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자제분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받으시었지만 인차 백두산밀영으로 오지 못하시었다. 소부대활동을 지휘하고 계시던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시던 수령님께서는 백두산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조국해방을 위한 작전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고 전민항전준비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하여 백두산밀영으로 돌아오시었다. 주체31(1942)년 6월, 장군님께서 탄생하신지 넉달만이었다.

김정숙여사께서는 아드님을 안으시고 수령님을 반갑게 맞이하시었다. 우리 인민이 민족의 가장 걸출한 3대위인을 백두산에 처음으로 함께 모신 역사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백두산의 혈통, 위대한 수령님의 선군혁명위업의 대가 굳건히 이어지고있음을 보여주는 불멸의 화폭이었다.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아드님을   포근히   안으시고   백두의   기상이    넘쳐나는   준수한   얼굴을   이윽토록   들여다  보시었다. 수령님께서는 김정숙여사에게 아드님을 잘 키워서 혁명의 대를 잇게 하자고 하시면서 백두산에서 치켜든 혁명의 붉은기를 후대들이 대를 이어 들고 나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뜻이라고 의미깊은 말씀을 하시었다.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백두산밀영에 도착하시어 이틀이 지난 날 저녁이었다. 사령부에서 열린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지휘관들은 김정숙여사께서 안고 나오신 자제분의 환한 얼굴을 보며 박수갈채로 열렬히 축복하였다.

오백룡동지는 격동된 목소리로 어리신 자제분은 사령관동지를 꼭 닮으시었다고 했다. 그러자 최현동지가 화답하며 『옳소. 자제분의 환한 모습만 보아도 꼭 사령관동지를 뵈옵는 것만 같소. 진정 어리신 자제분은 김일성장군님을 그대로 닮으신 백두산의 장군이시오.』라고 진정을 아뢰었다.

그때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나오시어 환희에 휩싸여 있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동무들이 그처럼 기뻐하니 나도 마음이 즐겁다고 하시고 진중한 어조로 우리들이 이 백두밀림에서 입을것도 입지 못하고 먹을것도 먹지 못하고 목숨을 내대고 싸우는 것도 다 후대들을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는 비록 헐벗고 굶주리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후대들에게만은 모두다 잘사는 해방된 조국을 안겨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들도 잘 싸워야 하지만 이 항일의 총포성속에서도 후대들을 혁명의 계승자로 억세게 키워야 한다, 그리하여 후대들이 우리가 들었던 혁명의 붉은기를 높이 들고 혁명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 나가도록 하여야 하며 그들을 문무백관들도 부러워하는 지, 인, 용을 겸비한 훌륭한 혁명가로 키워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아드님을 문무를 겸비한 선군혁명위업의 계승자로, 백두산의 용장으로 억세게 키우시려는 경애하는 수령님의 말씀은 투사들에게 무거운 사명감을 북돋아주는 간곡한 당부였다. 투사들은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기대가 담긴 가르치심을 받아 안고 심장의 격동을 금할 수 없어 폭풍같은 박수의 환호를 터치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유년시절은 군복입은 항일혁명투사들속에서 흘러갔다.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장군님의 유년시절을 회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포연에 절은 옷을 입고 군대밥을 먹으며 돌격구령소리와 함께 성장한 그의 인생은 첫 시작부터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백두산에서 탄생하시어 눈보라 세찬 밀림속에서 걸음마를 익히시며 억세게 성장하신 장군님의 유년시절은 선군태양으로서의  그분의 위대한 인생의 길에 세워진 첫 이정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탄생의 그 시각부터 이 세상 모든 위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고난에 찬 유년기를 보내시었다.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요람에 안긴다. 그러나 눈바람 사나운 백두산의 깊은 밀림속, 항일의 총포성이 그칠새 없이 울려오는 전장에서 탄생하신 장군님을 품어 안은 것은 포근한 요람이 아니었다.

군복입은 사람들의 활동거점인 백두산밀영에서의 장군님의 유년시절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속에서 흘러갔다. 무엇보다도 백두산의 눈보라와 혹한의 추위를 막아줄 변변한 옷이나 침구조차 없었다. 갓 탄생하신 장군님께 안겨진 것은 어머님의 군복을 줄인 홑옷과 자투리천으로 꾸민 얄팍한 포단 한장이 전부였다.

김정숙여사께서는 군용모포로 어리신 장군님을 감싸주시고 날씨가 더 차지면 자신의 군복을 벗어 덮어드리군 하시었다. 그러한 형편을 보고 있던 밀영의 여대원들이 생각다 못해 자기들이 입고 있던 군복에서 솜을 뜯어내고 배낭에 있던 천쪼박들을 모아 쪽무이포단을 만들어 드렸다. 지금도 백두산밀영고향집에 가면 그 쪽무이포단을 볼 수 있어 장군님의 어린시절의 체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주체32(1943)년 이른 봄 백두산밀영에서 김정숙여사와 어리신 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생활을 한바 있는 항일혁명투사 김옥순동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김정숙동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나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장군님께서 덮고 주무시는 쪽무이포단으로 쏠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장군님의 탄생을 그렇듯 열광적으로 축복하여 마지 않으며 그분을 백두광명성으로 높이 우러러 칭송하던 우리들이 과연 쪽무이포단밖에 마련할 수 없었단 말인가.…

훈련기지에서 장군님께 쪽무이포단을 해드렸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는 나의 말을 들으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이 포단이 얼마나 좋은가고, 우리 동무들의 성의가 어려있는 이 포단이 제일 좋다고 하시었다.』

그때 일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해방 후 항일혁명투사 임춘추동지는   외국에  갔다가  조국에   돌아올  때 좋은  담요 500장을 사다가 경애하는 수령님과 김정숙여사께 선물로 드리었다.

두분께서는 그가 백두산에서 풀지 못한 원을 풀자고 구해온 것인데 그 원을 풀어주자고 하시며 담요를 모두 만경대혁명학원 원아들에게 보내주시었다.

장군님께서는 추위만이 아니라 배고픔도 혹심하게 겪으시었다.

어리신 장군님께 차례진 것은 빨치산대원들의「군대밥 」이었다.

낟알 한톨 없는 백두원시림속에서 싸우는 빨치산들에게 있어서 통강냉이를 조금 섞거나 약간의 삶은 감자를 부스러뜨려 버무린 풀범벅이 상등식사였다. 풀죽도 여름 한철이고 눈이 강산같이 쌓인 한겨울에 식량이 떨어지면 빨치산대원들은 생눈을 움켜 먹으며 며칠씩 견디어야 했다. 이것이 빨치산의「군대밥 」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젖떼기때부터 그런「군대밥 」으로 자라시었다.

동서를 둘러보고 고금을 훑어보아도 그렇듯 춥고 배고프고 고생스러운「요람 」에서 자란 위인은 없다.

허나 우리 장군님께서 비록 군용밥통에 강낭죽을 담아 드시고 빨치산군복을 줄여 입으며 자라시었어도 그분께서는 그 군복에서 투사들의 체온을 느끼시고 불굴의 넋을 지니시며 애국심을 키우시면서 백두산을 닮아 가시었다.

오늘 백두산밀영고향집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성장에 깃든 사연들을 고이 안아 전하고 있다.

앉은뱅이책상위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나무권총, 나무쌍안경, 나무칼, 조선지도맞추기며 궤짝위에 포개있는 쪽무이포단 그리고 방 한쪽에 놓여있는 반짇고리며 독수리깃털방비… 어리신 장군님의  유년시절의  숨결과  체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사적물들에  접하면서  사람들은 어리신 장군님께서 김정숙여사의  「자장가」를 들으시며 씩씩하게 자라시던 그 나날들이 눈에 어려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한다.

 

아가 아가 자장자장 어서 자거라

어서 자라 속히 자라 총칼을 메고

조국해방 만세소리 활발한 곳에

너 앞서고 나 뒤에 나가 싸우자

 

아가 아가 자장자장 어서 자거라

어서 자라 속히 자라 붉은기들고

공산주의 새 세상 떨치는 곳에

너 앞서고 나 뒤에 나가 싸우자

 

위대한 사랑과 축복의 마음 담아 불러주시는 김정숙어머님의 「자장가」는 조국의 광복과 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앞장에서 나가는 기수가 되라는 간절한 당부로서 어리신 장군님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고난에 찬 생활환경이 인간을 조숙하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성장과정은 남달리 빨랐다.

장군님께서는 돌이 되기 퍽 전에 첫걸음을 떼시었다. 그분께서는 인생의 첫걸음마를 떼시는 것도 백두산을 닮아 남다르셨다.

속담에 아이들은 급하면 어머니의 손부터 잡고 늙은이는 지팡이부터 잡는다고 했다. 그런데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아직 돌이 되기 썩 전에 그 누구의 부축도 없이 제 힘으로 그것도 단숨에 걸음마를 완전히 익히시었다.

그날 밀영의 항일혁명투사들은 어리신 장군님을 안아 높이 받들어 올리며 백두산정기를 타고나신 장수이니 첫걸음부터가 다르다고 탄복하였다.

백두밀림에서 첫걸음을 내디디신 장군님의 발걸음, 그것은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할 위대한 계승자의 뜻깊은 첫걸음이었다.

첫걸음마부터 유달리 빨리 떼신 장군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조숙하시었다.

이웃이 없는 백두산에서 태어나신 장군님께서는 늘 빨치산대원들과 함께 지내시며 자라시었다. 그분의 다정한 친구들은 소꿉놀이동무들이 아닌 빨치산대원들이었고 그분의 기쁨은 「황군」을 소탕한 빨치산들의 환희였다. 그분의 뇌리에 새겨진 것은 희생된 전우들을 이국의 산야에 묻으며 복수를 다짐하는 빨치산들의 조총소리었다.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말과 노래도 빨리 배우고 익히시었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 다음에는 「총」, 「칼」, 「독립」, 「혁명」과 같이 투사들이 하는 말을 먼저 아시게 되었고 노래도 동요보다는「유격대행진곡」과 같은 혁명가요를 더 많이 아시었다.

장군님께서는 탄생하신 이듬해 봄, 항일대전의 최후승리를 준비하기 위한 경애하는 수령님의 작전적 방침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이 새로운 원동훈련기지에서 활동하게 되자 어머님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가 지내시었다.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훈련기지에서 빨치산대원들은 항일의 최후결전을 각 방면에 걸쳐 준비하고 있었다. 소부대와 소조로 만주각지에 파견되어 적들과 피어린 싸움을 벌이었고 총검의 숲을 헤치며 국내깊이 침투하여 적정도 탐지하였으며 조국해방의 앞날을 그리며 힘겨운 훈련도 하였다.

그 무렵 소도전쟁의 승리를 위한데 나라의 모든 힘을 기울인 당시 소련의 형편에서 남을 돌볼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백두산밀영에서도 그러하였지만 훈련기지에서도 식량사정이 몹시 어려워 모두가 허리띠를 조이며 힘들게 지냈다.

어리신 장군님께서는 쌀밥은 고사하고 검은빵조차 넉넉치 못해 밀가루미음으로 때식을 에우는 때가 많으시었다.

백두산밀영에서 쓰시던 쪽무이포단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대로 덮고 지내시었다.

강철이 불속에서 단련되듯이 간고한 빨치산의 생활은 어리신 장군님께 그 어떤 고난에도 끄떡하지 않는 강의한 의지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 한번 마음 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야마는 백두산형의 완강성을 키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