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대혁명학원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광복의 성전에 한몸 바친 항일혁명열사들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유자녀들을 혁명의 계승자로 키우기 위하여 세우신 혁명의 핵심골간양성기지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주체혁명의 총대동지, 혁명열사들에 대한 수령님의 한없이 고결한 의리에 의하여 마련된 사랑의 학교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41(1952)년 11월에 만경대혁명학원(당시 만경대혁명자유자녀학원) 4학년에 편입하시었다.

당시 만경대혁명학원 원아들은 전쟁의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수령님의 뜨거운 어버이사랑속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몸은 비록 후방에 계시었지만 수령님을 모시고 최고사령부에 계시던 때와 같이 학습과 생활을 긴장하게 전투적으로 해 나가시었다.

그분께서는 최고사령부를 떠나실 무렵 수령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늘 잊지 않고 계시었다.

『…사람은 언제나 신심을 가지고 멀리 내다보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네 말대로 이 전쟁에서 우리는 벌써 이겼다. 복구건설에서도 이길 수 있고.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한 조국을 일떠세울 인재이다.  그러니 너는 돌아가서 공부를 잘해야 한다.   학습도 전투로 알고 내밀어야 한다. 얼마 전에 종합대학에 나갔을 때 나는 대학생들에게 학습도 전투라고 말해 주었다. 이 무더운 여름철에 불바다속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인민군대를 생각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한다.』

혁명적 가문의 유산인 권총을 받아 안고 총대와 함께 한평생 혁명을 해 나가실 굳은 결의를 다지신 장군님께 있어서 아버님의 말씀은 생활의 지침이었다.

혁명의 군복인 만경대혁명학원제복을 입으신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뜻대로 학습은 물론 모든 생활을 원수를 무찌르는 심정에서 전투적으로 해 나가시었다.

장군님의 비범한 탐구정신과 불타는 정열, 강의한 투쟁정신과 실천적 모범은 혁명학원 원아들의 귀감으로 되었다. 학원의 원아들은 더 말할 것 없고 교원들까지도 모두 그분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해 하였다.

만경대혁명학원시절의 김정일장군님은 단순한 학생이 아니시었다.    그분께서는  모든  원아들이  부모들의  숭고한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수령님께 충직한 참된 혁명가가 되도록 이끌어 주는 스승이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41(1952)년 12월 어느날 학급모임에서 싸우는 조선의 소년단원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학습은 곧 전투이다, 원수와 싸워 이기기 위하여,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두다 최우등생이 되자, 모두다 5점의 총창으로 조국과 부모의 원수를 갚자고 열렬히 호소하시었다.

5점의 총창으로 조국과 부모의 원수를 갚자는 구호는 학습전투의 기치로 되었다. 원아들은 원수 미제의 가슴팍에 복수의 총탄을 안기는 심정으로 분초를 아껴가며 열심히 공부하여 모두가 최우등, 우등의 성적을 쟁취하였다.

그런데 일부 원아들속에서는 학습을 왜 해야 하고 무엇을 위하여 해야 하는가를 깊이 깨닫지 못한 데로부터 학과성적에 만족하면서 학습을 폭넓고 깊이있게 하지 않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그릇된 학습태도를 고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었다. 학생들은 마땅히 자신뿐 아니라 앞날의 조선을 위하여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고 보시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주체42(1953)년 1월 22일에 열린 만경대혁명학원 제3분단 총회에서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는 구호를 내놓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이 날 회의에서 올해는 아버지장군님께서 12살의 어리신 나이에 제 나라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신 김형직선생님의 말씀을 받들고 「배움의 천리길」을 걸으신지 서른돌이 되는 뜻깊은 해라고 말씀하시고 30년전 아버지장군님께서 지니셨던 원대한 뜻을 가슴깊이 새기고 조선의 참된 아들딸로 억세게 준비하기 위하여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는 구호밑에 학습을 더 잘해 나가자고 힘있게 호소하시었다.

장군님의 호소에 따라 학급이 떨쳐 일어나 학습전투를 힘있게 벌였다. 장군님께서는 며칠 후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는 구호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뿐 아니라 온 나라의 모든 학생들이 들고 나가야 할 구호로 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 구호밑에 조선을 위하여 배우기 위한 사업을 소년단위원회적인 사업으로 진행할 데 대하여 제기하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원아들속에서 조선을 위하여 배우기 위한 학습전투를 소년단조직생활과 밀접히 결부하여 진행하도록 하시어 그들이 실천투쟁속에서 혁명의 핏줄기를 이어갈 계승자의 사상정신적 풍모와 자질을 훌륭히 갖추도록 하시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하시던 때에 진행하신 활동에서 특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를 조직운영하신 것이다.

장군님께서는 혁명의 핏줄기를 이어갈 학원의 원아들에게 수령님의 위대성을 깊이 인식시켜 그들을 부모들처럼 총을 잡은 혁명의 계승자로 키우는 것이 자신의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을 자각하시었다.

장군님께서 학원에 편입되시었을 때 그분의 마음에 썩 들지 않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원아들이 오후복습시간이 끝나면 교실에 눌러 앉아 다른 나라의 동화나 우화, 외국영화에 대한 이야기판을 펼치군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는 책들도 거의나 번역된 다른 나라의 동화집이 아니면 탐정소설 같은 것들이었다. 높은 학년의 일부 원아들은 다른 나라 책들을 들고 다니며 읽는 풍도 있었다. 학원에서 운영하는 소조도 문학, 예술, 체육 등 학과목소조뿐이었다.

이런 실태를 요해하신 장군님께서는 원아들속에서 수령님을 따라 배우기 위한 분위기부터 세워야 하겠다고 결심하시었다.

어느날 그분께서는 원아들에게 오늘은 내가 옛말을 하겠다고 하시었다.

이 날 장군님께서 들려주신 「옛말」은 수령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친히 조직지휘하신 보천보전투때 돼지우리에 기어든 왜놈순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벼락같이 들이치는 통에 얼이 빠진 왜놈순사 한 놈이 너무도 급해 맞아 돼지우리속에 기어들었다. 그런데 새까만 순사옷에 칼까지 찬 놈이 불시에 우리속에 뛰어들자 돼지는 돼지대로 기겁을 해서 꽥꽥 소리 지르며 야단을 쳤다. 뒤에서는 항일유격대원들이 쫓아와서 금시 뒷덜미를 덮칠 것만 같지 안에서는 돼지가 소란을 피우지 간이 콩알만 해진 순사놈은 빌었다.

『야, 돼지야, 너두 새까맣고 나도 새까맣고 같은 족속 같은데 제발 좀 살려 주려마.  나중에 신세를 톡톡히 갚을테니 제발…』

그러면서 순사놈은 북데기속으로 자꾸 기어들었다.

원아들은 그분께서 하시는 이야기에 심취되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저마다 웃고 손벽을 치면서 한마디씩 하였다. 그전까지 들어오던 그 어느 옛말이나 우화보다도 재미있고 뜻도 깊은 장군님의 이야기는 대번에 원아들의 마음을 틀어 잡았다.

그때로부터 원아들은 그분께 이야기를 해 달라고 날마다 청을 드리었다.  그리하여 장군님께서는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들려주신 여러가지 이야기들이며 빨치산대원들이 들려주던 통쾌한 전투담들을 이야기해 주군 하시었다.

특히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신출귀몰한 전법과 영활한 지휘로 달려드는 일제의 대병력을 보기 좋게 요정내신 전투담을 들려주실 때면 원아들은 너무도 통쾌하여 박수를 치며 환성을 올렸고 며칠동안은 모여 서기만 하면 그 이야기들을 화제에 올리군 하였다. 이때부터 복습시간이 끝나면 원아들모두가 빠짐없이 모여 앉아 책을 덮어놓고 장군님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되어 학급에는 「이야기모임시간」이라는 전에 없던 「일과」가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을 따라 배우려는 원아들의 열망이 높아가는 것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하루일과생활이 끝난 깊은 밤이면 교실에 홀로 남으시어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들려주신 말씀들을 더듬으시고 수령님의 혁명역사와 관련한 여러가지 책들도 펼쳐보시며 이야기모임에 출연할 준비를 하시었다.

이 나날 그분께 크게 도움을 준 것은 최고사령부에서 가지고 오신 「김일성장군의 약전」이었다. 「김일성장군의 약전」에는 전설적 영웅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만경대에서 탄생하시어 일찍이 혁명의 길에 나서신 때로부터 항일혁명투쟁을 조직영도하시어 조국을 해방하시고 새 조국건설을 현명하게 이끄신 불멸의 업적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분께서는 때로는 학급학생들에게 약전을 그대로 읽어도 주시고 내용을 해설해 주기도 하시었다. 그리고 몇몇 동무들에게 책을 돌려보고 연구하여 동무들 앞에서 발표하게도 하시었다.

원아들속에서 수령님을 따라 배우려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것을 헤아려 보신 장군님께서는 어느날 소년단지도원선생을 찾아가 책 한권을 내놓으시며 약전연구소조를 무었으면 하는 의향을 표시하시었다.

『선생님, 제 생각에는 이 책을 기본교재로 삼아서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 」를 조직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 내놓으신 책은 바로 「김일성장군의 약전」이었다. 책의 속표지에는 활달한 필체로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최 고 사 령 부 에 서

                                1 9 5 2 년 7 월 2 일

                                      김 정 일

소년단지도원선생은 물론 학원 교직원, 학생들 모두가 그분의 발기를 지지해 나섰다.

장군님께서는 주체42(1953)년 2월 6일 약전연구소조를 내오기 위한 예비모임을 열고 약전연구소조결성의 필요성과 약전연구소조의 사명, 기본임무와 활동내용을 밝혀주시었으며 약전연구소조결성과 관련한 준비사업을 다그치시었다. 그리고 2월 10일에는 학급소년단원들의 모임에서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결성을 엄숙히 선포하시었다.

이 날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의 첫 성원이 된 원아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역사를 더욱 깊이 학습하고 열심히 따라 배울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약전연구소조의 활동계획을 손수 세워 발표하시었고 소조의 첫 사업인 약전독보도 맡아하시었다.

독보를 끝내신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우리는 장군님을 잘 따라 배워야 합니다.  나도 앞으로 장군님을 따라 배우기 위하여「김일성장군의 약전」학습을 더 잘하겠습니다. 우리모두「김일성장군의 약전」을 깊이 학습하여 장군님의 참된 아들딸이 됩시다.』

그 후 장군님의 적극적인 지도에 의하여 약전연구소조는 학원의 모든 학급들에 조직되고 운영되게 되었다.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를 결성하신 당시 장군님께서는 10대에 갓 들어선 소년이시었다.

마르크스는 28살, 엥겔스는 26살, 레닌은 25살, 손문은 28살에 이념소조를 조직하였다고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그들의 나이의 절반도 못되는 10대에 수령의 혁명역사, 수령의 위대성을 깊이 체득하기 위한 약전연구소조를 무으신 것이다.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는 나어린 원아들이 운영하던 극히 소박한 형태의 연구소조였지만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과 혁명업적, 고매한 덕성을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우리 나라의 첫 혁명역사연구소조였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를 무으신 것은 수령님의 혁명역사학습을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의 시원을 열어 놓으신 깊은 의미를 가지는 불멸의 공적으로 되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훗날 전쟁의 포화속에서 약전연구소조를 무어 활동하시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었다.

『수령님의 혁명역사에 대한 학습을 할 데 대한 문제는 결코 오늘에 와서 처음으로 제기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쟁시기에도 이 문제를 중시하고 소년단원들로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를 조직하여가지고 수령님의 혁명역사를 열심히 학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수령님의 혁명사상과 영도의 현명성, 고매한 덕성을 따라 배우기 위한 소년단원들의 열의는 대단히 높았습니다.』

당시 약전연구소조는 『김일성원수님의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자!』라는 구호를 들고 「김일성장군의 약전」과 위대한 수령님의 노작들 그리고 수령님의 혁명역사와 혁명사상을 깊이 학습하였다.

약전연구소조는 「김일성장군의 약전」을 교재로 삼고 주에 한번씩 운영하였는데 기본형식은 독보와 해설, 연구발표였다.

장군님께서는 직접 발표모임에 출연하시어 유서깊은 만경대고향집과 들메나무, 군함바위와 씨름터들에 깃든 수령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생동하게 들려 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증조부모님들과 소조원들과의 상봉모임도 조직하시었다. 소조원들은 이 기회에 수령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가슴깊이 새기며 수령님을 따라 배워 조국을 사랑하고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우려는 굳은 결의를 다지었다.

그분께서는 소조원들속에서 수령님의 혁명역사와 함께 수령님의 노작들도 깊이 학습하도록 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41(195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하신 역사적인 보고 『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가 나오자 그분께서는 곧 소조원들에게 수령님의 이 보고는 당원들뿐 아니라 민청원들,  소년단원들도  다  학습해야  한다고,  그래야 수령님의 사상을 잘 알고 그대로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하시면서 보고에 대한 독보와 연구발표모임을 조직하시었다. 한편 주체41(1952)년 12월 조선인민군 고급군관회의에서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연설 『인민군대를 강화하자』를 비롯한 여러  노작들을 먼저 연구하신 후 소조원들에게 그 내용을 해설해 주시었다.

학원의 원아들은 수령님의 혁명사상과 혁명역사를 깊이 학습하여 조국의 참된 아들딸이 되려는 한마음으로 소조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장군님께서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결성하신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는 점차 전국의 많은 학교들에 확대되어 활발히 운영되었다.

주체42(1953)년 4월 「노동신문」은 『수령의 약전을 열심히 학습 「평양지구 학생들」』이라는 제목아래 『평양지구의 각급 학교학생들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원수에 대한 무한한 경애심과 충성심을 가슴깊이 다짐하면서 그분의 약전을 열심히 학습하고 있다.』라고 소개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조직진행하신 「김일성장군의 약전연구소조」의  활동은 학생들을 위대한 수령님께 충직한 참된 아들딸로 키워낸 힘있는 정치활동이었다.

 





가열한 전쟁의 총포성은 그칠새 없었어도 후방의 교정에서는 언제나 원아들의 글읽는 소리, 노래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졌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학원에서 공부하시는 나날에도 최고사령부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수령님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늘 마음 쓰시었다.

아버님께서 지금쯤 어느 전선에 나가 계시는지, 어느 지방을 현지지도하고 계시는지,   건강은  어떠하신지  무척  걱정되시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가신  지대의 일기예보까지 일일이 알아보군 하시는 장군님이시었다.

주체42(1953)년에 들어와 전선형편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미제가 대규모적으로 준비해 온 「신공세」기도는 파탄되었다. 그러나 미제는 총포성을 더욱 광란적으로 울리면서 이승만도당을 부추겨 「정전결사반대」, 「단독북진」소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적들은 공화국의 도시와 농촌, 공장과 학교, 병원, 저수지들에 대한 무차별폭격을 계속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적들의 야만적인 폭격소식을 접하실 때마다 아버님의 신변에 대한 걱정을 놓지 못하시었다.

그 해 5월 하순 어느날이었다.

이 날 라디오보도를 통하여 미제의 공중비적들이 평양을 폭격했다는 소식에 접한 장군님께서는 오래도록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는 산너머 멀리 남쪽하늘가를 바라보시며 깊은 생각에 잠기시었다.

한학급에 있던 학생이 조심히 사연을 묻자 그분께서는 최고사령부가 걱정이 되어 그런다고, 놈들의 폭격소식을 들을 때마다 늘 위험한 길을 다니시는 아버님에 대한 근심이 더욱 난다고 심려 깊은 말씀을 하시었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건강하셔야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고 하시며 아버님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간절하게 말씀하시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 있어서 어버이수령님은 한 가정의 아버님이시기에 앞서 전체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었다. 아버님께서 계시어 조선인민의 행복도 찬란한 미래도 혁명의 승리도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심장깊이 절감하시는 장군님이시었다. 하기에 그분께서는 수령님곁에 계시어도, 머나먼 천리길에 떨어져 계시어도 수령님의 안녕과 건강을 절절히 바라시며 최고사령부의 보도 하나도 무심히 듣지 않으시었다.

그후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 장군님께서는 조용히 학원의 구내길을 걸으시다가 문득 강당으로 걸음을 옮기시어 풍금앞에 앉아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타시었다. 부르고 불러도 다함이 없을 그 불멸의 송가를 거듭거듭 마음속으로 부르시며 건반을 쳐 나가시었다.

한참동안이나 풍금을 타신 장군님께서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오시어 책상을 마주하고 앉으시었다. 눈을 감으시고 사색에 잠기시었다. 불길에 휩싸인 평양의 거리들, 허리 부러진 가로수들, 처참히 무너져 잿가루만 날리는 인민의 유원지들을 더듬어 보시는 듯 한자리에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으시었다. 미제에게 최후의 철추를 내리시며 준엄한 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눈앞에 그려보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안녕과 건강을 바라는 전체 조선인민의 간절한 소망과 염원을 담아 최고사령부에 계시는 수령님께 삼가 편지를 쓰시었다.

 

항상 그리운 아버지에게

아버지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가열한 조국해방전쟁에서 미국양코배기를 때려 부시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탁으로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릴 것은 아버지는 개인의 몸인 것이 아니라 전체 조선인민의 수령입니다.

…아버지께서 건강에 유의하고 항공에 주의하고 항상 몸조심함은 전체 조선인민의 행복이며 또한 우리들의 행복입니다.

아무쪼록 건강에 많이 노력하실 것을 멀리서 축복합니다.

                                                            1953년 6월 1일

                                                               김정일 올림

 

최고사령부에서 아드님의 편지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벌써 그 나이에 나라의 운명과 인민의 행복을 놓고 생각할 줄 아니 정말 기특하거든.』라고 하시며 일꾼들에게 편지를 보여 주시었다. 편지를 본 일꾼들속에는 홍명희내각부수상도 있었다. 이 날 크나큰 감동을 받은 그는 훗날 자기 자손들과 자리를 같이한 기회에 장군님의 편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김일성장군님 자제분의 편지는 부자간에 오고 가는 그런 서신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 편지는 장군님을 받드는 충의를 담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들도 그런 충의로 살아야 한다. 그런 충의가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버러지야.』

참으로 장군님께서 보내신 편지는 아버님을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위대한 수령으로, 무적필승의 최고사령관으로 높이 우러러 받드시는 그분의 신념화된 절대적인 충실성의 발현이었다.

아버님께 보내신 장군님의 편지는 그후 수령님의 안녕을 바라는 온 나라 인민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축복의 노래로 되었다.

주체50(1961)년 5월 어느날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함께 와산동-용성사이 도로확장공사에 참가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작업의 여가에 몇몇 학우들과 공사장근처에 있는 평양일용품공장 유치원을 돌아보시다가 풍금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앞에 앉으시었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시었던 그분께서는 조용한 음성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어린 시절에 맞는 명절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잊지 못할 추억이 많겠지만 나는 해마다 6.1절을 맞을 때면 조국이 준엄한 시련을 겪고 있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맞은 1953년 6.1절을 감회깊이 돌이켜보군 합니다.

그때 나는 어린 동생과 함께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있었습니다. 자나깨나 늘 수령님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우리는 그 날 따라 수령님이 못견디게 그리웠습니다. 그 날 나는 동생과 함께 오매에도 그리운 어버이수령님의 안녕을 간절히 축복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수령님께서는 우리의 편지를 받아 보시고 못내 기뻐하시었으며 최고사령부에서는 물론 위험한 전선길에 나서실 때에도 언제나 그 편지를 품안에 간수하고 계시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 담긴 간절한 축원의 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나의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으며 수령님을 천만년  영원히  우러러 모시고 충성 다하려는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지향과 절절한 염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령님의 만수무강은 우리 인민의 최대의 염원이며 세상의 전부입니다. 수령님께서 만수무강하셔야 우리 인민이 무궁하고 세상일이 다 풀려집니다. 이것은 우리 인민의 간고한 투쟁과 시련속에서 얻은 확고부동한 신념과 의지이며 세월과 더불어 더더욱 간절해 지는 최상의 소원입니다.

나는 수령님께서 잊지 못하시는 그 날의 편지내용을 노래로 남기고 싶어 수령님의 안녕을 축복하는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내가 풍금을 타면서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어둡던 강산에 봄을 주시고

조선을 빛내신 아버지장군님

저 멀리 하늘가 포연이 서리면

인민은 안녕을 축복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아버지장군님 인민의 수령님

준엄한 전선길 안녕하심은

온 나라 가정의 행복입니다

 

미제를 쳐부신 영웅의 땅에

낙원을 펼치실 아버지장군님

찬란한 조선의 미래를 위해

인민은 안녕을 축복합니다

 

 

 

나는 아직 이 노래에 제목을 달지 못하였습니다. 꼭 제목이 있어야 한다면 「축복의 노래」라고 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어 그 날의 편지내용이 노래로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자나깨나 뵙고 싶은 어버이수령님의 안녕을 바라는 장군님과 인민의 절절한 염원이 그대로 가사의 구절구절이 되고 선율이 되어 온 나라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었다.

그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이 노래를 알게 되시었다.

주체73(1984)년 5월, 위대한 수령님께서 머나먼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시었을  때였다.   열차안에서는  간단한  오락회가  있었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수행하는 한 일꾼이 부르는 「축복의 노래」를 깊은 생각에 잠겨 들으시었다. 그러시고는 오늘 나에게 참으로 뜻깊은 노래를 들려주어 참 고맙다고 하시며 선참으로 박수를 쳐주시었다.

수령님께서는 「축복의 노래」는 자신께서도 잘 알고 있다고 하시며 이런 뜨거운 말씀을 하시었다.

『…김정일동무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다 보니 고생을 많이 하였소.

그런데도 그는 그런 내색은 없이 오히려 아버지인 나를 더 극진히 위해주군 하였소.

…「축복의 노래」도 바로 김정일동무가 지난 전쟁 때 항상 전선길에 있는 나를 걱정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하오.

정말이지 나를 생각하는 김정일동무의 마음에는 감동을 금할 수가 없소.』

정녕 부자간의 정과 도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충성심, 수령님의 안녕을 위하시는 그분의 사색과 열정의 세계에는 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