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고대사 문제와 한(조선)반도의 정치정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 례> 

1. 주체적 역사인식의 문제 

2. 일제 식민주의사학의 만행 

    1) 일제 식민주의사학이 자행한 한(조선)민족 고대사 왜곡 

    2) 식민지시기 일제침략자들이 자행한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만행 

    3) 식민주의사학의 탁류는 아직도 흐른다 

3. 중국 패권주의사학의 횡포 

    1) 중국 패권주의사학이 자행한 고구려사 왜곡 

    2) 고구려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인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3) 이른바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 패권주의사학의 횡포 

4.. 동아시아 고대사 인식의 정치적 의미 

5. 글을 마치며 

 

1. 주체적 역사인식의 문제 


역사학은 과학이고, 역사인식은 과학적이다. 역사인식이 과학적이라는 말은, 역사인식이 과거사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뜻이다. 과학적 분석이란 대상고찰에서 객관성을 준수하고, 사물을 변증법적 운동발전의 관점에서 인식하며, 대상이 맺고 있는 연관관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역사인식은 과거사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인식작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주관적 인식을 배제한다. 역사인식에서 주관적 인식이 배제되어야 하는 까닭은, 주관적 인식은 일면적이고, 자의적이며, 객관성이 결여된 주관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인식은 과거사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만이 아니라 과거사실에 대한 주체적 인식에 의해서 성립된다. 역사인식이 주체적 인식이라는 것이 역사인식과 자연과학적 인식을 갈라놓는 근본적인 차이다. 자연과학적 인식은 과학적 분석에 의해서 진행되지만 주체적 인식으로는 될 수 없다. 역사인식이 가지는 본질적 특징은 그것이 주체적 인식이라는 데 있다. 주체적 인식이란 주체의 본성적 요구를 기준으로 하여 대상을 고찰하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주는 의미를 주체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역사인식이 주체적 인식이라는 말은 과거사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과학적 분석과 주체적 인식은 상호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주체적 인식과 모순되는 것은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이다. 과거사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내용과 과거사실의 의미를 해석한 내용은 주체적 인식에서 비로소 변증법적으로 통일되고 하나의 역사인식으로 완성된다. 

역사적 인식이 주체적 인식이어야 하는 까닭은, 역사가 주체에 의해서 변화되고 발전되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주체가 있으며, 역사는 주체에 의해서 발생하고 주체가 목적의식적으로 변화발전시킨다. 반면에, 자연현상들은 어떤 목적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생겨나고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는 주체가 없으므로 자연현상은 주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계는 오직 자연계의 객관적 법칙에 따라 진화한다. 역사는 주체가 목적의식적으로 변화발전시키지만, 자연은 무목적적으로 진화한다. 

역사가 주체의 목적의식에 의해서 변화발전된다는 진리는, 역사에도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객관적 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역사에 작용하는 객관적 법칙을 인식하고 그 법칙에 주체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역사를 자기의 목적의식에 따라 변화발전시킨다. 주체는 역사의 주체이며, 역사는 주체의 역사다. 

역사인식에서 제기되는 근본문제는, 역사를 변화발전시킨 주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과 역사를 변화발전시키는 주체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첫째, 역사를 변화발전시키는 주체는 민족이다. 사람이 역사를 변화발전시키는 주체가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사람이 변화발전시키는 대상을 개념화할 때는 역사라는 개념이 아니라 세계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세계와 사람이라는 개념은 철학의 근본개념이고, 역사와 민족이라는 개념은 역사학의 근본개념이다. 

그런데 역사를 변화발전시키는 주체를 민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계급사회에서 민중이라는 개념이 계급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므로, 민중은 지배와 착취를 당하는 사회계급의 총체적 개념이다. 계급사회에서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계급은 소수인 반면, 지배와 착취를 당하는 사회계급은 절대다수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성원은 지배와 착취를 당하는 사회계급인 민중이다. 

절대다수인 민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소수의 지배착취계급이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을 대표할 수 없다. 민족을 대표하는 사회계급의 총체는 어디까지나 민중이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민족의 계급적 실체는 민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의 계급적 실체인 민중이 역사를 변화발전시킨다는 의미에서 민중은 역사의 주체로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계급사회와 무계급사회를 모두 포괄하는 전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를 변화발전시키는 주체는 민족으로 개념화하여야 한다. 

둘째, 역사를 변화발전시키는 주체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주체가 역사를 변화발전시키는 목적은, 단순화하여 표현하면, 자주적으로 살아가려는 것이다.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 생겨난 사회적 생산력과 문명의 발달은 자연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자주적으로 살려는 주체의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모든 형태의 민중항쟁과 사회혁명은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주적으로 살려는 주체의 목적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주체의 역사는 자주성의 완성을 지향한 자주화의 역사다. 

역사인식이란 인식주체가 과거사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출발하여, 과거사실의 의미를 주체적 관점에서 인식함으로써 완성된다. 무릇 모든 역사는 주체에 의해서 인식된 역사다. 주체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로서 성립될 수 없다. 과거사실은 주체적 인식에 의해서,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역사가 된다. 역사는 과거사실의 총합이 아니라 과거사실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내용의 체계적인 총합이다. 

역사인식은 유적, 유물과 금석문, 문헌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주체적 인식으로 가능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사로 갈수록 유적, 유물과 금석문, 문헌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것은 고대사 인식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대상이 그만큼 줄어들고 의미해석의 공간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고대사 논쟁은 의미해석의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사 인식에서 주체의 의미해석은 민족국가의 발생보전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오늘날 고대사 인식이 중요하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민족국가의 발생사적 정체성과 민족의 역사적 형성기원을 밝혀주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형태와 방식은 매우 다양하지만, 모든 민족국가는 고대사에서 자기의 발생사적 정체성을 밝혔으며, 모든 민족은 고대사 인식 위에서 자기의 역사적 형성기원을 밝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강조된 것은 민족국가를 건설한 주체인 민족의 역사적 형성기원을 밝히고 민족국가의 발생사적 정체성을 세우는 정치적 과업이었다. 

이처럼 고대사 인식이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과업과 직결되는 것은, 고대사 인식이 민족국가의 정치적 목적과 결부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지역패권주의에 몰두한 나라들은 주변나라들과의 관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과 결부하여 고대사를 인식하였고, 근대 이후 제국주의나라들은 자기들의 대외침략과 식민주의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과 결부하여 고대사를 인식하였다. 문제는 고대사 인식과 민족국가의 정치적 목적이 결부된다는 사실 자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국가가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서 고대사 인식을 왜곡날조한다는 데 있다. 

동아시아 고대사에 대한 인식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일찍이 중국과 일본은 한(조선)민족과의 관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또는 한(조선)민족의 영역을 침략하기 위한 목적과 결부하여 동아시아 고대사를 인식하였다. 특히 일본이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 때부터 자기의 대외침략과 식민주의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과 결부하여 동아시아 고대사를 인식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글은 동아시아 고대사에 대한 역사인식 자체를 분석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의 고대사에 대한 일본과 중국의 왜곡날조행위의 정치적 측면을 분석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2. 일제 식민주의사학의 만행 


1) 일제 식민주의사학이 자행한 한(조선)민족 고대사 왜곡 


일본정부와 식민주의사학이 한(조선)민족 역사를 왜곡한 것은 어제오늘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저들의 역사왜곡은 적어도 1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일본정부와 식민주의사학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한(조선)민족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만행이 처음으로 시작된 해는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인 1882년이었다. 그해 3월 일본정부는 이른바 '조선국사편찬'이라는 이름으로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왜곡을 시작하였다. 일본정부가 다른 나라의 역사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책을 펴내겠다는 의도를 가졌다는 것부터 의혹이 가는 일이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그 편찬작업이 일본인 역사학자들이 아니라 일본군참모본부에 의해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도쿄제국대학에 사학과가 설치된 때는, 일본군참모본부가 '조선국사편찬'을 시작했던 때보다 5년이 늦은 1887년이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 사학과가 식민주의사학의 본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식민주의사학의 역사왜곡이 일본군참모본부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연구가 학술적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추진되었음을 명백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한(조선)민족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연구가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한(조선)민족 역사를 연구하였다는 뜻이다. 19세기말의 일본은 조선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약탈하려는 제국주의적 침략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조선에 대한 무력침략에 앞장섰던 집단이 일본군참모본부였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연구는 역사연구가 아니었으며, 제국주의적 침략과 지배를 역사연구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참모본부는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설치되었던 참모국을 확대개편한 군국주의의 핵심세력이었다. 원래 참모국은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사전준비로 두 나라의 지도와 해도를 작성하였다. 참모국이 작성한 조선해도와 조선지도가 실제로 사용된 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자행하였던 1875년의 운양호사건이었다. 

일제침략자들은 1878년에 일본군참모국을 일본군참모본부로 개편하고, 조선과 중국에 대한 첩보활동을 강화하기 위해서 첩보장교 수십 명을 일본대사관의 무관이나 어학교사로 위장하여 조선과 중국에 침투시켰다. 이를테면, 1895년 치하포에서 김구가 처형한 일본간첩도 일본군참모본부가 조선에 침투시켜 변복을 하고 잠입활동을 하던 일본육군 중위 스치다(土田壤亮)였다. 

일제침략자들이 조선과 중국에 침투시킨 간첩들 가운데 한(조선)민족 역사 왜곡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은 청나라 주재 일본공사관에 파견되었던 첩보장교인 일본군 대위 사까와 카게노부(酒勾景信)이다. 그는 1882년에 만주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하다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에 있는 광개토대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를 찾아갔다. 

광개토대왕릉은 광개토대왕의 웅장한 무덤이고, 광개토대왕릉비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이 네 면에 빽빽이 새겨진 거대한 돌비이다. 왕릉과 능비는 약 500m의 거리를 두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사까와가 그곳을 찾기 2년 전인 1880년에 밭을 개간하던 중국인 농부에 의해서 이끼와 덩굴에 덮여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높이가 6.39m이고, 너비가 1.35-2.0m나 되는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세계 최대, 최고의 돌비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가져왔다는 전설이 어려있는 그 돌비는 고구려의 거석문화를 증언하는 귀중한 유적이다. 그 비문은 고구려 제19대 임금 광개토대왕이 재위 22년 동안 이룩한 남정북벌의 업적을 기록한 것인데, 현재 남아있는 한(조선)민족 고대사에 관한 기록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비에는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쓴 글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북(조선)의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2001년 10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글자는 1천755자가 아니라 1천802자이며, 그 가운데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천530여자라고 한다. (『연합뉴스』 2001년 10월 10일자) 

사까와가 찾았던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에 세워진 뒤로 1천468년 동안 비바람을 맞아 돌이끼를 덮어쓰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글자를 새긴 각이 깊고 재질이 부드러운 현무암질 화산암이었다. 그러한 조건에서 탁본을 뜰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하여 사까와는 현지에서 중국인을 고용하여 비문 위에 종이를 대고 파진 글자 주변을 선으로 그리는 복사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런 복사작업을 쌍구(雙鉤)라고 하는데, 복사작업을 한 것을 선으로 그린 글자만 남기고 나머지 종이면에 먹을 칠해서 마치 탁본처럼 만드는 것을 가묵(加墨)이라고 한다. 사까와가 만들었던 것은 탁본이 아니라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베이징이나 텐진에서 활동하는 전문 탁공이 파견되어 탁본을 뜨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런데 쌍구가묵본을 만드는 데서 생기는 문제는, 복사작업을 하는 사람이 글자를 보고 그리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마모되어 읽기 힘든 글자는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변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사까와가 쌍구가묵본을 만드는 작업과정에서 이른바 신묘년(申卯年) 기사를 변조하였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연구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바 있다. 사까와가 변조한 부분은 391년(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사까와가 변조한 쌍구가묵본에서는 왜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으로 기록된 대목에서 해(海)라는 글자가 손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되었다. 뒷날 정밀하게 뜬 탁본에서는 해라는 글자는 없고, 적외선으로 촬영한 사진에서도 해라는 글자는 없다. 이것은 사까와가 신묘년 기사를 변조하였음을 말해준다. 

사까와가 변조한 이후에도 1899년부터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은 비문내용을 변조하거나 탁본을 팔아먹기 위해 비면에 진흙을 바르거나 석회칠을 하였는데, 석회가 떨어져나가면서 비에 새긴 글자가 지워짐으로써 비는 더욱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만주를 돌아다니면서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던 민족주의 역사가 신채호(1880년-1936년)가 광개토대왕릉비를 찾았던 때는 사까와가 비문내용을 변조한 때로부터 약 15년의 세월이 지난 1914년이었다. 조국을 일제침략자들에게 강탈당하고 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열중하였던 신채호에게는 광개토대왕릉비를 측량조사할 수 있는 아무런 도구도 없었고, 현지에서 상품으로 파는 탁본을 살 수 있는 돈조차 없었다. 노자도 모자랐던 그는 탁본값만 물어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으며, 하는 수 없이 붓으로 광개토대왕릉을 그리고, 자기의 걸음걸이로 왕릉의 둘레를 재고, 자기의 팔을 벌여 광개토대왕릉비의 길이를 어림하였다. 

사까와는 신묘년 기사를 변조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쌍구가묵본을 일본 도쿄로 가져갔다. 일본군참모본부는 이를 계기로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조선)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매달렸다. 일본군참모본부는 일본인 식민주의사학자들을 동원하여 비문 해독작업을 은밀히 진행하였는데, 사까와가 가져간 쌍구가묵본을 처음으로 해독한 사람은 일본의 저명한 식민주의사학자로서 당시 일본군참모본부 촉탁으로 일하고 있었던 요코이(橫井忠直)였다. 그들이 6년 동안 해독한 결과는 1889년에 나온 어용기관지 『회여록』 제5집에 요코이가 집필한 논문 「고구려비 출토기」로 발표되었다. 

일제간첩 사까와에 의해서 일본에 그 존재가 알려진 광개토대왕릉비를 약탈하여 일본 도쿄로 옮기려고 책동하였던 사람은 일본역사학계에서 동양사학의 태두로 칭송하는 도쿄제국대학 교수 시라토니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년-1942년)이다. 재일동포 사학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시라토니는 일제식민주의사학자들이 고구려시대에 왜국이 한(조선)반도의 남부지역을 지배하였다고 왜곡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던 것이 아니라 왜군이 광개토대왕의 기마군단에게 패하여 일본으로 다시 밀려났던 것을 몹시 원통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시라토니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도쿄제국대학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옛날 왜국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아시아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발판이었던 한(조선)반도를 잃어버린 '뼈아픈 교훈'을 일본인들에게 길이 깨우쳐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까와가 변조하고 일본군참모본부의 지휘에 따라 일제식민주의사학자들이 날조해내었던 왜국의 '남조선경영설'은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일본의 식민주의사학자들이 매달려 있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대표적인 식민주의사학자 스에마츠(末松保和)가 1949년에 펴낸 책 『임나흥망사』에서 총정리되었다. 그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49년(369년)조'를 해설하면서 신공황후 시기에 왜는 한(조선)반도 남부지역을 정복하고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는데, 그 세력은 백제와 신라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562년까지 존속하였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일제간첩이 변조하고 일제식민주의사학자들이 궤변으로 만들었으며, 일제침략자들에 의해서 조선침략의 명분으로 사용되었던 왜국의 '남조선경영설'은, 이미 1963년에 북(조선) 역사학자 김석형의 분국설(分國說)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파탄되었다. 그런데도 일본의 식민주의사학은 파탄된 '남조선경영설'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5월 광개토대왕릉에서 청동방울이 출토됨으로써 왜국의 '남조선경영설'은 역사해석에 의해서는 물론, 유물발굴에 의해서도 완전히 파탄되었다. 광개토대왕릉과 릉비가 있는 지안현에 있는 지안박물관은 2003년 10월 1일 개관하였는데, 거기에 전시되어 있는 청동방울에는 "신묘년에 호태왕(好太王, 광개토대왕을 뜻함-옮긴이)이 만든 제96번째 방울"이라는 뜻의 한문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글귀는 신묘년에 광개토대왕이 방울을 만들어 기념할만한 업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이것은 신묘년이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왜군을 격파했다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승전기록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연합뉴스』 2004년 1월 18일자) 

당시 광개토대왕은 백제, 신라, 동부여를 정복통합의 대상으로 보았고, 왜와 비려는 토멸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것은 고구려가 왜국과 달리 백제, 신라, 동부여를 자기와 동일한 민족집단으로 인식하였으며,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민족사의 발전을 위한 통일정책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가 백제, 신라, 동부여를 자기와 동일한 민족집단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은 1979년 4월 충청북도 충주시 부근의 중원군 가금면 용천리 입석마을에서 발견된 고구려비(국보 제205호)에 의해서도 입증된 바 있다. 여기서 한(조선)민족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중시하는 까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고 사용하였으며, 최고통치자를 태왕(太王)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으로 불렀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연호를 제정하고 사용하는 권한은 황제가 행사하는 고유한 정치적 권한이었다. 중국인들은 자기들의 최고통치자를 '황제'라고 불렀고,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최고통치자를 '천황'이라고 불렀던 것에 비해서, 고구려시대의 한(조선)민족은 최고통치자를 태왕이라고 불렀다. 『김일성종합대학 학보』 2003년 3호에 실린 북(조선) 역사학자의 논문에 따르면, 중국 지린성 지안현의 장천2호무덤과 산성밑332호무덤, 랴오닝성 환런현의 마창구1호무덤, 그리고 북(조선) 남포시 와우도구역의 감신무덤에서 발견된 왕(王)자 무늬가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 제후국의 왕들이 고구려의 최고통치자인 태왕으로부터 제후국왕으로 책봉을 받았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가진 황제국가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연합뉴스』 2004년 1월 14일자) 

둘째, 태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아시아 최고의 지위와 권한을 가진 통치자였다. 변방의 여러 제후국을 통치하는 왕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지위와 권한이 없었고, 땅을 맡은 신과 곡식을 맡은 신(社稷)에게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제사를 드렸다. 제후국을 거느린 황제국의 통치자인 태왕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태왕의 통치를 받았던 고구려사람들은 스스로를 천손민족(天孫民族)으로 불렀다. 

셋째,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넓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당시 광개토대왕은 서쪽으로 풍부한 철산지인 요동을 정복하여 철의 생산력을 발달시키면서 대륙원정의 교두보를 만든 다음, 요하를 넘어 대릉하 유역으로부터 멀리 흥안령 산맥의 시라무렌강 유역까지 원정하였고, 동쪽으로는 목단강 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에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일원으로 확장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곡창지대인 한강 유역까지 확장하였으며, 낙동강 유역까지 원정하였다. 

넷째, 남(한국)의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고구려라고 불렀던 나라이름을 423년(장수왕 10년)에 고려로 바꾸었다고 한다. 중원 고구려비에는 '고려태왕'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라는 나라이름을 고려로 바꾸었음을 말해준다. 중국문헌들에는 초기에는 고구려라는 나라이름이 나오지만 중기 이후에는 고려로 바뀌고 말기에는 고려라는 나라이름만 나온다. (『한국일보』 1999년 2월 11일자) 왕건이 세운 한(조선)민족 최초의 통일국가 고려는 장수왕이 개칭하였던 나라이름 고려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고려사』 서문의 「고려세계」에 따르면 왕건가문의 선조인 호경성골장군은 백두산으로부터 개경의 부소산(오늘의 송악산)으로 이주해온 사람이었고,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고구려인의 후손이었다. 왕건은 고구려땅에서 고구려유민의 후손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국가 고려를 세웠다. 

19세기말 '조선국사편찬'이라는 이름으로 한(조선)민족사에 대한 왜곡책동을 개시하였던 일본군참모본부와 식민주의사학자들은 고구려사 왜곡에서 그치지 않고 고조선사를 말살하기 위한 책동을 자행하였다. 고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하였던 책동에 앞장섰던 사람은 시라토니였다. 그는 1894년에 출판된 『단군고』라는 책에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한 선담(禪談)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조선사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1897년 나까(那珂通世)는 『사학잡지』 제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승려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주장하였다. 1902년에 이마니시류(今西龍)도 「단군고」라는 논문에서 단군의 역사를 부정하였다. 


2) 식민지시기 일제침략자들이 자행한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만행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조선통감부는 1909년 도쿄공과대학 교수 세키노(關野貞)에게 고구려 유적을 발굴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세키노는 즉시 '고구려 고적조사반'을 조직하여 평양지역에 있는 고구려 무덤 2기를 발굴하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강점하고 조선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개칭하자, 저들은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왜곡과 날조를 더욱 체계적으로, 집중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식민주의사학자들이 추진하고 있었던 '고구려 고적조사사업'을 '한대 낙랑군 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였다. 그 사업은 평양지역의 유물, 유적을 한나라 낙랑군의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1913년에 이마니시가 평안남도 용강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를 촬영한 사진은 1915년 3월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제1호에 실렸다. 세키노는 도쿄공과대학의 사진기술을 동원하여 용강을 한나라의 낙랑군 점제현이었다고 조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모든 연구활동을 금지하였고, 한(조선)민족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 독서활동마저 금지하였다. 금지령을 어긴 사람에게는 태형을 가했다. 일제침략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서 고대역사서 수 십만 권을 강탈한 뒤에 그 가운데서 일부는 불태워 버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가져갔다. 8.15 해방 후 나온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에 따르면,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명령을 내려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한(조선)민족 고대사 사료인 고서 51종 20여만 권을 약탈하였다고 한다. 일제침략자들이 약탈한 진귀한 고서들은 일본왕실도서관으로 알려진 궁내성(宮內省) 쇼료부(書陵部)로 옮겨다 놓고 아직까지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은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쇼료부에서 한(조선)민족 고대사에 관련된 고서를 분류하는 일을 했던 박창화(1899년-1962년)에 의해서 밝혀진 바 있다. 남(한국)의 한 역사연구가에 따르면, 일제침략자들은 1926년 5월 대마도 도주의 집에 소장된 한(조선)민족 고대사 사료인 고문서 6만1천469장, 고서 3천576권, 고지도 34장, 고화 18장을 몰수하였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였던 시기인 1922년 12월에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도(齋藤實)는 이른바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드는 규정을 제정공포하여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작하였다. 그 위원회의 위원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이었고 일제식민주의사학자 15명이 위원으로 동원되었다. 

1925년 6월 6일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도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로 확대강화하면서 이른바 '일왕 칙령 제218호'를 공포하여 '조선사편수회'의 관제를 제정하여 조선총독이 직접 관장하는 독립관청으로 격을 높였다. '조선사편수회' 위원장은 아리요시의 후임인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시타오카(下岡忠治)였고, 민족반역자들인 이완용과 권중현,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들을 '조선사편수회' 고문자리에 앉혔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날조와 왜곡을 자행한 담당자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퍼뜨리고 있었던 일본인 식민주의사학자들이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인 식민주의사학자들 밑에서 조선총독부의 봉급을 받으며 자기 나라의 역사를 날조왜곡하는 데 열을 올렸던 수사관보는 이병도였다. '조선사편수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최남선, 이마니시 등이었고, 수사관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이나바(稻葉岩吉), 스에마쓰(末松保和), 신석호 등이었다. 

이마니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조작하여 단군역사를 신화라고 주장하여 고조선사를 말살하려고 책동하였던 식민주의사학자였다. 이나바는 한(조선)민족 역사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한족의 식민지로부터 시작하였다는 궤변을 날조해낸 식민주의사학자였다. 스에마쓰는 『임나흥망사』라는 책을 펴내면서 가야지방이 고대 왜국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였던 식민주의사학자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식민지조선에서 한(조선)민족의 주체적 역사관을 파괴하고 반일의식을 말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식민주의사학을 적극 장려보급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한(조선)민족의 역사를 일본역사 2600년보다 짧은 2000년 이하로 축소조작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사를 말살하고 단군신화론을 전파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부터 16년 동안 거액 100만원(당시 화폐)을 쏟아 부어 전35권 2만4천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펴냈다.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에서 한(조선)민족 역사를 식민주의사관에 맞춰 난도질하고 왜곡말살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일제에게 체포되어 뤼순감옥에 갇혀 있었던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가 1931년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자기의 글 「조선상고사」를 103회에 걸쳐 연재하였으나, 그것으로는 '조선사편수회'의 왜곡말살을 막을 수 없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식민주의사학자로서 한(조선)민족 고대사를 왜곡말살하려고 날뛰었던 와세다 대학 교수 쯔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이병도에게 식민주의사학을 가르쳤다. 민족반역자 이완용의 숙질인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을 이른바 실증주의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씌우고 식민주의사학을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병도와 더불어 식민주의사학의 충실한 전파자였던 신석호는 일본에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공부하고 서울에 돌아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9년에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들어가 수사관보를 거쳐 수사관으로 일했다. 이병도와 신석호는 총독부 관리들, 경성제국대학 교수들, '조선사편수회' 성원들이 모여 결성한 '청구학회(靑丘學會)'에도 가입하여 한(조선)민족 역사에 대한 날조와 왜곡에 열을 올렸다. '청구학회'란 1930년에 '조선사편수회' 수사관이었던 나카무라(中村榮孝)가 주동이 되어 결성한 식민주의사학자들의 소굴이었다. 


3) 식민주의사학의 탁류는 아직도 흐른다 


일제식민주의사학의 앞잡이로 활동했던 이병도와 신석호는 8.15 해방 직후에 재빨리 변신하여 서울에 임시중등국사교원양성소를 세우고 역사교사를 길러냈다. 이병도는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되어 제자를 가르쳤으며,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한 국사관을 설립하고 초대관장으로 나섰다. 신석호가 주동이 된 국사관은 1949년에 북(조선)의 조선력사편찬위원회에 대응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로 확대개편되었다. 남(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는 이처럼 일제식민주의사학의 앞잡이들이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남(한국)의 역사학계가 8.15 해방 이후에 민족반역세력의 식민주의사학을 청산하지 못하고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말해준다. 8.15 해방과 더불어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미군정의 비호와 육성에 의해서 남(한국)의 역사학계만이 아니라 남(한국)의 각계각층에서 요직을 차지하였으며, 그 세력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힘을 가지고 있다. 남(한국)의 역사학계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식민주의사학의 유산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식민주의사학은 한(조선)민족이 한(조선)반도에서 발생하였다는 한(조선)반도 기원설을 부정하고 중앙아시아에서 흘러왔다는 이른바 '외래유입설'을 주장한다. 

둘째, 식민주의사학은 한(조선)민족의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20세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10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한(조선)민족의 고대사를 축소한다. 

셋째, 식민주의사학은 고조선을 세운 한(조선)민족이 동아시아 문명권의 변방이 아닌 중심을 형성한 주체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고조선의 역사를 왜소화한다. 

넷째, 식민주의사학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인식하면서,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와 후기신라의 시대도 역시 신라를 중심으로 인식하는 신라중심사관에 매달려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제는 패망하였으나 남(한국)에서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은 청산되지 않고 반세기가 넘은 세월 동안 끊임없이 탁류를 흘려보내고 있다. 일본학교의 역사교과서는 왜국의 '임나일본부설'이나 일제의 '대륙진출론'을 싣고 있으며, 일본의 식민주의사학자들은 한(조선)민족의 역사를 변조 또는 날조하는 만행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 독도영유권 문제에 대해서, 일제의 조선'합방'에 대해서 일본의 우익정객들이 자주 내뱉고 있는 망언들은 그들의 머리 속에 식민주의사관이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 역사학계에서 가장 최근에 밝혀진 역사날조범행은 구석기시대 유물을 날조한 것이다. 2000년 11월 일본언론은 일본의 한 역사학자가 밤중에 유적지에 구석기시대의 석기를 파묻어 두는 장면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하여 폭로하였다. 그 범인은 도호쿠구석기문화연구소(東北舊石器文化硏究所) 부이사장이었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였다. 그는 20대 후반이었던 1974년부터 석기가 나오는 꿈을 꾼 뒤에 그곳을 파보았더니 진짜로 석기가 나왔다는 식으로 요설을 퍼뜨리면서 석기를 계속 발굴하는 자작극을 연출하였다. 그는 모두 162개의 전기 구석기 시대와 중기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묻어놓고 발굴하는 척하면서 날조를 자행하였으며, 일본의 역사학계는 그를 '신의 손'이라고 칭송하였다. 그가 발굴작업으로 유명해지자 주변에서는 20만년 전, 30만 년 전의 석기가 나오면 좋겠다고 주문하였고, 그는 그 주문에 따라서 자작극을 벌였다. 그의 조작에 의하여 일본의 구석기시대는 7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날조되었으나 지금은 다시 7만년-5만년으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연합뉴스』 2003년 5월 25일자, 2004년 1월 26일자) 


3. 중국 패권주의사학의 횡포 


1) 중국 패권주의사학이 자행한 고구려사 왜곡 


중국공산당의 견해를 대변하는 당보는 『런민르바오(人民日報)』와 『공밍르바오(光明日報)』인데, 『공밍르바오』는 학술, 문화, 예술에 관한 기사를 싣는 당보이다. 그 신문을 읽는 주요 독자층은 중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인계층이다. 『공밍르바오』의 인터넷판 2002년 6월 24일자는 '변중'이라는 필명으로 작성된 「고구려 역사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이라는 제목의 긴 글을 실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글은 고려라고도 약칭하는 고구려는 서한(西漢)에서 수(隋), 당(唐) 시대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출현했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변방민족 중의 하나였다고 주장하였다. 

2) 글은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왕조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중원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고구려정권은 중원왕조의 제약을 받았고 중국지방정권의 관할 하에 있었으므로 고대 중국에 있었던 변방의 민족정권이라고 주장하였다. 

3) 글은 고구려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으나 그 수도는 모두 한사군 지역 안에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중국역사에 출현한 변방의 민족정권이라고 주장하였다. 

4) 글은 당태종이 중국영토의 변방에 있었던 고구려를 평정하고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사명을 완수하려는 목적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하였다. 

5) 글은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쳤으며 인질을 보냈다고 주장하였다. 

6) 글은 당이 고구려를 통일하자 고구려사람들은 당에 대해 망국의 한을 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7) 글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약 70만 명의 인구 가운데 10만 명만이 신라로 들어가 한(조선)민족에 융화되었고, 나머지 60만 명은 한족에 융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8) 글은 고려가 고구려의 칭호를 계승하였지만 고구려를 승계한 나라가 아니라 신라의 계승국이라고 주장하였다. 

9) 글은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했던 고려라는 명칭을 신라의 계승국인 고려가 도용하였고, 근세조선은 기자조선이 사용했던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2003년 11월 14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열린 '고구려 국내성 천도 20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제출된 중국 옌볜대학 교수 웨이즈민(劉子敏)의 글 「중화천하질서 속의 고구려」는 한 술 더 떠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모두 왜곡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사에서 내번(內蕃)은 중국고유영토에서 갈라져나간 소수민족정권을 뜻하며, 외번(外蕃)은 중국고유영토 밖에 존재하는 속국을 뜻하는데, 고구려는 내번이었으며, 백제와 신라는 외번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학술대회에 참석하지 않고 자기의 글만 보냈다. 

위의 내용들은 중국의 패권주의사학에 의해서 왜곡날조된 것으로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허구와 궤변이다. 중국의 패권주의사학이 고구려사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인 1993년 8월 지린성 지안에서 열린 '고구려문화 국제학술대회'에서 중국 랴오닝성의 역사학자 쑨진지(孫進己)는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였고, 1994년에 출판된 『동북민족사연구 1』에서는 한(조선)반도 북부지역이 원래 한족의 영토였다고 하면서, 그 지역이 한(조선)민족의 거주지가 된 것은 12세기 이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너무도 허황한 허구와 왜곡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족은 한(조선)반도 북부지역을 통치한 적이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를 통치한 적도 없었다. 한족의 활동무대는 중원이었다. 만주를 통치했던 고대국가들은 한(조선)민족이 세웠던 나라들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였고, 발해가 멸망한 이후 만주에 대한 통치권은 만주족에게 넘어갔다. 만주족은 한때 한족을 제압하고 청조를 세워 중원과 만주를 모두 통치한 적이 있었으나, 청조는 자기 왕조의 발상지인 만주를 신성한 강역으로 여겨 봉금지대(封禁地帶)로 정해놓고 중원의 한족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한족이 만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때는 1949년 중국혁명이 완전히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였다.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직후, 소수민족인 만주족을 한족에게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동화정책은 만주족의 역사를 한족 중심의 중국사로 편입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만주족의 역사만 중국사로 편입한 것이 아니라 한(조선)민족의 발해사까지도 중국사라고 왜곡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북(조선)의 역사학자들이 1960년에 고조선의 강역이 요동지역까지 포함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자,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고조선사를 중국사로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한(조선)민족 고대사에 대한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의 왜곡범위는 발해사→고조선사→고구려사로 확대된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고조선사와 고구려사에 대한 왜곡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은 북(조선)이 고조선사와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93년 10월 북(조선)은 평양시 강동군에 있는 단군릉을 발굴하여 고조선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 1994년 10월에 단군릉을 웅장한 규모로 개건하였다. 북(조선)은 한(조선)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동질성을 복원하면서 조선민족제일주의를 제창하였다. 또한 북(조선)은 1993년 5월 14일 고구려 건국시조 동명왕(298년-259년)의 무덤인 국보 제18호 동명왕릉 개건공사를 완공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중국은 1993년에 '선양동아연구중심(瀋陽東亞硏究中心)'이라는 동아시아역사연구소를 설립하고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왜곡하기 위한 작업에 달라붙었다. 북(조선)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산하에 고구려연구실을 설치하고,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2)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인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1998년 10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UNESCO) 산하 세계문화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enter, WHC)에 가입한 북(조선)은 2001년에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올리는 등재를 신청하였다. 이에 당황한 중국은 북(조선)에게 북(조선)의 고구려유적과 중국영토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조중 공동으로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북(조선)은 중국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2002년부터 북(조선)은 고대유적발굴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2002년과 2003년에 발굴한 유적은 구석기시대 유적 3곳, 신석기시대 유적 1곳, 고조선 유적 1곳, 고구려 유적 4곳이다. 

2002년 6월 북(조선)은 동명왕릉, 고구려 벽화무덤을 비롯한 고구려 유적 20여 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인 받기 위한 등록신청서를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중국도 2003년 2월 중국영토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인 받기 위한 등록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고대국가의 유적을 두 나라가 등록하려고 신청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북(조선)은 2003년 5월 14일 고구려 건국시조 동명왕 탄생 2천300주년을 기념하여 평양에서 고구려 사진 및 유물전시회와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중국정부는 2003년 4월부터 9월까지 여섯 달 동안, 2003년 9월초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실사단이 고구려 유적 현장을 방문하여 실사하기 직전까지 중국 지안현과 환런현(桓仁縣)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국내성,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들을 전면적으로 복원정비하는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였다. 최근 현지를 방문하여 조사활동을 벌였던 남(한국)의 역사학자에 따르면, 중국정부는 지안의 정비사업에 미화 4천5백만 달러에서 1억2천5백만 달러의 막대한 예산을 들였고, 환런의 정비사업에는 미화 3천7백50만 달러에서 6천2백50만 달러를 들였다는 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2004년 1월 27일자) 당시 현장을 방문했던 남(한국) 텔레비전방송 제작진과 역사학자는 중국정부가 외국인의 지안시 출입을 통제한 상태에서 도시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고구려 유적들을 복원정비하는 사업을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진행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3년 10월 13일자) 중국정부는 2003년 10월 9일에는 고구려 국내성 천도 20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2003년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산하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총회가 175개 회원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회의에서 북(조선)은 고구려 유적 가운데 20여 기만 등록하려고 신청하였던 이전의 방침을 바꿔 현재까지 발굴된 63기 유적 모두를 일괄하여 등록신청하였다. 등록을 신청한 고구려 유적은 동명왕릉, 강서3무덤, 덕흥리벽화무덤, 약수리벽화무덤, 수산리벽화무덤, 안학 1, 2, 3호 무덤, 호남리 4신무덤과 그 주변의 무덤떼, 롱강큰무덤, 쌍기둥무덤, 덕화리 1, 2, 3호 무덤, 진파리 1, 4호 무덤이다. 

그런데 등록신청을 심사하는 데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 ICOMAS)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조선)의 고구려 유적 등재에 관한 심의를 미루도록 권고하였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적정성에 관한 기술적 평가를 실시하고 그 평가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제출한다. 2002년 7월에 실시한 현지조사의 결과를 분석한 그 보고서는 북(조선)의 고구려 유적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느니, 유적 일부가 물에 잠기거나 원형이 훼손되었다느니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한국)의 역사학계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그 보고서에서 사실과 다르게 북(조선)의 고구려 유적의 보존상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던 까닭은, 중국이 북(조선)의 고구려 유적이 등재되는 것을 막후에서 저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연합뉴스』 2003년 6월 29일자) 중국 사정에 정통한 문화재 소식통은 중국이 북(조선)의 고구려 유적이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계문화유산위원회를 상대로 한 막후교섭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3년 7월 3일자) 

결국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총회는 북(조선)의 고구려 유적 등재문제에 관하여 다음 총회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7차 총회는 2004년 7월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열리게 된다. 올해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의 의장국은 중국이다.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본부는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북(조선)과 중국 사이에 조성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조중 두 나라의 동시등록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연합뉴스』 2004년 2월 6일자)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연구기관인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의 위원장 마다쩡(馬大正)은 1997년에 나온 '고대중국고구려역사'의 속편으로 2003년 10월에 펴낸 '고대중국 고구려역사속론'이라는 글에서 "조선이 고구려 벽화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신청한 것은 순수한 학술적 의도가 아니라 정치외교적 이익을 계산한 행위"라고 하면서, "조선의 고구려 연구는 1960년대 연구수준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재야사학자들의 고대사 왜곡파동과 군사정권 시기의 대북팽창 역사관 등 비학술적 연구행위가 있었다."는 내용을 주장했다. (『연합뉴스』 2004년 1월 8일자) 

그러나 그의 주장은 도둑이 매를 드는 격이다.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북(조선)의 정당한 노력을 저지하였던 중국정부의 행위야말로 자국의 정치외교적 이익에 두 눈이 먼 비열한 행위라고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현재 북(조선)은 중국의 패권주의사학에 대항하여 고구려사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주체적 역사관을 밝히는 토론회를 개최하고, 논설을 발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04년 1월 29일 평양에서는 사회과학원,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중앙력사박물관, 김형직사범대학의 역사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의 동명왕릉 발굴 교시 3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1월 30일자) 

한편, 남(한국)에서는 고구려역사지키기 범민족시민연대, 고구려역사문화재단, 중국역사왜곡대책 민족연대추진운동본부, 고구려사연구재단 설립추진위원회 등이 결성되었고, 중국의 고구려역사왜곡저지 1천만명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으며, 정부출연연구기관인 정신문화연구원이 부설기관으로 고구려사연구센터를 설립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3) 이른바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 패권주의사학의 횡포 


중국인들이 동북지방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포괄하는 지역, 다시 말해서 한(조선)민족이 만주라고 부르는 넓은 지역을 뜻한다. 중국공산당은 2003년 11월 제16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뒤떨어진 중공업지역인 동북 3성을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 동북 3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150개 중요기업들 가운데 3분의 1이 집중배치되어 한때 철강, 화학, 중장비, 자동차, 군수산업의 중심기지로서 중국 전체 산업생산의 17%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화 정책이 주로 연안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자 동북지방의 국유기업들은 파산상태에 밀려가게 되었고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1월 9일자) 

오늘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동북지방에 대한 재개발사업과 연구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연구기관인 '변강사지연구중심'은 2002년 5월부터 5년 동안 약 5억 달러를 들여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동북변강사여현장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약자인데, 그것은 '동북변경의 역사와 그것으로 파생되는 오늘의 현상에 대한 연구'라는 뜻이다.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 지리, 민족문제를 연구하는 거창한 사업으로, 연구분야와 번역분야, 문서자료분야를 포괄하는 3대 계열로 추진되고 있다. 

'동북공정'에는 고대중국변경에 대한 연구, 동북지방사 연구, 동북민속사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고구려민족과 고구려국에 대한 연구, 한(조선)반도의 민족과 국가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연구, 말갈, 발해와 동북 여러 나라 및 여러 민족의 관계사 연구가 들어있다. '동북공정'의 과제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영토문제를 논하는 '국제법중조변계쟁의문제(國際法中朝邊界爭議問題)'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관한 연구는 주로 랴오닝대학에서 담당한다. 

'동북공정'을 지도하는 상부기관은 '동북공정영도협조기구'이다. 이 기구의 고문은 중국공산당 정치국원이며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인 리톄잉,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며 재정부장인 샹화이청이다. 그 기구의 산하에 둔 영도소조 조장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며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왕뤄린이며, 부조장은 헤이룽장성 당위원회 부서기 양광홍, 지린성 부성장 취엔저주, 랴오닝성 부성장 자오신량이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동북공정'이 민간단체가 추진하는 역사연구사업이 아니라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추진하는 국책사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 '동북공정'의 취지문 일부를 인용한다. 

"특히 지난 10여 년 동안 동북아시아는 그 정치경제의 지위가 날로 높아짐에 따라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우리 나라(중국을 뜻함-옮긴이)의 동북변경지구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가진다. 이런 형편에서 일부 나라의 연구기관들과 학자들이 역사문제 등에 대한 연구에서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고, 소수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여러 가지 그릇된 주장을 공공연히 내놓으면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동북변경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연구는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고, 아울러 그 방면의 학술연구에 새로운 과제가 제기되었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역사문제 등에 대한 연구에서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일부 나라의 연구기관들과 학자들"은 북(조선)의 연구기관들과 학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치적 목적으로 여러 가지 그릇된 주장을 공공연히 내놓으면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소수 정치인들"은 남(한국)의 정치인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동북공정'은 한(조선)민족의 고구려사를 전면적으로 왜곡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조선)민족의 고구려사를 전면적으로 왜곡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남(한국)과 북(조선)에 대한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한(조선)민족의 고구려사를 부정하는 까닭은, 한(조선)민족의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고구려사 왜곡을 불가피한 조치라고 판단하였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한(조선)민족이 머지 않은 장래에 통일국가를 건설할 것이며, 장차 한(조선)민족이 건설할 통일국가는 고대 동아시아의 고구려처럼 강력한 자주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둘째,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장차 한(조선)민족이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면 간도에 대한 영유권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외교부에는 비공식적이지만 간도 영유권 문제를 전담하는 관리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시사저널』 2000년 1월 19일자) 

여기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대민족국가의 영토개념이 아직 명확하게 형성되기 이전 시기에 조청의 국경선은 오늘날 조중 국경선처럼 명확하게 그어진 것이 아니었다. 1712년에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가 말해주듯이, 간도에 대한 영유권이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조선에게 있었다. 청나라가 간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간도 조선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호구조사를 실시했던 때는 1881년이었다. 1883년에 조선은 관리들을 파견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조사한 뒤에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였으며, 청나라 관리들과 합동으로 국경문제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간도가 자기 나라의 영토라고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 청나라는 간도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사태가 심각하게 되자, 조선과 청나라는 간도의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협상을 벌였는데, 1885년에 있었던 '을유담판'과 1887년에 있었던 '정해담판'이 그것이다. 간도의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선과 청나라의 정치협상은 1895년 청일전쟁, 1902년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조선은 1901년 함경북도 회령에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하였고, 1902년에는 간도에 북변간도관리를 파견하고 간도에서 포병을 양성하고 간도주민으로부터 조세를 받았으며, 1905년 3월에는 북간도공립소학교를 설립하고 한성사범학교 졸업생을 교원으로 파견함으로써 영유권을 행사하였다. 1905년에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통감부의 조치에 의해 1907년에 간도 용정에 용정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 서울에서 출판된 '신정분도 대한제국전도'는 간도가 조선영토임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그런데 1909년 9월 4일 일제는 청나라를 협박하여 베이징에서 이른바 '두만강 중조계무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조약을 세칭 간도협약이라고 한다. 간도협약을 체결하기 이전까지 간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인정하였던 일제는 간도 조선인들에 대한 영사재판권, 지린-회령 철도 부설권, 푸순탄광 채굴권 등을 얻어내는 조건으로 청나라에게 간도가 청나라의 영토임을 인정해주었다. 

국제조약에 문제가 있을 때는 체결 이후 100년 안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므로, 만일 한(조선)민족이 간도협약 체결 100주년이 되는 2009년 안에 통일을 실현하는 경우에 간도 영유권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 남(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간도협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므로 간도협약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중국의 간도 통치권은 사실상의 지배에 지나지 않으며, 국제법상 영유권은 남(한국)에 귀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시사저널』 2000년 1월 19일자) 

'동북공정'의 추진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현재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학술연구단체를 앞에 내세워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한(조선)민족과 중화민족의 관계를 제멋대로 왜곡날조하였으며, 그것을 중국인민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다른 민족의 역사를 자기 민족의 역사로 조작하는 행위는 역사연구로 위장된 패권주의적 정치공세가 아닐 수 없다. 역사문제에 관한 국가 대 국가의 갈등과 대립에서 역사연구는 외피에 지나지 않고, 정치공세가 그 알맹이인 것이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연구라는 외피를 쓰고 전개하는 정치공세의 의도와 목적은 바로 이러한 견지에서 간파되어야 한다.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의 정치공세는 그들이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동아시아의 정세를 변화시키는 여러 가지 요인들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은, 한(조선)반도의 정세변화이다. 1990년대 이후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조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정치대결에 의해서 변화를 겪고 있다. 현재 그 대결은 이른바 '핵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회담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심각한 정치대결에서 북(조선)의 계속되는 정치공세에 밀린 부시 정부는 버티기 힘들게 되자 새로운 회담전략을 취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을 조미 정치회담에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 부시 정부는 중국을 조미 정치회담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중국-대만의 대결에서 중국을 지지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미국이 중국에게 조미 대결에서 미국을 지지해주면, 중국-대만 대결에서 중국을 지지해주겠다는 식의 은밀한 타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지적한 남(한국) 언론의 분석은 설득력을 가진다. (『시사저널』 2004년 1월 22일자) 

6자회담이 진행된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중국은 자기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조미 정치회담에 끼어 들어 중재역할을 자임하고 있고, 미국은 중국을 자기 쪽으로 일정하게 끌어당기면서 조중 관계를 벌어지게 하는 이간책동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북(조선)이 미국을 상대로 정치대결을 계속하는 동안에, 북(조선)은 조중 관계가 훼손되는 행동은 자제하지 않을 수 없다. 북(조선)이 중국과 갈등을 빚는 것은 결국 미국의 조중 관계 이간책동에 말려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바로 그런 정황을 이용하여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조작하려는 정치공세를 본격화하였다는 사실이다.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조작해도 북(조선)은 조중 관계의 손상을 우려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서 강한 반격을 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의 의도 속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미 대결에서 미국이 패하는 경우, 동아시아의 세력판도가 심하게 변동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세력판도의 변동은 당연히 조미 대결에서 승리한 북(조선)의 역내 영향력이 강화되고 세력권이 확장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조미 대결에서 북(조선)이 정치적으로 승리한다고 해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구도가 전면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자기의 동아시아 지배구도가 전면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미 대결에서 결정적인 양보를 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복잡한 양상으로 충돌하는 세력판도를 살펴볼 때, 미국에 대한 북(조선)의 정치적 승리가 무제한적인 성과를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조선)의 정치적 승리는 어느 범위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며, 미국이 동아시아 지배구도의 전면적 붕괴를 막기 위해서 취하게 될 결정적인 양보는 무엇일까? 나의 판단으로는, 북(조선)의 정치적 승리가 한(조선)반도의 세력판도를 근본적으로 변동시키는 범위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며, 미국은 조미 대결에서 패함으로써 남(한국)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고 그 대신 그 이외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기존의 지배구도를 유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이 조미 대결에서 정치적으로 승리하면, 한(조선)반도의 세력판도는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결국에는 파기되는 방향으로 변동될 것이다. 그에 따라서 한(조선)민족은 자기의 자주성을 전국적 범위에서 완성하여 강력한 자주역량을 보유하게 되고, 바로 그 힘으로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한(조선)민족이 강력한 자주역량을 보유하고, 그 자주역량의 조직형태로서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중국과 일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차츰 현실로 다가오는 한(조선)민족의 통일국가 건설에 대응하는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4. 동아시아 고대사 인식의 정치적 의미 


고구려는 한(조선)민족의 민족국가 건설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고대국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첫째, 천년왕국 고구려는 한(조선)민족 역사에서 가장 강성부흥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족의 거듭된 침략을 격퇴하였으며, 말갈족, 선비족, 거란족 같은 북방기마종족들을 복속지배하고 그들에게서 세금, 노역, 군역을 받으며 명실공히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한족의 정치적 간섭과 패권주의정책을 봉쇄하였을 뿐 아니라, 한족과 겨루어 고대 동아시아 역사발전의 영도권을 발휘하였던 강성대국이었다. 고구려는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여 한족을 뒤로 제치고 동아시아의 문명사를 앞장서서 발전시켰던 나라였다. 특히 광개토대왕(391-413년)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413-491년)의 통치기간 100년은 최고의 전성기였다. 오늘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주성을 완성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한(조선)민족은, 민족사적 견지에서 본다면, 고구려 천년왕국이 실현했던 위대성을 재현하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고구려는 민족적 자주성을 완성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한(조선)민족의 자존심을 간직한 역사적 상징이다. 

둘째, 한(조선)민족 역사에서 고구려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 것은 일찍이 고구려 중심사관을 정립하고 민족적 자주성을 최고의 가치로 실현하려고 투쟁하여왔던 북(조선)이다. 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믿고 있다. 그에 비해서 남(한국)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려고 하였고, 신라 중심사관에 집착하였다. 신라 중심사관이 사대주의사상에 물든 반동적인 역사관이라면, 고구려 중심사관은 민족자주사상에 기초한 진취적인 역사관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민족적 자주성을 실현하여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한(조선)민족이 신라 중심사관을 폐기하고 고구려 중심사관을 전민족적인 범위에서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한(조선)민족의 고대사를 왜곡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드러난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의 정치적 의도는 한(조선)민족의 통일국가 건설에 대응하여 중화패권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정책을 고수하여왔다. 중국에 사회주의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는 그 이전에 비해서 패권주의적 성향이 다소 자제되었으나, 중국공산당이 건설하려고 하였던 사회주의는 원래 자주성을 실현하는 내용을 담은 사회주의사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혁명이 승리한 뒤에도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사회주의진영의 국제주의 원칙에서 이탈하여 패권주의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들의 패권주의정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났던 중국소련 영토분쟁, 중국인도 영토분쟁, 중국베트남 분쟁, 그리고 문화혁명기의 조중 정치대결로 현실화되었다. 

중국이 사회주의적 발전노선을 포기하고 세계자본주의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던 1990년대 초부터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추구하는 중화패권주의에 급속히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의 고구려사 왜곡책동이 바로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세계자본주의시장에 뛰어들었던 1990년대 이후 중국에게 밀어닥친 가장 커다란 도전은 미국의 '세계화'전략이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미국의 '세계화'전략에 대응하는 담론을 반제자주사상이 아니라 중화패권주의에서 찾았다. 중국이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자발적으로 흡수되면서 민족국가로서 자기의 주체성을 보전할 수 있는 길은 국가통합력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국가통합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방편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중화패권주의다. 

이러한 견지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21세기에 야심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은 동아시아 고대사에 대한 중국의 패권주의책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중국은 동아시아 고대사 인식을 중화패권주의를 안받침해주는 정치적 담론으로 선택한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중화패권주의를 한층 강화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21세기에 들어와서 미국의 중국포위전략과 일본의 군국주의화전략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중화패권주의는 자극을 받으며 강화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일국 지배권이 약화되는 추세에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다극질서의 성립이다. 중국은 북쪽의 러시아, 서쪽의 인도, 동쪽의 일본, 남쪽의 미국에 의해 사방이 포위되어 있다. 중화패권주의의 강화는 이 포위전략에 대응하려는 전략이다. 

둘째, 동아시아정세의 격변에 대한 불안감이다. 중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아시아정세의 격변이란 한(조선)반도의 통일과 대만통합이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조선)반도에는 미국과의 기나긴 대결에서 최후 승리를 얻은 강한 통일국가가 건설될 것이다. 한(조선)반도에 건설될 통일국가는 민족적 자주권과 주체성을 강하게 내세우는 강국이 될 것이다. 


5. 글을 마치며 


한(조선)반도는 이집트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도문명, 중국문명과 더불어 고대문명의 시원을 열어놓은 인류문명의 발상지이며, 한(조선)민족은 고조선시대와 고구려시대에 동아시아문명의 중심을 형성하였던 민족이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주의사학은 한(조선)반도의 남부지역에서 전개되었던 한(조선)민족의 역사를 강탈하려고 책동하고 있으며, 중국의 패권주의사학은 한(조선)반도의 북부지역과 만주에서 전개되었던 한(조선)민족의 역사를 강탈하려고 책동하고 있다. 그 책동의 정치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중국의 패권주의이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를 강점하려는 군국주의정책을 추진하였고,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주의정책을 추진하였다. 

한(조선)반도의 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화발전하여 통일국가의 건설을 전망하고 있는 오늘, 일본의 군국주의세력과 중국의 패권주의세력은 한(조선)민족의 역사를 강탈하려는 책동에 매달려 있다. 이에 대응하여 한(조선)민족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한(조선)민족이 일본의 식민주의사학과 중국의 패권주의사학에 대응하는 길은 신라 중심사관을 폐기하고 고구려 중심사관에 근거하여 주체적 역사관을 정립하는 것이다. 또한 한(조선)민족이 일본의 군국주의와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응하는 길은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민족적 자주성을 완성하고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한(조선)민족의 고대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은 통일국가 건설의 역사적 임무와 결부되어야 한다. 사회주의강성대국을 건설하려는 북(조선)의 전인민적 추진력과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남(한국)민중의 강렬한 민족주의적 열망이 통일국가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합류하게 될 때, 한(조선)민족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상 최대의 민족주체역량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한(조선)민족이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민족적 자주성을 완성할 때, 일본의 군국주의세력과 중국의 패권주의세력은 한(조선)민족 역사를 감히 넘보지 못하게 될 것이며, 한(조선)민족은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주역으로 세계사의 무대에 나서게 될 것이다. (2004년 2월 11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