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구 소련에서의 사회주의복귀시도가 실패한데 대해 미국의 소리방송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1991년 8월19일사변은 러시아군의 비정치화, 중립화의 운명이 어떻게 끝나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한개 농업기사출신에 불과한 약삭바른 기회주의자 고르바쵸프에 의해 기만당하고 농락당한 러시아군은 자기 소비에트 조국의 붕괴를 넋이 나간듯 덤덤히 지켜 보기만 하였다. …소련군은 자기 나라가 거꾸러지고 뒷이어 붉은군대의 이름까지 빼앗기는 그 임종의 시각에도 술에 잔뜩 취해 비칠거리기만 하였다. 그것이 저들의 임종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조차 못했다.   결국 그들은 중립만을 지키라는 고르바쵸프의 독술에 취하여 소련을 통째로 무너뜨렸고 이제와서는 그들자신도 거지와 다름없는 신세로 되었다.』 

8월사변은 고르바쵸프에 의해 소련의 붕괴가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그것을 멈춰세우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단말마적 시도라 할 수 있었다. 

비상사태위원회는 결정서 제1호, 제2호, 제3호를 연이어 발표하고 군에 준비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하였으나 극동, 자바이칼, 레닌그라드, 오데사군관구 등 군대의 대다수가 비상사태위원회에 협력하기를 거절하였다. 

레닌그라드군관구 사령관 삼소노프는 레닌그라드시장 솝챠크에게 자기 부대가 시내에 돌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담보해 주기까지 했는가 하면 소련국가안전위원회 테러방지국 특수부대 「알파」사령관 카르푸힌소장은 러시아연방부 청사를 습격하고 옐친을 체포할데 대한 임무를 받았지만 그것을 집행하지 않았다. 카르푸힌의 관할하에는 소련내무성 제르쥔스키명칭 특수사단, 3개의 소련국가안전위원회 특수부대 등 총 1만 5,000명의 인원이 배속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에 진입한 타만친위기계화저격사단과 툴라제106친위공정사단은 자기의 임무를 줴버리고 옐친 편으로 돌아섰다.

군부가 비상사태위원회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고르바쵸프와 옐친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야말로 8월사변 실패의 주되는 원인이었다.

8월사변의 실패는 러시아공산당, 소련공산당 해체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맹해체로 이어졌다.

소련해체에 앞서 1989년 7월부터 12월까지의 6개월기간에 폴란드, 헝가리, 동부독일, 체코슬로바키아(당시),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된데 이어 알바니아, 몽골 등 여러 나라들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구 소련과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붕괴, 자본주의복귀현상은 미국의 소리방송이 평한 것처럼 이 나라들에서의 군의 역할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붕괴, 자본주의복귀의 근본요인이 군에 있다는 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었다.

『세계사회주의운동과 반제투쟁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최대의 약점은 혁명과 건설에서 군대가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옳게 보지 못하고 특히 군대를 혁명의 중요한 정치적 역량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인민대중의 자주위업, 사회주의위업을 위한 투쟁은 제국주의와 온갖 반혁명세력과의 힘의 대결을 동반하는 것만큼 군사는 혁명의 승패와 나라와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로 나서는데 이것을 외면하였던 것이다.

혁명과 건설에서 군대가 차지하는 핵심적 지위와 역할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군대를 혁명의 주도적,정치적 역량으로 내세우지 않은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제한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군대의 지위와 역할이 사회주의운명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력을 인식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은데로부터 구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붕괴라는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구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붕괴는 무엇보다도 이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정치가 경제우선시, 군사차요시의 것이었다는 정치방식의 이념적, 정책적 제한성으로 설명된다.

조국수호와 경제건설은 사회주의건설의 2대과제로 나선다. 선행 사회주의이론과 실천에서는 이 두가지 과제를 옳게 결합시켜 성과적으로 밀고 나가는 묘술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총대를 강화하면 경제건설에 지장을 주고 경제건설에 치중하면 총대가 약화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본질을 사회주의정권과 소유관계를 기본으로 고찰하면서 물질적 부의 증대를 기본으로 하는 계급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중시한 마르크스-레닌주의혁명원리에 그 근원을 둔 견해였으며 정치방식이었다. 

원래 사회주의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철저히 옹호하고 실현하는 인류사회발전의 새로운 단계의 사회이다. 인민대중의 자주적 요구와 이익을 떠난 사회주의란 있을 수 없다.

사회주의건설은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그것을 반대하고 훼방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위협 속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인민대중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은 1차적으로 총대에 의해서만 담보된다.

사회주의는 본질상 총대중시, 우선시를 요구하는 것인데 선행 혁명이론은 이 문제를 놓치고 물질적 부의 증진에 힘을 넣는 경제우선시 정치방식을 구현해 온  것이다.

구 소련에서 군력강화를 주도해 왔지만 그것은 냉전체제하에서의 군사적 경쟁정책에 따른 것이었지 군사중시의 사회주의정치방식의 정립이나 구현은 아니었다.

구 소련의 막강한 군력은 그 뿌리가 올바르게 박히지 못한 것으로 하여 지난 기간 흐루시초프수정주의에 의해 농락당했는가 하면 고르바쵸프의 「새로운 사고방식」에 의해 물먹은 담벽처럼 허물어지고 사회주의붕괴를 의식하지조차 못했으며 반사회주의세력의 편에 서서 사회주의붕괴의 비수로 역할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에 있어서 총대는 생명선이며 사회주의의 운명은 전적으로 혁명군대의 총대위에 놓여져 있다는 것, 사회주의정치방식은 군사를 우선시하는 군중시의 정치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새겨준다.

소련과 동유럽 여러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붕괴가 남긴 교훈은 다음으로 무장한 원수 앞에서 총을 놓는 것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르바쵸프의 대외정책이념인 「새로운 사고방식」은 제국주의와의 타협, 투항, 결탁사상의 정책화였다.

미국은 고르바쵸프의 이러한 반사회주의적인 사상동향을 파악한데 기초하여 구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을 허무는 것을 첫째가는 과제로 내세우고 그 실천에 달라붙었다.

고르바쵸프를 통한 미국의 소련군사력 허물기는 구체적으로 1985년 11월19일의 제네바 미소수뇌자회담을 출발로 한다. 원래 고르바쵸프와 레이건과의 단독회담시간은  15분 정도로 계획되어 있었음에도 한번에  1시간씩 5회이상 진행되었다. 이 단독회담은 미대통령이 고르바쵸프를 「세뇌」시키기 위해 품들여 준비한데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써 고르바쵸프를 대미투항주의에로 유도하기 위한 심리전이었다.

여기에서 고르바쵸프는 미국에 대한 자기의 특별한 호의의 표시로써 소련의 일방적인 군축노선을 제창했다. 

제네바회담과정에 고르바쵸프와 레이건은 소련과 미국은 핵전쟁을 절대로 해서는 안되며 핵전쟁에서는 승리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쌍방은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약했다. 또한 핵무기와 우주무기와 관련한 회담을 다그치고 각이한 급에서 대화를 정기적으로 진행할데 대해서도 합의하였다.

1986년 10월 레이캬비크회담에서 고르바쵸프는 미국이 「별들의 전쟁」계획을 취소하면 전략미사일문제와 관련한 소미협상에서 미국의 전진기지배치수단들을 제외할 것이라는 대양보조치를 제기하였으나 미국이 「별들의 전쟁」계획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완강히 고집함으로써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미국은 이 레이캬비크회담에서 고르바쵸프에게 어떤 경우에도 미국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소련이 일방적으로 양보하여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1987년 2월28일 고르바쵸프는 미국이「별들의 전쟁」계획을 취소해야 유럽중거리핵미사일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고 하던 종래의 입장을 취소하여 유럽중거리핵미사일만을 별도로 취급하는 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고르바쵸프의 성명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그해 4월 중순 국무장관 슐츠를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고르바쵸프-슐츠회담에서 소련은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을 전제한 소미중거리 및 보다 짧은거리미사일폐기조약의 틀을 마련했으며 그것은 1987년 12월8일 워싱턴 소미수뇌자회담에서 조인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소련과 미국은 3년안으로 호상 면밀한 감시 밑에 소련핵무기 1,846기와 미국핵무기 846기를 파괴할데 대한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미국언론계는 이 조약을 레이건의 대소강경정책이 가져다 준 「빛나는 결실」이라고 일치하게 평했다. 레이건은 조약조인식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이 조약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전략공격핵무기, 유럽상용무력의 균형, 세계 여러곳을 휩쓸고 있는 파괴적이며 비극적인 지역충돌, 하느님이 전인류에게 부여한 인권존중 등 우리 앞에 놓여있는 긴박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건설적인 관계의 시작으로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미국잡지 「미국무성뷸레틴」, 1988년 2월호)고 말했다.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 압력을 가하여 더 큰 양보를 받아내며 소련을 미국의 의도대로 변화시키겠다는 노골적인 야심을 드러낸 말이었다. 

그럼에도 고르바쵸프는 『1987년 12월8일은 핵전쟁의 위험이 커지는 시대로부터 비무장화의 시대에로 이행하는 전환점으로서 역사에 아로새겨질 것이다.』(미국잡지 「미국무성뷸레틴」, 1988년 2월호)고 응수하여 앞으로 소련무력을 해체하는 일을 더욱 추진하려는 비굴함을 드러냈다. 

실제로 고르바쵸프는 198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소련군 상용무력의 일방적인 감축에 관한 대양보조치를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무력축감조치에 의하면 다음 2년동안에 소련군병력 50만명을 축소하며 상용무장장비도 윈군축회담과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크게 축소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고르바쵸프는 소련군 상용무력축소의 구체적 내용들에 대해『우리는 바르샤바조약동맹국들과의 합의 밑에 1991년까지 독일민주주의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당시)와 헝가리에서 6개의 탱크사단을 철수하며 그것들을 해체할 것이다. 이 나라들로부터 소련주둔군 5만명과 탱크 5,000대를 소환할 것이다.… 탱크들이 철수된 다음 그 부대들은(잔여부대) 방어부대로 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소련, 유럽지역에 있는 무장력과 무장장비도 줄일 것이다. 이 지역과 유럽동맹국들에 있는 소련무장력 중에서 탱크 1만대, 포 8,500문과 전투기 800대를 축소할 것이다. 같은 기간에 우리는 우리 나라의 아시아지역에 있는 무장력도 크게 축소할 것이다.…』라고 상세히 밝혔다.

이것은 무장한 적 앞에서 스스로 손을 드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는 어떻게 하나 제국주의자들과의 대결을 피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 「개편」정책을 추진시키려는 목적으로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군력파괴에 스스로 달라붙은 것이다.

고르바쵸프는 이렇게 일방적인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며 소련무력을 해체하였다.

1985년 시점에서 소련군 총병력은 505만명이었다. 전략무기보유에서도 소련군은 미국을 압도하였다. 1979년말 당시 미국이 보유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1,054기였으나 소련은 그보다 많은 1,398기였다. 잠수함발사미사일도 미국보다 294기나 더 많은 950기에 달하였다. 1983년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소련군의 전략핵무기는 8,000기나 되었다. 함선, 비행기, 탱크, 포 등의 보유에서도 미국을 앞섰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소련군사력이 미국보다 10~15년이상 더 발전했다고 인정했다. 

고르바쵸프는 이러한 막강한 군력을 불과 수년사이에 완전히 붕괴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사회주의붕괴, 자본주의복귀노선인 「개편」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동유럽 여러 나라들과 구 소련에서의 사회주의붕괴가 남긴 역사적 교훈은 셋째로, 군대를 틀어쥐지 못하면 혁명을 지켜낼 수 없을 뿐아니라 반동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다.

폴란드공산주의자들은 반정부단체인 「연대성」노조와의 대결에서 군대를 틀어쥐고 군력으로 강하게 다스린 것이 아니라 그 합법화를 인정하고 선거의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려 하다가 결국 패하여 총 한방 쏴보지 못하고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헝가리에서는 1980년대 초부터 자본주의에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집권당이 변질되고 카타르 야노쉬가 제거되는 것으로 반동들에게 정권이 넘겨졌다.

동부독일에서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한 것을 계기로 반사회주의세력이 머리를 쳐들고 전국적인 규모에서 반정부소요가 일어나고 있을 때 무력으로 그것을 진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사상적으로 변질된 당일꾼들을 내세워 수습하려다가 호네커축출, 베를린장벽해체로 사회주의정권이 무너졌다.

불가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당시)에서의 사회주의붕괴과정도 이와 마찬가지의 양상을 띠었다.

루마니아의 챠우셰스쿠는 고르바쵸프의「개편」정책에 대해 반대입장을 취하면서 1989년 12월 부카레슈트에서의 반동들의 소요를 무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보위상 밀레아가 그것을 거역함으로써 사회주의붕괴를 막지 못하였다.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련군이 철수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지향한 나지블라흐정권이 붕괴되고 친서방적인 무쟈헤딘정권이 출현했으며 1990년에는 소련의 니카라과 산디노정권에 대한 군사적 지원중단조치가 취해지는 것과 동시에 사회주의를 지향한 오르테가정권이 붕괴되고 친미적인 챠모로정권이 출현했다.

이 모든 사실은 조국수호를 남의 군대에 의존하거나 또 군대를 틀어쥐지 않고서는 반혁명을 진압할 수 없으며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의 반사회주의책동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혁명의 총대위에 사회주의위업의 승리가 있고 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도 번영도 있다는 것, 이것이 선행 혁명실천이 남긴 역사적 교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