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김정일장군일화집」 중에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대학에서 공부하시던 시절인 주체49(1960)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이날 학급에서는「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학과토론이 있었다.

토론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이미 강의에서 배운대로 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는 것을 일치하게 강조하고 거기에서 논 김유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다.

지도교원은 흡족하였다. 학과토론이란 배워준 내용을 공고화시키는 교수의 한 형태인 것만큼 그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교원은 학과토론을 결속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장군님께서 자리에서 일어서시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김유신에 대한 평가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제기하시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사실상 국토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시었다.

그 근거로는 우선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땅에 발해국이 세워져 2백년동안 존속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세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에 발해와 신라라는 서로 다른 주권국가가 존립하였던 조건에서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었다.

다음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우리 나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지향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럴만한 힘도 없었다고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외적의 침략세력과 합세하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와 김유신을 응당 재평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신라와 외세와의 결탁관계를 자료를 들어 분석하시고 사대주의사가들에 의한 역사왜곡을 지적하시면서 인민의 입장에 선 진정한 역사관, 주체의 역사관을 주장하시었다.

숨죽인듯 교실은 조용해졌다.

교원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듯 그분의 제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서있었다.

너무도 엄청난 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은 12세기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13세기 일연의 「삼국유사」로부터 7∼8백년세월이 흘러온 오늘까지 하나의 정설로 굳어져 있었다.

휴식시간이 되자 역사교원은 그분께서 준비해오신 토론원고를 받아가지고 강좌로 돌아와 조용히 읽어보았다.

처음 얼마동안은 어리둥절해 있었지만 그는 시간이 가고 날이 감에 따라 차츰 3국통일을 두고 생각이 깊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날의 학과토론을 계기로 중세노비문제를 전문하던 그 교원은 자기 연구분야를 바꾸어 발해사연구에 집착하게 되었다. 문제는 발해를 조선역사에 포함시키는가 포함시키지 않는가 하는것이었다. 발해를 조선역사에 포함시키는 한 신라에 의한 3국통일은 부정되는 것이다.

장군님의 학과토론문 「삼국통일문제를 다시 검토할데 대하여」가 발표되자 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그리고 조중 두 나라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발해유적발굴 및 연구사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발해인들 대부분이 고구려유민이었고 건축과 생활양식도 고구려인들의 그것과 꼭같다는 것이 고증되었다.

그분의 견해가 정당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확증되고 후일 해당 시기 조선역사가 전면적으로 재정리되게 될무렵, 노교원은 그간의 연구성과에 토대하여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집필한 론문을 제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대학시절 장군님께서 제기하신 신라에 의한 3국통일부정론의 정당성을 입증한 논문이었다.

교원은 논문서두에 일찍이 대학시절에 장군님께서 제기하고 주장하신 그 내용을 다 밝히였다.

이 논문이 박사학위논문으로 심의결정되던 날 그 교원은 그날의 학과토론시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는 아무 대답도 못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분의 견해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원으로서의 대답이 아닙니다. 위대한 스승께서 내주신 숙제를 풀고 또 풀면서 20여년후에야 올리는 제자의 대답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이시야말로 사대주의사관을 뒤엎고 우리 나라 역사를 바로세운 조선역사학의 스승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