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 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의 대립구도에 대하여

- 민주노동당 발전특위 보고서와 관련한 논쟁에 대한 소견 -

대표집필 최성원 / 2003 10 21

 

1) 최근 인터넷에서 민주노동당 발전특위가 작성한 문건에 관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김창현 동지가 그 문건에서 드러난 몇 가지 결함을 지적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자, 장석준 동지와 김현우 동지가 각각 반비판을 전개하였다.

필자의 소견을 피력하기 전에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 문건을 예사롭게 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문건은 6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계기로 하여 민주노동당을 더욱 강화발전시키고, 앞으로 5년 동안 민주노동당이 나아갈 진로를 제시하는 발전전략 초안이다. 최종안이 아니라 초안이므로 당내토론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제시된 당의 발전전략에 대해서 당내에서 대립각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의 논쟁은 여러 가지 논제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필자가 판단하기에 가장 중심적인 것은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의 대립구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제다. 김창현 동지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논제를 서술하면서 그 문건의 발전전략기조를 비판하였고, 장석준 동지와 김현우 동지는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라는 논제를 서술하면서 김창현 동지의 비판에 반비판을 가했다.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라는 논제는 반비판을 전개한 두 동지들이 자의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고, ≪민주노동당 강령이 의미하는 바≫(장석준)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라는 논제에 관한 서술은 불가피하게 민주노동당 강령에 관한 서술로 연장되는 것이다.

논쟁의 대척점에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논제도 역시 김창현 동지의 개인적 발상이 아니라 자주, 민주, 통일의 실현을 위하여 투쟁하는 민족민주운동의 전략과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논제에 관한 서술은, 불가피하게 민족민주운동의 반독점민주화 강령에 관한 서술로 연장되는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민주화 강령이라는 개념 대신에 사용하는 반독점민주화 강령이라는 개념은, 민족민주운동의 발전단계에 따라 반파쇼민주화 강령과 반독점민주화 강령을 구분하여야 할 필요성에 따라 필자가 제기한 새로운 개념이다. 지난 1980년대 말에는 민주화 강령에 나오는 민주화라는 개념을 반파쇼민주화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였으며, 따라서 반파쇼민주화운동의 내용은 집권한 군사파쇼세력과 그 세력의 계급적 기반인 지주와 매판자본가들을 제거하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런 까닭에 반파쇼민주화운동에는 반파쇼투쟁과 더불어 반지주, 반매판투쟁이 포함되었으며, 반파쇼민주화운동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전략과업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변하였다. 미제는 식민지군사파쇼세력 대신에 식민지부르조아개량세력을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내세웠으며, 지주와 매판자본가들이 아니라 제국주의독점자본에 예속화된 식민지독점자본이 식민지부르조아개량세력의 계급적 기반으로 등장하였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은 이전처럼 매판자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산업전반을 직접 틀어쥐고 착취하고 있으며, 미제의 세계화 전략에 따라 제국주의독점자본에게 더욱 철저하게 예속화된 식민지독점자본이 식민지노동계급과 근로인민대중을 이중적으로 착취하고 있다. 필자가 사용하는 반독점민주화운동, 반독점민주개혁이라는 개념은, 민족민주운동의 민주화 강령이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전략과업으로 제시하였음을 해명하면서, 변화된 오늘의 현실에 조응하여 민주화 강령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한 개념들이다. 그 새로운 개념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상술하겠다.  

당의 발전전략에 관한 논쟁을 왜 강령문제로 끌고 가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나, 당의 발전전략과 당의 강령이 상호분리되지 않으므로 발전전략을 논하는 과정에서 강령에 관한 문제를 논하는 것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대치의 평행선을 긋고 있는 쌍방의 논쟁범위가 당의 강령까지 연장된다는 점에서 이번 논쟁은 비중이 무겁고 중요하다. 그리고 이론전개가 자못 복잡하게 된다.

주지하는 대로, 민주노동당에는 여러 정파들이 집결하여 있다. 고전이론을 신봉하는 정통좌파도 있고, 사회개량주의를 설교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있으며, 자주, 민주, 통일의 강령을 들고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에 따라 투쟁하는 민족민주대오도 있다.  

그런데 필자가 심각하다고 느끼는 문제는,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통좌파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을 배척하면서 자기들의 비과학적 견해를 고집하는데도, 민족민주대오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논쟁을 벌이는 것만으로는 민주노동당을 강화발전시킬 수는 없지만, 민주노동당을 강화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의 발전전략에 관한 논쟁이 불가피하며, 그 논쟁은 비과학적인 견해를 고집하는 정파들과의 논쟁으로 되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는 민족민주대오는 비과학적인 견해를 고집하는 정파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진보적 대중정당과 진보적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입증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 반비판자들이 제시한 핵심개념인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라는 개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더 정확하게 말해서 민주노동당 강령의 문구를 인용하면, 그 말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제한≫과 ≪생산수단의 사회화의 시작≫(장석준)을 의미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제한한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소유를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적 소유를 제한하는 목적이 사회적 소유를 확대하기 위함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의하면, ≪사회적 소유는 국가적 소유, 공공적 소유, 협동조합 소유, 민주적 참여기업 등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시작한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시장적 요소를 적절히 통제활용하는 가운데, 노동자를 비롯한 생산주체들이 생산수단을 민주적으로 점유≫(이것은 장석준 동지 민주노동당의 강령문구를 인용한 것이다)하는 것이라 했거늘,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라는 개념이다.

반비판자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라는 개념을, 민주노동당 발전특위가 작성한 문건에서 나온 당의 기본정책개념을 인용하여 표현하면, ≪사회공공성 강화≫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라는 말과 사회공공성의 강화라는 말은 동의어다. 그들이 말하는 사회공공성이란 ≪시장이나 이윤과 상관없이 소비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의료, 교육, 주택, 운수, 통신, 에너지, 환경 등의 공적 부문에서 형성되는 사회공리적 성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장석준 동지가 언급한 사회주의 성격의 강화라는 말은 공공부문에서 사적 소유를 제한하고 공공부문의 생산수단을 공유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민주노동당 발전특위가 작성한 문건에 의하면, 공공부문에서 생산수단을 공유화하고 그것을 여타의 사회경제부문까지 확대한다는 것이다. ≪사회공공성의 확대≫라는 개념은 사기업을 공기업으로 전환함으로써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제한하고 공유화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강령에 따르면, ≪대기업 가운데 공공성이 높은 부문인 통신, 운수, 병원, 학교 등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반비판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대선후보가 제시하였던 무상의료정책과 무상교육정책 등을 사회공공성을 확대하는 정책대안으로 이해한다.

필자가 지적하는 것은, 그들이 사회주의적 성격을 운운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라는 개념은 전인민적 소유가 아니라 공기업적 소유라는 의미이며,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개념도 사회주의적 사회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공기업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강화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공기업적 소유를 확대하는 것에 불과하지, 자본주의사회의 성격을 사회주의적 사회의 성격으로 개조변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은, 그 성격을 강화하는 형태와 방도가 아무리 급진적이라고 해도 사회성격을 개조변혁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공기업적 소유를 아무리 확대강화하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민주적으로≫ 통제한다고 한들 자본주의사회의 성격이 개조변혁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성격의 개조변혁은 사회경제의 공공부문을 사회화하고 그 범위를 점차 전사회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공공부문의 사적 소유를 제한함으로써 민중에게 ≪복지혜택≫을 주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여 사회성격의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사회변혁운동의 발전전망을 팽개치고 자본주의 몸통에 사회주의를 모방한 깃털이나 몇 개 달아놓으려는 사회개량주의자들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장석준 동지는 사회주의 성격의 강화를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사회민주주의(의회민주주의)≫를 언급하였는데, 그가 말한 사회주의 성격의 강화는 사회주의와 대립되는 사회개량주의의 실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와 사회개량주의는 아무런 매개장치가 없어도 서로 직통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양적으로 확대하면 혁명을 하지 않아도 사회주의가 실현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노동계급의 변혁의지를 마비시키고, 자본가계급에게 투항하도록 유인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초는 사회역사의 질적 변화를 부인하고 양적 변화만을 인정하는 속류 진화론이다.

사회주의적 성격의 강화를 논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무지몽매하여 알지 못하는 것, 혹은 교활하기에 알면서도 언급을 회피하는 것은, 사회변혁이론의 두 가지 논제다. 필자는 그 두 가지 논제를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는 문제와 사회성격을 개조변혁하는 문제라고 본다.

그런데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하여 민중에게 복지혜택을 주자고 하면서 사회개량주의를 설교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는 문제와 사회성격을 개조변혁하는 문제를 완전히 분리시키고,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는 문제를 외면하고, 사회성격을 개조변혁하는 문제를 내던지고 사회공공부문을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개량하는 공유화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는 문제를 논하지 않으면서 사회성격을 개조하는 문제를 논하는 경우, 사회공공부문을 개량하고 그 개량범위를 양적으로 확대하여 소위 ≪대안사회≫를 건설하려는 진화론적 사회개량주의의 유해한 환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민주노동당 안에서 사회개량주의를 설교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폭로비판해야 할 것은, 그들이 사회변혁세력이 어떻게 집권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집권한 이후에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반동적 견해를 유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진보≫를 자처하면서 민주노동당에 모여든 정파들이 사회민주주의, 사회개량주의의 반동성에 매몰되어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세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첫째로, 사회주의진영의 붕괴 이후 극심한 사상적 혼란에 휘말리면서 사회변혁의 역사적 전망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소위 ≪세계화≫를 앞세운 미제국주의의 무차별 공격에 겁을 집어먹고 사회변혁의 역사적 전망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로, 1990년대 이후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양적으로 증가한 소자산계급이 사회민주주의, 사회개량주의를 발생시키는 온상으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자산계급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개인노동의 이중성을 사회경제적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동요하면서 양자를 절충하려는 기회주의적 성향을 지닌다.

 

3)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은 ≪사회공공성≫을 확대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성격을 개조변혁하는 것이다. 민족민주운동이 말하는 바,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여 사회성격을 개조변혁하는 것은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성격을 개조변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성격을 개조변혁하는 것은 식민지적 성격과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개조변혁하는 것이다.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이 해명한 대로, 식민지성을 민족자주성으로 개조변혁하는 것은 민족해방혁명에 의해서 가능하며,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개조변혁하는 것은 민주주의혁명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민족민주대오는 제국주의지배체제와 식민지예속정권을 제거하는 것을 선결과업으로 보면서 반미자주화운동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제거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제에 대한 이론적 해명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정통좌파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족민주대오를 소위 ≪민족해방파≫라고 칭하면서 민족민주운동을 소부르조아 민족주의운동으로 왜곡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개조변혁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함으로써, 민족민주운동을 소부르조아 민족주의운동으로 왜곡하는 정통좌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민족민주운동이 가장 과학적이고, 최고수준에서 완성된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에 따라 투쟁하고 있음을 논증하려 한다.

이 글의 논지를 명료화하기 위해서 우선 해명할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성격을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로 보는 사회성격론의 문제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성격을, 정통좌파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부인하는 개념인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는 개념으로 인식한다. 식반자론에 대한 논쟁이 진행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인데, 필자는 이 글에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제기되는 세 가지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로, 현재 우리 사회는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확장심화되어 대기업독점체가 중소기업을 종속화함으로써 생산과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산업자본이 은행자본에 종속됨으로써 금융자본이 형성되고,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것은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와 독점자본주의사회에서 드러나는 현상적 공통성이다.

둘째로, 현재 우리 사회의 대기업독점체와 금융자본은 국제독점체와 국제금융자본에게 각각 식민지적으로 예속화된 사회다. 이것은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와 독점자본주의사회에서 드러나는 본질적인 상이성이다.

셋째로, 현상적 공통성은 본질적인 상이상에 의해서 규정되고 규제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적 성격이 식민지적 성격에 의해서 규정규제되는 반자본주의적 성격임을 의미한다. 식민지적 성격에 의해서 규정규제되는 반자본주의적 성격은, 자본주의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식민지독점자본이 외형적으로는 팽창하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독점자본에 의한 예속화가 심화되고, 그 두 독점자본의 이중적 수탈이 가중됨으로써 민중생활이 궁핍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발생하는 민중생활의 궁핍화 현상을 가리켜 흔히 부유층과 빈곤층의 양극화, 대량실업의 확산, 절대빈곤인구의 증가라고 부른다. 지금 노무현을 우두머리로 하는 식민지예속정권이 집권 7개월 반만에 전반적 위기에 빠지게 된 원인은, 저들이 말하는 소위 ≪국정실패≫에 있지 않고, 제국주의의 정치군사적 지배와 사회경제적 수탈을 끊임없이 가중시키는 식민지적 성격에 있다.

 

4)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해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으며, 이것이 논쟁거리로 될 수 없다.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개조하는 것은 집권한 사회변혁세력이 사회성격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의 성격을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심의 초점은 이것이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회성격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될 수 없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는 시점과 사회성격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성하는 시점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는 것으로 사회변혁과업이 일거에 완수되는 것이 아니라, 집권한 사회변혁세력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 사회성격을 개조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자본주의사회가 사회주의화로 이행하는 전과정에서 진행되는 사회변혁의 경로는, 마치 식칼로 두부를 잘라놓은 듯 자본주의사회와 사회주의사회로 양분되지 않는다. 인체혈액은 적혈구와 백혈구로 나누어지지만, 사회변혁의 경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분절되지 않는다. 혁명의 과정은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는 단계와 집권한 사회변혁세력이 사회성격을 개조하는 단계로 구분되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이다.

반비판자들은 민족민주대오가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 외부의 적대세력들로부터 이념공세를 받지나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개념 대신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만, 그런 의혹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민족민주대오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현 시기 사회변혁운동이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상술하겠다.

 

5)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하는 문제는, 집권한 사회변혁세력이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개조한 새로운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고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개조하였다고 해서 그 사회를 사회주의사회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 사회주의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권한 사회변혁세력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으로 교체하는 이행과정에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개조하는 형태, 방법, 속도는 어떠한 조건에서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한, 아직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의 개조가 완료되지 못한 사회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 사회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사회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성격이 아직 남아있는 사회다.

어떤 사회의 성격을 논할 때, 자본주의사회와 사회주의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 해결되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문제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고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개조하고 있는 중이라도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였다면 그 사회를 사회주의사회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회를 어떤 사회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민족민주운동이 말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에서 제시된다.

비판자인 김창현 동지가 언급했던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김창현 동지의 표현대로, 그것은 ≪기간산업을 장악하고 그것의 지도적 지위를 보장하면서 그것을 절대다수의 이익에 맞게 운영해나가는 것≫이다. 기간산업을 장악한다는 말은 자주적 민주정권이 반독점민주개혁을 시행함으로써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이 소유하고 있는 대기업, 은행, 운수, 통신, 대외무역, 토지 등을 사회화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가 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자주적 민주정권이라는 개념은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에서 제시된 핵심개념인데, 필자는 이 개념에 관련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아래의 내용을 확인하고자 한다.

첫째, 자주적 민주정권의 지위문제다. 자주적 민주정권은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를 개조변혁하는 사회변혁주체로서의 지위를 가지지만, 그 사회를 개조변혁하는 과정이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분단체제를 제거하고 연방통일정권을 수립하는 통일과정과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병진된다는 점에서, 자주적 민주정권의 지위는 독자적으로 될 수 없다. 자주적 민주정권의 수립은 곧 연방통일정권의 수립으로 직결되므로, 자주적 민주정권은 연방통일정권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성격을 개조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업은 연방통일정권의 지도하에서 자주적 민주정권이 담당하는 정치과업으로 된다. 연방통일정권의 일부로서, 그 정권의 지도를 받는다는 점에서 자주적 민주정권은 독자적인 지위를 갖지 못한다. 지역통일전선이 민족통일전선의 일부이므로 전국적 범위에서 분립적, 독자적 지위를 갖지 못하는 것과 동일하게, 자주적 민주정권도 연방통일정권의 일부이므로 전국적 범위에서 분립적, 독자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이러한 지위문제는 필자가 이전에 인터넷에서 진행한 ≪상대적 독자성론≫에 대한 비판과 전국적 관점에 대한 서술에서 이미 해명한 바 있다.

둘째, 자주적 민주정권의 성격문제다. 자주적 민주정권은 전국적 범위의 반미자주화운동이 민족해방혁명으로 발전하여 미제의 식민지지배체제를 제거함으로써 수립되는 혁명정권이다.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이 소유하고 있는 기간산업을 무상몰수하여 사회화한다는 점에서 볼 때, 자주적 민주정권은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의 성격을 지닌 정권이며,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의 범주에 속하는 특수한 유형이다. 자주적 민주정권의 성격문제도 역시 필자가 이전에 인터넷을 통하여 이미 해명한 바 있다.

셋째, 자주적 민주정권의 임무문제다. 자주적 민주정권의 역사적 임무는 제국주의자들의 재침책동을 분쇄하여 민족해방혁명의 전취물을 보위하고, 전복된 식민지예속정권의 재건을 획책하려는 반혁명세력을 색출소멸하는 한편, 반독점민주개혁을 전면적으로 시행하고, 혁명기지의 사회주의정권과 합작하여 연방제 통일의 과업을 완수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재침책동을 분쇄하고 혁명의 전취물을 보위하는 임무, 반혁명세력을 색출소멸하는 임무, 연방제 통일과업을 완수하는 임무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생략하고, 반독점민주개혁을 시행하는 임무에 대해서만 논하고자 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개념을 민족민주운동의 시각에서 다시 정리하면, 자주적 민주정권이 시행하는 반독점민주개혁에 의하여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이 소유하고 있던 기간산업을 사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주적 민주정권의 반독점민주개혁은 기간산업의 생산을 사회주의적으로 완전히 개조함으로써 적어도 기간산업부문에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완결적으로 형성시킨다. 이로써 기간산업부문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모순, 다시 말해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수단 및 생산물의 사적 소유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본모순이 완전히 제거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개념은 두 가지 대칭적 의미를 포함한다.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문제와 독점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문제다. 그 대칭적 의미의 차이는 아래와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된다.

첫째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이 소유하고 있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데 한정된다. 그에 비하여 독점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은 자본가계급 일반이 소유하고 있는 생산수단 전체를 사회화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둘째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수행하는 직접적인 담당자는 자주적 민주정권이다. 자주적 민주정권은 사적 소유가 폐지된 생산수단을 사회전체의 공동소유(전인민적 소유)로 만들고 국가경제계획의 통일적 관리하에 둔다. 이러한 사회화의 형태를 사회주의적 사회화라고 부른다.

그에 비하여 독점자본주의사회의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주체에 대한 반비판자들의 견해는 모호하다. 반비판자들은 전인민적 소유에 의한 사회화를 국가권력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국유화≫라고 왜곡하면서 사회주의 국가권력이 노동을 소외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이유에서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사회화를 반대한다.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사유화도 반대하고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사회화도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견해는 ≪생산자 주권의 실현≫이라는 미명하에 국가권력의 경제개입을 축소하며, 중앙집권적 통제를 지방분권적 자치로 대체함으로써 시장기능을 사회주의적으로 조절한다는 소위 ≪노동자자주관리제≫로 흘러간다. 필자는 여기서 ≪노동자자주관리제≫에 기초한 시장사회주의가 파산한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6) 민족민주운동이 반독점민주화 강령을 실현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의 공공부문을 사회화하여 민중에게 ≪혜택≫을 주는 ≪복지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민족민주대오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민중민주주의라고도 칭한다. 어떤 동지들은 자주적 민주주의라고 칭하기도 한다. 민족민주운동이 사용하는 이 세 가지 용어가 지시하는 의미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는 어떤가?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는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여 기존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요소를 약화소멸시키고 사회주의적 성격과 요소를 창출강화시키는 이행과정 중에 있는 혁명적 사회다.

자본주의적 성격과 요소를 약화소멸시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사회화한다는 의미이며,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비예속적 중소자본이 소유한 생산수단은 사회화하지 않고 용인한다는 의미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에서 제국주의독점자본, 식민지독점자본, 비예속적 중소자본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모두 사회화함으로써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주의적 성격을 창출강화하고 자본주의적 성격을 약화소멸하면서 사회성격을 개조하는 일련의 발전단계를 불가피하게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래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이행하는 혁명과정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근로인민대중과 여러 종류의 착취계급 사이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복잡한 양상으로 표출되며 상호영향을 미친다. 근로인민대중과 착취계급 사이에서 발생한 적대적 모순은, 사회주의사회로 이행하는 혁명과정에서 근로인민대중과 제국주의독점자본 및 식민지독점자본의 적대적 모순, 그리고 근로인민대중과 비예속적 중소자본의 비적대적 모순으로 분화된다.

따라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이행하는 혁명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식민지독점자본을 대하는 문제와 비예속적 중소자본을 대하는 문제를 구분하여 사고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과 제국주의독점자본, 식민지독점자본은 언제나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으므로 그 두 종류의 독점자본을 제거하는 반독점민주개혁의 과정은 급진적이고 강제적이고 비평화적이다. 그러나 집권 이전에 형성되는 지역통일전선은 물론, 지역통일전선에 기초하여 수립되는 자주적 민주정권에서 노동계급과 비예속적 중소자산계급은 이미 전략적 동맹관계로 결합되어 비적대적 모순으로 전화되어 있으므로 비예속적 중소자본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과정은 점진적이고 자발적이고 평화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정통좌파는 혁명과정을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으로만 보는 무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제한하면 노동과 자본의 모순을 비적대적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식민지독점자본과 비예속적 중소자본을 어떻게 구별하고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도 없다. 이러한 몰이해가 그들을 시각장애자로 만든다.

 

7) 정통좌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라는 개념을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계급 일반의 사적 소유이라고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강령으로 삼고 있는 민족민주대오의 이해는 정확하다. 민족민주대오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이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소유라고 이해한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여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폐지하기 시작한 사회는, 민족민주운동의 용어로 표현하면, 자주적 민주정권이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는 사회다. 민족민주운동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새로운 사회를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의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그 두 독점자본의 생산수단이 사회화된 사회로 본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여 사회주의적 성격을 창출강화하고 자본주의적 성격을 약화소멸하는 일련의 개조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은, 사회변혁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여 수립한 정권은 자주적 민주정권인데, 그 정권이 시행하는 중요한 과업이 반독점민주개혁이다. 반독점민주개혁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그 두 독점자본의 생산수단을 사회주의적으로 사회화한다. 반독점민주개혁의 시행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사회변혁세력이 집권하고 사회성격을 개조변혁하는 과정을 이해할 때, ≪혁명(변혁)≫이라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면 우선 심리적 거부감부터 느낀다. ≪개혁≫이라는 말을 들으면 ≪개량≫이라는 말을 머리 속에 금방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심리적 거부감은 개혁과 개량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해소된다.

개혁은 말 그대로 혁신적으로 개조한다는 뜻이다. 개량은 정권의 본질이 교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성격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피상적인 변화만 일어난다는 뜻이지만, 개혁은 정권의 본질이 교체되고 사회성격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혁명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성격을 개조하기 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혁명(변혁)이라는 말은 사회성격의 전면적,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개념이다.

민족민주운동이 말하는 민주개혁이라는 개념은, 사회성격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민주주의혁명이라는 개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은 민주주의혁명(민주개혁)의 개념에는 일반민주주의혁명과 민중민주주의혁명이 모두 포함된다는 것, 그리고 현 시기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민주주의혁명의 과제는 불철저하게 진행된 일반민주주의를 완성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중민주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반민주주의는 일명 부르조아민주주의, 또는 형식적 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데, 반봉건민주화의 과업을 수행하는 민주주의혁명은 정권의 본질이 교체되고, 사회성격을 개조하는 혁명으로 된다. 그에 비해,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는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의 민주주의혁명은 반제반봉건민주역량에 의해서 수행됨으로써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된다.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는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반파쇼민주화의 과업을 수행하는 민주주의혁명은 민족해방혁명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반제반파쇼민주역량에 의해서 수행되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으로 된다. 그러나 친미반파쇼세력이 반파쇼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경우에는, 민족해방의 과업과 반파쇼민주화의 과업을 인위적으로 분리시키고 반파쇼민주화의 과업만을 불철저하게 수행하게 되며, 따라서 정권의 본질도 교체되지 않고 사회성격도 개조되지 않으면서 일반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된다. 반면, 반제반파쇼민주역량이 반파쇼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경우에는, 민주주의혁명과 민족해방혁명이 반제민족해방을 선결과업으로 하여 상호결합되므로, 정권의 본질을 교체하고 사회성격을 개조하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 수행되고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오늘날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는 반봉건민주개혁, 반파쇼민주개혁을 경과하여 반독점민주개혁으로 전진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 같은 파쇼악법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매우 불철저하게나마 반파쇼민주개혁이 시행된 현재의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는 일반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한 사회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식민지예속정권을 전형적인 파쇼독재정권이라고 규정하기도 힘들다. 이 사회가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로 존속하는 한, 제국주의지배체제에 예속된 식민지예속정권의 독재가 계속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예속정권의 독재를 부르조아계급독재의 가장 악랄한 형태인 파쇼독재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식민지군사파쇼독재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현재의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는 반파쇼민주개혁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일반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과 더불어 반독점민주화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반파쇼민주화과업을 수행하는 경로가 반파쇼민주화운동에서 시작하여 반파쇼민주개혁의 시행으로 완성되듯이, 반독점민주화과업을 수행하는 경로도 반독점민주화운동에서 출발하여 반독점민주개혁의 시행으로 완성된다.

반독점민주개혁은 반미자주화과업이 완수된 이후에 자주적 민주정권에 의해서 시행된다. 자주적 민주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에는 지역통일전선이 추진하는 반독점민주화운동이 전개된다. 지역통일전선이 반독점민주화운동을 전개한다는 말은,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의 이중적 수탈을 반대하고, 식민지예속정권을 자주적 민주정권으로 교체하기 위한 광범위한 대중정치투쟁이 전개된다는 의미이다.

식민지예속정권을 자주적 민주정권으로 교체하기 위한 지역통일전선의 투쟁에서 제기되는 당면구호는 식민지예속정권 타도라는 전략구호가 아니라, 식민지예속정권을 타격하는 다양한 전술구호들이다.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의 이중적 수탈을 반대하는 지역통일전선의 투쟁에서 제기되는 당면구호는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을 타도하자는 전략구호가 아니라 민중생존권을 쟁취하자는 다양한 전술구호들이다. 현시기 반독점민주화운동은 이라크 파병반대투쟁을 대중적 차원에서 강력하게 전개함으로써 노무현정권의 식민지예속성을 타격하고 민족자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구호를 들어야 하며,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의 수탈을 가중시키는 경제개방책동을 타격하고 민중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구호를 들고 투쟁역량을 끊임없이 강화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은 반파쇼민주화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에 처음부터 식민지군사파쇼정권을 타도하자는 전략구호를 들지 않고, ≪국가보안법≫ 철폐, 폭압기구 해체, 광주학살주범 처단 등의 전술구호를 들고 투쟁역량을 끊임없이 강화발전시키다가 반파쇼민주역량이 식민지군사파쇼세력보다 우세하게 된 결정적 시기에 비로소 전략구호를 내걸고 투쟁하여야 했던 사정과 동일하다. (지난 시기 반파쇼민주역량이 식민지파쇼세력보다 우세한 적은 사실상 한번도 없었다. 반파쇼민주역량이 폭발적으로 강화발전하였던 1987년에도 반파쇼민주역량은 전술적으로 우세하였지 전략적으로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근로인민대중의 선진적 투쟁역량이 주도하는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를 든 지역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반미자주화운동을 앞세우면서 반파쇼민주화운동을 전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반독점민주화운동의 구호는 자주적 민주정권이 반미자주화과업을 완수한 이후에 시행하는 반독점민주개혁의 구호와 일치하지 않는다. 현 단계의 반독점민주화운동이 민중생존권 쟁취라는 낮은 수준의 구호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식민지군사파쇼정권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반파쇼민주개혁이 불철저하게 시행된 이유는, 그 개혁을 추진한다고 자처하는 집권세력이 미제에게 예속되어있는 식민지개량주의세력이기 때문이다. 만일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하여 반파쇼민주개혁을 시행하였다면 오늘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는 일반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철저히 실현하고, 민주주의혁명의 최고 수준의 과업인 반독점민주개혁을 시행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지적하는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 단계에서 반독점민주개혁을 시행하여 제국주의독점자본과 식민지독점자본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면, 사회주의 성격이 강화발전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 사회주의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전면적으로 실현된 이후부터 사회주의사회가 건설될 때까지의 혁명기에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은 소멸되어 가면서도 잔존한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를 개조변혁하는 혁명과정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단계를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 하는 데 있다.

 

8) 민족민주운동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를 반독점민주개혁을 시행한 민주적 사회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지배체제를 제거한 자주적 사회라고 본다. 그러므로 반독점민주개혁을 시행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새로운 정권을 자주적 민주정권이라고 규정한다. 혹자는 자주적 민주정권과 ≪민족자주정권≫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민주주의혁명과업을 포함하지 않고 민족해방혁명과업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는 ≪민족자주정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 정통좌파나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여기서 강조점은 반독점민주화가 아니라 반미자주화에 찍힌다. 필자가 반미자주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반독점민주화운동이 반미자주화운동과 결합되지 못하거나, 설령 결합되더라도 반미자주화운동을 전략적 중심으로 하여 결합되지 못하는 경우,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제국주의지배체제에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 반독점민주화운동이 반미자주화운동을 전략적 중심으로 하여 결합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경우, 독자적인 사회변혁운동으로 존립하지 못한다.

둘째로, 반미자주화가 실현된 이후에 반독점민주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지배체제를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서 반독점민주개혁을 시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매한 발상에 불과하다. 제국주의지배체제가 일정하게 개량되면 반파쇼민주개혁은 불철저하게나마 시행될 수 있지만, 반독점민주개혁은 제국주의지배체제가 제거되지 않고서는 시행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반파쇼민주개혁을 불철저하게 시행하는 정권과 반독점민주개혁을 철저하게 완수하는 정권은 그 본질이 서로 다른 정권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제국주의지배체제를 개량하는 식민지예속정권이고, 후자는 그 체제를 제거하는 자주적 민주정권이다.

민족민주운동이 이처럼 제국주의지배체제를 제거하는 문제를 선결과업으로 중시하는데 비하여, 반비판자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번 논쟁에서 나타난 대로, 제국주의지배체제를 논할 때 반비판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그들은 그 개념의 의미를 ≪노동 대 자본 간의 전세계적 투쟁에서 영미 주도의 금융자본이 전체 자본가세력의 수장이 되어 기세를 올리는 것≫(장석준)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지배체제에 대한 반비판자들의 인식은 제국주의자들이 투쟁기세를 올린다고 이해하는 정도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현 시기 정세는, 반비판자들이 빈약한 상상력으로 서술하는 것처럼, 미국 주도의 금융자본이 전세계 노동계급에 대한 투쟁에서 기세를 올리는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국제금융자본이 세계노동계급에 대한 투쟁에서 기세를 올린다는 식의 판단은 제국주의지배체제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어설픈 판단이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개념은 지배, 침략, 약탈, 착취, 파괴를 자행하는 현대제국주의체제를, 말 그대로, 세계화한다는 의미이다.

현대제국주의체제의 세계화, 그것은 제국주의가 정치, 경제, 군사, 문화부문에서 전세계를 식민지로 예속화하려는 책동이며, 전세계적 판도에서 침략전쟁과 자원약탈을 자행하려는 범죄다. 현대제국주의체제의 세계화는 식민지체제의 세계화와 동일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통좌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적대적 모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실제로 정통좌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글에서는 제국주의, 식민지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현대제국주의의 식민지체제를 제거하는 반미자주화과업에 대해서 외면하는 이유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적대적 모순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공부문을 강화확대하고 사적 소유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정통좌파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을 사회주의적으로 해결하는 근본문제에만 관심을 둔다. 정통좌파의 논리구조 속에서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적대적 모순이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 속으로 완전히 해소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적대적 모순이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에 근원을 두고있다는 것은 혁명운동의 기초상식이다. 비유로 말하면,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은 땅 속에 박혀있는 뿌리이고,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적대적 모순은 땅 위에 퍼져있는 거대한 나무줄기다. 땅 속의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 나무줄기를 자른다고 해도 다시 자라게 되는 것처럼,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했다고 해도 다시 뒤집히게 된다는 것 또한 혁명운동의 기초상식이다.

그런데 정통좌파의 이상한 논리대로 하면, 땅 위의 나무줄기는 그대로 두고 땅 속의 뿌리부터 잘라야 한다는 오류에 빠진다. 땅 속의 뿌리(자본과 노동의 모순)를 자르려면 땅 위에 퍼져있는 나무줄기(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모순)부터 잘라내야 한다. 사회를 변혁하겠다고 말하면서, 제국주의지배체제를 제거하는 문제를 외면하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은, 더 이상 좋게 표현할 수 없는, 분별력의 상실이다.

 

9) 정통좌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국주의지배체제를 제거하는 반미자주화과업을 외면할 뿐 아니라, 분단체제를 제거하는 조국통일과업에 대해서도 고개를 돌리고 있다. 왜 그런가? 그들은 조국통일의 과정이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혁명기지의 사회주의를 노동이 국가권력에 의해서 소외를 당하고, 개인의 자유가 국가권력에 의해서 억압당하는 소위 ≪국가사회주의≫라고 보고 있으므로, ≪이남의 자본주의정권≫과 ≪이북의 국가사회주의정권≫이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실현하는 통일을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의하면,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 극복되면서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통일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정권을 모두 교체하기 이전에는 통일이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것이 소위 ≪민중적 통일론≫의 논리구도다.

반비판자들은 민주노동당이 조국통일문제를 논하기 전에 선결해야 할 문제를 제기한다. ≪북한정권에 대한 당의 입장을 정리≫(김현우)하는 문제다. 그 문제는, 반비판자들이 표현한대로, ≪북한정권 성격에 대한 분석과 당이 북한 내에서 연대, 공조할 세력에 대해 판단≫(김현우)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북한정권 성격에 대한 분석≫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내용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드러나 있다. 그 내용은 혁명기지의 정권의 성격을 ≪국가사회주의≫의 성격이라고 하는 규정하는 것이다.

반비판자들이 혁명기지에서 연대공조할 세력에 대해서 판단하겠다는 말은, 혁명기지의 정권을 연대공조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혁명기지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반정부세력과 연대공조할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러한 견해와 주장은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인식이 황장엽 류의 모략선전 수준에 근접하였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반비판자들은 조국통일문제를 논하면서 왜 그렇게 완고한 반북성향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그들이 혁명기지의 사회주의의 성격을 소위 ≪국가사회주의≫라고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반비판자들의 인식이 ≪국가사회주의론≫의 망령에 감염되어있다는 데 있다.

민주노동당의 일부 인사들이 ≪국가사회주의론≫의 망령에 감염되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면,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의 상을 ≪민주적 사회≫라는 개념으로 해설한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장상환 교수의 주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민주적 사회주의와 민주노동당의 실천」이라는 글에서 ≪사회주의의 종별로서 국가사회주의,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가 있다.≫고 하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사회주의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상식 이하의 주장을 내놓았다. 사회민주주의는 명백하게 자본주의의 변종인데도 그것을 사회주의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그가 사회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회민주주의가 왜 사회주의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변종인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얼마나 관대하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내주는 인용문을 비판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장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사적 소유와 시장 조절을 용인하면서도 그 역사적 제한성을 인식해, 국가의 경제적 조절과 조절 수단을 기본적인 물질적 토대로≫ 하는 사회라고 한다.

시장경제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경제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사회적 결과물은 계급적 대립이므로 시장경제는 계급적 대립 속에서 형성되는 경제다.

그런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조절≫하는 사회가 어떻게 사회주의사회로 될 수 있을까? 계급적 대립을 조절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며, 계급적 대립이 존재하는 사회를 사회주의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흰색을 붉다고 하는 궤변이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의 조절이 ≪지배적인≫ 사회를 자본주의사회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조절이 중심적으로 되고 동시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의 조절을 보완적으로 용인하는 사회라면 사회주의사회라고 보아야 한다고 강변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 교수는 ≪사회적 소유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결합한 경제체제≫를 희망하고 있다.  

붉은 색과 흰색을 섞으면서 붉은 색을 좀 더 많이 넣으면 분홍색이 되지만, 사회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혼합하면서 사회적 소유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 ≪민주적 사회주의≫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양자택일의 문제이지 상호보완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소유와 시장경제는 하나의 사회성격 안에서 잡탕으로 뒤섞어놓을 수 없는 상호대립성을 지닌다. 생산수단을 사회주의적으로도 소유하고, 자본주의적으로도 소유하는 그런 사회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장 교수가 머리 속에서 상상한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잡탕사회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적 소유와 시장경제의 관계의 본질이 대립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상호보완적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사회개량주의다.

그런데 혹자는 오늘날 중국의 시장사회주의를 예로 들면서, 사회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융합한 ≪민주적 사회주의≫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중국의 시장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며, 탈사회주의화 과정에 진입한 이행과도기의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변종이다.

혹자는 민족민주운동이 말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리켜, 기간산업의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중심으로 하고 중소산업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보조로 하는 사회가 아니냐는 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장 교수의 ≪민주적 사회주의≫와 민족민주운동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떻게 다른 것인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사회는 기간산업의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확립하고 중소산업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도 차츰 개조해 가는 혁명적 사회이지, 사회적 소유를 중심으로 하고 사적 소유를 보조로 하면서 양자의 ≪장점≫을 결합한 절충적 사회가 결코 아니다. 장 교수가 상상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사회적 소유와 사적 소유를 절충한 하나의 완결된 개념이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는 양자를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유를 목적의식적으로 촉진시키고 전사회적으로 확립해 가는 이행과도기의 개념이다.

장 교수가 완결된 체제로서의 잡탕사회를 머리 속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에 ≪장점≫이 있다고 전제하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역사적 제한성≫이라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는 장점이 있을 수 없으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는 역사적 제한성이 아니라 사회역사발전을 본원적으로 차단하는 반역사성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의 반역사성을 부인하고 제한성으로 규정하는 장 교수의 견해는 존재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옹호하는 사회개량주의의 극치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에 장점이 있다고 착각하면서 자본주의를 너무도 관대하게 용인하는 장 교수의 시각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철폐한 사회주의사회를 평가하면 그 결과는 명백하다. 그는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맹렬히 비난하였다. ≪국가사회주의는 국유화 계획, 공산당 독재를 특징으로 한다. 국가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국가가 과잉비대하고, 국가관료와 전위정당이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인위적으로 분리시키고, 사회주의를 ≪민주적 사회주의≫와 ≪독재적 사회주의≫로 자의적으로 분류한다. 그들은 ≪독재적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나 있듯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주적 사회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은 정치적 측면,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정권의 성격문제에 집중되어있다.

장 교수가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정권은 어떠한 것인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의 자치를 기초로 하는 의회민주주의≫, 또는 ≪다수 국민이 중요한 문제를 직접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권이다.

그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은 ≪대중의 자치≫라는 개념인데, 그것은 중요한 문제를 대중이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가장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의미하며, 개인의 자유를 국가관료와 집권당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참된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그가 제기한 국가사회주의 비판은 사회주의가 ≪대중의 자치≫를 부인하고 ≪공산당의 독재≫를 실시했다는 ≪죄상≫을 폭로규탄하는 허황한 궤변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검토해야 할 문제는, 사회주의사회에서 당과 국가의 통치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치의 근본문제는 지방자치제와 중앙집중제로 표현되는 통치방식이 아니라 계급적 대립을 본질로 하는 민주주의와 독재의 문제, 다시 말해서 통치의 기본성격이다. 그러므로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이고, 중앙집중은 독재라고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사회주의사회를 통치하는 국가가 중앙집중제를 시행한다고 해서, 그것을 ≪공산당의 독재≫라고 규정하는 것은, 중앙집중제와 독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다.

문제의 핵심은 지방자치제냐 중앙집중제냐 하는 통치방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냐 독재냐 하는 정권의 기본성격을 논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장 교수는 통치방식의 개념과 통치의 기본성격의 개념을 혼동하고 뒤섞어놓았다. 그가 제기한 국가사회주의 비판이 허황한 궤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러한 개념의 혼동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급적 대립이 청산된 사회주의사회에서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독재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사회주의화된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적으로 협동화된 농민의 근로계급동맹을 골간으로 하여 형성된 혁명적 당이 지도하는 국가의 통치를 받는 사회주의사회에서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독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근로인민대중이 자기 자신에게 독재를 실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동일한 원리에서 그러하다.  

만일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독재가 실시되는 사회주의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계급적 대립이 청산되지 못한 사회이므로 사회주의사회가 아니다. 계급적 대립이 청산된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근로인민대중과 국가의 관계에서 계급적 대립을 본질로 하는 독재의 문제가 발생할 수 없다. 물론 사회주의사회에 잔존하는 자본주의적 요인에 대해서는 독재를 실시하겠지만, 그것은 사회주의사회의 통치의 성격을 결정하는 근본문제가 결코 아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통치의 성격은 철저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민주적이다.

그러나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지난 시기 소련형 사회주의사회에서 ≪공산당의 독재≫를 실시하였다고 말하는데, 그것도 또한 오류다. 소련형 사회주의사회에서 근로인민대중과 국가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문제는 계급적 대립을 본질로 하는 독재의 문제가 아니라 관료주의의 문제였다. 독재와 관료주의는 전혀 질이 다른 문제다. 독재는 계급적 대립에서 발생하는 문제지만, 관료주의는 통치기구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에게 아직 청산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비사회주의적 요인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관료주의는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계급적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인민성의 결핍, 도덕적 타락, 무능력, 무사안일주의, 형식주의, 독단주의, 보수주의, 요령주의, 주관주의, 완고편협한 태도 등이다.

사회주의사회이건 자본주의사회이건 봉건사회이건, 관료제도가 있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통치는 관료들에 의해서 실시되기 때문에 관료제도는 어느 사회에서나 불가피하다. 만약 관료제도 자체를 부인하면, 통치를 부인하는 무정부주의나 생디칼리즘, 또는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사회주의사회의 관료제도에 청산해야 할 비사회주의적인 요인이 있다는 사실은 소련형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에서 입증된 바 있고, 혁명기지에도 아직 비사회주의적인 관료주의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한 관료들이 일부나마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교조주의나 수정주의가 사회주의의 본질에서 발생한 모순이 아닌 것처럼, 사회주의사회의 관료주의도 사회주의의 본질에서 발생한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관료주의를 인식하는 관점은 계급적이어야 한다. 계급사회의 반동관료와 사회주의사회의 타락한 관료를 동일하게 판단하는 것은 몰계급적이다. 계급사회의 반동관료는 근로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억누르는 반민중적 독재세력이지만, 사회주의사회의 타락한 관료는 계급사회의 낡은 사상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사업과 생활에서 과오를 범하고 뒤떨어진 낙오자들이다.

자본주의사회의 관료주의는 적대적 계급관계의 산물이므로 오로지 사회변혁에 의해서만 청산될 수 있으나, 사회주의사회의 관료주의는, 주체의 사회주의 건설이론에 따르면, 사회구성원을 노동계급의 모양대로 개조하는 사상혁명을 통해서 해결해 가는 문제이며, 레닌의 고전적 해설을 빌려 표현하면, ≪지루할 정도로 오랜 교육사업에 의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과제≫다. 자본주의사회의 반동관료의 독재는 타도제거의 대상이지만, 사회주의사회의 타락한 관료는 교양개조의 대상이다. 그런데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사회의 관료주의와 사회주의사회의 관료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몰계급적, 몰역사적 관점에 빠져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관료제도와 독재체제를 동질적인 것처럼 왜곡하면서 관료주의적 병폐를 적대적 계급관계에서 발생하는 독재로 대체하고 사회주의사회에서 마치 ≪공산당의 독재≫가 실시되고 있는 것처럼 왜곡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은, 관료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사회주의를 마치 적대적 계급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주의인 것처럼 조작해놓은 허구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조작해놓은 적대적 계급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주의는 그들의 두뇌 속에서만 존재하며 현실에는 없다.

이 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국가사회주의 비판을 더 이상 자세히 서술할 필요는 없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사회주의 비판론이 서구의 신좌파에 의해서 조작되어 한때 유행하다가 파산된 반사회주의적 궤변이라는 사실이다.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서구의 반사회주의 지식인들에게서 들여온 철늦은 수입품목이 파산된 궤변의 찌꺼기인지도 모르고 금싸라기처럼 귀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사회주의건설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으면서 소위 ≪현실사회주의≫(필자의 개념으로는 소련형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매도하면서 비난의 칼을 휘둘렀던 서구의 신좌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제국주의자의 하수인(소위 신보수주의자들)으로 전락하였다. 지난날 ≪국가사회주의론≫을 제창하였던 서구의 신좌파들이 오늘날 제국주의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선봉에 서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겠다.

 

10) 반비판자들은 조국통일과업을 회피하고 그 대신 조선반도의 ≪평화프로세스≫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조선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은 ≪통일비전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반≫(김현우)이라고 한다. 통일비전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반이라는 말은 모호한 표현이어서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으나, 필자 나름대로 이해하면,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생각된다. 반비판자들은 조선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이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조국통일문제의 해결을 미래의 과제로 넘기고 당면해서는 평화체제의 수립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통일을 미래로 넘기고 평화에 힘쓰자는 구호가 반비판자들이 증오하는 김대중 류의 통일방안이라는 사실이다. 통일을 미래로 넘기고 평화에 힘쓰자는 구호는, 식민지예속정권과 식민지독점자본가들이 지금 한창 떠들어대고 있는 궤변이 아닌가. 그리고 그 궤변을 원래 조작하여 이 땅의 식민지예속정권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제국주의전략가들이다. ≪평화프로세스≫라는 말 자체가 제국주의전략가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반통일적 개념이다. ≪평화프로세스≫라는 개념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는 백악관에 물어보아야 한다.  

그런데 ≪자주적 민족통일국가의 평화적 수립≫이라는 강령을 가진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는 동지들이 어떻게 제국주의자의 반통일적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놀라운 일이지만, 그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반비판자들은 해도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통일문제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적들의 전략적 발상이고 어떤 것이 동지의 전략적 발상인지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무지가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심한 비판일까.

 

11) 민족민주운동은 제국주의지배체제와 식민지예속정권이 제거된 이후에 수립되는 새로운 정권을 자주적 민주정권이라고 부른다. 자주적 민주정권이 노동계급의 정권인가 자본가계급의 정권인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물음이다. 자주적 민주정권은 노농동맹중심의 통일전선적 정권이다.

그런데 정통좌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주적 민주정권을 ≪민족자주정권≫이라고 자의적으로 규정하면서, 자주적 민주정권을 소위 ≪부르조아와의 연립정권≫(김현우)으로 왜곡하였다. 자주적 민주정권과 ≪부르조아와의 연립정권≫이 어떻게 상치되는지는 이전에 필자가 인터넷에 발표한 글에서 이미 해명하였기에 여기서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자주적 민주정권이란 노동계급의 주도성이 보장되는 노농동맹의 역량을 중심으로 하여, 반미자주화, 반독점민주화, 조국통일의 과업에 동의하는 대중들, 심지어 그 과업에 동의하는 도시소자산계급까지 망라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의 기초 위에 수립되는 정권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자주적 민주정권의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통일전선적 성격의 정권이다.

그런데 그 통일전선이라는 개념 때문에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정통좌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통일전선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는 통일전선이 노동계급과 여타의 계급, 계층을 무원칙하게 뒤섞어놓은 ≪잡탕찌개≫로 보이고, 노동계급운동은 계급적 순결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통일전선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다. 통일전선은 ≪잡탕찌개≫가 아니라 노동계급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전선이며, 노농근로대중의 전략적 동맹에 의해 형성되는 전선이며, 자주, 민주, 통일에 동의하는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하는 전선이다. 그러므로 자주적 민주정권은 노농동맹중심의 통일전선적 정권이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는 노농동맹중심의 통일전선적 정권, 또는 자주적 민주정권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강령은 사회변혁에 의하여 수립된 새로운 정부의 성격을 밝히는 대목에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기본원리로 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는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민주정부≫라고 다소 모호하고 절충적인 개념을 사용하였다.

노농동맹중심의 통일전선적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연히 노농동맹중심의 통일전선적 당을 건설해야 한다. 그 당을 진보적 대중정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논쟁의 방향은 민주노동당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혹은 노동계급중심의 진보정당(사회주의 대안정당)으로 강화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노농동맹중심의 통일전선적 당으로 강화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맞춰진다.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 해명은, 지금까지 필자가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에 의거하여 서술한 대로, 노농동맹중심의 통일전선적 당으로 강화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민주대오에게는 당내에 스며있는 정통좌파적 경향과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을 일소하고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에 따라 노농동맹중심의 통일전선적 당으로 강화발전시키는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대한 임무가 부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