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63(1974)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황해남도 신천군의 한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은 점심때가 지나 작업반들의 탈곡형편을 알아보려고 관리위원회를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을앞길에서 지방현지지도차로 이곳을 지나가시던 경애하는 장군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관리위원장아바이, 그동안 잘 있었습니까?』

관리위원장의 마음을 한순간에 밝게 해주며 온통 끌어당기는 친근한 인사말씀이었다.

그분께서는 잠간 들려가실 차비가 아니신듯 벌을 함께 돌아보자고 하시었다.

그분께서 관리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시며 농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시고 등매산언덕길에 돌아오셨을 때는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질무렵이었다.

관리위원장은 누구나 그렇듯 간절히 만나 뵙고 싶어하는 그분을 반나절 가까이 모시고 다녔다는 기쁨으로 가슴 부풀어있었지만 이제는 헤여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수행원들도 차를 가까이 대기시켜놓고 그분께서 차에 오르시기를 기다리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떠나자는 말씀도 없이 한동안 생각에 잠기신째 저물어가는 벌판이며 멀리 산자락의 집집들에서 피여오르는 저녁연기를 바라보시었다. 그러시다가 탈곡장을 한번 더 보고 가자고 나직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수행원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다가 할 수 없이 그분을 따라 탈곡장으로 향하였다. 탈곡장은 아까 선참으로 다 돌아보신 곳이어서 이제 더 들리실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현지지도 일정에는 다른 사업이 예견되어있었다.

그분께서는 그러한 사정을 잊으신듯 관리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시며 조금도 바쁘신 기색이 없이 천천히 탈곡장을 다시 한바퀴 도시었다.

탈곡장을 돌아보신 그분께서는 드디여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는 언덕길에 나오시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그냥 그 언덕길에 서계시기만 하였다.

한 일꾼이 참다못해 떠나셔야 할 시간이 지났음을 말씀드렸으나 그분께서는 알았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이시기만 하였다.

수원들은 초조해지는 마음과 함께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을 그처럼 신속히 처리하며 분초를 쪼개 쓰시는 그분께서 오늘은 웬일이실까?

하지만 이때 수원들을 아연케 만든 일이 또 벌어졌다.

그분께서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생각해 내신 듯 밝게 웃으시면서 늙은 관리위원장에게 같이 식사나 하고 헤여지자고 하시며 사양하는 그의 손목을 잡아 끌다싶이 하여 자동차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차에 오르게 하시었다. 그 차에는 그분께서 가지고 다니시는 도중식사가 실려 있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분께서는 반찬그릇을 노인앞으로 밀어놓으시고 손수 권하기도 하시면서 식사를 하고 계시었다.

그분께서 식사를 끝내시고 관리위원장과 함께 차에서 내리시었을 때 모두 이제는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오르시려니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또다시 관리위원장을 바래우시기라도 하듯 그와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이미 어두워진 들길을 걸으시었다.

이때에 와서야 수원들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분께서 그 늙은 관리위원장과 헤어지는 것을 그렇게도 힘들어 하시는지, 어찌하여 떠날 시간을 자꾸만 미루시는지를 깨닫고 모두 숙연해 지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 관리위원장으로 말하면 지난 전쟁때 세 아들을 비롯한 아홉식구를 미제침략자들에게 학살당한 사람이었다. 온 집안식구를 한꺼번에 잃고 혼자 남은 그는 그 아물 수 없는 가슴의 상처를 안은째 젊지도 않은 나이에 농장의 큰 살림을 맡아 이끄느라 사시절 눈비를 맞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는 관리위원장으로서 늘 사람들속에 묻혀 살며 자기 가슴속의 옛 상처를 들여다 볼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할아버지!…』 하고 달려와 품에 안길 손자도 없는 집…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를 위해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그분의 심정은 좀처럼 발길을 뗄 수 없게 하였다.

그것은 그분특유의 인정이고 의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