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84)

유행어로 전락한 경제민주화를 넘어 어디로 가야 하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경제민주화라는 유행어가 나돌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민주화라는 유행어가 나돌고 있다. 원래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이전 시기 민주노동당에서 처음으로 썼고, 통합진보당은 2012년 5월 10일에 채택한 강령에서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을 계승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3년 전부터 민주통합당이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차용하더니, 이제는 어이 없게도 새누리당마저 그 말을 따라 쓰고 있다. 이를테면 수구우파 대권주자 박근혜는 2012년 7월 10일 대선출마선언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이 땅의 근로대중을 배반하고 국제독점자본과 국내재벌에 붙어돌아가면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길을 가로막는 새누리당 대권주자인 주제에 그 무슨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온 것은 그야말로 파렴치한 대국민 사기극이 아닐 수 없다.

주목하는 것은, 새누리당 대권주자의 파렴치한 사기극에서 통합진보당을 향해 '위험신호'가 발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정당이 근로대중과 소통하는 고유한 강령적 개념어를 수구우파정당이 슬그머니 먹어버리는 언어잠식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신호'가 발신되고 있다는 말이다.

진보정당이 자기의 진보적 언어를 정적에게 잠식당하면, 그 언어로 서술된 정치강령이 잠식당하게 되고, 정치강령을 정적에게 잠식당하면 결국 진보정치의 손발이 묶이게 되기 때문에, 새누리당 대권주자의 파렴치한 언어잠식은 통합진보당이 그냥 무심히 지나쳐버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언어잠식현상을 다른 각도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이 땅의 근로대중을 배반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새누리당이 느닷없이 경제민주화라는 진보적 언어를 마치 자기들 언어인 것처럼 쓰기 시작한 것은, 이제껏 그들이 쓰기를 기피해온 진보적 언어를 쓸 수밖에 없을 만큼, 오늘 이 땅의 사회경제적 현실이 전면파국에 다가섰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면적 경제파국의 위기가 수구우파정당에게 언어잠식과 유행어 쓰기를 강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경제강령으로 삼았고, 그것을 계승하여 통합진보당이 근로대중과 소통하는 경제민주화 강령이, 몇 해 전부터 민주통합당에게 차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새누리당 대권주자도 쓰기 시작한 마당에, 통합진보당이 다른 정당들과 똑같이 그 유행어를 써서 자기의 경제강령을 서술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통합진보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경제민주화 강령에 담긴 진보적 의미를 끄집어내어 재해석하고 새로운 언어로 근로대중과 소통할 필요가 있다.

통합진보당의 경제민주화 강령에 담긴 비현실적인 발상

통합진보당의 경제민주화 강령은 "재벌의 소유 경영의 독점해소 등을 통해 독점재벌 중심 경제체제를 해체하고,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 근절, 대형 유통점 규제 등을 통해 중소기업 및 영세자영업자를 보호육성함으로써, 경제의 민주화를 실현하고 내수 중소기업 주도형 경제체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 강령을 읽으면, 경제민주화 강령이 재벌해체라는 뜻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땅의 재벌기업들은 사회경제활동을 좌우하는 주요산업부문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전략기업들인데, 통합진보당 경제민주화 강령은 그런 거대전략기업들을 해체해버리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는 거대전략기업을 해체하여 중소기업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거대전략기업 자체가 반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거대전략기업을 극소수 대자본가들이 장악해버린 기업소유구조가 반민주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거대전략기업이 주도하는 반도체, 자동차, 선박, 통신, 금융, 에너지, 철강, 화학 등 주요산업부문은 중소기업활동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본과 기술과 노동력이 고도로 집약화, 집중화되는 주요산업부문에 거대전략기업이 출현하는 것은 산업의 현대화 발전경로에서 불가피한 일이다. 중소기업은 주요산업부문의 자본, 기술, 노동력의 집약화, 집중화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현실을 무시하고 거대전략기업을 해체하여 중소기업으로 쪼개놓으려 한다면, 그것은 주요산업을 분절화, 왜소화하려는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만일 거대전략기업을 해체해버리면 거기에 연관된 중소기업들까지 연쇄도산으로 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생각하면, 통합진보당의 경제민주화 강령을 재벌해체라는 개념으로 서술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통합진보당의 경제민주화 강령을 새롭게,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이 바로 주요산업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ajor industry)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주요산업 민주화란 무슨 뜻일까?

주요산업 민주화라는 개념은 주요산업의 생산관계를 민주화한다는 뜻이다. 지금 이 땅에서 주요산업의 생산관계는 이른바 '재벌총수'라고 부르는 몇몇 대자본가들이 반민주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원래 사회적 생산관계는 탐욕스러운 극소수 자본가들이 아니라 생산의 영원한 주체인 근로대중 자신이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사회적 생산관계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면, 근로대중이 사회적으로 사용하는 생산수단을 몇몇 자본가들이 사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국가가 사회적으로 소유해야 한다. 또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면, 근로대중이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는 생산활동을 몇몇 자본가들이 장악,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생산활동의 주역인 근로대중이 민주적으로 경영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생산관계의 민주화란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와 생산활동의 민주적 경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주요산업 민주화란, 한 마디로 말해서, 주요산업부문 생산수단을 국가가 사회적으로 소유하고, 주요산업부문 생산활동을 근로대중이 민주적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경제강령에는 "물, 전력, 가스, 교육, 통신, 금융 등 국가기간산업 및 사회서비스의 민영화 추진을 중단하고, 국공유화 등 사회적 개입을 강화해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하며 공공성을 강화한다. 또한 공공부문은 경영 민주화, 투명화를 통해 공공기관의 대국민 서비스를 강화한다"고 서술한 대목이 들어있다.

이 문장에서는 주요산업을 '국가기간산업'이라고 표현하였고, 주요산업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국가기간산업 생산수단의 소유구조의 다원화'라고 표현하였고, 주요산업부문 생산활동의 민주적 경영을 '공공부문의 경영 민주화'라고 표현하였다.

위의 경제강령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을 이처럼 다소 모호하게 표현하였으나, 그 기본내용은 주요산업부문 생산수단의 국유화 및 주요산업부문 생산활동의 민주화라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은 유행어로 전
락한 경제민주화라는 말로 자기의 진보적 경제강령을 서술할 것이 아니라, 주요산업 민주화라는 새로운 용어로 서술하고, 그 새로운 개념어의 의미를 주요산업부문에서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생산활동을 민주화한다는 뜻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주요산업 국유화라는 말로 서술해온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은, 주요산업부문 생산수단을 국가적 소유로 전환한다는 의미만 전달할 수 있었고, 국유화된 주요산업부문의 생산활동을 근로대중이 민주적으로 경영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요산업 민주화라는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개념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지난 시기 민주당은 경제민주화의 의미를 "공정경쟁, 참여경제, 분배정의"라고 밝혔다. 최근에 민주통합당으로 개칭한 뒤로는 거기에 "재벌개혁"을 추가하였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의 최근 발언에 따르면, 경제민주화란 "재벌특권경제를 민생중심경제로 전환하고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자기의 경제강령을 근로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통합진보당이 재벌해체라는 말을 선택하였다면, 민주통합당은 재벌개혁이라는 말을 선택한 것이다.

이 땅의 근로대중에게는 재벌해체나 재벌개혁이나 똑같은 말로 들릴 것이다. 이것은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전략적 차별성이 근로대중의 시야에서 흐릿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이 민주통합당에 대한 전략적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경제민주화 강령을 주요산업 민주화 강령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헌법 제119조 개정을 향하여

주요산업부문 생산수단을 사적 소유에서 국가적 소유로 전환하여 거대전략기업의 소유권을 국가에 귀속시키려면,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알려진 현행 헌법 제119조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주요산업부문 생산활동에서 근로대중의 민주적 경영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현행 헌법 제119조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정치세력과 그것을 가로막으려는 수구정치세력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정치투쟁에서 진보정치세력이 승리하는 것을 전제로 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정치세력이 수구정치세력을 꺾고 승리하지 못하면,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은 불가능하다.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질 치열한 정치투쟁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정치세력이 승리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첫째, 이번에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뚜렷이 드러난 것처럼, 지금으로서는 통합진보당이 수구정치세력에 맞서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일 만한 능력과 조건을 아직 갖추지 못하였다. 통합진보당에 결합한 사민주의자들이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주요산업 민주화를 당의 경제강령으로 채택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의 최대 정파인 자주파는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서로 단합하여 주요산업 민주화를 당의 새로운 경제강령으로 채택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당 지도부 개편과정에서 사민주의자나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당의 지도부를 장악해서는 안 되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자주파가 사민주의자들과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끌어가는 융합형 지도체제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통합진보당의 자주파 정치활동가들은 이미 새누리당의 언어잠식에 의해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유행어로 전락하였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대체할 주요산업 민주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당원대중에게 제시하여 당 내부에서 그 새로운 개념을 당원대중들이 공유할 각종 토론기회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셋째, 가짜 경제민주화 강령을 들고 나와 근로대중을 기만하는 새누리당 대권주자의 대선승리를 저지하기 위한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강력한 야권연대를 실현할 필요가 있다. 다행하게도, 2012년 12월 대선에서 야권연대세력이 승리하여 2013년 2월에 정권을 교체하면, 재벌특권경제를 민생중심경제로 전환하고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선에서 경제민주화가 실현될 것이다. 2013년부터 5년 동안 집권할 정권이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인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준비라고 말할 수 있다.

넷째,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인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은,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게 될 5년 동안의 정치적 준비 이후에 추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헌법 제119조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맞게 개정하려는 진보정치세력과 그 개정을 저지하려는 수구정치세력의 치열한 정치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기 위해, 진보정치세력은 자기의 힘을 꾸준히 길러야 한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활동가들이 예상할 수 있는 변혁과 진보의 발전경로를 정리하면, 통합진보당 지도부 개편→야권연대 대선승리→재벌개혁 추진→헌법 제119조 개정투쟁→자주적 진보정권 등장→개헌을 통한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으로 이어지는, 실로 위대하고 장엄한 사회역사발전의 미래가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험하고 먼 투쟁의 길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가 자주파 동지들의 눈부신 희망으로, 불꽃 같은 정열로 타오르고 있다. (2012년 7월 13일 작성)