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중에서


2. 《세기와 더불어》의 세계화 담론

 빨리 망하려면 사대주의를 해라 

 

단군릉이 우상화를 위한 급조물인가?

 

남《한》학자들은 단군릉건설을 두고 허구 혹은 우상화 운운하며 헐뜯는것이 학자되는 자격이 되는양 하고있다. 백두산을 민족의 종산이라고 한것은 바로 우리 시조 단군이 이곳에서 나라를 처음 펴신 곳이기때문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1993 1김일성주석은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에 있는 단군묘를 발굴할것을 지시하였다. 단군묘의 년대가 1993년 기준으로 5011±267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덤근처에 고구려 장군총과 모양이 같은 피라미드모양의 무덤을 건설하였다. 기본무덤을 보면 밑단 한변의 길이 50m, 높이 22m이다. 초대형단군릉은 1994년 준공되였기때문에 1 994개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남《한》의 력사 그리고 종교학계는 총동원되여 즉각 《단군》이란 책자를 만들어내여 단군릉에 대해 총공격 내지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공격의 내용인즉 왜 조사방법에 있어서 방사성탄소년대측정법을 사용하지 않고 전자상자공명법을 사용했느냐의 과학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왜 단군릉을 고구려식무덤으로 만들었느냐, 관대의 주인공은 누구냐에 이르기까지 고고학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알아들을수조차 없는 문제들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2001년 금강산에서 있었던 6. 15 1주년 기념행사에서 사회과학원 허종호박사와 고 김시민박사 등 북의 력사학자들을 만나 남《한》의 단군학회와 함께 개천절행사를 공동주최할것과 우리 고대사서인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를 할것을 제의하였다.

다음해에 개천절 공동행사와 단군관련 학술대회가 대박산 단군릉앞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되였다. 당시 북측학자들은 한결같이 단군릉의 력사성과 그리고 고대사서들의 력사적가치성에 대하여 긍정적인 발표를 하였다.

김일성주석은 서거 이틀전인 1994 7 6일 단군릉건설 최종형성안을 검토하면서 남과 해외동포들이 볼수 있는 단군릉이 속히 건설될것을 독려하였다. 그 이전에도 무려 수십회이상의 독려를 직접 할 정도였다. 이렇게 단군릉건립이 김일성주석생애의 마지막 마무리업적이 되고말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군릉을 남《한》학자들은 단 한마디의 말로 폄하부정하고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김일성주석 서거직후 7 13일에 개천절전 완공지시를 하여 그해 10 11일에 준공되도록 하고 10 29일 개건된 단군릉을 찾아 민족의 대경사라고 치하했다.

 

서울 《중앙박물관》은 사대주의교양교육관이다

 

그러나 이러한 남《한》학자들의 단군릉과 고력사사서에 대한 비판은 리병도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제자들의 렬등감에 가득찬 반민족사대주의 비학문적주장에 불과하다. 이런 매국노적사관이 서울대학교에 그 진원지를 두고있다는것은 천추에 씻을수 없는 대과인 동시에 어쩌면 력사가 계속되는 날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우리 력사의 악수가운데 악수이다.

이런 식민지사학의 후예들이 둥지를 틀고있는 서울대학교에서 리영훈과 안병직 같은 뉴라이트 주동인간군상들이 배여나온다는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일본의 이시하라 같은 인물이 저런 망언을 하는데는 이런 원군들이 주리를 틀고 남《한》 구석구석에 박혀있다는것을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그의 망언배경의 원인제공은 우리 국립대학교에서 제공하고있는것이다.

이들 남《한》력사학자들이 얼마나 비학문적이고 사대매국노적인가는 룡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확인할수 있다. 필자는 이 박물관이 개관되던 날 감격에 차 첫 방문을 하였다. 그러나 입구에서 더이상 보지 않고 돌아서 나오고말았다. 단군고조선력사는 겨우 한줄정도로 있는둥마는둥 눈을 비비고야 겨우 찾아볼수 있었고 우리 력사는 삼국시대 중엽부터 시작하는것처럼 기술을 해놓았기때문이다.

그 이후 필자가 회장으로 있던 단군학회와 시민단체들의 항의로 단군고조선이 복원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또 반가와 금년 4월 중순에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이것은 고조선복원이 아니라 마지못해 가져다찍어 발라놓는 정도였다.

그래도 참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 록음안내의 말을 들어가며 원삼국앞까지 갔다. 그러나 또 더 볼수 없어 돌아오고말았다. 리유인즉 거기까지 소개하는 안내말들에 의하면 우리 문화유산이 대부분 중국에서 온것이고 자생적인것은 없는것처럼 되여있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앞 입구에서 방문소감을 적는 글에 당시에는 《중국》이란 나라이름자체가 없었는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느냐고 적고 돌아왔다. 박물관측에서 며칠후에 전화를 주었다. 그리고 자기들나름대로의 변을 설명하였다. 설명내용인즉 지금 압록강이북의 땅이 모두 《중국》이란 나라에 속해있으니 그렇게 하였다는것과 국제외교정치관례상 지금국호를 사용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것이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였는가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상식적으로도 쉽게 판단할수 있을것이다.

만약에 이런 식의 설명이라면 설명을 듣는 모든 외국인들이 당시에도 《중국》이란 국호가 있었고 우리 문화와 력사는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아류격이며 파생적인것에 불과한것으로 리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2세아동들도 그렇게 우리 력사를 리해하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될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력사는 차라리 알지 않는것이 옳고 좋다고 본다.

미국에서 자란 《한》인2세학생들이 여름방학때 국제학교에 와국사강의를 듣고는 어깨가 모두 축 처져 되돌아간다는것은 이미 보편화되였다. 미국에 있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매우 실망한다고 한다. 이렇게도 우리 력사가 모멸스런것이였나 하면서.

2004년 개천절행사로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일행은 평양 중앙력사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입구에서부터 100만년전 검은모루유적에서부터 시작하여 덕천사람 그리고 우리 첫 조상인 승리산인간유물을 비롯하여 우리 력사와 문화가 이동한것이나 류입된것이 아니라는것과 고조선과 고구려가 모두 동북아일대를 차지하고있었다고 설명전시되여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고대사서인 《규원사화》나 《한단고기》의 문헌적가치를 인정한 후 이에 근거하여 단군 49대왕들의 이름을 모두 도록을 만들어 전시하고있었다. 이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그리고 이런 력사관의 대조가 지금 어떤 작용을 하는가? 지금 서울에 있는 《중앙박물관》은 사대주의교양교육관으로 딱 알맞는 곳이다.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날것이다.

 

빨리 망하려면 사대주의를 해라

 

회고록의 대종을 이루는 력사관은 망국의 첩경이 사대주의라는것이다. 종파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는 김일성주석 필생의 극복과제였다.(2 163페지) 망국의 원인이 바로 이 3대악페때문이라고 판단했기때문이다.

김일성주석은 회고록에서 력대로 사대주의를 일삼아오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때에조차 큰 나라들의 조종밑에 당파싸움만 하였다, 그러다나니 오늘 친일파가 득세하면 일본군대가 왕궁을 지키고 래일 친로파가 득세하면 로씨야군대가 임금을 호위하고 모레 친청파가 득세하면 청나라군대가 대궐의 파수를 서는 판이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술회하였다.

《그래서 한 나라의 왕비가 궁궐안에서 외국테로단의 칼에 맞아죽고(1895 <을미사변>) 왕이라는것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가서 1년동안이나 갇혀있는가 하면(1896 <아관파천>) 임금의 당아버지가 외국에 랍치되여가서 귀양살이를 하여도 오히려 사죄를 해야 되는 판국이였다.

왕궁을 지키는것도 남의 나라 군대에 맡겼으니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고 돌보겠는가.(1 3페지)

북이 지금 남에서 하는짓가운데 가장 꼴보기 싫어하는것이 사대주의행각이다. 리명박《정부》가 지금 당장이라도 북과 대화를 하려면 사대주의하는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 백번 말하는것보다 효과가 있기때문이다.

김일성주석이 사대주의에 대하여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였는가는 회고록 초반부부터 토로를 하는것을 보아서도 알수 있다. 남북의 혹은 북남의 동질성회복은 사대주의청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것이라도 북에서 하는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것이 철칙이고보면 이런 말이 소귀에 경읽기인것을 모르는바 아니다.

일본이 우리를 삼킬 때에도 세계앞에 내놓은 명분이 조선은 큰 나라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나라라는것이였다. 조선조 500년의 명과 청에 대한 사대주의행각을 확대재생산한 각본이다.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얄따와 까히라에 모인 4대국 정상들도 한결같이 조선은 독립을 바로 시킬수 없기때문에 신탁을 할것인가 말것인가 토론을 하였으며 신탁을 하는것은 모두 동의를 하되 그 기간을 얼마나 할것인가만을 토론하였다.

지금도 변한것이 있는가. 지난 전쟁기간에 리승만은 아예 《국군통수권》을 미국에 통채로 내주고말았다. 그 여파는 60여년이 지났지만 점점 더 큰 파장을 만들어내고있다. 아예 사대예속에 습관화되여버렸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젖떼기 두려워하듯 미국에 매달리고있다.

그렇다. 빨리 망하려면 군을 포기하고 더 빨리 망하려면 사대주의를 해라. 그렇지 않고 우리 력사, 우리 땅을 지켜내려면 사대주의부터 먼저 포기해라. 사대주의는 적의 손바닥안에서 적과 싸우자는것과 같은것이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