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중에서

 

1.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집단지성과 헌법 63조의 집단주의원칙이 웹 3. 0을 창조할 때가 온다

 

나는 20086 21() 오후 3시부터 서울시청광장에 나가 배회하기 시작했다. 4시에 《정부》가 소고기추가협상결과를 발표하기로 되여있고 전날에는 《대통령》비서진물갈이가 있었다. 과연 그 결과가 초불에 어떤 영향을 주고있는지 확인하고싶어서였다.

하늘은 장마비를 머금은 검은구름을 잔뜩 이고있고 《정부》는 비만 내리기를 기다렸을것이다. 토요일 오후 4시에 발표를 하면 저녁초불모임은 한풀 꺾일것이라 생각했던것 같다. 그러나 하늘도 도왔고 시민들은 《정부》발표는 보나마나라는듯 4시무렵에는 이미 광장을 그득 메운 상태였다.

4시이전부터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든 리유는 무엇일가. 나는 그 리유를 지금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소고기이상의것을 담고있기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MB의 잘못된 대전제, 다시말해서 《안보를 지키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시급히 서두르지 않을수 없다.》라는 MB의 전제아닌 착각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것을 이심전심으로 다 알고있었기때문이라 생각했다.

소고기는 차라리 이런 감추어진 감정이 표현되는 출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백두밀림의 우등불은 오늘도 여기서 다시 타고있는것이 아닐가? 그러나 우리는 다시 좌절할수밖에 없고 억울함을 안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여럿이 모였지만 그것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있다. 이 초불상황이 전체를 하나로 그리고 하나를 다시 전체로 만드는 력동적인 작용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웹 2. 0》이 만들어낸 소위 《집단지성》을 락관할수만은 없다.

 

《몰》의 구조를 한 서울시청광장

 

서울시청광장은 지하철 1호선, 2호선, 3호선, 4호선, 5호선에서 걸어서 10분안에 있는 공간이다. 1호선 시청역과 종각역, 2호선 시청역과 을지로입구역, 3호선 경복궁역과 종로3가역, 4호선 서울역과 회현역, 5호선 광화문역 출구에서 오후 5시만 되면 사람들이 빠져나와 서울시청광장으로 모여든다. 그것도 하루이틀이 아닌 50여일 가까이.

서울시청광장은 큰길이 사방으로 나있다. 광화문방향, 서울역방향, 정동방향, 을지로방향, 서소문방향, 안국동방향, 서대문방향으로 큰길이 나있다. 지하철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초불을 들고 지상에서 이런 방향으로 무리지어 행진을 한다. 그것도 수만에서 수십만씩이나 같은 구호를 웨치며 행진한다. 그러나 가다간 막힌다. 이것이 수십번 반복의 반복을 거듭한다.

탈현대의 상징으로 《몰(mall)》을 들고있다. 몰은 건축구조에 있어서 들어오는 입구(entrance)와 출구(exit)가 다른것이 아니고 사방에 출입구가 있고 다시 들어온 문으로 다시 나갈수 있다. 차를 지하에 주차하고 승강기타고 우로 올라가면 원형으로 된 광장에는 온갖 잡화상과 식당, 영화관, 서점 등이 있다. 이런 몰의 구조를 두고 탈현대적이라고 한다. 어쩌면 서울시청광장은 이런 몰의 확대판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그렇다면 우린 지난 50여일간 탈현대적구조속에서 이를 체험하면서 살아왔다고도 할수 있다.

1960년대말 하비 콕스가 쓴 《세속도시(Secular City)》는 선풍적이였다. 콕스는 세속도시의 형태(shape)는 클로버 립(Clover leaf)과 전화교환대(Switch board)와 같다고 했다. 마치 도시의 고속도로가 클로버 립같다고 하여 이를 기동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도시인들은 마치 전화교환원이 누구에게 서로 련결해주는줄도 모르고 일하는것처럼 살아간다고 하여 이를 두고 닉명성이라고 했다. 서울시청광장 지상과 지하는 교통망이 클로버 립과 같으며 서로 모인 사람들은 서로 누구인지 모르고 누구인지 묻지도 않는다.

 

와이브로로 무장한 신유목민

 

2008년 광화문시위현장에 유난히 눈에 띄는것은 3인조 와이브로 개인인터네트신문 기자들이다. 한사람은 노트북을, 한사람은 카메라와 장비를, 다른 한사람은 마이크를 들고다니면서 촬영도 하고 인터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즉각즉각 인터네트상으로 현장의 생생한 장면이 전송된다. 그러면 전세계 누구나 안방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고있는 일들을 시시각각 접할수 있다. 이것이 이번 초불집회를 성공시킨 비결이다.

여기에 현장과 독자간에 쌍방향소통을 가능하게 만든것이 《웹 2. 0》이다. 2. 0이라는 말은 지난 2004년 이름을 얻은 후 바야흐로 사회문화적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웹 2. 0에 대한 관심이 높다. 2. 0은 이제 인터네트평론가에서부터 개발자 그리고 매스미디어에 이르기까지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되였다.

쌍방소통이란 량방향이 동시참가함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개방체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개방, 공유, 참여가 웹 2. 0이 가지고있는 의미라 할수 있다. 이제 이 말은 사회비평가들까지도 2. 0이라는 단어를 사회문화적현상을 비유할 때 즐겨 사용한다. 《리뷰 2. 0》, 《쇼핑 2. 0》, 《토론 2. 0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이번 광화문시위는 1987 6. 10항쟁과 류사한 점도 있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는 바로 이런 웹 2. 0의 특징유무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20년전 항쟁에는 이런 개방된 참여가 없었으며 언론이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류비통신》에 의해 최루탄과 화염병만이 의사소통의 전부인 투쟁이였다. 이런것을 두고 《웹 1. 0》이라고 한다. 이런 비교는 20년사이에 얼마나 투쟁문화가 변했는가를 알수 있게 한다.

20년전에는 배후세력만 찾아내 검거 혹은 일망타진하면 조직이 쉽게 무너지고 운동의 기동력이 감소하기마련이였다. 그러나 2008년의 경우는 쉽게 배후주동자를 찾아낼수 없고 찾아냈다 해봐야 주동자의 영향력이란 미약하기마련이다. 지도부가 제시한 구호와 행동지침, 일사불란한 대오 그리고 대오의 응집력과 물리력으로 전선을 유지하던 《시위 1. 0》시대는 당시의 폭압적인 정치상황과 맞물려 아쉽게도 개방되여있지도 않았으며 참여하기도 공유하기도 어려웠다. 자발적참여에는 배후가 없다. 배후세력을 알고싶어하지만 배후세력을 알수 없는 리유이다.

여러 단체와 조직이 배후세력으로 지목받았지만 결국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시위 2. 0》의 배후세력은 누구인가? 초불시위가 벌어지는 광장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여있으며 성별, 년령, 직업과 무관하게 《참여》할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이슈에 대해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다.(공유한다)

80년대시위는 진압경찰의 립장에서는 다루기 편했다. 확성기를 들거나 유인물을 뿌리는 주동자의 색출이 용이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이를 태운 유모차와 젊은 부부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3대가 모두 나온 가족들, 데이트삼아 찾은 젊은 련인들을 흔히 볼수 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주동자로 삼기 어렵고 미디어다음 아고라를 배후세력으로 몰수도 없다. 2. 0이나 시위 2. 0이나 《사람》을 리해하는 사회학적, 인문학적관점을 가지지 않으면 온전히 해석할수 없음이 그 까닭이다.

이러한 웹 2. 0을 두고 《집단지성》이라고 한다. 상호 웹으로 련관이 되여 같이 지식을 공유하고 같이 생각하고 쌍방향소통을 하므로 누구나 동시참여도 할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집단지성의 상징성을 동학군에서도 그리고 항일유격대를 통해서도 그 단면을 엿볼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집단지성인 웹 2. 0의 문제점도 지적하려고 한다.

 

애동학군 같기도 하고

 

6 21일 저녁 초불집회를 현장에서 바라보면서 서울시청광장이 마치 전라도 정읍에 있는 백산(白山)과 그 영상이 겹쳐지는것을 발견하였다. 1894 3 21일 고부관아를 점령한 동학군은 3 25일 밤 홰불을 들고 태인에 있는 백산에 모여들었다. 허허벌판가운데 있는 낮은 야산에 7천여명의 농민들이 산지사방에서 모여 올라왔다. 마치 사방이 터져있는 서울시청광장과 같은 곳이다.

이들은 3정의 문란과 봉건지주의 억압에 견디지 못해 자발적으로 참가한것이다. 대장은 전봉준, 총관령은 김개남, 손화중이였다. 이들은 1. 사람을 죽이지 말것, 2. 충효를 다할것, 3. 일본오랑캐를 몰아내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할것,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올라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앨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두고 후대학자들은 반봉건반외세라고 한다. 민생과 민족문제가 모두 포함된 결의문이였다.

동학군은 사발통문이라 하여 사발을 엎어놓고 그 주변에 주모자들의 이름을 적음으로써 스스로 주모자가 없다는것을 통해 정부군을 속이려 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동학의 조직자체가 위계적이지 않는 수평관계였으며 이를 그물망식이라 하며 포접(抱接)이라고 했다. 각 포마다 접을 두고 접에는 접주를 두어 그물망과 같았다. 이는 실로 탈현대적인 조직방식과도 같았으며 이는 우리 민족의 심성구조에 맞는것이였다. 동학이 삼남일대에 그렇게 급속하게 퍼져나갈수 있었던것은 이런 탈현대적포접구조때문이다. 이런 구조에 의한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결국 청일외세에 의해 좌절되고말았지만 우리의 유목민적탈현대는 동학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의 1단계가 조병갑관아습격이고 2단계가 백산봉기라면 3단계는 동학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지방자치를 시행하며 농민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것이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청군과 일군이 개입하여 조선침략이 시작된 단계이다. 그해 5 8일부터 9 12일까지 실시된 집강소가 갖는 의의는 대단한것이였다. 집강소를 통해 농민의식이 깨여났고 이를 통해 4단계 즉 일본과 청을 몰아내기 위한 반외세투쟁이 전개된것이다. 봉기를 동학에서는 기포(起泡)라고 하며 이는 재기포라 할수 있다.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군은 좌절되기는 했지만 실로 동학농민전쟁은 《반봉건반외세》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한세기도 지나가고있지만 2008년 서울시청광장 현주소가 반봉건반외세에서 가히 먼것이라 보지 않는다. 《한국》의 재벌들이 돈벌이하여 그것을 국민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사리사욕채우기와 재벌 2, 3세들에게로의 경영권인수는 온 나라를 재벌공화국으로 만들고있다. 국민들은 재벌사가의 머슴군으로 변해가고있는 이 현실이 100년전과 하나도 다른것이 없다고 본다.

이번 소고기파동은 제국주의의 경제침략의 마수가 신자유주의란 허울을 쓰고 총칼없는 침략을 해오는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동학혁명이 유효한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린 여기서 우금치의 수모를 다시는 당해서는 안된다는 각오를 해야 할것이다.

지금 서울시청앞에 모이는 우리는 죽창과 홰불대신 초불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상황만은 100년전과 다른것이 없으며 그래서 우리들의 정신무장 역시 동학혁명에서 유래한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학군의 후예 《애동학군》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애》란 새로운 혹은 《신선한 어린》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 초불시위는 어린 소녀들로부터 시작되였다 하여 이런 발상을 해보는것이다. 동학이란 기표(記表)가 갖는 반외세 그리고 반봉건의 기의(記義)는 오늘의 초불광장으로 그대로 이어지고있는것이다.

 

유목민(遊牧民)과 유격대(遊擊隊)

 

일정한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여러곳을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점에서 유격대와 유목민은 외양적으로 같아보인다. 그들은 과거의 가치에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가지고 그런 꿈을 현실로 바꾸려고 하는 점에서 혁명의 정치학과 상통한다. 우리의 신체와 삶을 사로잡고있는 권력과 대결하며 새로운 창조적삶을 창안하며 살아가려는 몸부림, 유격대와 유목민의 철학은 같아보인다. 유격대 역시 누구의 배후도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그것은 어떤 강요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현재의 초불집회는 1 700여개 시민, 사회단체로 구성된 《광우병위험 미국산 소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이하 국민대책회의)》가 주도하고있다. 시위주최가 국민대책회의로 단일화됐지만 현장의 초불문화제는 학생, 주부, 직장인 등 시민들의 자발적참여형식으로 이뤄지고있다. 참석자들사이에 온건한 《초불문화제》를 고집하는 국민대책회의와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조성되고있는것이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리명박《대통령》의 5월 22일 대국민담화이후 여론이 더 악화되였고 24일 밤부터 가두시위가 전개됐다.

경찰은 5 24일부터 격화되고있는 거리시위에 대해 《특정세력이 지휘하고있다.》고 밝혔으나 명확한 물증을 내놓지 못하고있다. 《게릴라성시위가 치밀한것 같다.》는게 전부다. 그러나 게릴라성(유격대) 거리시위행태자체가 지휘부부재를 보여주고있는것이란 분석이다. 경찰관계자는 《지도부가 있어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하는것보다 시민들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가고있는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서 단순비교를 하면 김일성항일유격대는 안창호류의 비폭력저항도, 대부대에 의한 전면전도, 김구의 요인저격위주도 아닌 유격대전술을 선택한다.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유격대는 지휘관마저 보초와 경비를 담당했으며 김일성사령관에 대한 경위부대가 생긴것은 유격활동의 전반기를 훨씬 넘어선 이후부터였다. 유격대장이 보초를 서다 위기를 당한 기록들이 회고록에 그대로 나오는것을 보면 이는 마치 동학의 포접구조와 같이 수평적그물망과 같지 않았나 한다. 이들의 호칭인 《동무》라는것이 이를 잘 반영한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집단지성과 집단주의원칙

 

초불시위에 대한 앞으로 우려는 바로 이러한 탈현대적인 탈중심 그리고 집단지성의 등장이라고 할수 있으나 이러한 장점이 바로 가장 문제점이라는것이다. 혹자는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등장한 이후 인류문명사상 최초로 수만명이 모여 지금 직접 민주주의를 실험하고있다고 초불집회를 평가하고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상황은 집단화되여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 프랑스혁명이후 많은 시민단체가 나왔고 이것이 정당으로 발전하여 현재의 시민민주주의가 탄생되였다.

사실 이번 초불집회이후 가장 피해를 볼 대상은 기존의 여야정당들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정당전체가 이런 상황의 힘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갖지 못하였다. 이것이 21년전 6. 10항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21년전은 정치제도의 민주화가 목표였다면 21년이후 오늘은 정치문화의 변화자체에 있다. 21년전에는 김대중 같은 권위주의적지도력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신뢰의 지도력이 필요하다.(일요시사 6. 20) 우리에게는 신뢰받는 지도자도 없고 지금의 초불집회에서 새로운 조직이 탄생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근 80년전의 항일유격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김일성주석은 항일유격대에서 지휘관과 대원사이를 묶는 힘은 신뢰와 사랑이라고 회고록에서 루루이 강조하고있다. 김일성사령관은 유격활동과정가운데서도 부단히 조직을 일구어나간다. 19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 1926년 새날소년동맹, 1927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1936년 조국광복회, 1937년 조선민족해방동맹, 1945 10 10일 북조선공산당창건, 1946년 북조선로동당합당, 1948 9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이상 년대표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항일유격활동은 적과의 투쟁과 함께 조직을 일궈내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과정이 1948 9 9일 공화국창건의 이전과정이 되였다. 인민대중을 상황속에 있는 요소들이라 한다면 조직이란 요소들의 집합을 부분으로 하는 새로운 집합이다. 그래서 국가는 집합의 집합인것이다. 이러한 집합의 집합을 하나의 생명체 즉 사회정치적생명체라고 볼 때에 이런 생명체의 수뇌부가 바로 수령이다. 그래서 수령은 지배적구조속에 있는것이 아니고 자기자신이 수뇌부이면서 동시에 조직속의 한 부분이 되는 그러한 수뇌부이다. 그래서 수령은 조직을 위해 있고 조직은 수령을 위해 존재한다.

북의 헌법 63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민의 권리와 의무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원칙에 기초한다.》에서 말하는 《집단주의원칙》이란 하나와 전체가 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집단주의원칙이 집단지성이란 웹 2. 0과 어떤 상관성이라도 있는것인지?

 

《ㅌ. ㄷ》를 다시 생각한다

 

이번 초불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전에 듣지 못하던 새로운 말들을 듣게 되였다. 여당대표의 입에서 나온 《사회적시장경제》와 초불광장에서 나온 《집단지성》이란 말이다. 두 말이 나온 배경은 달라도 《집단》 그리고 《사회적》이란 말은 모두가 지금까지 남에서 금기시되던 말이고보면 놀라운 일이다. 아직 말만 있을뿐 이 말이 함의하고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두 말이 모두 이번 2008년 투쟁의 현장에서 나온 자연발생적인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웹 2. 0에 의한 직접민주주의는 북의 헌법 63조의 집단주의원칙과 일치할수 있는가?

헌법 63조는 웹 2. 0이 발전한 웹 3. 0이라 할수 있는가? 우리는 아직 웹 2. 0의 집단지성에 완전히 익숙한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편적인것도 아니다. 광장에서 우리는 갑자기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발견한것이다. 집단지성의 구조는 하나와 전체의 력동적인 작용이다. 그러한 력동성을 발견한 우리스스로의 모습에 우리는 지금 놀라고있을뿐이다. 그러나 북은 유격대활동을 통해 남보다 먼저 유목민적삶으로 이동하였으며 거기서 집단지성을 먼저 경험한것이다.

과연 북의 체제와 사상이 앞으로 나타날 웹 3. 0의 전형인지 아닌지는 속단할수 없다. 그러나 전자매체만 가미될 때에 북이 남보다 훨씬 빨리 웹 3. 0차원으로 쉽게 진입할것은 명약관화하다. 우리의 통일은 결국 이러한 문명의 새로운 진입으로 남북이 동시에 진입할 때에 갑자기 밀려올것이다. 나는 이러한 가능성을 이번 초불집회를 통하여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확인하러 오늘도 현장으로 나간다.

그러면서 《ㅌ. ㄷ》를 다시 생각한다. 남북청년들이 다같이 함께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첫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것이다. 그것은 이미 이 땅의 동학농민들이 내딛던것과 가히 먼것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위대한 정신적유산을 남북이 공유하고있으며 북의 유격대의 집단주의원칙과 남의 집단지성이 하나가 되여 함께 웹 3. 0을 창조해나갈수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