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49(1960)년은 역사적 사변으로 격동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강선제강소에 지펴 올리신 천리마작업반운동의 불길이 온 나라의 공장, 농촌, 교육, 문화 등 모든 부문, 모든 분야에로 세차게 번져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2월 5일 이른 새벽 숫눈길을 헤치시며 역사적인 청산리현지지도의 길에 오르시었다. 청산리와 강서군에 대한 현지지도를 통해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현실에 맞게 혁명적 군중노선을 구현한 새로운 사업방법, 지도체계가 창조되었다. 날을 따라 사회주의제도가 공고발전되고 천리마운동이 힘있게 벌어져 사회주의건설에서 대고조가 일어났다.

이러한 시기 남조선에서는 4.19인민봉기가 폭발했다. 이승만파쇼독재가 거꾸러졌다.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통치가 밑뿌리 채 뒤흔들리었다.

급변하는 격동적인 시기에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시었다.

7월 15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급중학교의 전 과정을 최우수의 성적으로 마치시었다.

졸업하는 날 정깊은 교문을 나서는 졸업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청춘을 빛내어 나갈 데 대한 뜻깊은 말씀을 하시었다.

『우리는 우리 혁명이 가장 간고한 시련을 겪던 시기에 그리고 사회주의건설에서 새로운 앙양과 변혁이 일어나던 격동적인 시기에 중학시절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우리 당과 혁명에 반기를 들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을 때려 눕히고 그 여독을 가시기 위한 전당적, 전인민적 투쟁에도 참가하였고 천리마진군의 거세찬 흐름속에서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위대한 변혁도  보았습니다.  이 과정에 우리는 혁명의 진리를 신념으로 새기었고 당과 수령만을 따르는 우리 인민의 투쟁정신을 깊이 체득하였으며 청춘의 희망과 꿈을 키웠습니다. 우리가 학창시절을 이처럼 보람차게 보낼 수 있은 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따사로운 품과 고마운 사회주의조국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신중한 표정을 지으시고 계속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나는 자주 우리가 성장해 온 지난날을 깊은 감회속에 돌이켜 보군 한다, 그때마다 오직 혁명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 수령님께서 개척하시고 이끌어 오시는 우리 혁명을 반드시 완성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굳게 가지게 된다, 지난날에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위대한 수령님을 높이 모시고 당과 혁명에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겠다, 내가 오늘 동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라고 하시었다.

졸업생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뜨겁게 받아 안았다.  장군님을 모시고 지내 온 학창시절의 보람찬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있어서 장군님은 다정한 학우이시었을 뿐 아니라 다심한 스승이시었고 지도자이시었다. 그들은 그분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혁명의 진리를 신념으로 새기고 당과 수령을 받드는 정신도 마음도 키웠다.

졸업생들은 장군님의 당부의 말씀을 무겁게 간직하였다.  그분의 높은 뜻을 따라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모시고 당과 혁명에 청춘을 다 바칠 굳은 결의를 다졌다.

졸업생들의 모임이 끝나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동무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동무들, 동틀 무렵이 되었습니다. 모두 해마중을 갑시다!』

모두 떨쳐 나 대동강가로 나갔다.  한여름의 싱그러운 대동강바람이 옷자락을 날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 솟는 동녘하늘을 바라 보시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시었다.

『아침해돋이를 보니 마음이 상쾌해 지고 심장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졸업생들도 저마다 흥분된 심정을 터놓았다.

그들을 둘러 보시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저 찬란한 태양의 빛발은 마치도 어버이수령님의 이끄심 따라 전진하는 우리 조국의 앞날을 비쳐 보이는 것 같다고, 우리의 이상과 행복은 해바라기가 그 어디 뿌리 내려도 태양을 향하여 아지펴고 열매  맺듯이 그  어디서 무엇을 하든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청춘을 빛내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뜻깊은 대동강 해맞이는 청춘들의 심장을 한껏 격동시켰다. 그들은 장군님을 따라 주체혁명위업의 계승완성을 위하여 억세게 싸워 나갈 결의를 다시금 굳게 다지었다.

고급중학교를 졸업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슴은 어버이수령님의 선군혁명위업을 빛나게 이어가실 결의로 부풀어 있었다.

이 무렵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정세의 발전추이에 주목을 돌리시었다.

4.19 인민봉기를 계기로 미제의 식민지통치위기가 더욱 심화되었다. 파쇼독재의 도구였던「자유당」은 완전히 붕괴되고 어용반동단체들도 총 파산의 운명을 면치 못했다.

반면에 새 정치, 새 생활을 요구하는 인민대중의 진출이 비상히 강화되었다. 반외세, 반보수, 반독재의 구호밑에 사회의 민주화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정치세력, 혁신세력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사태발전에 당황하여 미제는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이른바 「과도정부」를 내세워 인민들을 탄압케 하고 진보적 정치세력의 진출을 억제하였다. 그리고 「자유당」을 대신하여 반동세력의 중심적 정치집단으로 등장한 「민주당」을 떠밀어 주어 집권하도록 했다.

한편 미제는 군사정세를 악화시켰다. 남조선에 지상대공중유도무기들과 대전차유도무기 등 각종 신형무기들을 반입배치하고 8,000명의 병력을 미국본토에서 끌어 오고 대규모적인 전쟁연습과 유도탄시험발사놀음을 빈번히 벌였다. 이것은 남조선에 대한 영구강점과 「북침」전쟁책동에 혈안이 된 미제의 흉심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이러한 정세는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지 않고서는 남조선사회의 민주화도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똑똑히 보여 주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선군혁명위업의 정당성을 더욱 뜨겁게 절감하시었다. 총대중시, 군사중시의 혁명영도를 확립해야 혁명의 전취물도 수호하고 사회주의건설도 힘있게 추진하며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선군의 높은 뜻을 받들어 주체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해 나갈 결심을 굳게 다지시었다.

고급중학교를 졸업하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위대한 수령님을 받들어 선군영도의 길에 오르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선군영도의  거룩한 첫  자국을  찍으신  곳은  조선인민군   근위  서울유경수105탱크사단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이 사단을 현지지도하시었다.

역사의 그 날은 주체49(1960)년 8월 25일이었다.

근위 서울유경수105탱크사단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잘 아시는 부대였다. 장군님께서는 해방 후 우리 나라에서 탱크무력이 처음 탄생하였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이 부대를 찾으시었었다.

부대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큰 공훈을 세웠다. 전쟁이 일어나자 부대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받들고 노도와 같이 진격하여 서울에 제일 먼저 돌입하였다. 보병들이 탱크를 미처 따라오지 못했지만 탱크병들은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시내로 쳐들어 갔다. 유경수 탱크여단장은 직접 탱크의 조종간을 잡고 주력종대를 이끌고 서대문형무소 철문을 깔아 뭉개고 감옥문을 열어 제꼈다. 안동수 문화부여단장이 인솔한 탱크종대는 서울방송국을 단숨에 장악하고 문화부여단장자신이 마이크를 잡고 첫 방송을 하였다. 다른 한 탱크종대는 적소굴인 「중앙청」을 점령하였다.

이 혁혁한 위훈으로 하여 이 탱크여단은 탱크사단으로 승격되고 「근위 서울탱크사단」 칭호를 수여 받았던 것이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오신다는 환희로운 기별을 받은 부대지휘관들과 탱크병들은 이른 아침부터 설레였다.

군기를 선두로 명예위병대가 정렬해 있고 앞가슴에 훈장을 주런이 단 지휘관들과 손에손에 꽃을 든 탱크병들이 영광의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8시 30분,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폭풍같은 『만세!』의 환호속에 부대 정문으로 들어서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날 부대지휘관들과 탱크병들을 만나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부대지휘관들과 하신 담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동무들은 근위탱크부대에서 복무하는 영예를 깊이 간직하고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근위탱크병들이 당과 수령을 위하여 용감하게 싸운 것처럼 수령님께 충성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신 장군님께서는 지난 전쟁시기 우리의 근위탱크병들은 무비의 영웅적 위훈을 세웠다고, 수많은 공화국영웅을 배출하였다고 하시면서 그때를 더듬으시는 듯 깊은 생각에 잠기시는 것이었다. 지휘관들도 사단이 걸어 온 전투노정을 감명깊이 돌이켜 보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탱크병들이 전쟁시기 보병서열보다 앞질러 서울시가에 단독으로 돌입하여 통쾌한 섬멸전을 벌인 것은 일찍이 세계전쟁사에 없었던 기적이라고 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이 영웅적 위훈의 요인에 대하여 분석하시었다.

『수령님께서는 탱크병들이 그러한 기적을 창조할 수 있은 것은 지난날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 오다가 해방 후 당의 은덕으로 나라의 주인이 되어 참다운 삶의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하시었습니다. 탱크병들은 지난날 나라 잃고 설음 많던 자기들에게 보람찬 새 생활을 마련하여 주신 수령님에 대한 열화같은 충성심을 안고 그 어떤 곤난도 뚫고 나갔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유경수, 안동수지휘관을 비롯한 19명의 전투영웅들에 대하여 회고하시고 탱크병들은 지난 전쟁시기 근위서울탱크병들처럼 싸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으시었다.

『만일 미제침략자들이 또다시 무모하게 덤벼 든다면 탱크병들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원수들을 무자비하게 족치던 근위탱크병들처럼 놈들을 이 땅에서 모조리 쓸어버려야 합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은 부대지휘관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그분께서 힘 주어 강조하신 근위탱크병들처럼 싸우라는 그 말씀에는 그들이 지녀야 할 정신, 그들이 서야 할 영예로운 위치가 밝혀져 있었던 것이다.

격전장의 최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은 탱크병들의 정신이고 위치일 뿐 아니라 탱크부대 지휘관들의 정신이고 위치이라는 것으로서 탱크부대 지휘관들과 탱크병들에 대한 새로운 가르치심 이었다.

세상에 탱크가 출현한 후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탱크의 역할을 두고 분분한 논의를 해 왔다. 그 초점은 대체로 탱크는 『보병들과 함께 전진하면서 그들의 돌격로를 열어 주는 무쇠주먹』, 『보병들을 엄호하는 철의 장벽』이라는 데로 모아졌다. 따라서 탱크병들의 위치는 보병들의 공격로나 열어 주고 그들을 엄호하면 되는 그런 위치였다.

세계전쟁사에서도 유명한 「베를린함락작전」때 탱크병들이 그런 위치에서 싸웠다. 그때 탱크병들은 보병들의 돌격로를 한치한치 열어 주면서 히틀러파쇼통치의 아성인 국회의사당으로 육박하였다. 6천 3백대의 탱크가 시가전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국회의사당청사를 점령한 것은 탱크병들이 아니라 보병들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그때 근위 서울유경수105탱크사단 장병들에게도 있었다. 이러한 기존의 사고방식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졌다.

그때의 체험자인 한 탱크지휘관은 수십년이 지나서 그때를 회상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근위탱크병들처럼 싸우라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의 길에서 우리 탱크병들이 지녀야 할 정신은 근위탱크병들의 완강한 공격정신이며 서야 할 위치는 승리의 기발을 꽂은 근위탱크병들이 섰던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의 길에서 근위탱크병들이 섰던 위치, 이것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우리 부대의 모든 지휘관들과 탱크병들에게 안겨주신 최대의 믿음이며 성스러운 삶의 좌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날 무려 11시간 동안이나 부대사업을 지도하시었다. 혁명전통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대를 이어 계승발전시킬 데 대한 문제, 전투력강화에서 나서는 문제 등에 대하여 일일이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조국해방전쟁시기 발휘된 영웅적인 투쟁자료를 가지고 군인들에 대한 교양사업을 힘있게 벌일 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장병들에게 수령결사옹위의 억센 신념을 심어줄 데 대하여 강조하시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부대 군인회관정문 채양위에 내 붙인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구호를 보시고 우리 인민과 인민군군인들의 확고부동한 신념을 그대로 담은 아주 좋은 구호라고 하시면서 이 구호를 높이 치켜들고 조선혁명의 종국적 승리를 앞당겨 나가야 한다고 장병들을 고무하시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진행하신 근위 서울유경수105탱크사단에 대한 현지지도는 그분께서 선군영도의 거룩한 첫 자국을 찍으신 역사적사변이었다.

위대한 장군님의 이 역사적인 현지지도를 계기로 경애하는 수령님에 의하여 총대로 개척되고 전진해 온 선군혁명역사에 장군님의 선군혁명영도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게 되었다.

 

   




위인들에게는 흔히 그들만이 남길 수 있는 맹세의 발자취가 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다지신 맹세의 자국은 거룩하고 성스러웠다.

역사의 용남산이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용남산은 평양시의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산으로서 모란봉을 주봉으로 하고 그 주변의 낮은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진 금수산의 한 봉우리이다.

바로 이 봉우리에 민족간부양성의 원종장이며 주체과학의 최고전당인 김일성종합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주체49(1960)년 9월 1일이었다.  유달리도 하늘이 높게 열리고 초가을의 정취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이 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활달한 걸음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의 첫 등교길에 오르시었다.  뜨거운  열정과  예지로  빛나는 그분의  모습은 당년 18살의 청년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원숙하고 노련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대학정문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경제학부 학부장과 한 학급에서 공부할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시고 공부하시게 될 교실에도 들리시었다.

이윽고 장군님께서는 학생들과 함께 용남산마루에 오르시었다.

티없이 맑은 하늘을 떠이고 웅장하게 자리잡은 대학전경이 가슴 뜨겁게 안겨왔다. 창문들을 활짝 열어 젖힌 대학교사가 조국의 아들딸들을 어서 오라 부르는 듯 싶었다.

장군님께서는 감격에 겨우시었다.그분께서는 온 몸에 햇빛을 함뿍 받으시며 사위를 둘러보시었다. 용남산에 잇닿은 아름다운 3천리강산이 굽이굽이 다가서는 듯 싶었다.

장군님께서는 조용히 용남산마루를 거니시었다. 그분의 뇌리에는 문득 10여 년전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떠오르시었다.

해방 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농민들의 애국미로 인민의 첫 대학인 종합대학교사를 일떠세워주실 때였다. 안개도 채 걷히지 않은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어머님과 함께 한창 공사중이던 대학건설장을 찾으시었다. 잡관목과 풀숲의 이슬에 발목을 적시며 산마루에 이르신 장군님께서는 발밑으로 멀리 아미산과 대성산기슭까지  뻗어  나간  논밭들을  정겹게   바라보시었다.     그 날 어머님께서는 지난날 산에서 싸울 때 꿈처럼 그려보던 인민의 대학이 오늘 여기에 건설된다고 몹시 기뻐하시며 어서 커서 이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아버님의 위업을 잘 받들어야 한다고 당부하시었다.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어머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시었다. 바로 그 날의 어머님의 말씀과 함께 장군님의 심중에는 용남산이 뿌리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종합대학에서 공부하여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나갈 것을 바라는 혁명선열들의  절절한  염원과  우리  인민의 기대가 담겨진 어머님의 말씀은 해가 갈수록 장군님의 마음속에 어길 수 없는 신념으로 굳어졌다.

장군님께서 대학에 오시기 전해에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외국을 방문하실 때였다. 장군님께서는 역사를 자랑하는 그 나라 종합대학을 돌아보시었다. 그때 그 나라 안내자는 그분께 자기 나라 종합대학에 와서 유학하실 것을 권유했다. 장군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주는 그 권고가 고마웠지만 겸손하게 거절하시며 우리 평양에도 훌륭한 대학이 있다고 하시면서 『나는 우리 동무들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단호히 말씀하시었다. 새 시대, 주체시대의 혁명인재들을  키워내는  과학의 최고전당인  김일성종합대학을  떠난  다른  대학이란 그분의 마음속에 있을 수 없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때 동행한 한 일꾼에게 사회주의조국을 끝없이 빛내어 나가는 것이 수령님의 혁명사상과 영도를 높이 받드는 길이다, 이 나라 종합대학을 돌아보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려는 나의 결심은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선언하시듯 말씀하시었다.그분께서 외국유학을 하실 것이라는 일부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어 엎는 말씀이었다.

이것은 수령님의 주체사상과 그 구현인 우리 당 정책이 꽃피고 있는 조국의 현실에 기초한 학문을 배우시고  조선을 위한  혁명을  하시려는 그분의 투철한 주체의식의 발현이었다.

장군님께서 지니신 주체의식은 곧 조선혁명을 자신께서 책임지고 이끌고 나가실 불타는 사명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장군님께서는 못 잊을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시며 학생들에게 그때 어머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귓전에 울려오는 것 같다고 하시었다.

이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지방 현지지도를 하고 계시는 수령님께 오늘 종합대학에 등교하겠다는 것을 말씀 올리고 앞으로 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워 조선혁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맹세를 다지었습니다.』

그러시고는 조선혁명을 책임진 주인이 되어 수령님의 위업을 대를 이어 받들어 나가는 것은 시대와 혁명, 조국과 인민앞에 지닌 우리의 숭고한 의무이다, 위대한 태양의 나라 조선을 만대에 길이 빛내이자, 이것은 나의 드팀없는 신념이고 의지라고 하시었다.

용남산마루를 천천히 거니시며 격정속에 동녘하늘가를 바라 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섬광처럼 번뜩이는 시상을 터치여 조용히 읊으시었다.

 

 

해솟는 용남산마루에 서니

삼천리강산이 가슴에 안겨온다

이 땅에서 수령님 높은 뜻 배워

조선혁명 책임진 주인이 되리

아, 조선아 너를 빛내리

 

위대한 수령님 높이 모시고

주체의 한길로 억세게 나아 가리

사나운 풍랑도 폭풍도 헤쳐

조선을 이끌고 미래로 가리

아, 조선아 너를 떨치리

 

누리에 빛나는 태양의 위업

대를 이어 햇빛으로 이어 가리라

주체의 붉은 노을 지구를 덮을

공산주의 그 날을 앞당겨 오리

아, 조선아! 나의 조선아!

 

 참으로 비범한 맹세의 시정이었다.

일찍이 김형직선생님께서 역사의 새벽길을 걸으시며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고야 말 큰뜻을  새기신  남산의 맹세와 위대한 수령님께서 압록강을 건느시며 조국해방의 비장한 결심을 다지신 포평나루터의 맹세와 더불어 수령님의 혁명위업을 받들어 조선을 빛내이시려는 장군님의 용남산맹세는 위대한 실천으로 영광의 현실을 안아올 불멸의 역사적 선언이었다.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는 한편의 시에 집약된 용남산의 맹세! 그것은 장군님께서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조국과 민족의 존엄과 운명, 그 미래전체를 한 몸에 안으시고 인민과 겨레의 무궁번영과 영원한 행복을 위해 한 생을 바치시려는 더없이 크고도 신성한 맹세였다.

이 위대한 맹세가 다져지던 때로부터 시작된 대학교정의 나날 장군님께서는 자주 용남산마루에 오르시어 그 맹세를 되새기시며 실천해 갈 실력을 쌓으시었다.

장군님께서 지향하시는 실력이란 곧 문무겸전이었다. 더욱이 며칠 전에 근위 서울유경수105탱크사단에 대한 역사적인 현지지도로 선군혁명영도의 거룩한 자국을 새기시며 위대한 수령님의 선군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받들어 나갈 의지를 굳게 다지신 장군님께 있어서 문무겸전은 특별히 중대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일찍이 항일전의 나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학습을 조직하실 때 문무를 겸비해야 혁명을 더 잘할 수 있다고 하신 가르치심을 심장에 새기고 계시었던 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문무겸전의 길만이 용남산의 숭고한 맹세를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시었다.

결국 장군님의 맹세속에는 비할 바 없이 심원한 총대철학이 담겨져 있었다.

총대에 의해 개척된 수령의 위업을 총대로 계승하여야 그 명맥을 꿋꿋이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의지이자 지론이고 맹세였다.

장군님의 이 맹세는  총대에서 총대에로 이어지는 조선혁명의 줄기찬  기상이 넘쳐  흐르는  절세의  애국자의  숭고한 신념이고 의지였다. 장군님의 용남산맹세는 곧 문무겸전의 위대한 선언이었다.

장군님께서는 문무겸전을 배움의 좌우명으로 내세우시었다.그분께서는 조선을 책임지고 이끄는 주인이 되자면 반드시 문과 무를 최고의 경지에서 겸비한 정치가, 문무겸전의 대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삶의 철리로 삼으시었던 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대학생들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혁명의 지휘성원들은 언제나 문무를 겸비하여야 합니다.

출장입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전장에 나가면 이름 난 장수가 되고 들어 와서는 유능한 재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옛날부터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나라의 기둥감으로 되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 역사와 문화전반의 과학을 탐구하시는 데서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보이시었을 뿐 아니라 군사학을 탐구하시고 군사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키워 나가시는 데서도 누구도 따르지 못할 지혜와 정력을 쏟으시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군사전문대학이 아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 군사에 그토록 밝으시고 열정이 뜨거우시며 관심이 높으신데는 누구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대학시절은 용남산의 뜨거운 맹세속에 다진 문무겸전을 완벽하게 익히시는 탐구의 과정이었고 그것을 빛나게 구현해 나가시는 실천의 나날이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대학입학 첫 시기에 군력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시었다.

군력은 국력이다. 때문에 군력을 키우는 군사는 국사중의 제일 국사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군사는 「국사지대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군력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근본문제로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나라와 민족의 흥망역사를 군력을 위주로 하여 분석평가하시었다. 이것은 주체의 역사관에 기초한 독창적인 역사분석평가의 기준이었다. 그 정당성과 현명성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잘못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의 부당성을 올바로 해명하시어 민족사의 줄기를 바로 잡으신 데서 실증되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역사학계에서는 오랜 세월 사대와 교조의 베일속에 구겨졌던 역사의 페이지들을 올바로 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문제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장군님께서 대학생활을 시작하신지 겨우 한달 남짓이 지난 주체49(1960)년 10월 중순 어느날이었다.

이 날 조선역사학과목 강의에서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문제가 취급되었다. 교원은 중세기 조선반도에 존재했던 세나라(고구려, 백제, 신라)시기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삼국을 「통일」했고 여기서 신라의 「장군」 김유신이 큰 역할을 했다는 강의를 했다. 교원은 강의를 마치면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제목의 학과토론문제를 제시했다.

장군님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었다. 우선 강의내용에 문제가 있었다.

그이께서는 이미 고급중학교시절에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에 대하여 의문을 품으시고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해 오시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은 그때까지 정설로 굳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여기에 심중한 문제가 있다고 보시었다.

원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은 후기신라 때 신라통치배들에 의해 제창된 것이었다. 「삼국통일론」을 체계화한 사람은 신라왕족의 후손인 김부식이었다. 12세기 대표적인 신라중심주의사가였으며 사대주의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김부식은 1145년에 편찬된 전 50권의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에 삼국의 역사를 처음으로 체계화하고 성문화하면서 신라왕족의 「업적」을 크게 내세웠다. 그러다나니 후기신라시기에 통치배들이 떠든 「삼국통일」과 관련한 역설을 그대로 역사책에 옮겨 놓았다. 그리하여 조선의 중세역사는 큰 나라 세력을 끌어 들여 동족의 나라들을 멸망시킨 비열한 사대주의자들인 신라통치배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왜곡서술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신라정통설」로 굳어져 역대로 우리 나라 역사학계를 지배해 오고 있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 있어서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는 나라와 민족의 유구성과 정통성을 보여주는 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된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 중세역사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거의 「신성불가침」적으로 굳어진 삼국통일 문제를 바로 정립해야겠다고 생각하시었다. 이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역사학계에서 권위있다는 노학자들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문제였다.

장군님께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책들과 고문헌들을 다시 읽어 보시며 자료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나가시었다. 이 과정에 그분께서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지시고 그 해명에 파고드시었다.

그 하나는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세력을 끌어 들여 그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응당 우리 나라에 하나의 주권국가가 있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않고 옛 고구려영토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라는 나라가 세워져 오랫동안 존재한 사실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세우시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려는 지향과 국력을 가졌다면 어떻게 되어 신라통치배들이 처음부터 당나라에 아부굴종하면서 그 세력을 끌어 들이는 비열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다음 고구려의 옛 영토위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이 서있었다면 어떻게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의문이기에 앞서 놀라운 발견이었다.

고대, 중세를 포함한 지난 시기의 인류사를 돌이켜 보면 군력이 강한 나라나 민족들이 그렇지 못한 나라나 민족들을 병탄하거나 제압하고 통합한 것이 통례로 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되거나 올바로 평가되지 못한 채 후세에 전해진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그것을 옳게 평가할 수 있는 자막대기를 찾아 쥐지 못한 데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삼국통일론도 그 한 실례였다.

이 문제는 오로지 어리신 때부터  군사와 군력을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근본문제로 보신 장군님에 의해 비로소 올바르게 해명되었다.

천재적인 군사적 예지와 안목으로 역사평가기준을 정하시고 연구를 심화시키신 장군님께서는 끝내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부정할 수 있는 자료를 포착하게 되시었다. 사료에 의하면 신라의 실권자였던 김춘추는 자기네 군사력이 고구려와는 대비조차 할 수 없으리만큼 약했기 때문에 648년에 당나라로 가서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대동강이남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지역은 당나라가 가지기로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 후의 역사적 사실도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또 다른 사료에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영토위에 신라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당당한 동방 천년강국이었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이 200년이상 굳건히 존재하면서 주권국가로 후기신라와 병존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료들은 신라통치배들에게는 애초부터 삼국통일을 실현할만 한 힘이 없었다는 것, 또 그들에게는 통일지향적인 의지도 없었고 오직 동족의 나라를 외세에 내주면서라도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뜨려 영토를 넓히고 저들의 통치를 유지확장하려는 야욕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것이 천만부당한 역설이라는 결론을 내리시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통일국가는 언제 세워졌는가?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신 장군님께서는 후기신라와 발해국 이후 하나의 국가로 세워진 고려에 주목을 돌리시었다.그분께서는 「고려」라는 나라이름이 나오게 된 경위부터 따져 보시었다. 이 과정에 고구려사람들이 자기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도 불렀고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발해국사람들이 나라이름을 그대로 「고려」라 관습적으로 불렀으며 그 후 왕건이 918년에 새 왕조를 세울 때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나라이름을 「고려」로 정식 선포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시었다.

고구려는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서 천년강국으로 이름 높았다.

건국초기부터 독자성과 자주권을 확고히 고수한 대국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 고구려는 중세 동아시아대륙을 크게 진감시켰던 군사강국이었다.

고구려는 건국이후 반세기 남짓한 기간에 당시 이웃한 동족의 나라들과 지방정치세력들을 많이 통합함으로써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군력이 강하고 큰 나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었다.

고구려의 군사력은 동방의 그 어느 나라도 따를 수 없는 무적이었다. 고구려에는 무술과 함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나 다 활을 쏘고 말을 탈 줄 알았으며 무술을 숭상했다. 그래서 수천 수만의 외래침략자들이 빈번히 달려들 때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을 비롯한 명장들이 일어나 용맹을 떨쳤고 인민들이 떨쳐 나 적들을 족쳐버렸다.

고구려의 군력은 침략야욕에 들떠 한때 동서대륙을 횡단하던 칭기스칸의 그런 「군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고구려의 군력은 외세의 침략을 허용치 않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애국애족의 군력이었고 천년강국의 위력을 떨친 자랑스러운 군력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분석하신 데 토대하여 우리 나라에서 통일국가는 고려이며 통일을 실현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삼국통일에 대한 고구려의 지향을 계승한 고려사람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시었다.

그리하여 장군님께서는 학과토론에서 삼국통일문제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실 것을 결심하시고 『삼국통일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준비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학과토론시간에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시었다. 학과토론이 끝난 다음 장군님의 논문을 받아 안게 된 교원은 흥분을 억제할 길 없었다. 삼국통일과 관련한 종전의 견해를 완전히 뒤집어 엎은 전혀 새로운 논문이었던 것이다.

장군님의 논문은 오랜 세월을 두고 굳어져 온 신라중심의 역사관을 타파하고 군력이 강했던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여 역사관을 새롭게 정립한 위대한 과학적 발명으로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장군님께서는 논문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의 부당성과 우리 나라에서 통일국가실현의 전 노정을 명백하게 밝히시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중요한 과학적 결론을 내리시었다.

첫째로, 신라통치배들은 우리 나라에 외세를 처음으로 끌어 들인 사대주의자들이고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은 완전히 왜곡된 「이론」이며,

둘째로, 신라왕조의 침략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동족의 나라들을 멸망시키는데서 「무훈」을 세웠다는 김유신이나 김춘추는 「애국명장」이 아니며,

셋째로, 삼국통일은 민족통일에 대한 고구려의 지향을 계승한 고려에 의하여 실현되었으며 또 그 이전 삼국시기 우리 나라 역사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 나라 역사학발전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일으킨 일대 혁명이었다.

장군님의 논문은 군력이 강해야 나라와 민족이 흥하고 발전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우여곡절과 멸망을 면치 못한다는 역사의 철리를 밝혀 주었다.

논문을 받아 안고 온 대학이 끓고 역사학계가 술렁이었다.

 

   




시대를 밝히는 사상이나 이론은 누구나 내놓지 못한다. 천재적인 예지를 지닌 위인만이 역사의 방향타를 움직일 수 있는 지론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대학입학 첫 시기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 잡아 주신데 이어 현대제국주의를 낱낱이 해부하시었다.

주체51(1962)년 1월이었다.

그 때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제국주의이론의 권위자로 꼽히던 경제학부의 한 교원은 어느 날 대학당위원회로부터 중요한 사회적 과제를 받았다. 제국주의의 죄상을 폭로하는 제강을 학술적으로 잘 만들어 인민군 구분대들에 다니며 해설강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경제학부 교원은 그때 제국주의에 대한 학위논문을 써 놓고 변론을 준비하고 있던 때어서 며칠내로 제강을 쓸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한 날짜에 빈손으로 당위원회를 찾아갔다. 제강은 고사하고 이미 써놓은 학위논문까지 부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사연인 즉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집필하신 논문이 정치경제학강좌에 들어 왔는데 그 논문제목이 『현대제국주의의 특징과 침략적 본성에 대하여』였던 것이다.

이 논문은 그분께서 학과토론에서 발표한 것을 정리하신 것이었다.

평시에 장군님의 비범한 사상이론적 예지에 탄복해 온 그는 하던 일을 미루고 그분의 논문부터 펼치었다.

1. 현대제국주의의 특징에 대하여

2. 현시기 제국주의침략의 악랄성과 교활성에 대하여

3.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부인하는 수정주의자들의 견해의 반동성에 대하여

이렇게 세워진 논문의 구성체계부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다.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고 조성된 정세가 목마르게 갈구하던 문제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살찐 미제는 전후 줄곧 세계제패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오다가 1960년대 초반에 갑자기 「평화의 사도」로 둔갑해 나섰다.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케네디는 저들의 침략정책을 가리우려고 선임자들과는 달리 「평화전략」을 들고 나왔다.

그는 취임연설에서 미국의 상징적인 독수리(미국국장)는 한쪽 발톱에 화살을, 다른 한쪽 발톱에 감람나무가지를 움켜쥐고 있는데 지금까지 미국은 화살정책(전쟁정책)에 매달렸다면 이제부터는 감람나무정책(평화정책)을 중시해야 한다고 하면서 세계적 판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모든 나라들을 평화롭게 살도록 하겠다고 떠벌였다.

비단보자기로 감싸여진 미제의 기만적인 「평화전략」에 흐루시쵸프와 같은 현대수정주의자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평화의 훈훈한 바람이 불어 온다』느니 하면서 마치도 「열전의 시대」는 지나가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듯이 요란스럽게 떠들어 댔다. 그들의 주장인 즉 제국주의가 오늘날에 와서는 이성적으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이 지구상에 더는 전쟁의 근원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궤변들은 미제와 직접 맞서있는 우리 나라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진보적 인민들에게 제국주의자들과 현대수정주의자들에 대해 각성을 높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고전에 대한 교조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사회과학분야에서는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문제에는 관심을 적게 돌리고 레닌의 제국주의론에 기초하여 산업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제국주의일반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었다.

양의 가면을 쓴 엄지승냥이를 앞에 놓고 지난날의 새끼승냥이를 논하는 격이었다.

일찍이 백두산시절에는 일제의 포악성을,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미제의 잔인성과 교활성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체험하시면서  오늘의 「백두산 김대장」으로 대성하신 장군님께 있어서 이것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사태였다.

그리하여 장군님께서는 미제의 「평화」의 너울을 벗겨 버리고 그 침략적 정체를 만천하에 폭로해야 할 시대적 사명감으로부터 현대제국주의를 해부하는 필봉을 드시었던 것이다.

장군님의 학과논문은 아직 정치경제학에서 취급해 본적이 없는, 역사상 처음으로 되는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해부도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논문의 첫 머리에서 현대제국주의의 특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기초위에 서있으며 그 식민지지배에서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고 제국주의나라 호상관계에서는 어떤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밝혀내야 한다고 하시면서 논제 하나하나를 과학적으로 해명해 나가시었다.

장군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현대제국주의가 독점의 지배에 기초하고 있던 지난날의 제국주의와는 달리 국가독점의 지배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시었다.

「독점」과 「국가독점」이란 말은 용어상으로는 비슷하나 내용적으로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독점의 지배에 기초하고 있던 지난날의 제국주의시기에는 대독점들이 위기를 겪는 경위에만 국가에 압력을 가하여 저들의 이익에 맞는 정책을 실시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국가독점자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현대제국주의시기에 와서는 대독점들이 항시적으로 국가권력을 틀어 쥐고 제놈들의 요구에 맞게 나라의 대내외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대독점들이 경제와 정권을 다 거머쥐고 부르조아정치제도를 파쇼화하며 해외침략책동을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는 악마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장군님께서는 또한 현대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방식이 지난 날의 제국주의통치수법이 아니라 보다 은폐되고 교활한 신식민주의에 의거하고 있다고 밝히시었다.

지난 날의 제국주의는 공개적인 방법으로 식민지나라들을 침략하고 약탈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의 제국주의는 지난 시기와는 달랐다. 교활하게 식민지나라들에 가짜 「독립」을 선사하고 실제로는 손때 묻은 괴뢰들을 내세워 그 나라들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틀어쥐고 있는 것이 통례였다.

이처럼 현대제국주의가 식민지지배와 약탈을 계속하면서도 그것을 가리울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은 지난날의 제국주의보다 더 음흉하고 교활한 괴물로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군님께서는 또한 현대제국주의는 그 역량관계에서도 지난 날의 제국주의처럼 열강들이 호상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종속적으로 재편성되었다고 밝히시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제국주의나라들 사이에서는 미제의 지위가 높아진 반면에 다른 열강들의 힘은 약화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세계제국주의는 미제를 두목으로 하고 그 밑에 연합하게 되었다. 이렇게 재편성된 현대제국주의는 장성강화된 것이 아니라 쇠퇴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이러한 분석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시었다.

『…현대제국주의는 단순히 독점의 지배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정치경제적 기초로 하고 있으며 구식민주의가 아니라 신식민주의에 의거하고 있으며 서로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종속적으로 재편성되었으며 장성강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급속히 쇠퇴몰락하면서 최후발악하고 있는 제국주의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처럼 현대제국주의의 특징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초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절대로 변할 수 없으며 날이 갈수록 더욱 교활하고 악랄해 진다고 하시었다.

침략과 약탈은 제국주의의 고유한 본성이다. 오늘 제국주의의 침략수법은 지난날의 제국주의에 비해 일련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지난날에는 제국주의자들이 경제적 이권과 식민지획득을 위하여 물고 뜯는 싸움을 끊임없이 벌여 왔다면 오늘에 와서는 사회주의나라들을 비롯한 혁명역량을 파괴말살함으로써 뒤흔들리는 제국주의체계를 유지하려고 발악하고 있다. 현대제국주의의 악랄성은 교활성에 의하여 안받침 되고 있으며 그것은  「평화 」와  「친선 」의 간판밑에 사회주의나라들과 혁명역량을 내부로부터 와해 시키려고 음흉하게 책동하고 있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었다.

『제국주의자들이 겉으로는 「평화」와 「친선」의 구호를 들고 나오지만 실지로는 새 전쟁준비에 미쳐 날뛰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새 전쟁준비책동은 미국에서 군사비지출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지출하고 있는 방대한 군사비가 그들이 떠들어대고 있는 것처럼 「평화」와 「협조」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승냥이가 양으로 변할 수 없듯이 제국주의의 본성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장군님께서는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수정주의자들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제국주의도 「이성」적으로 변화되어 침략정책을 포기하고 있는 듯이 미화분식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그자들의 이른바 「이성」적 제국주의론의 반동성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발가 놓으시었다.

참으로 위대한 장군님의 논문은 현대제국주의의 가면을 벗기고 그 진면모를 만천하에 밝혀 낸 논고장이었다. 아울러 「이성」적 제국주의론을 떠드는 현대수정주의자들의 심장을 찌르는 예리한 비수이기도 하였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제국주의론을 내놓은 것은 레닌이었다. 그의 제국주의론은 물론 지난 시기의 제국주의를 이해하는 데서는 정당했다. 그래서 그의 제국주의론은 당대 노동자계급의 반제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시대적 제한성으로 하여 현대의 변화된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현대제국주의론은 오랜 세월 공백상태에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과학적 해부와 완벽한 정식화를 내리신 것은 실로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사에 특기할 사변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학이 법석이고 학계가 들끓었다.

장군님께서 불후의 논문을 발표하신 역사의 1월 15일, 그 때 장군님께서는 금시 약관의 20살이시었다.

마르크스는 30살에 「공산당선언」을 내놓았다. 「공산당선언」은 노동자계급선각자들의 머리위에 「유령」처럼 떠돌며 자본주의를 매장하는 투쟁의 기치로 되었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20살의 젊으신 나이에 세계최초로 현대제국주의라는 괴상한 승냥이의 정체를 발가 놓으셨다.그분의 현대제국주의론은 사회주의위업과 세계의 선량한 인민들을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지켜내는 강위력한 사상이론적 무기, 반제투쟁의 기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제국주의론에 접한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반제반미투쟁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미제와 직접 맞서 생산과 건설, 조국보위를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병사, 근로인텔리들이 멸적의 총창을 더욱 억세게 틀어 잡았다. 온 나라가 반제반미투쟁의 도가니로 끓어 번졌다.

논문이 가지는 의의와 생활력은 세계적 판도에서도 대단했다.

장군님의 현대제국주의론은 제국주의본성이 변했다는 현대수정주의자들의 궤변에 된 타격을 가하고 반제혁명전략의 기초를 마련해 준 강령적 문헌이었고 전투적 기치였다.

바로 그런 것으로 하여 현대제국주의자들의 「평화전략」과 「평화시대」를 운운하던 수정주의자들에게 속아넘어가 지구상에 더는 전쟁의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평화적 기분에 사로 잡혔던 사람들의 「상아탑세계」에 파열구가 뚫어 졌다.

장군님의 현대제국주의론은 한마디로 우리 인민과 세계 진보적 인류에게 군력강화와 군건설의 필요성과 반제투쟁의 방도를 명시한 불멸의 대강이었다.

현대제국주의에 대처한 군력강화의 필요성은 장군님의 논문이 나온 후에 조성된「카리브해위기」가 여실히 반증해 주었다.

참으로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해부는 천리혜안의 비범한 과학적 예지와 정치군사적 통찰력을 지니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만이 이룩하실 수 있는 위대한 공적이었다.

 

   




문무겸전의 정치가, 청년장군으로 대성하신 장군님의 대학시절은 비상한 사상이론활동으로 빛났다.

장군님께서는 대학 교원, 학생들과 자주 담화도 나누셨고 논문들도 내놓으시었다. 그 담화나 논문들은 어느 것이나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서도 정수를  이룬 것은 혁명투쟁에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독창적으로 밝힌 수령론이었다.

혁명과 건설에 관한 사상이론에서 수령에 관한 문제는 핵심적인 논제였다. 더욱이 현대수정주의에 의해 혁명의 수령이 모독당하고 있는 조건에서 수령에 관한 문제를 사상이론적으로 올바로 해명하는 것은 초미의 이론실천적 과제로 나섰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수령론은 세계적 판도에서 과학이론적으로 옳은 해답이 주어져있지 못하였다.

그런데로부터 수령을 모독하는 현대수정주의자들의 책동에 응당한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체49(1960)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공산당 및 노동당대표들의 회의 때였다.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이른바 「집체적 지도」라는 간판밑에 수령의 권위와 위신을 허물어 버리려고 책동한 현대수정주의자들은 각국 공산당 및 노동당대표들의 회의에서도 스탈린을 받든 것을 「개인미신」이라고 하면서 그를 반대하는 회의성명까지 채택케 하였다.

수령도 개인이므로 그를 받드는 것은 개별적 인물을 숭상하는 미신행위와 같으니 그것을 반대해야 한다는 이 회의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속에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으면 좋을지 몰라 의견이 분분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직원, 학생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엇다.

이러한 형편을 헤아리신 장군님께서는 어느 날 교원들과 자리를 같이하시었다.그분께서는 우리 당은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공산당 및 노동당대표들의 회의성명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원래 우리 나라를 비롯한 적지 않은 나라 당대표들은 회의에서 그런 문건이 채택되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일부 다른 나라 당대표들이 현대수정주의자들의 주장에 추종한 데로부터 성명에 「개인미신」문제가 반영되게 되었다고 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수령을 개별적인 인물로 보는 것은 매우 유해로운 견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수령은 인민대중의 최고뇌수이며 플로레타리아 독재체계에서 최고영도자의 지위를 차지합니다.』

수령을 개인으로가 아니라 인민대중의 최고뇌수, 최고영도자로 보신 것은 수령의 지위에 관한 전혀 새로운 견해였다.

선행고전가들도 수령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여 왔다.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은 역사발전에서 인민대중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밝히면서도 탁월한 개인이 역사발전을 일정하게 추동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영웅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영웅을 낳는다고 하면서 역사적 필연성만 제기되면 탁월한 인물은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했다.

또한 레닌은 대중, 계급, 당, 수령이 뗄 수 없는 호상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대중은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 지고 계급은 당에 의하여 지도되며 당은 『수령이라고 불리 우는 사람들로 이루어 지는 다소간 고정된 그룹』에 의해 영도된다고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견해들의 제한성을 하나하나 밝혀 주시면서 수령을 개인으로 보고 수령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아주 위험한 것이라고 하시었다.

이렇듯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행고전가들과는 달리 수령은 개인이 아니라는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으시었던 것이다.

장군님께서는 그 후 다시금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대하여 심오하게 해명해 주시었다.

주체52(1963)년 6월 어느 날이었다.

이 날 학생들은 조국해방전쟁의 승리와 관련한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학생들 모두가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가 전쟁승리의 결정적 요인이라는데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토론과정에 한 학생이 역사발전에서 인민대중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유물사관의 원리와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가 조국해방전쟁승리의 결정적 요인으로 된다는 사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보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수령의 역할을 탁월한 개인의 역할의 테두리안에서 보는 것은 옳은 고찰방식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수령은 혁명투쟁에서 특출한 지위를 차지하고 특출한 역할을 합니다. 혁명투쟁은 인민대중을 위한 사업이며 인민대중자신의 사업인 것만큼 혁명투쟁에서 차지하는 수령의 지위와 역할은 인민대중과의 관계에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군님의 말씀은 고전의 그 어느 갈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명제였다.

모두가 흥분된 마음으로 마디마디를 심장에 새겨 넣는데 그분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수령은 인민대중과의 관계에서 뇌수의 지위를 차지합니다. 개별적 사람의 뇌수가 유기체의 생명활동을 통일적으로 관할하는 중심으로 되듯이 수령은 인민대중의 통일단결의 중심, 영도의 중심으로 됩니다.』

장군님의 말씀은 인민대중을 하나의 생명유기체로 본다면 수령은 그 유기체의 뇌수라는 것이며 뇌수와 유기체를 분리시킬 수 없듯이 수령과 대중을 가를 수 없다는 독창적인 과학적 천명이었다.

그것은 수령과 인민대중이 한 몸이라면 수령은 뇌수이고 인민대중은 몸체이며, 따라서 수령과 인민대중을 별개의 유기체로 보면서 역사발전에서 인민대중의 역할이 중요한가, 수령의 역할이 중요한가 하고 대립시키는 것은 애당초 성립조차 될 수 없는 문제이라는 것이었다.

계속하여 장군님께서는 뇌수는 생명유기체의 한 부분이지만 유기체를 이루는 다른 조직기관과 같은 단순한 부분이 아니라 생명유기체의 생명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특수한 부분이라고 하시면서 수령은 뇌수로서 인민대중을 영도함으로써 혁명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하시었다. 다시 말하여 수령은 대중을 혁명사상으로 무장시켜 의식화하고 그들을 혁명조직에 묶어 세워 조직화하며 올바른 전략전술적 지도를 통해 그들을 승리에로 향도한다고 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탁월한 수령의 영도를 받지 못하면 인민대중은 자기의 역할을 할 수 없고 혁명은 모진 진통을 겪게 된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으시었다.

『오늘 현대수정주의자들은 수령을 단순한 개인으로 묘사하고 수령에 대한 인민대중의 충성과 신뢰를 「개인미신」이라고 모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령과 대중을 대립시키는 황당한 궤변입니다.

수령과 인민대중은 혼연일체를 이룹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인민대중전체를 위한 것인 동시에 자기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우리 인민의 충실성은 수령님의 영도밑에서만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위대한 수령님을 모심으로 하여 세계에서 가장 긍지 높은 인민으로 되었으며 동방일각에 사회주의조국을 일떠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세기적 기적과 변혁은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혁명투쟁에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깊이 인식하고 언제나 위대한 수령님을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시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끝마치시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모두가 장군님을 우러렀다. 그들은 짙은 안개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수령에 관한 문제를 즉석에서 흑백을 갈라 과학이론적으로 명철하게 해명해 주시는 장군님의 천재적 예지에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대학기간에 교원들과 학생들과 하신 담화들인 『노동자계급의 수령은 개인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수령은 혁명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등은 다 노동자계급의 수령이 혁명투쟁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새롭게 밝힌 불후의 고전적 노작들이다.

장군님의 노작들을 통하여 대학의 전체 교원들과 학생들은 수령을 한갖 탁월한 개인으로 보아 오던 기존관념에서 벗어나 인민대중의 최고뇌수로서의 수령이 혁명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며 군사분야에서의 전쟁승리도 수령의 역할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는 명백한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사회과학부문의 학자들과 일꾼들은 숲속에서 보물을 찾아낸 듯이 기뻐들 했다. 군사부문의 일꾼들과 전문가들의 경위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것은 수령의 지위와 역할문제가 옳게 밝혀짐으로써 군건설과 군력강화, 전쟁승리의 결정적 요인을 정확히 밝힐 수 있는 강력한 사상이론적  기초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날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인민군대를 「통일전선의 군대」이니 뭐니 하면서 군대를 수령님의 사상과 영도체계안에서 떼어 내려고 책동하였다.

이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조선인민군은 일찍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건하신 노동자계급의 혁명군대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혁명적 무장력으로서 수령님의 사상과 영도에 의해 강화발전되어 왔다. 때문에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혁명과 건설을 무력으로 담보하는 것이 인민군대의 기본사명으로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이치인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규제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수령론은 우리의 인민군대가 명실공히 수령님의 군대이며 그 강화발전과 전쟁승리도 전적으로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였다.

군대가 수령의 군대이고 그 존망도 수령에게 달려 있다는 사상이론은 지금까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밝히신 수령에 관한 사상이론은 혁명적 수령관과 수령의 위업과 그 계승에 관한 혁명이론, 수령의 영도방법론 그리고 혁명적 인생관을 새롭게 전개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 준 동시에 인민군대의 혁명적, 계급적 성격과 사명, 그 강화발전의 사상이론적  기초를 마련해 준 불후의 고전적 문헌이었다.

장군님의 수령론이야말로 문무겸전의 사상이론가, 군사의 대가이신 그분께서만이 새겨 넣으실 수 있는 인류사상사의 위대한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