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운명의 선택

 □ 《가자! 흥남으로》 

무릇 뜻이 높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서 참되게 빛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바란다고 하여 저절로 그렇게 되는것은 아니다.

좋은 종자도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려야 훌륭한 열매를 맺을수 있는것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참답게 살려는 인간의 소망과 지향은 근로인민대중의 자주적운명개척을 확고히 담보하여주는 정의로운 사회제도에서만 훌륭히 실현되고 참답게 꽃펴날수 있다.

이것은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식민지지식인으로서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오다가 해방후 공화국의 품에 안겨 비로소 리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애국의 길에 삶의 뚜렷한 자욱을 남긴 사람들의 인생행로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옹근 한세대와 맞먹는 40여년간의 악독한 일제식민지통치가 끝장나고 해방의 새 아침이 밝아오자 삼천리강토는 만세의 환호성으로 진감하였다.

압제에 짓눌리고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가슴마다에서는 눈물의 샘줄기가 터져올랐다.

하지만 조국해방의 환희에 잇닿은 북과 남의 분위기는 서로 달랐다.

조국해방의 구성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하신 북반부에서는 해방의 환희가 민주조선건설의 마치소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미《군정》통치로 바뀐 38°선이남의 남조선에서는 반역의 정치판이 짜여지고있었다.

북과 남의 판이한 현실은 오로지 지식에 대한 갈망과 비상한 두뇌로 《제국》대학들의 《높은 문턱》을 넘고 온갖 민족적차별을 받으면서도 공부를 한 과학자, 기술자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운명의 선택을 요구하고있었다. 스스로의 결심과 의지에 따라 어느 길이 정의의 길이고 어느 길이 부정의의 길이며 어떻게 하는것이 애국하는것이고 어떻게 하는것이 매국하는것인가를 가름해보아야 하였으며 자신이 설자리를 결정해야 하였다.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들이닥친 이러한 운명의 갈림길에서 정의와 애국을 지향하여 뚜렷한 항로를 정하고 삶의 닻을 올린 사람들이 있었다.

1945년 10월 어느날,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걸음을 다그치는 몇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외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갈라진 조선의 북과 남이 진보와 반동이라는 판이한 길을 걸을 때 스스럼없이 북행길에 오른 그들은 강영창, 김두삼, 리재업, 두순종, 윤정섭선생들이였다.

남조선에서 해방을 맞은 지식인들이 북이냐 남이냐 하면서 이러저러한 타산으로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되여 남먼저 북행길에 오르게 되였는가.

이들은 비록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대학까지 나온 기술자들이였지만 나라없는 식민지지식인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들이였다.

강영창선생의 경우만 놓고보아도 잘 알수 있다.

해방전 만주에 들어가 공과대학졸업증을 쥔 그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어느 한 전기회사에 취직하여 기사로 일하였었다.

당시 자기의 기술과 지식이면 무서울것이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그를 일본놈들은 조선사람이라고 하여 차별시하고 고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끝내 병들어 병원에 실려가자 이번에는 그를 새로운 의학실험대상으로 삼는 비렬한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지식과 기술은 있어도 그것을 받아줄 제 나라가 없어 민족적멸시와 천대를 받다가 나중에는 생명까지 희롱당하는것이 바로 식민지지식인의 피할수 없는 운명이였다.

그는 1945년 3월 일본땅에 침을 뱉고 다시금 현해탄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자기의 기술과 지식에 맞는 일자리를 얻을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해방전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을 나오고 어느 한 연구기관에서 일하였으며 《징용》에 끌려가 인간이하의 고초를 겪다가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생활이 너무도 어려워 일자리를 찾아 중국 동북지방에까지 흘러들어가서도 헛걸음만 하고 도로 돌아와 서울에서 해방을 맞은 리재업선생의 운명은 또 얼마나 기구하였던가.

그들은 대학공부를 한것으로 하여 조선사람치고 특별한 행운아이기라도 한것처럼 돋보일지언정 나라잃은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게 절감한 불운아들이였다.

해방을 맞아 그들의 뇌리를 때린것은 저주로운 일제가 패망하였으니 이제는 마음껏 일하고 창조하며 지성의 탑을 쌓아가리라는것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한갖 꿈에 지나지 않았다.

남조선에서는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구가 그대로 살아있었고 버려진 상태에 있는 일본인소유였던 공장, 기업소, 산업시설들은 모두 숨을 죽인 상태에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게 각양각색의 당파들이 출현하고 《애국자》로 자처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저마다 자기의 《치적》을 내세우며 권세욕을 채우려 날뛰였지만 파괴된 산업시설들을 복구하고 재생시키는데는 누구도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혼잡된 정국에서 모리간상배들과 협잡군들이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고 돈벌이를 하겠는가 하는데 골몰하고있을뿐이였다.

어둠만이 짙어가는 남조선에서는 그 누구도 민주의 새 사회를 지향하는 그들, 기술과 지식으로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려는 열정에 넘친 지식인들의 진정을 알아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남조선은 정의감에 불타는 지식인들이 삶의 닻을 내릴 곳이 못되였다.

더우기 이들의 마음을 어둡게 한것은 1945년 9월 미제가 남조선을 강점하면서 발포한 맥아더의 명의로 된 《포고》였다.

《포고》에는 조선의 북위 38°선이남과 동지역의 주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통치를 실시한다는것,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복무하던 모든 기구와 인원, 그 기능을 그대로 존속시킨다는것, 미군의 명령에 즉속 복종하며 이를 위반하면 용서없이 엄벌에 처한다는것, 《군정》기간중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포고》는 미제가 조선인민의 민족적자주권과 존엄을 짓밟고 남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선포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였다.

남조선이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된다는 명백한 사실앞에서 강영창선생을 비롯한 기술자들은 자기들이 찾는 정의와 진리는 어디에 있으며 지식으로 민주의 새 사회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거듭 론의하였다. 지성과 량심은 자주와 민주의 기치가 나래치고 지난날 억압받고 천대받던 인민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나오는 북을 가리키고있었다.

더우기 중공업, 화학공업부문의 전문기술자들인 그들로서는 일제가 다 마사놓고 달아난 북반부의 동해안에 있는 중화학공업부문의 공장들을 한시바삐 복구하여 일본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민족적자존심이 꿈틀거림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것은 해방된 조선의 지성의 량심이고 의기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해방된 조국을 위하여 기술과 지식을 바치려면 정의와 진리의 길을 걷는 북반부에 가야 하며 구체적으로는 동해안의 흥남지구 공장들에 가야 한다는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함경남도의 남동부 함흥만연안에 접해있는 흥남에는 당시 비료공장과 화학공장, 제약공장, 제련소 등이 집중되여있었고 그 가까이에는 이 공장들에 전기를 대주는 장진강발전소, 부전강발전소들도 있었던것이다.

정작 흥남으로 가자고 결심하였지만 북에서 일제에게 복무한 자기들과 같은 기술자들을 어떻게 대해주겠는가 하는 걱정이 앞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선뜻 북행길에 오르지 못하고있던 바로 그러한 때 이들의 걸음을 재촉하는 극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력사적인 조국개선연설에서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며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민주주의 새 조국을 건설하자고 열렬히 호소하시였다는 소식이 전해진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조선민족이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힘을 합칠 때는 왔습니다. 각계각층 인민들은 누구나 다 애국적열성을 발휘하여 새 조선건설에 떨쳐나서야 합니다.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개선연설은 민족산업건설에 자기들의 지혜와 재능을 다 바치자면 흥남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들의 결심을 굳혀주었다.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에 개선하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야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의로운 일을 할수 있다는 자각, 진정한 내 나라는 남이 아니라 북이라는 확신으로 온몸이 끓어올랐다.

(민족의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어 우리의 기술과 지식을 민주의 새 나라, 새 조선건설에 바치자. 가자! 흥남으로.)

그들은 이런 결심을 안고 단호히 북행길에 올랐다.

그들이 흥남의 공기와 물을 마시며 흥남땅에서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려는 의욕을 안고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의 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일제는 쫓겨가면서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흥남지구 공장, 기업소들의 생산공정과 기계설비들을 혹심하게 파괴하였다. 흥남비료공장만 놓고보더라도 비료생산에 없어서는 안될 합성압축기 18대중에서 16대, 류산배수로 48대중 33대, 류안포화기 22대중 12대, 변류기 44대중 33대, 질소분류기의 22%가 못쓰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락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들은 파괴되고 못쓰게 된 기계설비들만 본것이 아니라 복구에 달라붙은 로동자들, 해방된 조선의 참된 공장의 주인들을 보았다.

강영창선생을 비롯한 기술자들은 로동자들과 힘을 합쳐 일부 비료생산설비부터 가동시키기 위한 사업을 밀고나갔다. 그리하여 10월에는 파괴된 비료생산설비의 일부가 복구되여 해방후 이 공장 로동계급의 손으로 만든 첫 비료가 생산되였다.

첫 비료생산으로 환희의 날과 날이 기쁨속에 흘러갈 때 정권기관에서는 흥남지구의 중요공장 여러개를 하나로 통합하여 흥남지구인민공장이라 명명하고 총지배인을 파견해주었으며 강영창선생을 이 공장 기술부장으로, 김두삼선생을 조사기획부장으로, 리재업선생을 연구과장으로, 두순종선생을 어느 한 공장의 공장장으로 임명해주었다.

그들은 공장의 피해복구와 생산을 위한 투쟁을 더욱 활기있게 내밀어 12월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하루에 180t을 생산하는 수준에 올라서게 되였다.

이 벅찬 투쟁속에서 기술자 5명은 그해 11월에 모두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건국투쟁대오의 앞장에 섰다.

나라의 공업지구인 흥남이 불과 몇달 안되는 짧은 기간에 비료생산설비를 복구정비하고 10월에 첫 생산을 시작하여 12월에 이르러 하루에 180t씩 생산하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4(1945)년 12월 6일 흥남지구인민공장을 몸소 찾으시여 비료공장의 로동자들과 기술자들을 고무해주신데 이어 그 이듬해 4월 어느날에는 이 공장을 또다시 찾아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산인해를 이루며 모여온 3 000여명의 로동자들앞에서 《새 조국건설에서 모두다 로동영웅이 되라》는 뜻깊은 연설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의 산업중심지인 흥남은 로동계급의 근거지이며 새 민주조선건설의 기지이며 조선의 생명선이라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이곳에 자리잡은 흥남지구인민공장은 로동자들의 억센 로력투쟁에 의하여 벌써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흥남의 자랑일뿐아니라 조선의 자랑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흥남의 로동계급을 새 조국건설의 애국선봉대로 내세워주시였다.

이 자랑찬 애국선봉대오에 몇달전 북행길에 올랐던 5명의 기술자들이 당당히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었다. 이미 그들은 보다 더 무겁고 책임적인 직무를 맡고있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자기들에 대한 나라의 기대가 얼마나 크며 앞길에 얼마나 휘황찬란한 무지개가 비껴있는지 알지 못하고있었다.

주체35(1946)년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영창선생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강영창(1912. 10. 1-1965. 8. 2) 당 및 국가활동가

주체34(1945)년 11월부터 흥남지구인민공장 기사장 겸 부지배인, 그후 성진제강소 기사장, 산업성 금속관리국 기사장, 금속공업상, 과학원 원장으로 사업. 주체37(1948)년 3월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그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주체47(1958)년 9월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으로 사업. 주체46(1957)년 8월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경력에 대하여 물어도 보시고 그가 제기하는 물음에도 대답을 주시며 특히 나라의 강철산업을 놓고 많은 문제를 의논하시였다.

강영창선생은 너무도 소탈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인품에 이끌리여 그이께 령상태나 다름없는 조선의 강철기술에 대하여 그리고 반동들의 악선전으로 하여 지식인들이 품고있는 위구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장군님께서는 무엇을 믿고 나라의 강철산업을 일떠세우려 하시는가고 외람된 물음까지 제기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를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전체 인민이 다같이 잘살고 번영하는 새 나라를 일떠세우려 한다고, 그렇기때문에 인테리들도 내 나라를 위한 건국사업에 참가할것을 바란다고, 우리는 인간의 지성을 존중하며 강철에 앞서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더 중시한다고, 우리에게는 강철도 중요하지만 내 나라의 강철을 생산하려는 그들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따뜻이 일깨워주시였다.

해방된 내 나라에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사업은 지식인들의 뜨거운 애국의 마음만 있으면 반드시 실현된다는것이 위대한 수령님의 드팀없는 확신이였다.

이날의 담화가 있은 후로 강영창선생은 나라의 강철공업을 위한 핵심적위치에 서게 되였다.

주체36(1947)년 9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강영창선생이 기사장으로 사업하는 성진제강소(당시)를 찾아주시였다.

복구된 공장구내와 생산현장을 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원철직장에서 걸음을 멈추시였다. 원철직장은 일제가 건설비를 줄일 목적으로 절연장치도 하지 않고 로들을 빼곡이 들여놓은 곳으로서 해방전 로동자들이 무시로 생죽음을 당하던 곳이였다.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인간도살장과도 같은 원철로이지만 강영창선생을 비롯한 기술자들은 그것이 없이는 단 한t의 강철도 생산할수 없는 조건에서 당장은 이것부터 살리기로 하고 복구를 다그쳐왔던것이다.

한동안 원철로앞에서 로동자들의 작업모습을 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철이 아무리 중해도 로동자들의 생명과 바꿀수 없다, 강철을 못 생산해도 좋으니 이 직장을 폭파해버리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강영창선생은 놀라움과 격동을 금치 못하였다.

새 조국건설에서 강철생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위대한 수령님이시였지만 그토록 품들여 복구한 원철직장을 하늘로 날려보내라고 하시는것이였다.

지난날 왜놈들밑에서 민족적멸시를 받으며 페인이 되도록 일하였던 강영창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 뜨거운것을 금할수 없었다.

수령님께서는 민족적차별의 쓰라린 아픔속에 메말라터진 강영창선생의 가슴에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 조국과 인민에 대한 크나큰 사랑의 불씨를 심어주시며 건국의 길에 뜨거운 심장을 안고 나서도록 이끌어주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겨주신 그 뜨거운 불씨는 강영창선생의 몸과 마음에서 식민지지식인의 낡은 사상잔재를 깡그리 불태워버렸으며 그를 혁명화되고 로동계급화된 지식인으로 변모시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펴주신 인간중시의 불씨는 그의 심장속에 뜨거운 불길로 활활 타번지며 사상관점과 활동방식의 원동력으로 되였다.

그는 스스로 나라의 금속공업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 올려세울 제강법연구에 달라붙었다. 그 성공을 막아보려 반동들이 그를 모해하며 기사장직책에서 떼여내려고 할 때에도 그는 현장에서 연구사업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성공의 문을 열어젖혔다.

강영창선생은 부강한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벅찬 투쟁에서 무한한 애국의 열정을 다 바쳐 특출한 공적을 이룩하였으며 그 나날에 흥남지경을 벗어나 산업성 금속관리국 기사장을 거쳐 1955년 10월부터 나라의 금속공업발전전반을 책임지는 금속공업상의 중책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경제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과학원 원장 등 당과 국가기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면서 사회주의의 승리적전진을 위한 길에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다.

강영창선생만이 아니다. 김두삼선생도 그러한 인생성공의 자서전을 새겨왔다.

 

김두삼(1911. 9. 14-1976. 5. 21) 국가활동가

주체37(1948)년부터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전시에는 교통성 부상, 중공업상, 전후에 전기상, 중공업위원회 부위원장, 그후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검사위원, 주체51(1962)년 10월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 《김일성훈장》수훈자.

 

사실 강영창선생과 함께 남조선을 떠나 흥남행을 결심하였을 때 김두삼선생도 자기의 과거와 전도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본의건 아니건 해방전에 일제기관에 복무하며 나라와 민족앞에 떳떳하게 살아오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볼 때 북에서 그러한 행적을 용납해줄것인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존경과 신뢰의 정은 그것을 가셔주었다. 그는 만주에서 기술자로 있을 때부터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항일유격대에는 로농청년들과 함께 지식인, 학생출신들도 있으며 그이께서 그들도 다같이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그래서 김일성장군님께서 항일무장투쟁에서 그러하신것처럼 해방된 새 조선의 건국사업에서도 지식인들과 함께 손잡고 나가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강영창선생을 비롯한 여러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가자! 흥남으로》를 주장하였으며 북행길에 오른것이다.

주체35(1946)년 4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본궁화학공장(당시)을 현지지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장장으로 사업하고있던 김두삼선생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그를 보시고 나는 오늘 동무를 처음 만나보지만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시며 그의 두손을 따뜻이 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윽토록 가슴만 들먹이는 그를 정겹게 바라보시다가 공장장동무를 비롯하여 남조선에서 들어온 기술자들이 흥남지구 5대공장복구사업에 참가하여 애국적열의와 기술을 바치고있는데 대하여 높이 평가한다고 치하의 말씀을 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화학공업발전의 위대한 구상을 펼쳐주시면서 지난날 사랑이란 모르고 민족적멸시와 천대만을 받아오던 메말라진 그의 가슴에 인간에 대한 사랑, 조국과 인민에 대한 사랑의 불씨를 심어주시며 애국의 길에 뜨거운 심장을 안고 나서도록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김두삼선생은 기술은 있어도 마음을 의지하고 바칠데가 없어 몸부림치던 지난날이 되새겨져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낳아준 어머니도 책임져주지 못하여 조약돌마냥 만주광야에 비분의 눈물을 뿌리며 굴러다니던 자기의 운명을 맡아 안아주고 키워주는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어버이이시라는것을 절감하였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의 품이야말로 지성의 량심이 깃을 내리고 정의와 진리가 빛을 뿌리며 한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조국과 인민의 부강번영을 고이는 받침돌이 되게 하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위대한 지성의 세계였다.

그는 일생 이 위대한 운명의 태양의 가까이에서 살며 그 따사로운 빛발을 따르는 길에 지식과 기술은 물론이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치리라는 억척의 결심을 다지였다.

그는 새 조선건설사업에서 더욱 분발하여 뛰고 또 뛰였다.

그는 공장의 관리운영을 책임진 공장장이기도 하고 복구현장에서 기술문제가 제기되면 그곳에 뛰여나가 책임지고 풀어나가는 현장기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힘든 작업모퉁이에 한몸을 내대며 힘꼴이나 쓰는 로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패주해가면서 10년이 걸려도 돌아갈수 없다고 하던 이 공장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공장을 다녀가신 3달후에는 석회질소비료공장의 질화로 16기가 전부 복구되여 운전에 들어갈수 있었고 유기화학계통의 적지 않은 공정들도 생산을 시작할수 있었으며 1946년 3. 4분기에는 카바이드직장의 전기로들이 완전히 복구되여 생산을 시작할수 있었다.

당시 기술자, 로동자들의 투쟁모습을 현지에서 목격하였던 한 일본인은 1970년에 일본에서 출판한 어느 한 책에 이렇게 썼다.

《공장기술자들은 굉장한 분발가로서 장치의 제거작업도 제기되면 자신의 진두지휘로써 3일안에 해치웠으며 방폭벽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느 공장의 반응탑을 가져와서 그것으로 즉시 방폭벽을 만들었다.…

한달이라는 공사기일에 초산설비를 완성하였다.

이 방법은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 아직 해본 일이 없는 방법이기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다.》

이것은 그대로 자기의 령도자의 두리에 하나로 굳게 뭉쳐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선 로동계급과 기술자들의 무궁무진한 힘에 대한 격찬의 목소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애국의 길에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쳐가는 김두삼선생을 굳게 믿으시고 중공업상, 전기상,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등의 중임을 맡겨주시면서 애국의 마음을 더 높이 발양해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리재업(1918. 4. 29-1997. 6. 6) 화학자

주체36(1947)년 8월까지 흥남지구인민공장 연구과 과장으로 사업. 주체41(1952)년~주체74(1985)년 기간에 우리 나라에 풍부한 석회석과 무연탄으로부터 카바이드를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고무공업화를 위한 과학기술공학적문제들을 연구완성. 로력영웅(1979년), 원사(1986년), 교수(1972년), 박사(1962년).

 

흥남땅에 아직은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외국류학의 길에 등을 떠밀어준 조국의 사려깊은 뜻을 한시도 잊지 않고 더 높은 과학기술의 령마루에 올라 한생을 보답의 한본새로 일하여 화학공업의 주체성을 강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로력영웅, 원사, 교수, 박사로 인생을 총화지은 리재업선생을 비롯하여 이들 누구나의 자서전의 갈피를 더듬어보아도 그들이야말로 운명의 행운아들임을 잘 알수 있다.

해방직후 남들보다 먼저 북행길에 올랐던 5명의 지식인들은 이렇게 민족산업건설의 초행길에 흥남땅에 삶의 자욱을 뚜렷이 찍는것으로 지성의 나래를 마음껏 펴고 인생의 높은 령마루를 향해 살같이 달렸으며 그 길에서 당과 수령이 알고 조국과 인민이 사랑하는 애국자로 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