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얼룩진 《유신》독재자의 천인공노할 죄악을 고발한다

- 조국통일연구원 고발장 - 

남조선에서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비참한 종말을 고한 때로부터 33년이 되였다.

박정희역도는 집권 18년간 극악한 정보정치, 폭압정치로 남조선을 민주와 인권의 불모지, 암흑천지로 전락시키고 의로운 통일애국인사들과 무고한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탄압, 학살한 희세의 파쑈폭군, 살인마이다.

《유신》독재자가 감행한 치떨리는 파쑈적폭압만행들은 오늘도 피해자가족들은 물론 온 겨레의 원한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남조선에서는 《유신》파쑈독재의 망령이 떠돌며 독기를 풍기고있다.

조국통일연구원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박정희《유신》독재자의 피비린내 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만천하에 알려 《유신》부활책동을 반대배격하는 목소리를 더욱 높이기 위하여 이 고발장을 발표한다.

 

애국적정당, 단체들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고문학살만행

1) 인민혁명당사건

박정희역도는 집권하자마자 군사파쑈통치와 매국배족적인 정책들을 반대해나서는 애국적인 정당, 단체들과 민주인사들을 탄압하는데 광분하였다.

인민혁명당사건은 그 대표적실례의 하나이다.

특등친일매국노 박정희역도는 권력의 자리에 들어앉자마자 매국배족적인 일본과의 회담을 추진하였으며 이것은 남조선 각계층의 대중적인 분노를 폭발시켰다.

1964년 3월 서울대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청년학생들과 각계층 인민들의 항의투쟁이 삽시에 남조선 전지역에로 파급되여 6. 3인민봉기로 번져지게 되였다. 다급해난 박정희역도는 이를 탄압하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악명높은 중앙정보부를 내세워 40여명의 무고한 청년학생들과 각계층 인사들을 체포구속하여 야수적으로 고문한 끝에 8월 《북의 지령을 받고 지하조직을 구성하여 국가변란을 획책하였다.》는 이른바 인민혁명당사건이라는것을 날조해냈다.

그리고 친구를 만난것을 《접선》으로, 술을 같이 마신것을 《회담》으로, 악수를 한것을 《비밀약속》으로 날조한 심문자료라는것을 서울지방검찰청에 넘기여 그들을 기소하라고 명령하였다.

사건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날조극이였던것으로 하여 담당검사들까지도 《피고인들이 중앙정보부에서 문초를 받을 때 자백했다고 볼만한 근거가 없고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수 없다.》고 하면서 수사를 거부하고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일당은 《피고인들이 북에서 남파한 간첩과 접선했다고 볼만한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북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한 혐의는 있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기소장을 날조하여 재판에 회부하고 이들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하였다.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74년에 들어서면서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청년학생들과 각계층인민들의 대규모적인 투쟁이 폭발하자 박정희역도는 《긴급조치》들을 련이어 발동하면서 그해 4월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대표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의 배후에서 《정부전복음모》를 꾸미였다는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을 날조해냈다.

그리고 20여명의 애국적인 인사들을 긴급체포하고 그들에게 《보안법위반》, 《반공법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어마어마한 죄를 들씌워 극형을 선고하였으며 그중 8명은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전대미문의 파쑈적폭거를 감행하였다.


2)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1968년에 있은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도 박정희역도가 조작해낸 대표적인 탄압사건이다.

파쑈도당은 1967년 2월 남조선에서 조직된 남조선해방전략당이 《앞으로 결정적시기가 도래하면 혁명을 일으켜 통일을 실현하고 공산주의에로 나아갈것》을 목표로 내세웠다고 하면서 그 관련자들을 체포한 다음 가혹한 고문을 들이대여 《북 로동당에 입당했고 북의 공작금을 받아 간첩활동을 하였다.》는 허위자백을 만들어냈다. 이에 기초하여 핵심인물인 권재혁을 사형에 처하고 관련자 11명에게 무기징역형을 언도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3) 민청학련사건

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민청학련)은 1970년대 남조선 6개 도시의 24개 대학과 각 지역 고등학교들의 민주주의적인 학생조직이 모여 결성한 합법적이고 대표적인 청년학생조직이였다.

민청학련은 1973년 말부터 《유신》독재철페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중앙정보부해체, 일본과의 회담반대, 구속자석방 등의 투쟁구호를 내들고 남조선 각계층의 반독재, 반외세투쟁을 선두에서 이끌어왔다.

박정희역도는 민청학련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오다가 1974년 4월 《불순반정부조직》이라는 감투를 씌워 무려 4 000여명을 체포투옥하고 《긴급조치위반》과 《내란음모죄》에 걸어 핵심인물 200여명에게 중형을 선고하였다.

당시 민청학련사건으로 체포투옥되여 파쑈도배들의 갖은 고문악행을 당하였던 서울대학교 학생 리병식은 《체포된 이튿날 나는 중앙정보부 6국의 제208호실에서 두손을 앞에 짚고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를 취하고 죽도록 매를 맞은 후 이틀동안 잠을 잘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취조는 3일간 계속되였는데 그들은 나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수건으로 입을 막은 후 코에다 물을 부어넣었다. 다음 전기줄이 손끝에 련결되였을 때 나는 절반 의식을 잃었다.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지독한 고문을 받은 다음 북에 충성을 맹세하였다는 자백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4) 최종길교수학살사건

박정희역도의 《유신》독재기간 개인테로사건도 한둘이 아니다.

박정희일당은 1973년 10월 진보적학자인 서울대학교 교수 최종길이 대학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간섭을 완강하게 반대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해나선것을 문제로 삼고 그를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였다.

파쑈도배들은 그에게 야수적인 고문을 들이대여 《간첩》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려다가 실패하게 되자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그리고는 저들의 살인만행을 감추기 위해 그의 시체에 옷을 갈아입힌 다음 7층 위생실로 끌고올라가 창문밖으로 내던져 투신자살한것처럼 각본을 꾸미였다.

심지어 의사인 최종길교수의 안해에 의해 부검과정에 저들의 범죄내막이 드러날가봐 시체마저 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5) 장준하학살사건

장준하는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림시정부》의 광복군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벌렸고 1953년에 창간한 잡지 《사상계》를 통해 박정희역도의 매국배족행위와 파쑈독재를 예리하게 비판한 진보적인 지식인이였다.

그는 박정희《유신》독재를 반대하여 《개헌100만명서명운동》을 주도하고 매국적인 남조선일본《협정》체결과 윁남파병반대투쟁의 선두에 섰으며 사카린밀수사건과 같은 역도의 부정부패를 파헤친것으로 하여 《재야운동의 거목》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이런것으로 하여 장준하는 박정희《정권》하에서 여러차례나 감옥생활을 하였다.

괴뢰중앙정보부는 1975년 8월 17일 끝내 장준하에 대한 테로를 감행하고 그가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등산도중 발을 헛디디면서 굴러떨어져 죽은것처럼 사건을 조작하였다.

2012년 8월 유가족과 장준하기념사업회가 그의 유골을 새로 조성한 장준하추모공원으로 옮기다가 두개골의 오른쪽 뒤부분이 흉기에 맞아 깨여진것을 발견하고 법의학감정을 해본 결과 타살흔적이라는것이 밝혀졌다.

 

6) 김대중랍치사건

박정희역도는 당시 재야민주인사였던 김대중이 《유신》독재체제구축에 장애물로 되자 그를 《반공법》과 《선거법》에 걸어 3번이나 구속하였는가 하면 1971년 괴뢰대통령선거때에는 편지와 전화로 《정계에서 물러서서 조용히 살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집을 폭파시켜 버리겠다.》고 하면서 무려 11차례나 협박하다 못해 그의 집마당에 폭발물을 던지고 그가 탄 자동차를 3번이나 들이받아 부상을 입히였다.

그리고 1973년 4월 미국 쌘프랜씨스코에서 반박정희강연을 하고있던 김대중을 《도마도쏘스작전》으로 살해하려 한것을 비롯하여 여러차례나 그를 없애버릴 살인음모를 꾸미였다.

그해 8월 8일에는 일본 도꾜의 한복판에서 김대중을 랍치하여 짐짝처럼 오사까로 실어가 미리 대기시켜놓았던 괴뢰중앙정보부소속 선박에 옮겨싣고 바다에 나가 수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역도를 뒤에서 조종하던 미국이 이 사건이 일으킬 국제적파장을 우려하여 저지시키는 바람에 미수로 끝나고말았다.

후에 이 사건이 박정희역도가 직접 지휘한 희대의 정치테로사건으로 만천하에 폭로되여 국제사회의 커다란 분노를 자아내게 되자 역도는 그 모든 책임을 중앙정보부에 떠넘기고 중앙정보부 부장 리후락의 목을 떼는것으로 사건을 덮어버리였다.

이외에도 크리스챤 아까데미사건을 비롯하여 박정희집권기간 애국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단체들과 인사들이 탄압당하고 학살당한 사건들은 수없이 많다.

그것들은 오늘날 그 진상이 전면적으로 드러나 만사람의 격분을 더욱 불러일으키고있다.

 

가혹한 언론탄압 

1) 《민족일보》사건

박정희역도는 1961년 5. 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가로챈 후 파쑈독재체제구축을 위해 언론에 대해서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박정희역도가 쿠데타직후 일으킨 사건도 바로 《민족일보》사건이였다.

《민족일보》는 비록 1961년 2월에 창간되였지만 남조선언론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문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열렬히 주장함으로써 각계층의 통일열기를 북돋아주던 통일계몽지였다.

박정희역도는 1961년 5월 《<민족일보>는 북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창간된 신문이다.》, 《북에 동조하여 용공사상을 류포시켰다.》는 터무니 없는 죄를 들씌워 강제로 페간시켰다.

그리고 사장 조용수는 《간첩》으로 몰아 1961년 12월 야수적으로 학살하고 감사역 안신규, 전기통신사장 송지영에게는 무기징역형을, 론설위원 리건호, 리사 겸 초대편집국장 리종률, 론설위원 리상두 등에게는 징역 5~10년형을 들씌우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2) 《경향신문》강제매각사건

1960년대 중엽에 있은 《경향신문》강제매각사건도 박정희독재가 빚어낸 대표적인 언론탄압사건의 하나이다.

1964년 5월 파쑈당국은 《경향신문》이 괴뢰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고 하여 사장 리준구 등 관계자 8명을 《반공법》위반으로 몰아 체포투옥하였다.

그리고는 리준구에게 신문사의 경영권을 포기할것을 강요하다 못해 《반공법》과 《외환관리법》을 위반하였다고 하면서 중형을 들씌웠다.

뒤이어 《경향신문》강제매각에 반발하는 편집국장 송건호를 체포구금하고 리준구의 안해에게 남편을 석방해주겠으니 그가 가지고있는 신문사 주식을 넘기라고 강박하였다.

나중에는 리준구로부터 경영권을 강탈하여 박정희역도의 사유물인 5. 16장학회에 넘겼다.

 

3) 《동양통신》필화사건과 문인간첩단사건

박정희일당은 1968년 6월 《동양통신》이 미제와 괴뢰역도의 북진흉계가 담겨있는 《전투태세완비 3개년계획》을 보도한것을 두고 군사기밀을 루설하였다고 하면서 이를 보도한 3개의 통신사와 5개의 방송국, 2개의 주간신문사를 불의에 수색하고 54명의 언론인들을 체포투옥하여 중형을 들씌웠다.

1972년 《유신헌법》을 조작해낸 박정희역도는 남조선에서 반독재투쟁이 전례없이 고조되자 1974년 문인간첩단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고 진보적인 작가, 지식인, 언론인들을 《간첩》으로 몰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1974년 2월 괴뢰군 보안사령부는 진보적인 소설가 리호철과 대학교수 김우종, 장병희, 림헌영, 정을영 등이 민단계잡지 《한양》에 《북의 주장에 동조하는 글을 실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들씌워 체포구금하였다.

특히 박정희일당은 《한양》이 총련계잡지라고 하면서 그에 글을 실은 작가, 교수, 언론인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들이대여 허위자백을 받아낸 후 《간첩》으로 몰아 징역형을 들씌우고 자격을 박탈하였다.

2009년 남조선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문인간첩단사건이 박정희《유신》독재에 의해 조작되였다는것이 밝혀졌으며 2011년에는 당시 《간첩》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탄압과 박해를 당한 관련자모두에게 무죄가 선포되였다.

 

4) 《신동아》필화사건

1968년 11월 박정희일당은 월간잡지 《신동아》 기자 김진배와 박창래가 《정부》와 재벌들의 결탁관계와 부정부패를 폭로한 기사를 잡지에 게재하자 즉시 《반정부음모죄》, 《내란선동죄》에 걸어 그들을 체포하였다.

이들에게 들씌운 《반정부음모죄》라는것은 박정희역도가 재벌들에게 특혜와 특권을 주어 폭리를 얻게 해주고 재벌들은 그 대가로 역도에게 거액의 통치자금을 섬겨바친 내막을 폭로한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쑈당국은 기자들을 체포하여 온갖 박해를 가하고 나중에는 기자직을 박탈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 부장 손세일, 론설위원 홍승면 등도 김진배와 박창래의 취재와 집필을 묵인조장하였다는 죄를 들씌워 강제로 해임시켰다.

이런 식으로 역도는 1968년 한해동안에만도 무려 70여개에 달하는 언론, 출판기관들을 강제페간시켰으며 1 000여명의 언론인들을 체포투옥하였다.

 

해외교포들에 대한 야수적인 폭압만행

 1) 남조선적화공작단사건

정의와 진보에 대한 박정희역도의 파쑈적탄압만행은 해외교포들에게도 악랄하게 감행되였다.

해외교포들이 남조선에 들어서는 첫 순간부터 《간첩용의자》라는 딱지가 붙어 첫째가는 감시의 대상이 되였고 그들이 누구를 만나면 《접선》이고 돌아가면 《탈출》에 해당되여 탄압당했다.

그 대표적인것이 바로 1967년에 있은 남조선적화공작단사건이다.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박정희역도가 서부도이췰란드, 프랑스, 이딸리아 등에서 학술연구와 학업에 종사하고있던 남조선출신 학계, 문화계 인사들과 류학생들이 역도의 굴욕적인 일본과의 회담의 반동성을 폭로하고 북남대화와 협력, 교류를 통한 자주적평화통일을 주장했다고 하여 그들에게 《간첩죄》를 들씌워 탄압한 폭압사건이다.

당시 박정희역도는 서유럽에 거주한 예술인, 지식인, 류학생 등 194명이 동부베를린주재 북대사관을 오가면서 간첩활동을 하고있다고 하면서 70여명의 해외교포들을 유인, 랍치하여 온갖 고문과 박해를 가하여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서부도이췰란드 프랑크푸르트대학 리론물리학 연구원 정규명 등 2명에게 사형을, 서부도이췰란드에서 세계적인 음악가로 활동하던 윤이상을 비롯한 30여명에게 무기징역까지의 중형을 각각 선고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1967년 3월부터 8월까지의 기간에 329명의 해외교포들이 체포구금되여 극형과 중형을 언도받았다.

 

2) 학원간첩단사건

재일동포류학생들이였던 서승, 서준식형제에 대한 《유신》독재자의 야만적인 고문행위는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세상사람들을 경악케 하고있다.

박정희역도는 1971년 4월 27일의 괴뢰대통령선거를 앞두고 《3선개헌》반대투쟁 등 대중적인 반파쑈민주화투쟁으로 선거에서 패할 위기가 조성되자 20일 학원간첩단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고 재일동포류학생들인 서승, 서준식형제를 비롯한 51명을 체포하였다.

파쑈살인마들은 간첩단의 주모자가 서승, 서준식형제라고 하면서 이들이 선거를 앞두고 학생, 지식인, 로동자들속에서 민중봉기를 선동하고 사회적혼란을 조성하여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느니, 학원과 각계층에 잠입하여 지하당을 조직하고 반《정부》운동,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하였다느니 뭐니 하는 어마어마한 죄를 들씌웠다.

그리고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그들을 천정에 매달아놓고 참나무몽둥이로 두들겨패는 비행기고문, 밑에서 불로 구슬리는 칭기스한료리고문, 500촉짜리 전등 5~6개가 켜있는 밀페된 방안에서 60℃의 고열과 촉광으로 잠재우지 않는 백열등고문, 독사가 우글거리는 좁은 콩크리트방에서 전등을 켰다껐다 하면서 정신을 마비시키는 뱀고문 등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야수적인 방법으로 고문하였으며 나중에는 얼굴형체조차 알아볼수 없는 페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일본언론들은 파쑈교형리들의 잔인한 고문만행에 대해 《그들의 얼굴은 화산에서 녹아내린 용암을 련상케 할 정도로 울퉁불퉁 이그러졌고 피부색은 팥색으로 변하여 죽은 사람의 피부처럼 보였다.》고 폭로했다.

오죽하였으면 일본에서 서승을 가르쳤던 한 교원이 그를 만나보고는 《털하나 남지 않은 눈섭, 끝머리가 불에 타 녹고 구멍이 우로 향하여 벌어진 비뚤어진 코, 불에 녹아난 입술, 턱밑에서 목까지 검붉은색을 띤 상처, 아래우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의 중간마디가 없어지고 손바닥이 불에 타서 녹은 왼팔, 상처 입지 않은것은 그의 발가락뿐인데 그것은 도장을 찍기 위해서만 필요했다.》고 몸서리를 쳤겠는가.

교형리들은 서승, 서준식형제에게 각각 사형과 15년의 징역형을 언도하였다가 내외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자 무기징역형과 징역 7년형을 언도하였다.

 

3) 학원침투간첩단사건

박정희역도는 1975년 괴뢰중앙정보부를 내세워 또다시 학원침투간첩단사건을 날조했다.

1975년 8월 5일 괴뢰중앙정보부는 서울교육대학 2학년 학생이였던 민단계 재일동포류학생 권말자를 랍치하고 10여일동안이나 가혹한 고문을 들이대여 간첩으로 만들려 하였다.

괴뢰중앙정보부의 살인마들은 권말자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그의 옷을 벗기고 짐승처럼 달려들어 릉욕하였으며 그가 실신하자 허위진술서를 작성하여 학원침투간첩단사건이라는것을 날조하고 12명의 재일동포류학생들을 포함한 21명을 체포투옥하는 치떨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사건은 그해 12월 권말자가 일본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박정희일당의 야수같은 만행을 폭로하면서 그 진상이 세상에 낱낱이 알려지게 되였다.

이상의 사건들은 박정희군사파쑈독재시기의 수많은 탄압, 학살만행들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유신》독재자의 잔악무도한 탄압만행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원한은 아직도 구천에 사무쳐있다.

천하의 파쑈폭군, 살인마로 악명떨친 박정희역도의 천인공노할 죄악은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절대로 용납될수 없으며 온 민족의 저주와 규탄속에 두고두고 계산될것이다.

남조선인민들은 피로 얼룩진 박정희의 군사파쑈독재 18년의 악몽을 잊지 말고 보수세력의 재집권책동을 추호도 허용해서는 안될것이다.

주체101(2012)년 10월 26일

평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