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99>
 

  변신의 귀재는 가고, 혁신의 주역은 오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우습지도 않은 변신
      
20121022일 서울에서 노동연대센터발족식이 있었다. ‘노동연대센터는 올해 대선에 출마한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는 노동계 인사들이 급조한 선거기구다. ‘표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대선출마자가 노동계급의 표심을 겨냥하여 그런 기구를 급조한 것은 선거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발족식에서 상식을 깨뜨리는 충격적인 이변이 일어났다. 민주노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저명한 노동계 인사들이 안철수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발표하면서 노동연대센터에 핵심간부로 가입한 것이다.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이 노동연대센터대표를 맡았고, 또 다른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이 노동연대센터산하 노동포럼대표를 맡았고, 민주노총 전 정책연구원장이 노동연대센터집행위원장을 맡았고, 민주노총 전 정치위원장도 노동연대센터에 가입하였다.
 
다른 한 편, 또 다른 민주노총 출신 노동계 인사들은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진영에로 넘어갔다. 통합진보당과 민주노총을 갈라놓는 이간작업을 벌인 뒤에 어느 대선후보진영에 들어갈까 고민 중으로 보이는 민주노총 현 위원장은 또 누구의 품에 덥석 안길 것인가?
 
한국노총 출신 노동계 인사들이 안철수 후보의 노동연대센터에 가입하거나 문재인 후보 선거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민주노총 출신 노동계 인사들이 그런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것은 민주노총의 상식을 깨뜨린 충격적 이변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노동연대센터노동계와 소통하는 창구기능을 하면서 노동정책 수립과 노동부문 조직화사업, 노동현장 현안해결 등 역할을 맡게 된다고 한다. ‘노동연대센터발족식에 신임대표로 나타난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은 발족식 기자회견에서 비정규직, 실업과 저임금, 노사관계 등 산적한 노동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목표를 수립하고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산별, 지역별 노동현장의 힘을 조직하겠다고 자기의 포부를 밝혔다. 이게 무슨 소린가?
 
만일 노동연대센터가 위에 인용한 언론보도나 위에 인용한 신임대표의 발언 그대로 자기 사업을 추진하려 한다면, 그것은 민주노총이 추진해오고 있는 과업을 자기들이 대신하겠다는 뜻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잘라 말하면, ‘노동연대센터는 민주노총을 대체하는 새로운 노동기구로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아니다. 대선국면에 급조된 선거기구가 이 땅의 노동계급이 지난 수 십 년 동안 피땀 흘려 건설한 민주노조를 감히 대체하겠다니, 당치도 않는 헛소리이며, 민주노조운동을 부정하려는 망발이 아닌가! 어제까지만 해도 민주노총 집무실에 들어앉아 노동자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다고 곧잘 말하더니, 오늘은 민주노총에 등을 돌린 채 안철수 또는 문재인 대선후보진영에 머리를 들이밀고 노동자를 위해 일해 보겠노라고 목청을 돋운 우습지도 않은 행동은, 변신의 귀재들에게나 어울리는 기회주의적 행태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안철수 후보는 노동연대센터발족식에서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그런 소리는 노동계급이 행복하게 살아갈 미래의 새로운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노동계급 유권자들의 귀에 듣기 좋게 하는 소리로 들린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안철수 후보의 노동정책이 수구정치세력의 기만적 노동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안철수 후보는 노동연대센터발족식에서 우리 사회의 노사관계는 기업가와 노동자가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협력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로 나가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진정한 노사연대’”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안철수 후보가 말하는 노동연대는 노동계급의 연대가 아니라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연대 곧 노사연대인 것이다. 문재인 후보가 제시한 노동정책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직접 논하지 않지만, 그의 노동정책도 안철수 후보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를 가르는 기준선들 가운데 하나는 계급관에서 나타난다. 진짜 진보정치인의 계급관이 진보적이고, 과학적이고, 변혁적인 데 비해, 가짜 진보정치인의 계급관은 기만적이고, 비과학적이고, 퇴행적이다. 안철수 후보나 문재인 후보는 스스로 진보정치인이라고 자처한 적은 없으므로, 그 두 후보를 가짜 진보정치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들이 비과학적인 계급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진보정치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안철수 후보의 계급관이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그가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불가능한 계급연대를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계급연대를 통해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강력한 기초체력공급을 재개해야 한다
 
안철수 후보나 문재인 후보의 정치활동경력을 살펴보면, 그 두 후보는 사회계급문제를 공부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였을 것이므로, 그런 그들에게 계급관이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별로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이다. 정작 신랄한 비판을 받아야 할 대상은, 그런 수준의 대선후보가 집권하면 계급연대를 실현해보겠노라고 하면서 그들의 대선후보진영에 머리를 들이민 민주노총 출신 노동계 인사들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지난 시기 한때 나마 민주노총 지도부를 차지하였던 그들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진보정당의 노동중심성 확립이니 하고 떠들었던 것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껏 계급연대를 거부하며 노동자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고 노동계급을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으로 이끌어온 민주노총의 길에서 이탈한 그들의 기회주의적 변신은,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이어져온 이 땅의 진보적 민주노조운동사에 먹칠을 하는 짓이며,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자본의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였던 이 땅의 노동열사들을 모욕하는 짓이며, 노동계급이 자기의 투쟁으로 쟁취할 변혁의 미래를 배반하는 짓이다.
 
민주노총 출신 노동계 인사들의 기회주의 변신행위와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계급연대를 주장하는 대선후보진영에 머리를 들이민 인사들이 민주노총을 이끌어 왔으니, 민주노총의 조직역량이 차츰 약화되어 이제는 총파업을 벌이지도 못할 만큼 조직력과 투쟁력이 쇠락해지고 말았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선언은 투쟁은 없고 말로만 하는 뻥파업선언이라는 자조 섞인 탄식이 민주노총 조합원들 사이에서 들려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
 
계급연대를 주장하는 대선후보진영에 머리를 들이민 한심한 기회주의자들이 민주노총 지도인사랍시고 민주노총을 이끌어 왔으니, 민주노동당이나 그 후신인 통합진보당 안에서 노동자 당원들이 당의 주력으로 나서지 못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에는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해괴망측한 사건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민주노총의 기초체력이 강해야,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이 힘있게 전진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구나 체험하는 것처럼, 민주노총의 기초체력은 생각보다 너무 허약하다. 이 땅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이 우여곡절을 겪는 까닭은 민주노총의 기초체력이 허약하기 때문이며, 민주노총의 기초체력이 허약한 까닭은 기회주의자들이 민주노총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은 민주노총 지도부의 혁신이다. 계급연대를 배격하고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사상적 혁신, 오로지 그런 자기혁신만이 기초체력을 잃고 길 위에 쓰러진 민주노총을 다시 일으키고, 집단탈당과 종북모략소동으로 상처를 입은 통합진보당에게 노동계급의 강력한 기초체력공급을 재개하는 것이다.
 
민주노총 조합원들 가운데는 집단탈당과 종북모략소동의 광풍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통합진보당을 사수한 믿음직한 노동자 당원들이 많이 있다. 오직 권력욕에만 병적으로 집착하는 수구정객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기회주의자들이 흐려놓은 진보정치의 시야에 그런 믿음직한 노동자 당원들이 희망으로 비쳐든다.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추구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혁신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는 올해 대선국면에서 이 땅의 진보적 노동계급이 수행해야 할 선행과업은 민주노총의 혁신이다. 혁신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2012111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