걸쳐 평양과 서울에서는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에도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교환을 명기하여 주시고 이 사업을 민족의 혈맥을 더욱 굳게 이어주며 분열의 고통을 끝장 낼 조국통일의 그 날을 앞당기는데 지향되도록 이끌어주시었다.

북남공동선언발표이후 평양과 서울, 금강산에서 여러 차례 진행된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봉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지니신 뜨거운 민족애의 발현이었다.

남녘동포들을 언제나 잊지 않고 늘 생각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은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오는 동포들을 친부모의 심정으로 따뜻이 대해주시는 데서도 발현되고 있다.

공화국에 들어오는 남녘동포들을 보면 그 경위와 사회계급적처지도 같지 않다. 또 그들속에는 정치인, 지식인, 기업인, 근로자, 종교인, 군인, 학생 등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있으며 그들의 사상과 정견도 각이하고 북에 대한 인식정도와 감정도 같지 않다.

하지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누구이든 또 어떠한 이유로 하여 들어왔건 뜨거운 동포애의 정으로 대해주시고 아낌없는 사랑과 은정을 돌려주신다.

주체65(1976)년 남조선어선 「신진3」호가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왔다.

「신진3」호가 항로미실로 공화국북반부경내에 불법적으로 들어온 것은 미제침략군의 도발책동으로 하여 「판문점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나라의 정세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아 초긴장상태에 들어갔던 때었던 것만큼 남조선어민들은 공화국북반부측에서 자기들의 불법침입행위를 두고 어떤 조치를 취하겠는가 하고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들을 혈육의 정으로 따뜻이 맞아주고 잘 보살펴 주도록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었다.

그분께서는 원산부두에 도착한 그들이 훌륭한 숙소에 들도록 해주시고 해당 부문에서 그들의 건강을 잘 돌봐주고 생활에서 사소한 불편이라도 있을세라 구체적인 대책까지 일일이 세워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보살피심속에 남조선어민들은 집을 떠나 추석날을 맞게 되었지만 색다른 푸짐한 음식상을 받고 온종일 체육경기와 오락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며 즐겁게 지냈다. 그리고 풍랑에 파손된 흔적이란 찾아볼 수도 없이 말끔히 고쳐진 배에 쌀과 부식물까지 넉넉히 싣고 돌아가게 되었다.

친부모의 사랑인들 이보다 더 뜨겁고 다심할 수 있으랴.

하기에 남조선어민들을 태운 「신진3」호는 그 사랑의 품을 그대로 떠날 수 없어 원산앞바다를 여섯번이나 돌고서야 떠나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남조선「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던 정주영에게 돌려주신 각별한 사랑 역시 이러한 겨레사랑의 일단이다.

정주영으로 말하면 한때 정계에 진출하여 「대통령후보」로까지 나섰던 대재벌이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말년에나마 민족을 위한 길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그의 애국의 마음을 귀중히 여기시고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각별한 은정을 베풀어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7(1998)년 10월 또다시 평양을 방문한 정주영명예회장을 친히 만나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귀중한 시간을 내시어 몸소 그의 숙소를 찾아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인자하신 음성으로 고령에 있는 분이 나를 찾아오게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가서 만나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현지지도도중에 평양에 오다보니 이렇게 밤이 늦어서 정주영선생을 만나게 되였는데 이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겸허하게 말씀하시며 그와 혈육의 정 넘치는 따뜻한 담화를 나누시었다.

그 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금강산관광개발문제를 비롯하여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다 풀어주시고 애국애족의 입장에서 북남이 서로 협력을 잘해 나갈 데 대하여 말씀하시며 영광의 기념사진까지 찍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정주영명예회장을 만나주신 것은 그가 누구이건 조금이라도 민족적 양심이 있는 사람이면 뜨겁게 안아주고 출신과 경력, 성분과 재산의 유무, 주의주장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적단합으로 조국통일의 길을 열어 나가시는 한없이 넓은 도량과 포옹력, 동포애의 정의 발현이다.

그러기에 경애하는 장군님의 접견을 받은 정주영은 『김정일장군님은 제 나라, 제 동포들부터 생각하시는 덕망높은 분이시기에 민족의 통일전망도 밝다. 김정일장군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을 영원히 가슴깊이 간직하고 받들겠다.』고 하였으며 남조선에 돌아가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경애하는 장군님을 『민족공동의 이익을 그 무엇보다 우위에 놓으시』며 『연로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매우 지성적이고 매혹적인 지도자』로 높이 칭송하며 다함 없는 흠모의 정을 표시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정주영명예회장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친히 조전을 보내시고 화환과 함께 조의대표단까지 보내주시었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고 민족적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어느 때든지 반드시 애국애족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인생전환의 용기를 주고 활력을 주는 것이 민족의 영도자의 한없는 민족애와 고매한 인격 그리고 넓은 포옹력인 것이다.

애국과 통일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지난날의 불미스러운 과거도 묻지 않으시고 넓은 품에 안아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토록 고귀한 덕망이 있어 오늘 사상과 정견도, 신앙과 국적도 다른 수많은 남녘동포들이 애국애족의 대오, 통일대오에 합류해 나서고 있는 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의로운 통일애국투쟁에 나선 사람들을 높이 평가해주시고 그들에게 영생하는 삶을 안겨주신다.

남조선에서 조국의 통일과 반외세자주화, 반파쇼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애국의 마음을 간직하고 스스로 투쟁의 길에 나선 사람들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들의 의로운 투쟁을 열렬한 애국으로 조국과 민족앞에 높이 내세우시고 크나큰 믿음과 은정을 베푸신다.

문익환목사에게 돌려주신 사랑과 배려를 놓고 보아도 통일애국인사들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이 얼마나 숭고하고 뜨거운가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평양을 방문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 뵙고 돌아간 문익환목사가 감옥에서 생일 71돌을 맞이한 주체78(1989)년 6월초 어느날이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 일꾼을 전화로 찾으시어 평양에 왔던 문익환목사에 대해 회고하시면서 목사가 남조선에 나가서도 당국자들의 탄압과 박해를 무릅쓰고 민족적 양심과 지조를 굽히지 않은 것이 아주 장한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었다. 그러시고는 목사가 평양에서 생일을 쇠었더라면 우리가 생일상을 크게 차려주었겠는데 지금 그는 생일상은 고사하고 죄수복을 입고 감방에 갇혀있다고,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말씀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그가 오늘 비록 철창속에서 생일을 보내고 있지만 통일된 조국땅에서 만민의 축복을 받으며 생일을 쇠게 될 날은 멀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그때에는 내가 생일상을 크게 차려주겠다고 가슴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그 사랑, 그 믿음이 있었기에 문익환목사는 숨지는 마지막순간까지 투철한 자주통일신념을 굽히지 안고 참된 애국의 삶을 빛내일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4(1995)년 7월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1돌을 맞으며 문익환목사의 부인인 박용길여사가 고령의 몸으로 평양을 찾아왔을 때에도 몸소 그를 접견해주시고 그에게 한없는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용길여사와 동포애의 정 넘치는 따뜻한 담화를 나누시며 떠나간 문익환목사에 대하여 감회깊게 회고하시고 그를 애국적 지조가 높고 절개가 굳은 통일애국투사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익환목사에게 사랑을 못다 주신 듯 박용길여사에게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에 돌아간 박용길여사가 감옥으로 끌려가 온갖 박해를 받을 때에는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투쟁을 강력히 벌여 나가도록 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남녘동포들에 대한 따사로운 사랑은 역사적인 평양상봉이후 남조선의 각계 인사들에게 더 넓은 내왕의 길을 열어주시고 매번 수백명이라는 전례없이 많은 남녘동포들과 각계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평양과 금강산으로 달려와 여러가지 통일행사를 벌이고 조종의 산 백두산과 묘향산 등의 명승지들을 돌아보며 민족의 향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은정깊은 조치들에도 뜨겁게 어리어있고 남조선의 한 민족옷전문가의 소망을 헤아리시고 두 차례에 걸쳐 평양에서 민족옷전시회를 성황리에 진행하도록 해주신 조치에도 잇닿아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정깊은 사랑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 남조선가수에게도 뜨겁게 미치었다.

주체90(2001)년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는 처음으로 남조선가수가 참가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조선가수 김연자였다.

김연자로 말하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였지만 자체로 노력하여 조선사람으로서 일본땅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여성가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마다 태양절을 맞으며 성대히 진행되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서 노래를 불러 보았으면 하는 그의 마음속소원을 깊이 헤아리시고 풀어 주시었으며 가수일행의 참관일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돌리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현지지도의 그 바쁘신 길에서도 주체90(2001)년 4월 11일 김연자의 공연을 보아주시고 그의 일행을 접견해주시었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가수일행을 맞아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연자가수의 평양방문을 열렬히 환영하시고 그와 따뜻한 담화를 나누시었다.

그분께서는 일본에서 음악이나 무용으로 이름을 떨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나 조선사람들이라고 하시면서 조선민족은 재능있는 민족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김연자가수의 노래에서 특징적인 것은 남조선에서 소문 난 명가수들의 장점들을 다 종합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노래가 독특하다고 평가해주시었다.

문학예술의 거장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분에 넘치는 평가와 치하에 가수는 너무도 황송하여 몸둘바를 몰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앞으로 아무 때나 다시 평양을 방문하여 공연을 하라고, 다음해 와서는 큰 극장들에서 공연을 많이 하여야 하겠다고, 이제는 문이 열렸으니 누구도 그 길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북쪽의 인민들도 같은 동포이니 노래로 서로 사귀도록 하여야 한다고 고무의 말씀도 해주시었다.

가수의 노래가 북과 남사이의 화해와 협력, 통일의 유대를 강화하는 하나의 무지개다리가 되기를 바라시는 기대와 믿음이 어린 말씀이었다.

이 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앞으로 조선노래를 일본말로 많이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오늘 「임진강」을 비롯하여 3곡의 우리 나라 노래를 일본말로 불렀는데 일본땅에서 조선노래를 일본말로 부르면 일본사람들속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고 해외동포가수들에게도 영향이 미치게 될 것이라고, 모든 해외동포가수들의 예술활동을 이렇게 지향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깨워주시었다.

해외동포가수들이 민족의 넋을 지키면서도 예술활동의 무대를 넓혀 나갈 수 있는 길을 밝혀준 참으로 뜻깊은 가르치심 이었다.

민족의 넋, 애국의 참뜻을 새겨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명철한 가르치심에 가수는 시종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 분의 말씀을 자자구구 새기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러는 가수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시며 나는 김연자가수의 노래를 1980년대부터 관심을 가지고 들어왔다, 지난해에 김연자가수를 초청하였는데 오늘에야 만났다, 내가 직접 초청한 가수이기때문에 현지지도를 하러 지방에 나왔지만 시간을 냈다고 말씀하시었다.

끝없는 감격속에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안은 김연자가수는 현지지도의 그 분망하신 속에서도 자기를 만나주신데 대하여 장군님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또 올리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날 김연자가수일행을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세우시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어 주시었으며 가수일행을 위해 만찬을 마련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김연자의 공연을 보아주시고 노래로 민족의 화합과 단합, 통일성업에 이바지하도록 고무해주신 감격적인 소식은 커다란 충격을 일으키며 급속히 퍼져 온 강토와 7천만겨레를 통일의 열망으로 들끓게 하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은 우리 겨레모두를 은혜로운 한 품에 안아 통일애국의 길로 이끌어주시고 그들의 운명을 끝까지 맡아 보살펴 주시는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