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민보 10월 22일)

미국은 조선과 타협에 응할 것

2003년 10월21일 제네바합의일을 맞아

강진욱 연합뉴스 기자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1994년 오늘 세계사는 중대한 한 고비를 넘었다. 미국에는 1백년래 정복 대상이었던 조선과, 조선은 철천지원수였던 미국과 조-미 제네바기본합의(Agreed Framework)에 서명했던 것이다.

조선을 오로지 정복의 대상일 뿐 정치외교적 교섭의 상대로 여기지 않던 미국이 ‘합의’(Agreement)가 아닌 ‘합의 틀’이라는 형태로나마 조선과 정식 외교문서에 서명했고 미국의 태도를 못미더워하는 조선에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각서’까지 보내야 했다.
조선과 미국 사이의 이런 대타협은 1백년 숙적 관계였던 두 나라 사이의 평화와 우호선린의 새 시대를 여는 첫 관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이 마침내 동북아 및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미 패권전략의 기세를 한 풀 꺾었다는 점에서 제네바합의는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기 부시행정부(1988-1992)가 구 소련을 해체시키고 냉전을 종식시킴으로써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데 이어 클린턴정부가 출범해 반미반제(反美反帝)의 최후 거점인 조선 점령을 위한 핵 위기를 조장한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새 정부에 이슬람권 침탈과 유교권 정복의 사명(‘문명충돌론’-‘윈-윈 전략’)을 부여했던 미 군산복합체가 극심한 내홍에 휩싸이고 제네바합의 한 달 뒤인 1994년 11월 치러진 미 중간선거에서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제네바합의 이행에 급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후 ‘새 세기-새 세계질서’(new era - new world order)를 향한 미제(美帝)의 책략은 제네바합의라는 역사의 철퇴가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피하면서 이라크를 위시한 중동 및 중앙아시아를 공략하는 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제네바합의 이후 클린턴행정부 잔여 집권기는 이런 거대한 책략과 음모가 무르익는 기간이었다.

대통령 각서까지 첨부한 저들로서는 제네바합의를 대놓고 파기할 수는 없었지만 지난 9년간 저들의 행보는 이 합의 이행을 어떻게든 막고 이 합의가 내포한 북-미 평화와 남북통일의 프로세스를 파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약속은 저들이 해놓고도 제 주머니 대신 하위동맹국 한국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회유했고 당시 대북정책과 관련해 좌충우돌하던 김영삼 정부는 미국의 꾐에 넘어가 전체 비용의 70%를 떠맡게 된다. 나머지는 일본과 유럽연합(EU) 등에 넘겨졌다. 제네바합의 이행은 이미 시작단계부터 파행했고 클린턴행정부 1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조선의 붕괴를 앉아서 기다리던 미국은 자신들의 비현실적이고도 한심한 ‘태업 전술’이 제네바합의를 무효화시킬 것으로 생각했지만 조선은 핵 시설 동결과 폐연료봉 봉인에 관한 제네바합의 의무를 ‘바보같이’ 착실히 이행하면서 미국의 ‘일방적 일탈’을 억제했다. 미 대북 군산전문가인 버뮤디스나 한때 총련에 적을 뒀던 김명철 조미평화연구소 소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1996년 조선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능력을 갖추게 됐고 이는 미국에 의한 제네바합의의 일방적 파기를 막는 또다른 제어장치였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클린턴행정부 2기가 출범하면서 ‘고립압살전략’에서 ‘교류유인전략’으로 탈바꿈한다. 소위 대북포용정책 또는 관여정책으로 번역되는 인게이지먼트 폴리시(engagement policy)가 그것이었다. 4개년국방검토보고(QDR)를 의무화하고 세계지배를 향한 새로운 책략을 꾀하면서 대북전술전략에 관한 심도있는 논의를 통해 마침내 남북직접대화 및 교류협력 증진을 통한 조선의 체제 변질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8년 김대중정부 출범과 그해 봇물을 이뤘던 남측 언론계 및 재개 인사들의 방북 행렬 및 국가보안법을 무색하게 하는 이들의 대북 선물 공세,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98.6.16)과 금강산관광 시작(98.11.18)은 1997년 클린턴행정부 2기 출범 후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저들의 소위 ‘조선연착륙책략’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예정보다 1년여 이상 지체됐으나마 그해 8월19일 경수로 착공식이 거행된 것도 저들의 책략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붕괴를 겨냥한 고립압살전략을 포기하고 접촉을 통한 체제변질전략으로 넘어간 저들이 본격적인 대북 접촉에 나선 것은 놀랍게도 ‘대포동 충격’이었다. 이제 곧 붕괴될 것이라던 조선이 ‘광명성 1호’라는 이름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1998.8.31) 저들은 ‘미사일 충격’에 휩싸였고 이 사건 20일 전 한-미 양측의 언론플레이로 시작한 ‘금창리 핵시설 소동’을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본격적인 대북 접근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핵에 이어 미사일이라는 또다른 의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또 한 차례 정치적 담판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1999년 5월 미 특사 일행은 식량 60만톤이라는 값비싼 참관비를 지급하면서 형식적으로 지하시설을 돌아본 뒤 그해 9월 ‘페리보고서’를 발표했고 이후 클린턴행정부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2000년 1월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서방 각 나라들이 조선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나 될 듯 말 듯하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남측에서 그토록 터부시하던 7.4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이 6.15공동선언에 명기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미제의 대북봉쇄압살전술이 크게 후퇴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경수로 건설 공사에 탄력이 붙은 것이 이때부터였다.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4개월째인 2000년 10월12일 조-미 공동코뮈니케가 발표되면서 북-미 평화와 남북통일의 프로세스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미 평화와 남북통일의 전도에 중대한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미 군산복합체 파워엘리트가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을 목적으로 거대한 전쟁 음모를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린턴행정부 2기가 출범하면서 대북정책이 연착륙전략으로 뒤바뀔 즈음 저들은 미사일방어구상과 무제한의 군비증강을 통한 세계지배책략을 꾀했었다. 2001년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된 소위 신세기 전략이나 대테러전쟁은 1997년 6월3일 출범한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 구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저들 소위 매파 세력에게 조선이 추동하는 북-미 평화와 남북이 일궈내는 통일의 프로세스는 허용 한계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2001년 9.11 사건을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서서히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미제의 거대한 전쟁시나리오는 북-미 관계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할 때인 2000년 가을 그 마지막 손질이 가해지고 있었다. 계간 <워싱턴쿼털리> 2000년 겨울호에 실린 아프가니스탄 공격 구상은 한 예일 뿐이다. 당시 이 글을 쓴 이는 1990년대말까지 아프간을 경유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려던 미 석유회사 유노컬의 자문위원이었고 미국의 아프간전쟁 이후 중동 특사로 활약하는 잘메이 카를자드였다.

클린턴은 2000년 말 북-미 관계의 대미를 성대하게 장식할 자신의 평양행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중동문제에 바빴기 때문이라고 둘러대고 있지만 그의 평양행이 좌절된 것은 미 군산복합체 핵심세력의 반평화 반통일 책략 때문이었다. 클린턴의 평양행은 아프간과 이라크 침략을 시작으로 하는 거대한 전쟁시나리오 및 동북아 지배질서 재구축 음모를 무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준동에 순풍에 돛단 듯 흘러가던 남북관계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6.15선언 이후 남북 당국간 회의에서 처음으로 ‘결렬’의 징후가 감지된 것이다. 바로 2000년 12월 평양에서 열린 4차장관급회담에서부터였다. 이후 남북관계도 모두 소강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PNAC가 2000년 9월 발표한 <미국 국방의 재건> 보고서에서 클린턴행정부 집권기를 가리켜 ‘미국 국방의 공백기’라고 지적하면서 ‘차기 대통령의 군비증강 의무’를 적시한 대로 민주당 집권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쿠데타에 버금가는 선거부정과 개표 시비를 뒤로한 채 부시가 백악관에 입성한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제네바합의 수정론’ ‘화력발전소 대체론’ 등을 퍼뜨리며 합의 파기의 속셈을 드러냈다. 저들은 대북정책을 원점에서부터 재고한다고 발표했고 결국 저들의 말대로 북 핵 사태는 1991년 11월 1기 부시행정부가 한반도에서의 전술핵무기 철수를 선언하고 남북이 비핵화공동성명을 발표하기 이전 상태로 회귀하고 있다. 제네바합의의 운명 역시 이미 예정된 수순대로 파탄지경에 빠졌음은 물론이다.

부시행정부가 충분히 인지한 가운데- 사실은 치밀하게 준비한 가운데- 9.11 사건은 터졌고 급기야 조선에 대한 부시행정부의 포위전술은 거의 무조건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요구하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2000년 10월6일 발표된 국제테러에 대한 조-미 공동성명을 무시한 채 ‘조선 단독 반테러선언’을 요구했고 이란과 시리아 등 조선의 전통 우방국들의 테러개입 정보를 불라고 강박했다. 저들의 반테러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나라는 모두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적으로 간주된 나라는 선제공격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강도적 논리 앞에 조선은 막다른 골목으로 밀리고 있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감은 순식간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사그러지는 듯했다. 소위 대테러전쟁이라는 명분 하에 남쪽에서도 오래 전 사라졌던 ‘멸공’ 구호가 다시 등장했고 남북은 다시 대결 구도로 회귀하는 듯 했다. 그러나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조성된 한반도 정세는 이미 미국이나 미국을 추종하는 일부 반통일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없었고 조선의 대응 또한 단호했다. 제네바합의 이행을 미국이 거부할 경우 자신들도 이를 포기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미국의 일탈을 막았고 마침내 2001년 11월말 부시행정부는 찰스 카트먼 KEDO 사무총장을 평양에 보내 경수로 품질보증서에 서명하면서 공사 추진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네바합의 파기를 통한 북-미 평화 및 남북통일프로세스의 파탄을 노린 저들의 책략은 계속됐다. 제네바합의 무용론과 함께 조선의 핵 개발설을 퍼뜨리면서 한편으로는 북 핵 조기사찰론을 제기하며 조선을 압박했다. 급기야 2002년 1월29일 부시는 이란과 이라크 및 조선을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지칭하는 지경에 이른다. 조선이 폐연료봉 봉인 작업을 100% 완료한 마당에 미국이 일방적으로 제네바합의 이행 책임을 모면할 길이 보이지 않자 저들은 우라늄농축 방식의 핵개발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2001년 말부터 거론되기 시작해 2002년 10월3-5일 어렵사리 이뤄진 미 대통령 특사의 방북은 우라늄농축 소동을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이라크 침략전을 위한 내부 정비를 서두르면서 한편으로 북 핵 위기를 조장한 것은 2000년 9월 PNAC 문건을 청사진으로 하는 4개년 국방검토보고서(2001.9.30)의 내용을 그대로 집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다른 한 곳에서는 현상을 유지하는 전략”으로 풀이되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 (소위 ‘원-플러스 전략’)이 그것이었다.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거대한 전쟁터로 만들면서 남북간 대립과 북-미 군사적 대치상태를 기본 틀로 하는 남북분단관리체제를 다시 복원시키는 것이 바로 이 전략의 요체였다.

북 핵 난동 이면에 감춰진 저들의 속셈은 3자회담(2003.4.23-25)과 6자회담(2003.8.27-29)을 거치면서 서서히 그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조선의 일방적 무장해제를 주장할 뿐 조선의 합리적인 해법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대북 적대관계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빚어진 조-미 불협화음은 저들의 흉폭한 9.11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1994년 제네바합의의 기본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부시행정부는 이 합의 불이행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 합의를 온전히 이행할 수밖에 없으며 그동안 북 핵 난동으로 빚어진 ‘새로운 사태’(제2 핵 위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또 한 차례 북-미 대타협에 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잭 프리처드 전 미 국무부 대북교섭담당 대사는 10월14일(미국시간) 한반도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 의회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미국이 조선과 직접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데 대해 비판하면서 “양자협상을 전개하지 않으면 6자회담만으로는 핵 위기를 완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은 최근 워싱턴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클린턴 정권 아래서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맡았던 역할을 수행할 ‘고위급 대북특사’를 부시행정부도 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월 베이징의 3자회담에 이어 8월 6자회담을 했음에도 미국의 비타협적 태도로 핵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 조선은 계속 ‘핵 억제력 강화’를 언급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페리 특사의 평양행(1999.5)과 같은 돌파구가 필요함을 은연중 강조한 것이다. 워싱턴타임스는 또 슐츠 장관의 말을 전하면서 국무부내 온건파들이 1994년의 ‘제네바 기본합의’에 이어 ‘제2차 기본합의(Agreed Framework II)’의 체결을 은근히 바라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시행정부 일각에서 밑도 끝도 없는 ‘11월 6자회담 재개’설을 흘리기도 하지만 다시 조선을 다자회담장에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적대시정책 포기와 불가침조약 체결이라는 북측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후속 6자회담 조기 개최설은 북측과의 대타협이 아니고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 더 이상 시간을 끌 여유가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10월20일 미 USA 투데이가 “미국, 북한 달래기 시도” 제하의 기사를 내보낸 것이나 영국 신문 파이낸셜 타임스 독일판(FTD)이 20일 ‘부시, 대북연합 구성 노력’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이 연말까지 한.중.일.러와 북 핵 해결방안에 대한 합의문을 타결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한 것은 부시행정부가 버틸 시간이 연말을 넘길 수 없음을 웅변한다.

부시행정부가 제네바합의 9주년이 되는 21일(한국시간) ‘대북 안전보장 문서화’의 형식과 관련해 양국간 적대관계 해소를 선언한 ‘조-미 공동코뮈니케’(2000.10.12)를 일본 언론에 흘린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날 일본의 교도(共同)통신은 워싱턴발 기사에서 9월말 뉴욕에서 열린 ‘남-북-미-중-일’ 5개국 정부당국자 비공식 모임에서 미국측이 ‘적대시정책 포기 방안’을 묻자 리근 조선 외무성 미주국 부국장은 공동코뮈니케 문건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1953년에 체결한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키로 합의한 이 문건은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차수)이 백악관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과 합의한 것으로 북-미 평화와 남북통일의 프로세스를 구체화할 수 있는 중요한 문건이다. 21일 미국측이 이 문건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은 단지 이 문건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을 수용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 아닐까?

한때 ‘정밀타격’ ‘맞춤봉쇄’ ‘군사적 옵션’을 입에 올렸던 미국이 이제 조선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린 것은 바로 조선의 핵 전략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조선의 핵 억제력 강화 발언을 평가절하하며 애써 이를 무시하려는 태도가 역력하지만 조선의 ‘핵 억제력’ 증강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때가되면 물리적으로 공개할 것”(외무성대변인 10월16일 회견)이라거나 “실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말(외무성 대변인 10월18일 담화)은 허투루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조선을 정밀타격하거나 강압으로 무력화시킬 수 없는 한 조선의 핵 억제력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부시행정부는 힘겨운 타협을 할 수밖에 없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미국이 제네바합의를 온전히 이행했더라면 어쩌면 저들의 남북분단관리 영구화 책략은 그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 조-미 양국이 합의를 성실히 이행했다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정세는 그 자체로 일단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부시행정부는 그네들 스스로 시작한 북 핵 난동으로 인해, 또 ‘미국의 난동’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장장 아흐레나 침묵하며 핵 위기감의 확산을 방치했던 조선의 핵전술로 인해 미국은 또 한 차례 남북분단관리를 노리는 자신의 손발을 묶고 조-미 평화와 남북통일을 담보하는 대타협에 응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