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10일(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강조된 문단에 마우스를 올려놓으면 설명 을 볼 수 있습니다.

조국광복회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새 사단의 탄생으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더욱 강화발전된 것으로 하여 우리의 앞길에는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과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 준비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전개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 새 사단의 출현은 무장투쟁을 국내 깊이에로 확대하며 각계각층의 애국역량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군사정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되었으며 카륜회의 이후부터 우리가 줄기차게 전개해 온 통일전선운동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광활한 전망을 열어놓았다.

남호두회의 이후 시기부터 우리의 통일전선운동은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조직을 위한 활동에로 집중되었다. 하나의 상설적인 통일전선조직을 내오고 그 산하에 광범한 반일애국역량을 튼튼히 묶어 세우는 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견지에서 보나 내외 정세의 요구로 보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나섰다.

자주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전민항쟁에 있고 민족대단결이 자력독립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주장해 온 사상이었다. 통일전선은 주체확립과 더불어 항일혁명투쟁의 초시기부터 견지해 온 가장 중요한 이념의 하나였다.

민족대단결의 통일전선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여러 갈래의 민족주의세력과 반일애국역량과의 연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바쳐왔고 중국 땅에서 투쟁하는 조건에 맞게 중국의 광범한 반일역량, 공산주의자들과의 공동투쟁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이 과정에 우리가 쌓아올린 적지 않은 성과와 경험은 통일전선운동의 폭넓은 발전을 위하여 값있는 밑거름으로 되었다. 우리는 이런 성과와 경험에 토대하여 통일전선운동을 전민족적인 범위에서 벌여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과 함께 그것을 맡아 수행할 수 있는 핵심과 주체적 역량을 빨리 키워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

민족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묶어 세우기 위한 시도는 1930년대 이전 시기에도 있었다.

조선의 근대역사에서 주의와 주장을 초월하는 민족의 대동단결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중기 이후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 무대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두 개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제의 폭정과 수탈이 강화될 수록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하던 선각자들은 애국역량의 단합과 민족대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초기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을 모색하였고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진영과의 제휴를 시도하였다.

민족해방과 민족자주권의 부활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두 진영 지도자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1927년 2월에 서울에서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통일전선조직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당대의 애국인사들과 사가들이 신간회를 가리켜 민족단일당이라고도 부를 만큼 이 단체에 대한 민중의 기대와 신뢰는 컸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두 세력의 반목대립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대중은 환호를 올렸다.

주의주장의 차이로 하여 사이가 벌어졌던 공산주의운동자들과 민족운동자들이 때늦게나마 통일단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단일전선기관을 내온 것은 민중의 염원과 시대적 요구에 부합되는 하나의 큰 경사였다.

우리 나라 민족협동전선의 첫 산아라고 할 수 있는 신간회는 그 취지와 목적이 애국적이고 반일적이었다.

민족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양대세력의 공동전선이 실현됨으로써 발족한 순간부터 전민족을 대표하는 거족적인 유일조직으로 되었다. 이 단체의 창립취지는 그 발기인들이 ≪고목신간≫이란 뜻에서 신간회하고 한 명칭 자체에 잘 반영되어 있다. ≪고목신간≫이란 오랜 나무에서 새 줄기가 자라난다는 뜻이다. 명칭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신간회는 새로운 기초 위에서의 민족역량의 총집결을 지향하였다.

이상재, 홍명희, 허헌과 같이 민중의 인망이 높은 진보적 애국지사들에 의하여 발기되고 추진되고 운영된 신간회운동은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민족적 단결을 공고히 하며 일체 기회주의를 부인한 강령의 내용도 혁신적이고 혁명적이었으며 회원들의 직업별 구성도 다양하고 광폭적이었다. 신간회에는 노동자, 농민, 여관업자, 사진업자, 기자, 상업가, 의사, 회사원, 교원, 대서업자, 목축업자, 인쇄업자, 어업자, 운수업자, 직공, 재봉공, 학생, 변호사, 저술가, 은행원, 교역자 등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 3만 7,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좌우합작으로 민족의 총력을 하나로 집결시키려고 한 그 훌륭한 취지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쳤다.

신간회의 해산 원인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공산주의운동자들은 그 해산의 원인을 민족주의자들에게서 찾으려 하였고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책임을 지우려고 하였다. 한때 일부 역사가들은 신간회가 해산된 근본적인 원인을 상층의 분열과 개량주의적 경향에서 찾으려고 하면서 이 조직의 애국적 성격과 민족사적 의의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였다.

나는 그런 허무주의적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해산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교훈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놀음을 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신간회 상층에 개량주의자들이 더러 있었다고 하여 이 조직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되며 그 민족사적 의의를 영으로 만들어도 안된다.

신간회가 해산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선민족의 반일항쟁역량이 하나로 단합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가 그 내부에 쐐기를 박아 분열을 꾀하고 개량주의적 상층을 매수한 데 있었다. 적들의 암해책동과 파괴공작을 물리치고 신간회를 능숙하게 운영하고 이끌어 나갈 만한 중심적인 지도역량이 없는 것도 하나의 주요한 해산 원인이었다.

신간회의 와해에서 뼈저린 교훈을 찾은 우리는 애국적 민족역량의 통일을 우리가 주도해야겠다는 비상한 각오와 결의밑에 반일민족통일전선문제를 중요한 방침으로 제기하고 민족의 총력을 항일구국위업의 깃발 아래 결집시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 과정에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만한 핵심도 키워내고 유익한 경험도 축적하였다.

남호두회의는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창립에 대한 결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 나라 통일전선운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분수령으로 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시키기 위한 인민전선운동이 대두하여 파시즘과 대결하고 있을 때였다.

독일나치스의 정권탈취에서 커다란 자극을 받은 프랑스노동계급은 자기 나라에서도 파시즘의 위협이 증대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반파쑈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대중이 강렬한 통일열망에 따라 사회당은 1934년 7월 공산당의 제기를 받아들여 반전, 반파쑈통일행동협정을 체결하였다. 두 당의 영향밑에 분리되어 있던 노동조합도 통합되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노동과 자유와 평화의 인민전선≫이 결성되었다. 추세는 이 전선중산계급들과의 통일에로까지 확대발전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1935년 6월말 사회당, 공산당의 연합에 소부르주아정당인 급진사회당이 가담함으로써 이른바 ≪인민집합≫이 이룩되었다. 7월 14일 파리에서는 수십만 명의 참가하에 인민전선의 대시위가 진행되게 되었다. 3당 수뇌자들인 모리스 토레즈와 레온 블륨, 달라지예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위행진의 선두에 섰다. 1936년 1월에는 3당을 중심으로 반전, 반파쑈 투쟁에 떨쳐나선 진보적 그룹의 통일에 기초한 인민전선강령이 정식으로 발표되었으며 그 해 4-5월에 진행된 하원총선거에서 인민전선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결과 사로내각은 총사직하고 레온 블륨을 수반을 하는 인민전선내각이 탄생하였다. 물론 인민전선정부는 대중의 구매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으로 공황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에스파냐인민전선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이른바 불간섭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은 인민전선도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에서의 노골적인 파쑈정권의 수립을 저지시켰으며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반파쑈투쟁에서 하나의 유익한 경험으로 되었다.

국제공산당은 프랑스에서의 인민전선운동의 발전을 좋은 시사를 받고 전세계공산주의자들앞에 인민전선결성을 중요한 투쟁목표로 제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자본주의의 즉시 타도를 목적한 세계혁명이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전쟁과 파쑈를 반대하는 운동을 당면한 과제로 내세웠다. 이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의 하나의 노선상 전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2국제당계열의 여러 정당들은 국제당의 통일전선 제의를 거부하였으나 프랑스, 에스파냐,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인민전선운동은 현저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1936년 2월 에스파니아에서의 아싸니아인민전선정부의 출현은 그 단적인 실례로 된다.

에스파니아인민전선은 프랑코의 반란과 독일, 이탈리아의 군사적 간섭에 직면하여 곤경에 처하였다.

에스파니아인민전선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주도하에 추진된 이른바 불간섭정책이었다. 엄정중립과 무기금수를 결정한 부당한 불간섭정책은 결국 반란군을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 쏘련도 처음에는 불간섭적 입장을 취하였으나 그것이 인민전선정부에 결정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태도를 바꾸어 인민전선정부에 비행기, 탱크 등을 보냈다. 에스파니아인민전선이 겪고 있던 곤경은 여러 나라의 지식인들과 근로자대중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각국에서 숱한 지원병들이 에스파니아로 달려갔다. 이리하여 에스파니아는 파시즘세력과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진보적 세력간의 국제적 교전무대로 되었는데 그 교전은 작은 규모의 세계전쟁을 연상시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동강에서 조국광복회를 결성하던 때를 전후하여 벌어졌던 국제적인 반파쑈운동 형편이었다. 우리는 이탈리아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궐기한 이디오피아애국자들의 영웅적 항전에서도 커다란 고무를 받고 있었다

국제당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재빨리 포착하고 각국 노동계급과 근로인민들을 반전, 반파쑈 투쟁에로 묶어 세워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며 파쑈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것을 당면한 전략적 과업으로 제시함으로써 세계혁명의 영도기관으로서의 명분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기에 반파쑈인민전선운동과 관련한 국제당의 역사적 공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파시즘은 새로운 적이 아니었다. 국제파시즘이 대두함으로써 우리 나라 혁명의 대상이 달라진 것도 없었고 성격이 변화된 것도 없었다. 우리는 국제당이 반파쑈인민전선운동 노선을 제기하기 전부터 우리 식의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제기해왔고 그 궤도를 따라 우리 혁명을 줄기차게 전진시켜왔다.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를 창립하기 위한 준비사업은 남호두회의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주로 내가 혼자서 광복회 창립을 두고 사색을 무르익혀 왔을 뿐이다. 김산호, 최현, 박영순을 비롯한 몇몇 동무들이 이따금씩 필요한 조언을 주느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대체로 그거야 사령관동지가 좋을대로 하시지요 하는 식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다가 돈화지방에 있는 옥수천부근의 한 산간부락에서 어떤 나이 많은 서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훌륭한 조언자가 되고 의논대상이 되어 주었다.

그 부락에 조선사람이 사는 집이 둘이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집에 들었다. 그때 화룡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어느 한 소부대가 우리를 찾아왔다. 그 소부대동무들은 나를 만나자 괴이한 사람을 달고 왔다고 보고하였다. 화룡의 어느 벽촌에서 만난 사람인데 소부대가 사령부를 찾아온다는 낌새를 알고 김일성장군을 만나야겠다고 하면서 자기네를 뒤따라왔다는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사람을 사령부로 데려올 수 없다고 생각한 소부대성원들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몇 번이나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네들은 가라, 나는 나대로 갈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상호 남의 일에 간참하지 말자, 이렇게 말하고는 장바 한두 기장쯤 되는 거리를 두고 그냥 태연하게 소부대를 따라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만나기 전부터 나의 호기심을 끌더니 첫 상봉 좌석에서도 별스럽게 굴었다. 소부대동무들은 사령관이라고 하면서 나를 소개하였으나 괴이한 손님은 그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자기의 나이와 열성을 봐서라도 진짜 김일성장군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주인집 장작을 패 주다가 그를 맞아들였는데 나의 차림새가 아마도 그의 눈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나를 이리 훑어보고 저리 훑어보고 하다가 아무렴 장군이 그렇게 젊을 수 없고 장군되는 사람이 머슴처럼 장작을 팰 리도 없으며 막된 옷을 입고 다닐 수도 없다고 하였다.

북만의 관지 부근에서 야숙할 때 불무지 보초를 선 신입 전령병이 조는 바람에 내 바지를 태운 적이 있었다. 헌 솜옷이었던 데다 기워입기까지 하였으니 사실 나의 옷주제가 허술하게 보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가 괴짜였다. 그는 호지명의 수염 같은 턱수염을 달고 있었다. 실제는 마흔네댓 살밖에 안되는 사람이었으나 나이보다는 겉늙어서 쉬나문 살이나 돼 보였다.

그는 항간에서 떠도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면서 하도 소문이 났길래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자고 찾아왔다고 말하였다. 내가 소문난 잔치 먹을 알이 없다고 대꾸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장군이 입은 옷만 봐도 노고가 짐작된다고 하였다.

심한 나이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우리는 대뜸 언어가 통하고 마음이 통하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의 첫 소개부터가 아주 괴이하고 호탕하였다.

≪저는 아무 것도 이룩해 놓은 것 없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며 우왕좌왕하기만 해온 기회주의자올시다.≫

나는 한평생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초면에 자기를 기회주의자라고 서슴없이 소개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무한히 양심적인 사람만이 무한히 솔직한 법이다. 솔직성은 흰 눈처럼 깨끗한 양심의 반사이며 감춰내지 못하는 양심의 빛이다. 그는 우리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할 정도로 솔직한 그 몇 마디의 말로 대뜸 나를 반하게 만들었다. 자기를 스스로 비하하는 그 꾸밈없는 이야기에서 나는 도리어 그의 인격적 높이를 보았다.

우리는 미혼진으로 빨리 나가야 했던 것만큼 그 마을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섭섭해하지 않을 정도로 만나 주고 헤어질 작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길을 떠나려 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갈 대신 우리를 따라나섰다. 장군을 만나고 보니 인차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같이 따라가며 이야기나 나누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나도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와 함께 줄창 이야기를 하다나니 행군에서 지루한 줄을 몰랐다. 이야기에 얼마나 열중했던지 나는 대원들이 쉬고 싶어할 때 쉬우지 못하고 행군을 계속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김산호가 우리 곁에 다가와 좀 쉬다가 가야 하지 않느냐고 귀띔해 주곤 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 당 역사에 조국광복회 발기인으로 기록된 ≪대통영감≫ 이동백이었다. ≪대통영감≫이란 이동백의 별명이었다.

함경남도 단천이 이조 말기의 참령이며 유명한 의병지도자이고 공산주의운동자인 이동휘의 고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적지 않지만 이동백의 고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한학 공부를 많이 하며 자라난 이동백의 성장에서 이동휘가 준 영향이 대단히 컸다는 것과 그 영향밑에서 ≪대통영감≫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행군도상의 담화를 통하여 우리가 얻어낸 지식이었다. 그가 소속된 투쟁단체는 군비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군비단의 소재지는 장백지방이다.

군비단과 강진건의 이야기가 나오자 우리들 사이의 담화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강진건에 대해서는 그도 나만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다. 이동백은 8도구와 임강 쪽에도 자주 가곤 했고 그때마다 강진건과 깊은 연계를 가졌다고 하였다. 군비단에서의 그의 직무는 통신사무국장이었다.

그러나 경신년 대≪토벌≫바람이 장백땅에 미치게 되자 그렇게 으리으리하던 군비단도 하루아침에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다. 실망한 이동백은 이동휘를 찾아 러시아로 들어갔다.

그는 치따에서 이동휘를 만났고 이어 고려공산당에도 들어갔다. 어젯날의 독립운동자가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운동자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 전환과 함께 그는 곧 파쟁속에 휘말려들어 갔다.

이동백에게서 고려공산당 소리가 나오자 나는 오가자 시절에 고려공산당 당증이라는 것을 구경하던 생각이 나서 변대우를 아는가고 물었다. 그는 자기와 변대우와는 일찍부터 막역지우였다고 하였다.

내가 오가자의 변대우한테서 고려공산당증을 구경하던 소리를 하자 이동백은 감자도장을 찍은 대표증도 구경했는가고 물었다. 그 소리는 금시초문이라고 하자 그는 감자도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22년 11월 러시아원동의 엘프뉴진스크라는 곳에서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합동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대회에서 다수파가 되어야만 합당 후 당의 영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간주한 양파는 자파의 대표수를 늘리기 위한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이르쿠츠크파는 감자도장까지 새겨 가지고 숱한 가짜 대표증을 만들어 대회에 엉터리 대표들을 참석시켰다. 상해파도 그만 못지않은 협잡행위를 하였다. 결국 대회는 옥신각신 끝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환멸을 느낀 변대우는 민족주의운동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품고 임강쪽에 가버렸고 이동백은 이동휘의 파견을 받아 훈춘쪽에 나왔다.

≪대통영감≫은 훈춘에서 교원생활을 하다가 1925년 봄에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가명을 가지고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듬해의 6·10만세시위운동에도 참가하였다.

파벌들의 집결처였던 서울 체류는 이동백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새로운 파쟁의 회오리바람속에 말려들게 하였다. 처음에는 화요파에 끌려들었다가 다음에는 엠엘파에 뛰어드는 식으로 일인 양역, 일인 삼역의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당의 영도권을 장악하려는 각파의 추악한 암투는 중앙위원이라는 사람까지 자루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곤봉으로 때리고 목침으로 머리를 까는 따위의 추태들을 산생시켰는가 하면 반대파를 경찰에 밀고해서 잡아가두게 하는 통탄하여 마지않는 희비극도 연출하였다. 서울에 그냥 있다가는 언제 어느 골목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쇠고랑을 차거나 곤봉에 머리가 깨질지 몰랐다. 이동백은 다시 북간도로 들어왔다.

돛도 키도 노도 다 없는 난파선마냥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떠미는 대로 우왕좌왕해왔던 이동백은 파쟁의 세계에 침을 뱉고 돌아서서 뭍에 단단히 눌러앉았다. 그는 용정에서 신문기자 노릇도 하면서 독립군운동도 공산당운동도 다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간도대지에 불타오르기 시작한 30년대의 항일운동은 이동백을 또다시 풍랑속에 떠밀어 넣었다. 화요파계열의 그 무슨 어정쩡한 무리에 끌려든 이동백은 화룡현 3구의 서기로 있다가 간도대≪토벌≫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후 영영 세상을 등지고 살리라는 결심을 품고 솔가하여 화룡의 깊은 벽지에 들어갔다. 거기서 서당 훈장질을 하며 지난 몇 해 동안 은둔생활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기회주의자가 아니구 뭐겠습니까? 서상파 하날 내놓구는 파벌이란 파벌에는 다 끼어본 알짜 기회주의자입지요.≫

이동백은 그 파란 많은 과거사에 종지부라도 찍듯이 대통에 써레기담배를 재워 넣었다. 그는 담배를 지독하게 피웠다. 때로는 마상행군길에서도 대통을 꺼내 물었다가 애어린 전령병에의 핀잔을 받곤 하였다. 그럴 때면 노염을 탈 대신 ≪이 정신 봐라. 행군 때 담배를 피우면 멀리 있던 개들까지 불러온다던 걸 또 잊었군.≫하고 변명삼아 웅얼거리며 대통을 덧저고리 주머니에 집어넣곤 하였다. 그는 담배를 절대로 종이에 말아 피우는 법이 없었다. 꼭 대통으로만 피웠다. ≪대통영감≫이란 별명도 그런 연유로 해서 생긴 것이었다.

≪솔직한 말씀을 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을 기회주의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조선사회의 참다운 진로를 탐색하느라고 이리 기웃해 보고 저리 기웃해 본 데 지나지 않지요. 진리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 이러저러한 당파에 관여하게 된 것은 결코 기회주의가 아닙니다.

나의 그 말에 이동백은 저으기 놀랐다.

≪제가 실지로 여러 당파에 휘말려들었는데도 기회주의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것은 은둔생활을 결심하고 화룡의 산간벽지에 몇 해 동안 들어박혀 있었다는 선생이 그 결심을 어기고 젊지도 않은 몸으로 불원천리하고 우리를 찾아오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걸 기회주의자의 본심이 움직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속심을 그렇게 속속들이 꿰뚫어 들여다보시니 제 기꺼이 손을 들겠습니다. 제가 또 집을 떠나온 건 수십 년 동안 못 찾은 ≪보물≫을 죽기 전에 기어이 찾아 쥐자는 짖궂은 욕망 때문입지요.≫

의로운 뜻을 품고 진리를 탐색하는 선생과 같은 분을 보게 되니 참 반갑습니다. 한때는 선생 같은 진리의 탐색자들과 의로운 운동객들이 우리 나라에 적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감옥에 잡혀가지 않았으면 변절하고 또 이렇게 저렇게 피해를 당하고 보니 지금은 정말 희소합니다. 선생이 살아 계신 것만도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대통 영감≫과의 흥미진진한 담화는 미혼진에 가 닿았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 나는 이동백에게 정이 들었다.

이동백도 또한 우리에게 정을 붙였다. ≪정들자 이별≫이라는 속담도 있지만 그런 이별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나이 많은 사람을 적과의 접전이 계속되는 멀고 위험한 행군길로 계속 동행시킬 수 없었다.

미혼진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이동백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재삼 권고하였다. 그는 대답 대신 부시럭거리며 덧저고리 안자락을 들추더니 네 겹으로 접은 종이 한 장을 펴서 내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국한문을 섞어서 쓴 입대청원서였다.

해가 서쪽에서 불쑥 떠올랐다 해도 그 순간처럼 우리를 놀래우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도대체 그 연세에 어떻게 우리들을 따라다니겠다고 그러십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오.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의 휘하에는 나보다 한 배 반이나 더 나이 먹은 군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이로는 부결할 조건이 못됩니다.≫

≪화룡 오지에서 눈이 새까매 기다릴 부인과 자식들은 누가 돌봐 줍니까?≫

≪정배도 가려다 못 가면 섭섭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구국대업에 한 몸을 다 바치고 싶어서 떠난 걸음인데 저더러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다니요. 장군은 병중의 모친과 어린 형제분들을 돌봐 줄 사람들이 따로 있어서 나라 찾을 싸움길을 떠난 게 아니었지요?

무슨 말로도 ≪대통 영감≫을 설복해 낼 수 없었다. 내가 지고 말았다. 그의 입대를 기념하여 나는 두 해 동안 애용해 오던 권총을 그에게 주었다.

이동백은 입대가 결정되자 자기가 어째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곁에 남기로 결심하였는가를 신바람이 나서 역설하였다.

≪나를 장군 곁에 붙잡아둔 게 뭔지 알겠습니까?

첫째는 물론 장군의 그 고명한 경륜이구, 둘째는 장군의 기운 바지미혼진열병환자들의 울음이었지요.… 격리상태의 열병환자들을 아무 거리낌도 없이 찾아가 돌봐 주는 걸 보고 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일신의 위험도 마다하고 아랫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돌봐 준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한다하는 거물들을 만나봤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조선혁명의 참된 주인, 조선의 운명을 책임적으로 맡아 안은 진짜배기 주인, 진짜배기 지도자를 찾은 것, 이게 나를 여기 남게 한 근본이유입니다. 탁상공론을 안하고 공리공담을 안하는 것, 장군은 이 우점만으로도 나와 같은 시골서생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선생을 붙잡은 세 번째 이유도 있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물론 있지요. 그것은 장군의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사고방식과 혁명승리에 대한 드팀없는 확신입니다.≫

어느 날 행군의 휴식 참에 나와 ≪대통영감≫사이에는 민족통일전선체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는데 그는 프랑스, 에스파냐, 중국 등에서는 공산당, 사회당, 국민당 같은 정당들과 노동운동단체들이 있어 정당, 단체들의 연합으로 인민전선 결성이 가능하였지만 우리 나라에는 어떠한 정당이나 합법단체도 사실상 없는 것과 같은 조건에서 통일전선체조직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나는 그에게 눈덩어리 두 개를 주면서 그걸 합쳐보라고 이르고 나 자신은 작은 눈덩이를 눈위에 굴려 그 두 개의 눈덩이를 합친 것 만한 눈덩이를 만들었다.

≪자 보십시오. 선생은 두 정당연합으로 한 덩이를 만들었고 나는 작은 구심력을 굴려 그보다 더 큰 덩이를 빚었습니다. 이래도 꼭 정당이 있어야만 통일전선체조직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까?≫

이동백은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내 손의 눈덩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 참 오묘한 이치올시다. 그렇지만 눈덩이는 눈덩이고 정당이야 정당이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자연현상 가운데는 사회의 현상과 이치상 일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더란 말입니다.≫

나는 길림시절부터 우리가 시종일관하게 고수해 온 통일전선정책과 각계각층의 반일애국역량을 결속시키는데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축적해 놓은 경험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다.

≪통일전선이란 반드시 정당단체들의 연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단체설을 절대화하게 되면 그것은 곧 교조가 됩니다. 군중이 있고 영도핵심만 있으면 능히 통일전선체를 내올 수 있습니다. 목적과 지향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하여 열 사람이건 백 사람이건 묶어 세워야 한다는 것이 통일전선에 대한 나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통일전선운동을 추진시켜 왔습니다.≫

이동백은 뒷더수기를 툭툭 치며 ≪역시 교조가 문제이군.≫하고는 껄껄 소리를 내어 웃었다.

≪대통영감≫은 우리 곁에 남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바로 장군 곁에 와서 인생 말년을 보람있게 지낼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습니다. 결국 자기의 생존가치를 발견한 셈이지요. 자기가 이 세상에 아주 쓸모있는 인간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그 인간은 행복한 인간으로 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내가 그런 행복한 인간으로 되고 있습니다.≫

≪무슨 일거리를 찾았기에 행복해졌다는 것입니까?≫

≪내가 찾아낸 일은 나폴레옹을 묻어다니던 다비드가 수행했던 일과 비슷한 것이지요. 다비드가 미술화폭에 옮겨놨던 일을 나는 나의 일기장에 옮기자는 것입니다. 나폴레옹군대의 역사적 행적이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역사적 행적을 말입니다.≫

이동백은 결의대로 매일 일기를 적었다. 한두 끼, 혹은 며칠씩 굶는 적은 있었어도 그가 일기를 쓰지 않고 번진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인민혁명군역사 저술가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는 입대 후 사령부 비서처에서 사업하였으며 후에는 조국광복회 기관지 ≪3·1월간≫의 주필로 출판소 책임자사업을 겸해 보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문건들과 사진들을 수집해 뒀던지 비서처가 한 번씩 자리를 옮길 때에는 여라문 개나 되는 문서배낭들과 등사용구들을 옮겨 주기 위한 운반대로 여러 명의 전투원들을 그에게 배속시켜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언제인가 김주현이 그 숱한 짐짝들을 정리해서 절반쯤이라도 줄이라고 권고했다가 되게 면박을 당한 일이 있었다.

≪아니, 이 문서장들이 ≪민생단≫문서보따리 따위 같은 줄로 아는가. 자네가 지휘관이기는 하지만 안목은 넓지 못한 사람이야. 저 짐짝들은 나 같은 목숨 열백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야. 군사직급으로는 연대장이지만 이 짐짝앞에서는 졸병이나 같애. 국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기나 해?≫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지휘관들은 ≪대통영감≫의 짐짝이 아무리 많아도 군소리 한마디 못하고 운반대를 고스란히 붙여 주곤 하였다.

그가 기록, 수집, 보관한 그 숱한 문서들과 일기들과 사진들이 소실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날 그것은 ≪대통영감≫이 언명한 대로 나라의 만년재보가 되었을 것이다.

이동백이 어쩌다 오발사고를 낸 적이 있었다. 그가 나폴레옹을 자주 입에 올리곤 한 끝에 어느 한 경위대원이 그를 ≪나폴레옹 숭배자 영감≫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때마침 이동백은 분해소제를 마친 권총을 손에 들고 있었다.

≪민충이 같은 녀석, 내가 누구를 숭배하는가 하는 건 이 권총이 말해줄 게다. 너 어디 한번 죽어봐라.≫

이동백은 만탄창이 된 권총을 쳐들고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 뜻하지 않았던 오발사고로 인하여 노모정자 숙영지에서는 비상소집 소동이 벌어졌다. 지휘관들은 경고책벌과 함께 한 달간의 무기휴대 금지 처분을 주어야겠다고 을러댔다. 내가 한 번만 용서하자고 하였으나 군율은 에누리가 없었다. 사고를 낸 권총은 김산호에게 회수당하였다.

보배 같은 ≪대통영감≫이 우리 부대에 굴러든 것은 인복이 있는 나에게 차례진 큰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로 귀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와 우리를 도와 준 셈이 되었다.

100여 명에 달하는 ≪민생단≫혐의자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대사단이 편성되고 마안산아동단원들의 생활처지가 개선된 다음부터 나는 모든 힘을 조국광복회 창립을 위한 준비사업에 집중시켰다. 비록 간고한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으나 오만가지 시름거리들이 우리의 의도대로 원만하게 풀려서 모든 일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었다.

이동백은 김산호와 함께 이 사업에서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성실하고 빈틈없는 방조자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그가 입대하자마자 곧 조국광복회 창립준비위원회 성원으로 망라시켰다. 그 준비위원회 위원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위원은 김산호와 이동백이었는데 김산호는 대외조직과 연락 사업을 맡았기 때문에 주로 바깥에 나다니며 일을 보고 대내에서 준비사업을 주관하여 맡아본 것은 이동백이었다.

조국광복회의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을 작성하는데서도 그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때 매 조항을 그와 토론도 하고 초고도 그가 작성하도록 권고하였다. 이동백은 자기의 문투가 고루한 데다가 나의 의도를 정확히 쪼아박을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 그 제의를 사절하였다. 그래서 기초작성은 내가 하고 그가 보충하는 식으로 창립문건들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갔다.

그와의 토의에서 가장 크게 의견상치가 된 것은 강령의 첫 조항이었다. 강령의 첫 조항에 어떤 내용을 앉히는가 하는 것은 조국광복회가 어떠한 이념과 투쟁목적을 가진 어떠한 성격의 정치단체인가를 단마디로 규정짓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논의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대로 2천만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강도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통치를 짓부수고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세우자는 내용을 앉히자고 하자 이동백은 머리를 기웃하고 생각에 잠기더니 도리질을 하였다.

≪무산계급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문구가 하나도 없으니 서운합니다. 강령 첫 조항에 공산주의 냄새가 없으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숱한 주의자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진정한 인민의 정권이라는 말은 계급적 성격도 모호하고 어쩐지 민족주의 냄새가 납니다.≫

훗날 백두산밀영에서 박달과 처음으로 자리를 같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도 역시 조국광복회 강령 첫 조항에 대하여 이동백과 꼭 같은 논조의 말을 하였다.

확실히 그 시기는 우리 나라에서 사이비 맑스주의적인 견해가 널리 오염되어 있던 시기였다.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도 공산주의는 민족적 이념과 상치되는 사상인 것처럼 여기면서 공산주의자들은 협소한 민족적 이념에서 벗어나 철저히 계급적 원칙과 국제주의적 입장을 고수해야만 노동계급과 전인류를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주되는 원인의 하나는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한 명제를 매우 단순하게 그대로 받아들인 데 기인된다.

맑스엥겔스일국사회주의혁명의 가능성이 채 성숙되지 못했던 역사적 시기에 살았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혁명이 동시에 진행되리라고 예언하였다. 노동계급의 전복대상인 각국 부르주아지가 민족적 이익의 옹호자로 자처하고 있는 조건에서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 부르주아계급이 표방하고 있는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의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간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세계적인 혁명위업은 망쳐질 수 있었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부르주아적 지배하에 있는 모국이 결코 조국으로 될 수 없으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수주의와 국제주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양자 가운데서 반드시 국제주의, 사회주의편에 서야 했다. 바로 이러한 견지로부터 맑스주의고전가들은 노동계급이 이른바 애국주의적인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였고 애국주의와 사회주의의 양자속에서 언제나 민족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사회주의를 옹호할 것을 가르쳤다. 맑스는 파리코뮌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코뮌참가자들이 반동의 소굴인 베르사이유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외적인 프러시아군이 파리를 포위하고 있는 때 국내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애국주의에 배치된다고 그릇되게 생각한 데서 온 것이었다고 단언하였으며 레닌제2국제당 수정주의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노동계급의 혁명적 원칙을 버리고 ≪조국방위≫의 구호밑에 제가끔 자기 나라의 부르주아 편에 붙은 것을 사회주의위업에 대한 변절로 낙인하였다.

자기 민족 전체를 희생시켜서라도 개인적 치부를 증대시키려는 환장한 부르주아지들의 식민지 쟁탈전쟁에 ≪조국방위≫의 간판을 들고 도와나서는 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된다. 그러므로 제국주의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위업에 충실하려면 ≪조국방위≫의 간판을 들것이 아니라 ≪전쟁반대≫의 기치를 들고 전쟁보이코트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식민지 예속국가들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식민지 예속국가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과 애국주의의 기치를 드는 것은 곧 종주국의 부르주아지를 반대하는 것으로 되며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민족혁명과 계급혁명 그리고 국제혁명위업에 다같이 기여하게 된다.

명백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명제를 무조건 절대화하면서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공산주의의 원쑤처럼 여기고 배척하였다는데 바로 사이비 공산주의자들, 행세식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실천적 착오가 있었다.

사회주의혁명이 민족국가단위로 진행되게 되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하에서 식민지나라들에서의 진정한 민족주의와 진정한 공산주의 사이에는 사실상 깊은 심연도 차이도 없다. 한편에서는 민족성에 대하여 좀더 역점을 찍고 다른 편에서는 계급성에 대하여 좀더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지 사실은 이념도 지향도 애국애족의 감정도 같다고 보아야 한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이며 또 진정한 민족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라고 보는 것은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다.

이런 신조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시종일관 애국적인 진정한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중시해왔으며 그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쳐왔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공산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민족적 권리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그것이 결코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자신의 투철한 조국애와 민족해방을 위한 실천투쟁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이라는 것을 온 민족앞에 과시하였으며 드디어는 민족해방투쟁의 진두를 떳떳이 나서게 되었다.

우리의 이러한 장구한 희생적인 투쟁의 결과로 보람찬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조국광복회 창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국광복회≫라는 명칭 자체도 당당하게 내걸고 강령의 첫 조항에 우리 민족 성원 전체의 자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동만유격근거지에 세웠던 것과 같은 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세우려 한다는데 대해서도 뚜렷이 밝혀야 한다.

나의 이야기를 주의 깊이 듣고 난 이동백은 무릎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이제는 됐습니다! 눈뜬 소경이 됐던 나는 장군과 논쟁을 한 덕에 불구를 면케 됐습니다. 대찬성입니다.≫

강령의 다른 조항들에 대해서는 상치되는 의견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이처럼 주권문제의 해결을 조선민족앞에 나선 일차적 과제로 제시하고 인민들에게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과업과 해외교포들의 민족적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과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정치적 과제들을 제시하였다.

이 강령에서는 또한 혁명적인 군건설과업도 제기하였으며 경제관계분야에서 일제와 매국적 친일지주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일본 국가,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과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을 몰수하며 빈곤한 인민을 구제하며 민족적 공농상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고 민족경제를 건설할 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경제적 과업들도 명시하였다.

민족적 공농상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고 민족경제를 건설할 데 대한 사상은 민족자본과 매판자본의 차이를 엄격히 구별하고 애국적 민족자본을 장려하며 민족자본가는 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옹호지지하여 반일공동전선에 묶어 세우려는 우리의 시종일관한 방침과 노선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반일적 민족자본가까지 포함하는 자본가 일반을 한 몽둥이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공산주의자들과 비록 부르주아라는 명칭은 띠고 있으나 그 지향에서 애국적이고 실천에서 반일적인 모든 민족자본가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보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들과의 차이가 있었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또한 사회문화적 과업과 대외적 과업도 제시하였다.

종교인이나 민족자본가, 애국적 지주들의 문제에서 좀 마찰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강령 첫 조항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이미 우리와 같은 세계관을 가지게 된 이동백은 놀라울 정도로 나의 견해를 앞질러 알아맞히곤 하였다. 이 문제에서는 오히려 김산호나 오백룡과 같은 사람들이 옹졸한 태도를 취하였다.

내가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문을 기초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창립준비위원회의 명의로 된 편지들과 선전물들을 준비하였다. 실로 일분일초의 허실도 허용하지 않고 다 잡아 쓰던 분망한 봄이었다.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문을 준비위원회의 최종토의에 붙인 곳은 만강부락의 허락여촌장네 집이다.

≪대통영감≫은 지난날 이른바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던 파쟁꾼들은 변변한 강령조차 제대로 내놓지도 못하는 주제에 눈이 시뻘개서 헤게모니 쟁탈전만 일삼아왔다고 통탄하면서 이제는 캄캄했던 조선혁명의 진로를 더 밝게 비쳐줄 새로운 등대불이 나타났다고 퍽 좋아했다.

4월말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창립대회 장소를 동강수림으로 내정하고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청장을 받은 대표들이 그럭저럭 거의 다 모여왔으나 꼭 참석하겠다고 답장까지 보내왔던 남만의 이동광과 전광(오성륜)이 대회가 끝나도록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오지 못하였다. 국내대표로는 강제하의 조직선을 타고 벽동에서 천도교대표와 농민대표가 왔고 온성지구의 당조직선을 타고 교원대표와 노동자대표들이 각각 한 사람씩 왔다.

역사적인 조국광복회창립대회는 5월 초하룻날부터 시작되었다. 꽃은 만발하지 못하였지만 만산에는 봄빛이 짙었다.

회합을 앞두고 대표들은 모두 다 격정과 흥분으로 설레였다.

통칭하여 동강회의라고 부르는 그 회의는 15일 간이나 진행되었다.

나는 보고에서 조국광복의 기치밑에 전민족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결속할 데 대한 과업과 국경지대와 국내에 진출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전개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가일층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국경 연안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할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할 데 대한 과업들을 제기하였다. 이 보고가 후에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켜 전반적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 올리자≫라는 제명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나는 또한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창립선언을 대회 심의에 붙였다.

우리는 10대강령에서 1930년대의 혁명정세와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적 조건, 계급상호관계 등을 정확히 분석한 데 기초하여 조선혁명의 성격과 임무, 전략전술적 원칙을 규정하였으며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의 이익과 각계층 애국적 인민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철저히 고려하여 조선혁명의 전도를 명백히 밝혀 주었다.

회의참가자들은 강령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면서 뚜렷한 투쟁목표를 가지고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확신성 있게 나아갈 수 있게 된 데 대한 기쁨을 토로하였고 강령에 제시된 과업들을 적극적으로 실현해 나가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다.

대표들의 가슴을 이만 못지않게 격동시킨 것은 조국광복회의 창립선언에 대한 토론이었다.

창립선언의 구절구절들은 처음부터 참가자들의 심장을 거머잡았다. 특히 온 민족이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이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능과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한데 뭉쳐 행동으로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참가한다면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고 모두다 조국광복회에 망라되어 싸울 것을 호소한 부분은 회의참가자들을 상당히 격동시켰다.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이 채택된 다음 이 선언을 누구의 이름으로 발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토의를 진행하였다.

회의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 이름으로 발표하자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조국광복회를 창립할 데 대한 첫 발기도 내가 하였고 창립준비위원회 사업도 내가 주관해 왔으며 또 강령과 창립선언도 내가 작성한 것만큼 토론할 여지도 없이 응당 나의 이름으로 발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조국광복회는 전체 조선인민의 반일역량을 총집결해야 하는 것만큼 민족적 형식을 띠어야 했다. 그러므로 발기인으로서는 과거 의병운동이나 3·1운동 시기부터 조선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명망이 높고 나이가 지숙한 애국지사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 당시까지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로 만주지방을 투쟁무대로 삼아 싸워 왔기 때문에 국내의 광범한 인민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이름이 국내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백두산에 새로운 비밀근거지들이 설치되고 무장투쟁이 국내 깊이까지 확대되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우리 주력부대의 움직임과 투쟁에 대하여 국내 신문이 처음으로 보도한 것이 아마 1936년 3월 어느 날 ≪매일신보≫였다고 기억된다. 그때 ≪매일신보≫는 장백현에 150-160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진출하였는데 ≪부대의 수령은 김일성이라고 한다.≫라고 슬쩍 언급하였다. 이것을 시발로 국내의 출판물들은 우리의 활동을 자주 보고하였다.

나는 대회 대표들에게 솔직히 말해 주었다. 누가 첫 발기자였고 누가 준비위원회를 책임져 왔고 또 누가 강령과 규약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아무개의 이름으로 내야 한다고 모두다 우기는데 그런 사실이나 따져가며 나 한 사람을 내세우는 것은 큰 의의가 없다, 2천만 동포가 다 아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조국광복회에 결집해 나설 것을 호소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성이 있다, 나를 동포 민중의 한 아들로 여기고 민중을 위해 남모르는 수고를 했다고 치면 그만이 아닌가, 대의를 위하여 소의를 버리고 나이도 지숙하고 명망도 높은 애국지사들로 공동발기인을 삼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이동백과 여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하여 창립선언문을 발표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나의 제안에 먼저 반기를 들고나선 것은 이동백이었다. 그는 연세나 지난날의 명망 같은 것은 별로 고려할 바가 못된다고 하면서 실천적으로 전민족을 대표하여 조국광복의 대업을 맡아 나서 지도하고 있는 지도자는 국내외를 통틀어도 김장군밖에 없는데 그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같은 사람을 발기인으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조국광복회 회장도 마땅히 장군이 돼야 하고 발기인도 장군이 돼야 하다고 다시금 고집해 나섰다. 그는 나의 제안을 참작하여 나와 함께 여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하자고 하였다.

신중한 토의 끝에 결국 김동명이라는 가명을 쓰는 조건에서 내가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되는데 동의하였다. 나의 양보를 받자 이동백이도 발기인으로 나서는데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5월 5일에 발표된 조국광복회창립선언에는 김동명, 이동백, 여운형 세 사람의 이름이 공동발기인으로 기재되었다.

나에게 김동명이라는 가명을 붙여 준 것은 이동백이었다. 내가 가명을 쓰는 조건에서만 동의하겠다고 하자 그는 더 우기지 못하고 생각을 더듬다가 가명의 성을 그대로 김씨로 하고 이름은 동녘 ≪동≫자 밝을 ≪명≫자를 붙여 ≪동명≫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김동명≫이라고 달게 되면 민족을 대표하는 의미에서 여러 모로 뜻깊은 이름으로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열렬한 박수로 찬성의 뜻을 표시하였다. ≪김일성≫이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김동명≫이라는 가명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다.

우리가 발표한 조국광복회선언은 그 후 국내의 여러 곳에 발송되었는데 어떤 곳에서는 그것을 자기대로 복제하여 발표하면서 각기 자기 지방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저명인사의 이름을 발기인으로 바꾸어 써서 발표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실정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조국광복회 명칭 자체도 동만에서는 동만조선인조국광복회라고 달았다면 남만에서는 재만한인조국광복회라고 달았다. 당역사연구소에서 발굴한 조국광복회 선언문들에 더러 오성륜, 엄수명, 이상준(이동광), 안광준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나 있는 것은 그런 사정에 기인한 것이다. 나는 참가자들의 총의에 따라 조국광복회 창립대회에서 이 조직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 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가 탄생하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혁명의 군중적 지반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어 전국적 범위에서 보다 조직성 있고 체계성 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반일역량을 나라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민족의 총력을 광복전선에 결집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투쟁 시초부터 내세운 지상의 과제였으며 우리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해 전부터 인내성 있는 준비를 해왔다.

조국광복회 창립은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꾸준히 키워온 우리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의 위력한 산물이었다. 그것은 우리 인민이 민족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 나갈 의지를 다시금 엄숙하게 선포한 역사적인 계기로 되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떠밀어가는 전환점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조선혁명 자체발전의 요구와 시대적 흐름에 부응한 것으로 하여 내외의 커다란 지지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외 각지에서 그것을 찬동하는 목소리들이 높이 울려 나왔다. 선차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독립군부대들이었다.

조국광복회 창립이 선포된 직후 조선혁명군 정부참모장으로 있던 윤일파는 우리에게 서한을 보내어 조국광복회 창립을 축하하고 앞으로 반일전선에서 긴밀한 연계를 지을 것을 희망해 왔다. 또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주의운동자 박모는 불원천리하고 만주까지 찾아와서 조국광복회 남만대표들을 만났다. 상해, 베이징, 천진 등 중국 관내에서 다년간 독립운동에 종사한 애국지사로서 민족주의운동자들속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앞으로 국내와 국외를 포함하는 넓은 영역에서 조국광복회 사업을 널리 전개해 나갈 것을 약속하였으며 앞으로 전민족적 이 무장역량으로서 ≪독립혁명군≫을 결성하기 위한 방도문제를 놓고도 많은 논의를 하고 있다.

≪3·1월간≫창간호에 이동백이 ≪천도교 상급 영수 모씨! 우리 광복회대표를 친히 방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쓴 것처럼 천도교 도정이었던 박인진도 조국광복회가 창립됐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고 우리를 찾아 백두산밀영을 방문해 왔었다. 천도교청년당에 속한 100만 당원을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이 그때의 일이다.

이창신, 이제순, 박달 기타 많은 사람들이 연속 우리를 찾아왔고 조국광복회의 조직확대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단시일 안에 수십만 회원을 가진 범민족적 조직으로 확대발전한 조국광복회의 발전사에 대해서는 아마 큰 몇 권에도 다 담기 어려울 것이다.

1936년 5월 백두산 북쪽 기슭에서의 조국광복회의 탄생은 조선혁명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조국광복의 밝은 서광을 안아온 역사적 사변으로 된다. 조선혁명의 보다 창창한 새날은 이렇게 백두산기슭에서부터 밝아오기 시작했다.

 

copyleft © 백두산편집부
이 문서는 Internet Explorer v5.0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