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운명의 선택

 □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주체35(1946)년 7월 어느날, 몇몇 일군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동무들을 부른것은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오기 위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이라고 하시며 며칠전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북조선에 들어와 민주조국건설에 참가하겠다는 의향을 표시한 남조선의 인테리들을 데려오기 위한 조치를 취한데 대하여 알려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새 민주조선건설에서 대학교원, 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매우 부족한 문제에 대하여 상세히 분석하시였다.

당시 새 조국건설에서 직면하고있는 가장 큰 난관의 하나는 지식인이 부족한것이였다. 기술자가 부족하기때문에 일제가 파괴해놓은 산업운수시설을 복구정비하고 관리운영하는데서 커다란 지장을 받고있었으며 새로운 민족문화를 건설하자고 하여도 작가, 예술인들이 있어야 하였다.

지식인이 부족한것은 악독한 일제식민지통치의 후과였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우매화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사람의 절대다수가 대학이나 중학교는 고사하고 소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극히 적었다. 일본이나 만주에 가서 대학공부를 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불과 몇명 되지 않았으며 그들마저도 각지에 흩어져있었다.

새 조국건설의 성과여부는 지식인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었다.

그래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새 조국건설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민족간부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자체의 민족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종합대학을 하루빨리 내오도록 하시였다.

민족간부양성기지로서의 종합대학을 창설하면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일할 간부들을 동시에 양성할수 있었으며 그것을 모체로 하여 앞으로 빠른 기간에 많은 대학을 세울수 있을것이였다.

이미 종합대학창립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건설과 동시에 교육준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진척되고있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군들은 앞으로 개교될 종합대학교단에 세울 교원들을 찾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였다.

그들모두가 민족교육을 무참히 짓밟은 일제에 대한 치솟는 격분으로 주먹을 거머쥐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당면하여 부족한 인테리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어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오는것은 그들을 미제와 그 주구들의 탄압으로부터 구원하고 민주건국의 옳바른 길로 이끌어주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하시였다.

당시 남조선에서는 미제가 교육을 철저히 식민지예속화할 목적으로 조작한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반대하는 투쟁이 교정의 울타리를 넘어 전사회적으로 격렬히 벌어졌다. 이에 당황한 미제와 그 주구들은 그것을 무자비하게 탄압해나섰다. 민주주의적교육의 실시와 과학탐구의 자유를 요구하는 지식인들은 학교와 연구기관들에서 쫓겨나거나 검거투옥되고 항시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고있었다. 미제와 그 주구들의 책동으로 하여 그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과학탐구의 길이 막혔으며 초보적인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마저 박탈당하였다. 많은 교원들이 진보적민주주의길로 나아가고있는 북조선을 동경하면서 북에 들어와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교육사업과 과학사업에 종사할것을 열망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어 결연히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새 생활의 길을 열어주어야 하며 그들이 자기의 희망에 따라 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 문학예술사업을 마음껏 할수 있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단순히 모자라는 기술자, 전문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만이 아니라 나라의 인재들을 위기에서 구원하고 보호하며 운명을 책임져주시기 위해 남조선에 있는 지식인들을 데려오시려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데려와야 할 학자들의 이름을 한명한명 찍어주시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시였다. 그리고 자신의 명의로 된 위촉장을 보내주도록 하시는 조치를 취해주시였으며 미《군정》과 반동들의 경계가 심한 조건에서 그들을 무사히 데려오기 위한 대책적문제들에 이르기까지 깊이 관심하시였다.

그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이라는 직함이 밝혀져있는 위촉장이 발급되였다. 그것은 새 민주조선이 생사기로의 갈림길에 선 남조선의 지식인들의 운명을 구원해주고 그들과 굳게 손잡고 민족의 창창한 앞날을 열어나갈것을 담보하는 보증이였으며 민주조선건설의 기둥이 되고 핵심이 될것을 바라는 믿음과 기대의 표시였다.

이 위촉장을 자신의 신분에 대한 증표이런듯 가슴에 품고 수많은 남조선의 교원, 학자들이 미제강점하의 남쪽사회와 결별하고 38°선을 넘어섰다. 그들속에는 30대의 력사학자 박시형선생도 있었다.

 

박시형(1910. 1. 16-2001. 2. 26) 력사학자

주체42(1953)년 1월부터 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주체46(1957)년 1월부터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 주체50(1961)년 1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강좌장, 주체65(1976)년 10월부터 연구사로 사업, 《김일성상》계관인(1972년), 로력영웅(1996년), 력사학원사(1952년), 교수(1949년), 박사(1949년).

 

1946년 8월 어느날이였다.

서울에서 어느 한 학교의 교원으로 있던 그는 뜻밖에도 평양에서 찾아온 한 일군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위촉장을 전달받았다.

일제는 망했어도 전문분야인 조선력사연구의 옳바른 길을 찾지 못하여 암중모색하던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같은 일이였다.

해방전 경성제국대학을 나왔지만 항상 망국노의 설음과 민족적모멸감을 지울 길 없었는데 해방을 맞고도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민족사연구의 뜻이 막혀버려 몸부림치고있던 그였다.

박시형선생은 한달음으로 38°선을 넘어섰다.

민주건국의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 북조선의 현실에서 그는 반만년민족사에서 처음 보는 민족륭성발전의 힘을 느꼈으며 여기서 인민을 위해, 민족을 위해 참답게 복무하는 애국적인 지식인으로 살려는 굳은 각오를 다지였다.

나라에서는 력사학자인 그를 인민의 첫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교정에 세워주었다.

박시형선생이 북에 들어온지 한해가 되던 주체36(1947)년 10월 어느날이였다.

어느 한 전람회를 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박시형선생을 비롯한 력사학자들이 꾸려놓은 조선력사전람실도 찾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전시된 자료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시며 조선인민은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민족이며 예로부터 외래침략자들과 압제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인민이라고 하시면서 자기 나라의 력사를 깊이 연구하고 잘 알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돌이켜보면 유구한 전통과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조국의 력사는 일제의 간악한 식민지통치로 하여 여지없이 짓밟히고 외곡되고 말살되여왔다. 일제와 그 어용사가들은 이른바 《동조동근》의 파렴치한 력사위조로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 지어는 말과 글, 성까지 빼앗으려고 하였다.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는 조국의 력사와 문화연구에 대하여 생각조차 할수 없었으며 그에 대하여 말하는것조차 탄압과 감시의 대상이 되였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력사연구의 넓은 길을 활짝 열어주시니 박시형선생의 기쁨은 헤아릴수 없이 컸다.

이날 조선력사전람실을 다 돌아보신 수령님께서는 박시형선생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조국력사를 연구한다는 높은 긍지를 가지고 과학연구사업과 후대교육사업에 적극 이바지할데 대한 기대를 표시하시였다.

이렇게 건국의 초행길에서 새 삶의 첫걸음을 뗀 박시형선생의 인생행로는 민족이 낳은 절세의 애국자의 손길에 이끌리여 애국적인 력사학자로 새롭게 태여나 일제에 의해 외곡되여온 조국의 력사를 바로잡고 인민의 지혜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력사유적을 민족의 재부로 보존하고 빛내이는데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하는 참으로 긍지로운 나날이였다.

언제인가 박시형선생을 비롯한 몇몇 력사학자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수령님께서는 한가지 토론할 문제가 있어 불렀다고 하시며 종합대학이 들어앉을 자리가 옛날 토성자리라는게 사실인가고 물으시였다.

그자리가 고구려토성자리로 알려져있다는 력사학자들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대학을 그자리에 짓게 되면 토성이 얼마나 허물어지게 되는가, 력사적으로 꼭 보존해야 할 토성인가를 일일이 알아보시였다.

박시형선생은 일제놈들의 파괴략탈정책으로 인하여 많이 마사지고 또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여 그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렵게 되였지만 고구려토성으로서 남아있는것이 얼마 되지 않는 조건에서 될수만 있으면 보존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래서 내가 선생들을 부른것이라고, 학자들, 전문가들의 의견이 귀중하다고, 선생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보존하도록 하자고 하시면서 앞으로 우리 나라 력사를 더 잘 연구하며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발전시키자면 력사유적들을 잘 보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하나의 력사유적을 놓고서도 조국력사연구의 전반을 헤아리시며 력사연구에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귀중한 말씀을 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풍모는 력사학자들에게 절세의 애국자의 위대한 모습으로 안겨왔다.

이날 력사학자들을 함께 데리고 몸소 현장에까지 나가시여 대학터전을 다시 잡아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박시형선생은 그이를 한생의 스승으로 모실 결심을 굳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력사문제와 관련된 론의가 있을 때마다 박시형선생을 찾으시고 해당 문제에 대한 력사기록이 어떻게 되여있는지를 료해하시였으며 그가 주체적안목을 가지고 력사적사실과 유적들을 옳바로 재검토, 재평가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이러한 위대한 지성의 손길에 받들려 력사학자 박시형선생은 동명왕릉과 안학궁의 발굴과 정리사업 그리고 단군릉, 동명왕릉, 왕건왕릉개건사업에 참가하여 학술적으로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다. 또한 조선력사를 주체적인 사회력사관에 기초하여 체계화하며 이 부문 후비육성에서 많은 공로를 세울수 있었다.

이 나날에 그는 수많은 력사과학서적들을 집필하였고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으로 인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력사학원사, 교수, 박사로 여러 국제학술토론회들에 참석하여 조선의 력사학계를 대표하였다.

위촉장을 가슴에 품고 북행길에 올라 애국의 궤도에 삶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중에는 통계학자 황도연선생도 있다.

주체35(1946)년 마가을의 어느날 깊은 밤이였다.

한 일군의 안내를 받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집무실로 들어서는 안경낀 한 젊은이가 있었다. 위촉장을 받아안고 서울을 떠나 북으로 들어온 황도연선생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그에게 정말 반갑다고,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 많았는가고 하시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일본으로, 만주로 떠돌아다니던 나날 민족적멸시와 수모를 받으며 민족의 위대한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마음속으로 끝없이 우러러온 황도연선생은 자신이 항일의 전설적영웅앞에 서있다고 생각하니 꼭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믿음과 기대가 실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선생이 통계학, 회계학을 전공하였다는데 우리에게는 지금 그런 부문을 전공한 경제일군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새 조국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와 같이 손잡고 일하여 봅시다.》

백두산청년장군을 모시고 건국의 길에!

한 식민지지식인의 삶이 민족의 위대한 태양의 빛발속에 새로운 출발을 하는 영광과 행복의 뜻깊은 시각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황도연선생의 지나온 생활경위도 너그럽게 다 들어주시였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출생하여 남달리 머리가 총명하였던 황도연선생은 친구들이 법학이나 의학을 전공하라고 권고하였지만 그때로서는 누구도 선뜻 내딛지 못하는 경제학을 배우는 길에 주저없이 나섰다. 그리고 도이췰란드어도 한해사이에 자습으로 떼고 일본의 어느 한 대학에 입학하였다.

《비날론박사》로 유명해진 리승기선생은 당시 제노라 하는 일본인수재들을 깔아뭉개는 황도연선생의 비상한 두뇌와 탐구열을 두고 조선민족의 자랑으로 늘 말하군 하였다고 한다.

대학을 높은 성적으로 마친 황도연선생은 과학기술인재를 써주지 않는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안고 만주로 건너가 조선민족의 넋을 살려보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하였다.

그후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향으로 갔건만 미제와 그 주구들이 살판치는 그곳에서는 절망과 좌절감이 그의 가슴을 허비였다. 그는 《과학자동맹》과 인민위원회수립에도 발벗고나섰으며 대학교단에 서서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매국이 애국을 짓밟는 남조선에서의 생활은 시시각각 혐오감과 실망만을 안겨주었다.

(정녕 지식과 정열을 바치자고 하여도 그것을 받아줄 진정한 내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황도연선생은 자신의 처지를 두고 울분과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였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위촉장이 그에게도 전달되였던것이다.

황도연선생은 진리의 길을 찾아 방황하는 한 불우한 지식인에게 보내준 구원의 손길에 이끌려 아무런 미련도 없이 남조선사회와 결별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밤깊도록 그에게 새 조국건설전망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면서 그를 산업국의 중요한 위치에서 사업하도록 해주시였다.

해방전 온갖 민족적멸시와 모욕속에서 애를 태우며 쌓은 지식이 민족의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겨 비로소 건국의 밑천으로 되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그의 가슴에서는 애국의 세찬 불길이 타번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경제부문의 주요과업들이 제기될 때마다 그를 믿고 새로운 과업들을 맡겨주군 하시였다.

그 믿음속에 황도연선생은 새 조선의 첫 인민경제계획인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작성을 비롯하여 여러 인민경제계획작성에서 자기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당시 조선에 와있던 외국인들도 조선이 독립되여 2년도 못되는 때에 자기 과학기술인재로 인민경제계획을 작성했다는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하면서 조선사람들의 힘과 지혜는 참으로 무섭다, 정말 놀랍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애국의 열의로 자립적민족경제의 토대를 닦아놓은 력사의 기적은 민족기술인재를 끝없이 아끼고 사랑하며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투철한 애국애족사상의 빛나는 결실이였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결정체였다.

그 사랑, 그 믿음이 있어 황도연선생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와 전후복구건설시기는 물론 사회주의건설시기에도 자기의 애국의 열정을 다 바칠수 있었다.

참으로 위촉장이라는 인생전환의 기관차에 운명을 맡겨 사회주의조국의 대지우에 뿌리내렸기에 학문연구의 자유와 초보적인 인권마저 유린당하던 남녘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민족교육의 높은 연단과 과학연구기관들에서 자기의 지혜와 정열을 깡그리 바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