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중에서

2. 《세기와 더불어》 세계화 담론

  
 
《墾島》에 가다 《看島》에 살다 《間島》에 죽다

 

글을 시작하며

 

지금 룡산철거민유가족들은 망루에 《살려고 올라갔다가 죽어서 내려왔다.》고 절규하고있다. 한세기전 우리 민족은 간도에 《살려고 갔다가 죽어서 돌아왔다.》 이 글은 《墾島에 가다 看島에 살다 間島에 죽다.》로 요약된다. 이 세가지 간도의 이름속에 왜 우리가 그곳에 살려고 갔다가 죽어서 돌아왔는지의 리유가 다 담겨져있다. 적어도 간도에 대한 이 세가지 이름을 설정해놓지 않고는 간도에서 겪었던 우리 민족의 운명과 수난을 바로 리해할수 없다. 룡산참사와 일제에 의한 간도에서의 대학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은유적비교이다. 이런 세가지 간도의 각기 다른 의미는 1791년 제라미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을 일제가 간도라는 땅에 침략야욕을 성취하려 그대로 적용한 결과이고 룡산참사는 대재벌의 리익추구에 힘없는 민중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민생이고 복지인가?

소설 《북간도》의 첫 장면은 조선인인삼장사군들이 간도땅에서 서로 싸움을 하다 일제순경과 중국관리가 서로 끌고가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곳에 왜 갔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잘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것이다. 이렇게 《비옥한 반달모양의 땅(fertile crescent)의 이름 <팔레스티나>》같은 우리 민족의 젖과 꿀이 흐르는 민생복지의 땅으로 우리는 간도에 墾島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것이다. 1881년 두만강바닥에 흙모래가 쌓여 길이 5리가량의 모래톱이 만들어져 여기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런 개척의 땅을 墾島라 한다. 1903년 조선관원 리원범은 땅을 조선사람이 개간하였으니 조선땅이라 하였다. 이에 청은 동의하지 않았다.

1904년 청은 조세를 바치고 조선사람들이 농사를 짓도록 했다. 1907년 일본은 사이또를 우두머리로 룡정에 총감부 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한인의 생명재산보호소》를 설치, 간도의 범위를 연길, 화룡, 왕청 등지로 확대한다. 그리고 주요교통로에 14개 헌병분주소를 둔다. 이런 《보호와 보살핌》의 대상이 된 간도를 看島라 할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우리를 중국에 대하여 《보호하고 생존권을 보장해준다.》는 《민생단》이 看島에서 출현한다.

이제 더 나아가 1909 9 4일 《중조도문강변무조항》 즉 간도협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일제는 길회철도부설권과 조선인에 대한 령사재판권을 얻어내고 청나라는 룡정, 국자가, 훈춘, 백초구, 이도구 등 5개 지역을 일본의 통상지로 개방하고 통상지에 일본령사관 분관을 세운다. 이제 간도는 완전히 정치적으로 일본과 중국사이에 끼여있는 間島가 된다. 모래톱으로서 간석지인 사이섬이 아닌 정치적분쟁지역이 되였다. 이제부터 마치 가자지구의 팔레스티나사람들같이 처참함을 우리 민족은 경험하게 된다. 반《민생단》마녀사냥에 휘말렸던 땅으로서 間島는 우리에게 더이상 墾島도 看島도 아니다.  

 

간도라는 이중감시탑속의 조선인

 

1931 9 18일에 일본은 자해공갈단같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로 둔갑하는 소위 《만주사변》을 조작한다. 이는 근현대사에 손꼽힐만 한 일본이 자행한 위장기발사건이다. 진주만, 바크보만 그리고 만주사변 이 3대사건은 미, 일이 조작한 《위장기발》이라고 미국 그리핀교수는 이미 지적한바 있다. 이 조작극에 놀아나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피해를 고스란히 조선열혈공산주의자들이 떠안았다회고록에 의하면 《민생단》혐의가 있는자들은 고작 89명정도였다. 그 소수의 밀정들때문에 수많은 애국자들이 학살당한다.

1932 2월 만주 간도는 봄을 기다리고있었다. 조선족 100만은 9. 18사변의 최대희생자가 될 운명이였다. 일본군대는 조선족 한교만 보면 자기들을 피해 도망온것이라 보고 즉 《부정선인(不呈鮮人)》이라 하고 체포총살하였다. 일본측 적구로 오지 않는 부락은 방화략탈하였다.

현대프랑스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주저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에서 《사건(event)》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의하고있다. 여기 공백인 0이 있다고 할 때를 이를 (0)으로 표시하면 이것은 사건이 된다. 0은 완전공백이지만 이것을 일단 두개의 괄호사이에 넣어버리면 《한개》라는 개수가 되여 《1》이 된다. 2 000년동안 수학자들이 1을 사용하면서도 1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몰랐다고 하면서 (0)은 공백인 무이면서 동시에 1이라는 유라는것이다. 이를 《공백의 가장자리》 혹은 《사건적장소》라고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간도에 살고있던 조선사람들은 공백의 가장자리 그리고 사건적장소속에 있었던것이다. 일본과 중국이 이런 사건속에 있었다고 할수는 없다. 이런 가장자리에서 생긴것이 바로 《민생단》이며 이는 분명한 하나의 《사건》으로 조건을 갖추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를 《민생단》사건으로 부르기로 하는 리유이다.

간도의 조선인청년들은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한것인지 극심한 정신적혼돈을 겪지 않을수 없었다. 그 모호함은 가장 견결한 항일투사를 일제의 개인 《민생단》특무로 몰아죽이는 그 순간마저도 삼켜버렸다. 《부정선인》 혹은 《소귀자》라는 이름이 우리한테 붙게 된것은 0과 같은 존재가 사건적이 될 때에 공백의 가장자리에서 따르는 불가피한것이였다.

이러한 사이로서의 間島를 한홍구교수는 《희망의 땅, 비극의 땅 간도》 그리고 《빛과 어둠 그리고 운명과 의지》라고도 했다. 《그것은 동원인 동시에 참여였고 혼돈인 동시에 진보였으며 어둠인 동시에 빛이였다.

 

오가작통법과 십가련좌법

 

룡정에 일본령사관이 생기고 만주철도가 부설되고 드디여 1930년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墾島는 間島로 심화되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도 5. 30폭동, 곧 이은 백색테로사건, 공산주의자들의 《주구청산투쟁》 등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살아오던 우리들에겐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격랑의 세월을 안겨다주었다.

일본은 《토벌대》를 간도에 보내 반일 혹은 항일유격대를 《비적》 혹은 《공비》라 명칭하고 이잡듯이 마을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집단으로 죽였다. 드디여 1932년 일본은 《조선군》으로 가장된 군대를 간도에 보내여 조선인을 그리고 중국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여기서 진정한 의미의 사이적존재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래서 중국인이 볼 때에 조선사람들은 자기들과 같이 일본의 피해자인 동시에 일본과 같은 가해자로 보게 된다. 조선사람은 이렇게 가해자로서, 피해자로서 간도에 살게 된것이다. 이를 두고 墾島에 살러 왔지만 間島로 살아가게 된것이라 한다. 間島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것인지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붙인것인지 간도의 밤만이 알고있을것이다.

이밤의 노래를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아래 글은 회고록 4 140142페지의 내용을 요약한것임.)

 

《간도의 항일근거지들은 1935년에도 물샐틈없는 봉쇄상태에 놓여있었다. 이해에는 적들의 봉쇄가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가 로선을 바꾸어 혁명에서 대단원을 이루어보려고 결심하였다면 그들은 봉쇄망을 최대한으로 조이여 <공비>숙청에서 결정적승리를 달성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일제는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정예무력을 동원하여 유격구를 겹겹이 포위하고 매일같이 항일근거지의 모든 생물체들을 지상에서 쓸어버리기 위한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혁명군과 인민들사이의 련계를 끊어버리기 위한 적들의 책동중에서 기본으로 된것은 바로 집단부락정책이였다. 이 정책에 따라 인민혁명정부의 관할밖에 있는 모든 행정구역의 주민들은 싫건좋건 토성과 포대로 둘러싸여있는 밀집부락에 들어가서 오가작통법이나 십가련좌법과 같은 악법들과 중세기적인 질서의 지배밑에서 두더지같은 생활을 해야 하였다.

적들이 만주각지에 널려있는 수천수만개의 산재부락들과 가가호호들에 불을 지르고 최후통첩적인 철거령을 내리고 그 주민들을 벌방의 토성촌들로 무자비하게 이주시킨 목적은 군대와 경찰, 무장자위단이 상주하고있는 <안민촌>들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편안한 통치를 하자는데도 있었지만 주요하게는 토성, 포대, 물홈, 울타리, 탐조등, 철조망과 같은 인공적인 장벽들 <공비박멸>에서 가장 큰 장애로 되고있던 군민일치의 피줄기를 영원히 끊어버리자는데 있었다. 유격대가 인민의 보호자이고 인민이 유격대의 후방이며 중요한 정보원천이라는것은 적들도 잘 알고있는 상식이였다.

인민을 토성속에 모조리 걷어넣으면 도로건설과 군사시설의 설치를 비롯한 여러가지 부역에도 집단적으로 동원시킬수 있었고 그 비밀도 철저히 보장할수 있었으며 로력과 자금, 물자의 징발도 어느때나 용이하게 할수 있었다.

적들은 집단부락건설을 계기로 반공선전을 강화하였다. 너희들이 정든 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집단부락으로 가게 된것은 다 공산당때문이고 혁명군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들과 내통하면서 치안을 교란시키기때문에 당국은 부득불 산재부락들을 없애고 백성들이 <공비>나 마적들의 성화를 받지 않고서도 살수 있는 <안민촌>들을 건설하게 된것이다라고 지껄이였다.(필자주: 이것이 바로 看島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적들은 토성을 네모나게 쌓고 한 토성안에 100호 또는 200호의 집들을 밀어넣었다. 집은 군경들의 감시에 편리하게 현대공장지구 사택들처럼 줄을 맞춰 지었다. 한동네에서 온 사람들도 집단부락에만 들어가면 서로 추녀를 맞대고 살지 못하게 갈라놓았으며 친척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앞뒤집이나 아래웃집에 있게 하지 않고 동서남북에 각각 분산시켜 배치하였다. 그것은 뜻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치안유지에 방해되는 모의를 하거나 비밀결사를 시도하지 못하게 하자는 조치였다.

적들이 집단부락안의 주민들의 분렬과 리간을 얼마나 꾀하였는가 하는것은 오가작통법 한가지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적들은 다섯집으로 한개 조를 뭇고 그중 한집이라도 유격대와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면 조안의 모든 세대들에 꼭같은 처벌을 주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그 다섯집의 주민들을 전부 학살하군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악명높은 오가작통법이다.(필자주: 이것이 바로 판옵티콘의 구조이다.)

《집단부락을 통치하는 행정관리들과 무장군경들은 인민혁명군의 수중으로 한되박의 쌀이라도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식량에 대한 통제를 무섭게 하였다. 그들은 주민들이 토성밖으로 일하러 나갈 때마다 <공비>들에게 줄 여분의 밥이 담겨있지 않는가 하는것을 조사하려고 점심보따리까지 헤쳐보았다. 점심그릇도 한사람몫이 넘으면 무턱대고 빼앗아냈다. 집단부락의 농민들은 밭일이 묵어서 새벽작업을 하고싶어도 날이 밝기 전에는 성밖으로 나갈수 없었고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혁명군은 집단부락인민들의 식량상방조를 거의나 기대할수 없었다.(필자주: 지난 전기간에도 《공비토벌》이란 말은 그대로 적용되였으며 같은 방법으로 초토화내지 《토벌》을 하였다.)

《유격구에서 재배하는 곡식으로는 군민에게 필요한 식량을 충당할수 없었다. 게다가 적들이 줄곧 농사를 방해하였다. 그들은 사람과 함께 농작물도 초토화대상으로 삼았다. 싹이 돋아나는 곡식은 군화로 짓밟았고 성장기의 작물은 불을 질러 태워버리였으며 다 익은 낟알은 무장대가 우마차를 끌고와서 모조리 실어갔다. 이것은 총과 대포로써도 멸살시킬수 없는 유격구역의 군대와 인민을 완전히 굶겨서 죽이기 위한 비렬하기 짝이 없는 기아작전이였으며 목을 조이는 봉쇄작전이였다.

<민생단>은 해체되였지만 혁명대오를 안팎으로부터 분렬와해하기 위한 적의 파괴작전은 종전보다 더 악랄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였다.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들에는 미인들의 라체사진이나 추잡한 남녀관계를 그린 눅거리춘화들까지 나타났다. 돈에 매수된 미녀들이 로자 룩셈부르그나 쟝느 다르크의 탈을 쓰고 우리 대오에 침투하여 군정간부들의 넋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경찰서나 헌병대로 데려가기 위한 부식공작을 열심히 벌리였다.

이 모든것은 간도의 유격구들을 인간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절해고도의 세계로 만들어버리고 그것을 철저히 초토화하고 질식시키기 위한 대살인광대극이였다.

 

스낭제염소마을과 프렌감옥 그리고 간도(看島)

 

그러면 일제는 어디에서 오가작통과 같은 방법을 배워왔을가? 우리는 이미 일본은 《명치유신》직후부터 판옵티콘을 도입하여 일본내에서 성공한 사례를 소개하였다. 서구에도 오가작통과 같은 구조로 마을을 건설하려는 생각이 없었던것은 아니다. 벤담보다도 먼저 17751779년 왕립제염소를 위해 세운 아르케 스낭마을이 그 례라 할수 있다. 정중앙에 관리자의 집은 토대가 높게 망루같이 설계되였고 내부에 교회가 있고 눈을 상징하는 둥근 창을 내였다. 이는 마치 성경 창세기속의 에덴동산같은 구조이다. 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가 하나 있고 그 둘레에 다른 과일나무들이 서있다. 《생명나무》가 원어로는 《모든것의 모든것(all of all)》이라고 한다. 두말할것없이 신이 거주하는 곳이고 신의 두눈은 동산안의 모든것을 간호, 감시한다. 인간이 죄를 짓는지 않는지, 인간이 다른 존재에 의해 상해를 당하는지 안당하는지 등등.

스낭마을은 설립목적이 이런 에덴동산같이 리상향을 만들기 위한것이였다. 그러나 스낭마을은 원래 원형으로 건설하려는 취지가 다 이루어지지 못하고 반원이 되고말았다. 사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그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다. 18세기 유럽의 합리주의사상과 인간의 도덕성이 완성되면 인간사회는 저절로 리상향이 이루어질것으로 믿었다. 판옵티콘이 이런 리상향의 반응이라 할수 있다. 19세기말에 와서는 원형판옵티콘이 사라지고 중앙탑이 없는 프렌감옥은 중앙공간축에 수직으로 수용실건물을 배치하였다. 건축가 푸생이 1898년 설계해 프랑스 빠리근교에 세운 프렌감옥은 넓게 정착된 방사형평면과 함께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있는 평면이다.

생각키로는 일제가 간도에 만든 오가작통마을구조는 프렌감옥의 변형된 판옵티콘에서 유래한것이 아닌가 한다. 일제가 《명치유신》이후 판옵티콘을 생산로동현장에 적용하여 효과를 본 결과를 역으로 악랄하게 우리에게 적용한것이 오가작통방법이라고 본다. 그것도 조선사람들을 《공비》로부터 돌본다는 미명하에 말이다. 벤담은 수감자들이 어떻게 로동을 생산적이고 효률적으로 하도록 할것인가? 어떻게 수감자들을 유용하게 만들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가 감옥안에서 무엇보다 필요한것은 수감자들을 분류, 구분하는것이라 생각하게 되였다. 지금까지 감옥안에서 효과를 보지 못한 리유는 수감자를 무작위로 가둠으로 효과적인 로동조직을 하지 못하였고 통제도 어려웠다는데서 착안한것이다.

이 정도면 일제가 간도땅에서 유격구해체이후 오가작통구조를 만든것이 얼마나 판옵티콘과 닮았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벤담은 통제를 위해 인구조사만큼 유용한것은 없다고 보아 《극빈자분류표》를 만들어 년령, 성별, 건강의 등급 등을 포함한 47렬의 분류표모델을 작성하였다. 그래서 인구의 분류에 따라 일의 종류도 분류하여 그 사람에게 알맞는 일을 무엇이든 분담시킨다. 례를 들어 앉아서 일어설수 없는 수감자에게는 실뜨개같은 일을 시키면 된다. 벤담은 이를 《모든 팔을 사용하는 원리》라고 했다. 모든 팔이란 신의 팔같은것이 아닌가. 불교의 돌봄의 자비의 손 천개와는 정반대인 감시의 천수가 간도에 마수같이 뻗치고있었다.

감옥의 죄수를 개인고립화할것인지 아니면 집단화할것인가는 아직 론난거리이다. 전자의 방식이 펜실베이니아모델이라 하고 후자를 어번모델이라고 한다. 벤담은 물론 이 량자를 종합한 제3의 방식을 취하였다. 일제의 오가작통법도 제3의 모델이다. 일제는 집단화된 유격구내 사람들이 집단행동하는데 위협을 느꼈으며 그렇다고 개인별로 고립화시킬수도 없었다. 관리와 비용이 엄청나기때문이다. 이런 제3의 모델을 악리용한것이 회고록이 전하는 일제의 오가작통같은 《집단부락정책》인것이다. 그안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벤담이 선의로 구상한 판옵티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것이였다.

 

드디여 間島에서 우리는 죽어가고있었다

 

이렇게 벤담의 판옵티콘이 역기능으로 진화할줄은 그자신도 몰랐었다. 19세기말∼20세기에 들어 18세기 합리주의와 도덕주의는 빛이 바래고 권력의 성격과 구조자체가 변했기때문이다. 이에 착안한 푸코는 판옵티콘의 감시와 처벌의 기능만을 엿본것이다. 그리고 그의 감시와 처벌의 리론은 일제의 식민통치론리를 보기에 더 적합한것이였다.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오늘날 신자유시대에 《최대소수의 최대행복》으로 변한것에 대해 그는 지하에서도 놀라고있을것이다. 여기에 간도락토의 꿈은 산산이 무너지고 墾도가 看도로 그리고 다시 間도로 변하면서 우리 배달조선족은 서서히 죽어가고있었다.

이런 구조속에서 발생한것이 《민생단》사건이다. 사이적존재로서의 기구한 운명은 간도에서 표본같이 나타났다. 거듭 말해 마치 팔레스티나안의 가자지구같이 말이다.

만주땅안에서 이런 일본이 만들어놓은 마을과 같은 처지와 신세는 다름아닌 우리 민족자체 그리고 국가라는 그자체의 신세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세울수 없었던 그것이 이것과 무엇이라도 한점, 다른 점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오가작통, 십가련좌라는 구조속에 들어있지 않다고 장담할수 있는가? 사이적존재로 강대국들사이에 끼여 이쪽저쪽에서 감시와 감독을 받아야 하고 의심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어제가 아닌 현재 우리의 민족적운명이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윁남에서 우리의 의사에 상관없이 요청만 하면 파병을 해야 하고 모든 경제주권은 미국딸라의 힘앞에 맥을 쓸수 없는 우리는 지금 국제적으로 혐오와 의심과 증오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것이다.

항일유격대는 여기서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유격구지역을 이렇게 오가작통방식으로 전환시키려 달려드는 일제의 대규모적인 침략에 대처하여 새로운 조치를 취할수밖에 없었다. 유격대는 협소한 지역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역에 진출하여 일제와 전면대전하는 한편 유격구해체문제를 상정시켜 새로운 론쟁을 하지 않을수 없었. 김일성사령관의 이에 대한 결단은 또 하나의 력사적기록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