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113)

챠베스는 왜 혁명전쟁을 택하지 않았을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세기 사회주의와 ‘21세기 사회주의’
 
한창 정력적으로 일할 나이에 불치의 병에 걸려 2년 동안 투병생활을 해오던 우고 챠베스 베네주엘라 대통령. 얼마 전 그가 59세를 일기로 애석하게도 서거하였다. 생전에 자신을 믿고 따르던 베네주엘라 인민들을 남겨둔 채, 온갖 시련을 뚫고 이끌어온 볼리바리안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라틴 아메리카 혁명운동을 진두에서 이끌어온 걸출한 지도자를 상실한 것은 누구도 대신하기 힘들고,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공백으로 남게 되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 세계 진보적 민중은 1999년 2월 2일에 집권하여 이제껏 14년 동안 혁명을 위해 바친 그의 짧은 생애를 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챠베스 대통령은 생전에 자신이 이끌어온 볼리바리안 혁명을 통해 베네주엘라에 ‘21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20세기 사회주의와 구분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그렇게 구분한 것일까? 100년을 단위로 하는 연대기를 기준으로 하여 혁명을 구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설정한 기준은, 혁명전쟁에서 승리하여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갔는가 아니면 혁명전쟁을 수행하지 않고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갔는가 하는 것이었다.
 
‘혁명의 세기’라고 불렀던 지난 20세기에 세계 각지에서 승리의 깃발을 올린 사회주의 혁명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모두 혁명전쟁에서 승리하여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혁명전쟁이란 사회계급모순이 내전으로 폭발한 것을 말한다.
 
군사학에서 논하는 전쟁양상으로 더 세분하면, 고강도 혁명전쟁도 있었고 저강도 혁명전쟁도 있었는데, 어느 경우에도 무력투쟁이라는 전쟁요소가 지배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난 시기에는 혁명과 혁명전쟁을 동일시하는 공식이 통용되었고, 혁명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혁명전쟁을 통해 나아가는 사회주의의 길은, 그 전쟁의 진전속도만큼  급진적이었다.
 
그런데 챠베스 대통령은 혁명전쟁을 수행하지 않고, 혁명적 당을 건설하고 선거에서 승리하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집권함으로써 21세기 세계혁명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고 하였다.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방식과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이 이끄는 ‘21세기 사회주의’의 불길은 마침내 베네주엘라 국경을 넘어 라틴 아메리카 전역으로 번져가며, 낡고 썩은 것들을 불살랐으며, 볼리비아, 에콰도르, 우르과이 등으로 확산된 그 불길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좌파블럭’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챠베스 대통령이 혁명의 유산으로 남기고 간 ‘21세기 사회주의’ 건설경험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데 기초하여 라틴 아메리카를 사회주의의 길로 더욱 힘있게 이끌어 가야 할 중대한 과제가 그의 서거 이후 베네주엘라 혁명가들에게 제기되었다. 아래와 같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혁명전쟁을 택하지 않은 혁명가
 
챠베스 대통령은 원래 군사정변을 일으켜 반민중적 수구정권을 전복하려고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군사정변에서 실패한 이후 그가 선택한 길은 혁명전쟁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혁명이었다.
 
그는 왜 혁명전쟁이 아니라 선거를 선택하였을까? 혁명사상을 지닌 직업군인이었던 그는 당시 베네주엘라에서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베네주엘라에서 혁명전쟁을 일으키려면 혁명전쟁을 수행할 강력한 군사전선을 구축해야 하였고, 혁명전쟁을 성원하는 대중적 지지기반도 구축해야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베네주엘라에서는 군사전선도, 대중적 지지기반도 구축하기 힘들었다. 당시 그의 시야에는 베네주엘라 혁명전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혁명의 뜻을 품은 직업군인에게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페루나 콜롬비아의 혁명세력들이 그러한 것처럼 베네주엘라 밀림지대에 들어가 유격전 방식의 혁명전쟁을 벌이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분산된 혁명세력을 결집시켜 혁명적 당을 건설한 다음에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하는 길이었다.
 
군사정변에 실패하여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직업군인 출신의 혁명가는 베네주엘라에서 유격전 방식의 혁명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미국의 무력침공과 반혁명세력의 유혈진압으로 승리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 초 칠레에서 선거승리로 등장한 아옌데 정권이 미국의 무력개입과 국내 반혁명세력의 무장반란으로 무너진 비극적 경험을 그는 기억하였을 것이다.
 
만일 챠베스가 혁명적 직업군인이 아니라 혁명적 지식인이었더라면, 혹시 유격전 방식의 혁명전쟁을 택하였을지 모른다. 만일 그가 그렇게 혁명전쟁으로 집권하여 베네주엘라를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었더라면, 미국의 무력침공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페루나 콜롬비아에서 투쟁하는 혁명세력들은 1960년대에 시작한 유격전 방식의 혁명전쟁을 5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계속해오면서도 미국의 무력개입으로 여전히 난관과 역경을 겪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챠베스는 베네주엘라의 분산된 혁명세력을 결집시켜 혁명적 당을 건설하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하는 길을 택하였고,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리고 그런 집권과정으로 출발한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를 ‘21세기 사회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답은 아직 빈 칸으로 남아있다
 
14년 전 베네주엘라는 혁명전쟁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반민중적 수구정권을 민중 중심의 혁명정권으로 교체하는 데서 눈부신 성공을 이룩하였지만, 그런 경로를 통해 등장한 혁명정권은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베네주엘라가 ‘21세기 사회주의’의 길에 첫 걸음을 내디딘 때로부터 14년이 지난 오늘에도 혁명정권을 전복하고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려고 날뛰는 반혁명세력의 집요한 공세가 음으로 양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런 정세 속에서 챠베스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였으니, 반혁명세력의 기가 살아서 혁명정권 전복공작에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보인다.
 
혁명전쟁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21세기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선 베네주엘라 혁명은 지금 가장 어려운 시련기를 만난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 집권당이 자기 앞에 밀어닥친 시련을 이겨내고 ‘21세기 사회주의’ 건설과업을 끝까지 완성할 수 있을까? 전 세계 진보적 민중들에게는 베네주엘라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챠베스 없는 볼리바리안 혁명의 완전 승리를 낙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혁명전쟁을 벌여 반혁명세력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등장한 혁명정권은 안정된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의 길로 진전하게 되지만, 선거를 통해 세워진 혁명정권은 반혁명세력을 물리적으로 제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혁명의 주체역량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경우 언제라도 반혁명세력의 역공으로 전복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선 때로부터 14년이 지난 오늘에도 베네주엘라에는 혁명정권을 반대하는 성인인구가 400만 명이나 된다. 2,900만 명 전체 인구 가운데 성인인구 400만 명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커 보인다.
 
사회주의의 길에서는 낡은 정권을 새로운 정권으로 교체하는 초창기 혁명과정도 힘들고 어렵지만, 집권 이후에 전개되는 건설기 혁명과정은 그 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 제국주의세력과 국내 반혁명세력의 정권전복기도에 맞서 혁명정권을 지키고, 민중을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어 가며 높은 단계로 전진하는 것은 말처럼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베네주엘라가 사회주의의 길에 들어선 때로부터 14년 동안 그 나라의 혁명정권은 전략산업의 사회주의적 국유화를 추진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물질적 토대를 확장해왔는데, 전략산업 국유화 비율은 아직도 30% 선에 머물렀다. 무상몰수방식이 아니라 유상구매방식으로 국유화를 추진하였으니, 추진속도가 그처럼 완만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베네주엘라가 사회주의의 길에 들어선 때로부터 14년 동안 그 나라의 혁명정권은 민중의 사회주의적 조직화를 추진하여 민중을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힘써왔고, 그 과정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적 범죄율과 빈곤율이 상당한 수준에 머물고 있으니, 사회주의의 완전 승리가 멀어 보인다.
 
베네주엘라가 14년 전에 들어선 ‘21세기 사회주의’의 길이 전 세계 진보적 민중에게 던지는 심각한 물음은, 사회변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느냐 아니면 단계적으로 추진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사회주의’의 길에 들어선 베네주엘라가 제국주의세력의 무력침공과 국내 반혁명세력의 정권전복기도를 무슨 힘으로, 어떻게 막아내고 제압하느냐 하는 문제다.
 
챠베스 대통령이 열어놓은 ‘21세기 사회주의’의 길은 그 심각한 문제에 대한 답을 빈 칸으로 남겨두었다. 그의 심장은 그 답을 찾기 전에 너무 일찍 멈추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주엘라 혁명은 아직 미완의 혁명이다.
 
챠베스 대통령이 생전에 찾지 못한 그 답은 그와 함께 ‘21세기 사회주의’의 길을 개척해온 그의 혁명동지들이 실천과 투쟁으로 찾고, 장차 완전 승리의 날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베네주엘라에서 휘날리는 혁명의 깃발을 바라보며, 그들의 앞길에 승리가 있기를 기원한다. (2013년 3월 2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